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6)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꿈속에서 정신을 잃은 채 현대에서 깨어난 건.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뜬 몽주는 자신의 배를, 나무 조각이 박혔던 부위를 어루만졌다. 물론, 진몽주의 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나는 죽었을까?’
일단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애매모호하긴 했지만, 몽주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사고를 당한 후 정신을 잃은 채 꿈에서 나오긴 했으나, 꿈속의 나, 그러니까 석몽린의 상태가 사경을 넘어선 건 아니라는 예감이 있었고, 그 예감은 확신에 가까웠다.
사실 고려에서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았다. 몽주는 ‘나’를 스스로 인지할 수 있었지만, 단지 육체가 그 인지와 동떨어져 있는 상태였을 뿐이었다.
그건 고려라는 과거와 현대 사이에 한 발씩 걸쳐 있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정신’이 정신을 차렸지만, ‘육체’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컴퓨터에 운영 체제를 설치하면서 설치가 완료되길 기다리는 인간의 입장이랄까.
근거 없는 확신이지만, 어쨌든 몽주는 고려에서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더 이상 걱정 없이, 물론,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죽을 뻔한 상황인 건 분명하여 회복에 대한 걱정은 있지만, 적어도 두 번째 천몽이 허무하게 끝날 것에 대한 걱정은 없이 다음 생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어지간하면 안 죽는 건가.’
천몽 속의 ‘나’에 대한 의문이었다.
워낙에 무소불위한 인생을 살았었기 때문이었는지, 첫 천몽이 무사튼튼하였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첫 천몽에서도 몽주는 여러 번이나 죽을 뻔했었다.
초원의 약육강식이란 법칙 속에서 살해의 위기를, 진짜로 무기에 살이 베이고, 몸이 상했던 것만 따져도 몇 번이었고, 선사(先史)의 시대에 사신의 강림이라고밖에 여길 수밖에 없는 전염병이 십여 차례 창궐해 몽주도 몸져누운 적도 두어 번 있었다.
독이나 다름없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묻은 날붙이에 