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5)
* * *
저판(底板 : 배밑판)을 평탄하게 깔았다. 현판(舷版 : 외판)을 배밑부터 좌우로 차례대로 붙여 올렸다.
이물과 고물에 가로다지 널판때기로 대어 막았다.
이제 멍에(배의 대들보)를 얹을 차례였다.
“이놈들아, 벌써 힘이 빠졌냐. 그래 가지고 배꾼이 되겄냐!”
선소지기의 호령 아래 어리고 젊은 바치들이 용을 쓰며 묵직한 멍에목을 밀고 당겨 배 위로 올리고 있었다.
‘도르래를 쓰면 좀 나으련만.’
그리 전문적인 시야로 보지 않아도, 몽주는 선소의 배 건조 방식 여기저기서 미비한 점과 아쉬운 점을, 그래서 고쳐야 할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나, 그에 대해 선소지기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몽주는 그저 지켜만 보면서, 고려 당대의 조선 기술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는 데에 열중할 뿐이었다.
이곳은 검모포의 선소, 몽주가 고려 수군에 가져다 바쳐야 할 대소선 쉰 척을 만드는 곳이었다.
* * *
고려의 꿈이자 현실로 돌아오기 전, 몽주는 크리스티 본사와 경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방지영은 세 시첩들과 하나의 표문을 보고, 너무 놀라 오히려 흥분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 대신, 방지영의 연락을 받은 크리스티 본사 측이 크게 흥분하였다.
물론, 그 연락을 몽주가 직접한 게 아니라서 그쪽의 흥분을 몸소 확인한 건 아니었다.
하나, 다음 날 크리스티 본사의 감정위원들이 급하게 내한한 걸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의 감정위원들이 왕희지와 구양순의 시첩들이 송대 제작된 탑본임을 확인하고, 또 주원장의 친필에 대해서도 매우 높은 확률로 진품일 것이라 추정하자, 크리스티 측은 이틀 후에 전용기를 보내겠다고 연락하였다.
게다가 한국지사에 해당하는 한양옥션 측과 연계, 대단위 경호원들을 따로 섭외하여 몽주의 집 주변을 휘휘 감듯했으니,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너무 소란을 떨어서 오히려 고미술품계 관련 인사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물론, 그런 거야 한양옥션과 크리스티 측이 알아서 퍼리할 문제였고, 경매와 관련해서 몽주가 우려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그 왕희지와 구양순의 탑본이 현대에도 전해져 왔던 것인가에 대한 우려였다.
시첩 자체야 명 황실에서 새로 만든 것이지만, 시첩에 들어간 왕희지와 구양순의 탑본은 본래 있던 것이니, 만약 현대에까지 그것들이 전래되었다면, 시첩이 만들어진 순간 그것들이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에서도 그와 관련된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현대에 남아 있는 왕희지와 구양순의 탑본에 관한 자료를 방지영을 통해 얻어 확인해 보았지만, 시첩의 탑본에 해당하는 건 없었다.
남아 있는 것들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법첩이라는 책자의 형태로 되어 있기도 했으니, 몽주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게 현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분명 극히 적었다.
다만, 그럼에도 공개되지 않고, 개인이 비밀리에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차후에 경매를 통해 몽주의 시첩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문제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몽주가 그 작품을 훔쳤거나 장물로 입수하였다고 누가 증명할 길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지난 국보 도난 사건과 직관적으로 연관되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므로, 몽주로서는 다소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몽주가 또다시 초대형 경매의 주인공이라는 건 나중에라도 알려질 것이니, 정부와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중국의 고미술품이라고 해도, 한국인이 초고가의 고미술품을 자꾸 내다 팔면 신경이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름 대책이야 있긴 하다만, 그게 득일지 실일지는 모르겠군.”
선소에 새로 지은 목채에서 쉬며 현대의 일을 떠올리던 몽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대책이란 바로 포은의 표문(表文)이었고, 만약 정부 당국 예컨대, 문화재청이 압박한다면, 포은의 표문을 국내 박물관에 기증하여 그들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포은의 표문은 고려에서 몽주가 요청하여 얻은 것으로, 지난 사신행에 대한 소회를 임금께 바치는 형식으로 적은 일종의 문학 작품이었다.
그 내용 중에는 주원장을 알현한 사실에 대한 것도 있고, 주원장의 생김새와 성품에 대한 묘사도 있어, 런던에서 경매할 때 주원장의 시첩과 더불어 전시될 예정이었다.
물론, 포은의 표문은 경매 물품이 아니었고, 도로 가져올 것이니, 아마도 귀국할 때는 나름 언론의 주목을 받을 테고, 정부에서도 군침을 흘릴 게 분명했다.
그런 만큼 표문을 기증하거나 대여하기로 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몽주의 표문까지 드러나면 몽주가 추가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문화재급 고미술품에 대한 의심의 시선이 더 강해질 수도 있으니, 최종적으로 득일지 실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렇지. 주사위는 던져졌지.”
두 번째 천몽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수 차례나 중요한 주사위를 던졌다는 생각을 하며 실소한 몽주는 쉬던 몸을 일으켜 다시 선소의 작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밖에서 군불을 쬐고 있던 탁기가 다가와 곁을 따랐다.
“날이 몹시도 찬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추운 날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하는 이들도 있지 않나.”
“저들이야 익숙한 일입죠. 게다가 나리께서 핫옷을 나눠 주셨으니, 저들에게는 그 어느 겨울보다도 따뜻할 겁니다.”
아부인가 싶은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몽주가 한양부에서 핫옷, 그러니까 솜이 든 두툼하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파카’ 형태의 옷을 수십 벌을 기워 와 바치들에게 나눠 준 덕에 그나마 보기에 경악스러운 겨울 차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여전히 바지는 홑옷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손은, 붕대를 감듯 천으로 손등에 감은 걸 제외하곤 맨손이었으니,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솜을 넣은 장갑을 만들어 보자니, 궂은일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 적합한 것을 이 시대에 만들 수는 없었다.
새삼 현대에 널리고 널린 합성 섬유가 위대해 보일 뿐이었다.
몽주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돛대를 만드는 작업장이었다.
물론, 작업장이라고 해 봐야,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야지에 긴 받침을 두고 그 위에 돛대를 뉘어 놓고 작업을 하는 곳에 불과했다.
몽주가 다가가자, 바치들이 일제히 몸을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대충 손을 저어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하면서, 걔 중 ‘베테랑’ 바치의 곁에 섰다.
“돛대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가?”
“대략 예순 자쯤 됩니다요. 소선에 심을 놈이죠.”
20미터 안팎의 돛대는 한창 대패질 아래 점점 번듯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면 대선의 돛대는 몇 자나 되는가?”
“대선에는 돛대가 크고 작은 두 놈이 들어가는데, 큰 놈은 아흔 자에 가깝고, 작은 놈은 이놈과 비슷합니다.”
돛대에 대한 설명을 계속 들으니, 그 돛대를 만들 나무는 내륙에서 구하여 떼군이 강 위로 몰아 옮겨 온 것이라 하였다.
검모포가 있는 부근에도 해송(海松)이 제법 풍부했지만, 2, 30미터짜리 곧은 나무를 구하긴 어려운 탓이었다.
몽주는 가만히 돛대를 관찰하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돛대를 어찌 배에 고정하는 겐가?”
물으면서 현대에서 중국 정크선에 대한 책으로 안 것을 떠올렸으니, 정크선의 경우에는 보통 선박 하부의 격벽에 돛대 아래에 파인 홈을 끼워 고정하였다.
“저희는 고정하지 않고, 개밥통에 세워둡지요.”
“개밥통? 그게 무엇인가.”
몽주가 다시 묻자, 시찰을 돕던 바치가 이리저리 설명을 하다가 잘 안 된다 싶었는지, 직접 보시라며 길을 안내하였다.
하여, 간 곳은 소선 한 척이 선체 하부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개밥통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개밥통입죠. 달리 대굽이라 하기도 합니다요.”
특별한 구조는 아니었고, 그저 사각으로 된 틀이 있어 돛대의 밑동을 받치고, 그 위로 두세 자 떨어져 또 다른 사각의 구조물이 있었다.
그것을 앞뒤로 움직여 돛대를 뉘였다, 세웠다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노를 쓸 때는 뉘이고, 바람을 탈 때는 세우는 모양이군.”
“참으로 안목이 좋으십니다요. 맞습죠. 에…… 또, 세워 두면 활대의 방향에 따라 자체적으로 이쪽이나 저쪽으로 돌아 돛이 바람의 힘을 잘 받도록 하기도 합습죠.”
그 설명이 얼핏 이해가 안 되어 몇 번을 더 캐물은 후에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굽에 돛대를 세우면 돛대가 고정되지 않으니, 돛대를 축으로 회전이 가능하였다.
그런 돛대에 돛을 걸어 바람의 방향을 따라 조절하면 돛이 힘을 받는 것에 따라 돛대도 회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몽주는 내심 감탄하였는데, 한선에서 쓰는 돛을 생각하면 대굽의 형태로 돛대를 이용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보다 안정적이고,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한선에 쓰이는 돛은 정크선의 그것처럼 가로 활대 러그세일(lugsail : 사각돛)의 모습을 띠고 있었고, 가로 활대 러그세일의 대표적인 특징대로 돛의 가장 위에, 대를 끼운 황포를 잡고 있는 활대가 있었다.
그 활대가 돛대에 걸려 있으니, 만약 돛대가 고정되어 있다면 바람에 따라 돛의 방향을 움직이면서 자연히 활대와 돛대가 부딪치고,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구조적으로 약화가 일어남은 물론, 바람의 힘을 돛대에 전달하여 배가 나아가게 하는 것에 힘의 손실이 일어날 터였다.
그걸 돛대가 자체적으로 회전하게 함으로써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참으로 현명한 방책이오.”
“헤헤, 저희야 예부터 내려오던 걸 따를 뿐입지요.”
그 뒤에도 몽주는 한참이나 대굽을 유심히 보며, 그가 후에 만들 배에서 이것을 이용할 수 있을지를 따져 보았다.
잘만 응용한다면, 설명대로 대굽의 이점을 이용함은 물론이고, 돛잡이의 수를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듯했다.
다만, 후에 대선을 관찰했을 때 큰 돛대는 대굽으로 지탱하기 어려워 그냥 고정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형 범선에 쓰일 대형 돛대에서는 한계가 있을 법도 하였다.
“나중에 바당보름과 논의를 해 보아야겠군.”
아마 바당보름에서도 대굽에 대해 언급이 있을 테니, 그때 사용 용도에 대해, 그 한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몽주는 한선의 특별한 기술 하나를 확인하였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리고 그 좋은 기분으로 한양부로 올라갔다.
그곳에 1천 근의 철을 ‘꽁친’ 화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고려의 제강법, 즉 강철을 만드는 방식은 다분히 주먹구구식이었고, 이는 당대의 모든 세계가 다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숯불에 달궈 두드리면서 표면침탄을 일으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몇 자루의 연철검 중에서 어쩌다 제법 잘된 강철검이 나오는 식이었다.
물론, 고열에 물러진 철에 침탄을 일으키며 그 철을 접어 좀 더 강철화될 가능성을 높이는 접쇠 방식도 쓰이곤 있지만, 필요한 시간과 노동력이 급격히 상승하는 탓에 차라리 낮은 확률이라도 경험과 운에 맡기는 방식이 보다 보편적이었다.
어떤 방식이든 주먹구구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좀 더 복잡한 형태의 물건을 강철로 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하나는 균질화된 강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강철을 주물의 형태로 이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량으로 생산하는 조건까지 충족된다면, 비로소 현대적인 제강법에 닿는다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언감생심인 데다가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제해야 했다.
일단 다행인 건 고려의 기술이 주철과 연철, 그러니까 선철을 제련하여 얻은 무쇠(주철)와 선철에서 탄소를 제거하여 연철(혹은 순철)을 만들 정도는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철에 탄소를 가하거나, 주철에서 탄소를 빼는 방식을 구조적으로 완성하여, 생산되는 강철이 균질한 품질을 가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몽주가 선택할 방식은 선철이나 주철에서 탄소를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고려에서 연철을 구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 과정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노동력 갈아 넣기가 필요한 터라 구하기가 쉽지 않은 편이고, 무엇보다 현대에서 각종 철강 제품을 생산함에 있어, 대개 선철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현대의 지식을 빌려 오는 몽주로서는 선철이나 주철처럼 탄소 함유량이 많은 철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몽주가 선택한 것은, 제강법의 ‘테크트리’ 중에서도 ‘도가니법’이었는데, 가마 안에 철이나 강을 넣은 도가니를 집어넣고 가열시키는 방법이었다.
도가니법은 달리 만든 연강을 넣어 융해시키는 정련법에 해당하는 것과 선철을 넣고 산소 공급을 통해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탄소를 제거함으로써 강철을 얻고자 하는 제강법에 해당하는 것이 있었다.
몽주가 선택한 건 당연히 후자에 해당하는 도가니법이었으니, 화극 최무선과 더불어, 천마산 중에 작은 폭포가 위치한 곳에 가마를 만들고자 하였다.
자기(瓷器)가 발전한 고려에서 가마를 만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관건은 당대의 도자기 가마보다 훨씬 높은 고온을 달성할 수 있는 가마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강철을 주물의 형태, 즉 주강으로 얻기 위해서 넘어야 할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먼저 넘어야 할 게 그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 전에 이겨 내야 할 문제는 화극의 급한 성미였다.
“거, 대충하면 안 되나?”
“대충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몽주의 설명을 듣던 화극이 투덜대었기에 설득조로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퉁했다.
“난 되던데? 자네 내가 어찌 화약을 만들었는 줄 아는가? 하고 또 하고, 또또 하고! 어차피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일단 해 보는 게 중요한 것이네.”
“잘 모르지 않으니까 대충 안 하고 잘하려는 겁니다.”
“……장하구먼.”
왠지 ‘장하구먼.’이 ‘잘났구먼.’으로 들렸다.
화극은 내열 점토부터 만들려고 하는 몽주가 못마땅하였는데, 그가 보기에 어차피 가마면 도기소의 독바치들을 불러다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좀 더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일단 만들고 모자라면 보강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그의 성미에 맞았던 것이다.
하나, 현대에서 고려자기를 통해 고려 시대 가마 기술을 가늠한 자료를 확인한 몽주로서는 당대의 가마 제작법은 시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청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온도는 아무리 높아 봐야(?) 섭씨 1,100도 정도였던 것이다.
당연히 가마도 그에 충족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니, 철의 융점인 섭씨 1,538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는 몽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백자가 대세였던 조선 시대였다면, 백자를 굽던 가마를 이용해도 충분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자를 굽는 데에 필요한 온도는 섭씨 1,400도 이상이었으니, 철을 녹이는 온도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현대에서 워낙에 고려청자가 고평가를 받기 때문에 조선백자가 상대적으로 폄하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굽기’ 기술 면에서는 백자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기에 몽주는 조선 시대 가마 제조법을 참조하여 새로 가마를 만들고자 하였으니, 무엇보다 내열 점토를 만들기 위해 진주목 하동현에서 고령토부터 구하였다.
고령토로 만든 내열 점토는 섭씨 1,600도에도 견딜 수 있으니 몽주가 원하는 가마에 적합했기 때문이었고, 오늘날 경남 하동군의 고령토를 구하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 품질의 고령토이기 때문이었다.
그 고령토가 오기를 기다리게 된 탓에, 하필 1천 근의 철(선철)을 한 배에 실었다가, 하필 그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그 철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화극의 몸이 달아 있는 것이었다.
하여, 몽주는 일단 화극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그나저나 화약 제조는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아, 아주 잘되고 있네!”
몽주가 대충 묻자, 화극이 화색을 띠며 덥석 물었다.
“자네는 참 대단하이. 대체 어디서 비서들을 그렇게 잘 구한 겐가? 주강을 만들려는 것도 그렇고, 그 염초를 대량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조상님을 잘 둔 덕이지요. 하면, 이제 화약을 혼합할 차례입니까?”
괜히 ‘비서(秘書)’의 존재로 관심이 향할까 싶어, 다시 물었다.
폭죽 제조를 명분으로 세워 화약 제조에 도전하게 된 화극은, 몽주로부터 몇 가지 비법을 전수받아 빠르게 화약의 샘플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 비법이란 염초밭 조성, 순수한 황 제조, 고품질 목탄 제조, 혼합 비율 등등이었으니, 사실상 흑색 화약과 관련해서는 몇 년을 앞당긴 셈이었고, 최무선이 원하던 ‘진정한 화약 제조법’을 완성하게 만든 셈이었다.
그중에서 최근에 화극이 공을 들인 건, 순수한 황을 얻는 것이었다.
사실 흑색 화약을 만듦에 있어서, 염초 못지않게 난관은 순수한 황을 얻는 것이다.
왜국에서 수입되는 유황이 있긴 하나, 보통 유황광의 형태로 불순물이 많아서 이를 정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몽주가 현대에서 알아 온 방법을 화극에게 전한 것인데, 유황광을 석탄으로 감싸고, 그 바깥으로 흙으로 감싼 형태의 노(盧)를 축조한 후, 노 위에 구멍을 뚫어 불을 붙여 구멍으로 유황증기가 뿜어지게 만들었다.
그 위로 사발을 엎어서 응축시켜 유황 증기를 포집하여 냉각시키면 순수한 고체 유황을 얻을 수 있다.
화극이 약간의 실수 끝에 유황 증기를 포집하여 순수한 황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고 지난번에 알려 왔기에, 몽주는 화약에 적합한 목탄을 만드는 비법도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경목(硬木 : 굳은 목재)으로 목탄을 만드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는 단풍나무가 가장 적합하였다.
하여, 몽주는 이쯤이면 목탄도 만들었겠다 싶어, 화극에서 이제 혼합할 차례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면, 이제 함께 조심스레 화약을 완성해 보고, 화약이 좀 더 반응이 잘되도록 하는 기법을 알려 주…….
“아닐세.”
“네? 하면 아직 목탄을 얻지 못하셨다는 겁니까?”
이번에도 화극은 고개를 저었다.
“목탄이야 금방 완성했고, 많이 만들었지.”
“하면?”
“이미 합제하여 자네가 알려 준 대로 화약을 곱게 빻고 있네.”
“……!”
* * *
몽주는 부리나케 달렸다. 그의 뒤를 탁기와 화극이 따르고 있었다.
“이보게, 조카사위!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급하게 구는 겐가!”
화극이 그를 불러 세웠지만, 몽주는 그저 달릴 뿐이었다.
목표는 역시나 천마산 내에 있었으나,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샛길을 만들어 놓기는 했으나, 험하기는 여전하여 몹시 힘들고 숨이 가빠 왔다. 하지만, 몽주는 불안한 마음에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제길! 설마 아니겠지! 왜 바보같이 그걸 말해 줬을까!’
화약을 곱게 빻으라 한 것은 후에 알갱이화하기 위해서, 코닝 기법을 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었는데, 화약 제조와 관련한 비법을 화극에게 알리다가 얼결에 언급한 것이었다.
문제는 화약을 빻을 때 물을 뿌리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설명을 빼먹었다는 점이었다.
화약이라는 놈을 안다면, 말하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불행히도 이 시기 고려에서 몽주를 제외하고 가장 화약을 잘 안다는 화극도 화약에 대해서는 ‘유아기’에 불과했으니, 우려한 대로 물을 뿌려야 함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화극은 그가 예전에 화약 제조법을 궁리하면서 재료를 섞어 가마솥에 끓여 보기도 하고, 빻아 보기도 했다면서 무얼 걱정하느냐고 했지만, 그건 순전히 그가 운이 좋은 덕이었다.
게다가 화극이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화약과 달리, 이번에 만들고 있는 화약은 보다 순정한 것이었으니, 반응성이 훨씬 뛰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걸 그냥 무작정 빻아 댄다면…….
탁기가 뒤에서 밀어 준 덕에, 샛길을 쉬지 않고 달린 몽주는 천마산의 어느 계곡 안에 있는 목책으로 들어갔다. 그 목책 안에 작은 건물이 있었으니, 그곳이 화약 실험실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화극의 가복 몇 명이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목책의 문을 밀고 들어간 몽주는 건물 입구로 달려갔다. 그러곤 곧바로 문을 젖히며 모두 멈추라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하였다.
하나, 몽주가 문에 손을 댈쯤에는 이미 문이 열리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면서.
쾅!
생각보다 소리가 작은 것에 의아해한 직후, 몽주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잠시 충격에 정신이 없다가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배에서 문득 불편함이 느껴졌다.
“…….”
배에 아기 팔뚝만 한 나무 조각이 박혀 있었다.
‘위나 간은 괜찮을 것 같고, 신장은…… 음!’
그 와중에도 상했을 법한 장기를 추측하던 몽주는 아찔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물어 가는 시야로, 이마에 피를 흘리는 탁기가 그가 다시 쓰러지는 걸 부축하는 걸 볼 수 있었고, 이어 화극이 경악한 표정으로 무어라 소리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 몽주는 무어라 말할 겨를도 없이 정신을 놓아야 했다.
* * *
-하목! 네놈이 기어이!
-단 하룻밤의 내 권리를 위하여!
기습으로 인하여 옆구리에 상흔을 입은 몽주가 자신을 죽이려는 자, 이복동생 하목과 죽고 살기를 겨루었다.
사투 끝에 마침내 하목의 목에 검을 꽂아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이미 입은 상흔 때문에 그 역시 쓰러졌다.
단 하룻밤. 영어로 하자면 ‘The night’라 고유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간.
부족장이 죽은 후, 그 후계자가 정식으로 지위를 승계받기 전까지 보내야 하는 그 밤.
부족장의 다른 아들이 후계자를 죽여서 그 스스로 부족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초원의 법칙이자, 그 부족의 법칙 속에서 한 남자의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이려 하였고, 결국 한 아들이 죽었다.
하나, 남은 아들도 생사가 불분명하였으니, 상흔을 입힌 검에 썩은 말 오줌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원의 현신께서는 죽지 않는다!
부족의 주술사가 쓰러진 몽주 옆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그것이, 고려에서 정신을 잃은 몽주의 무의식 속에 흐른 첫 천몽의 기억이었으니, 잠시 잊고 있었으나 따지고 보면 첫 천몽에서도 몽주는 충분히 죽을 고비를 겪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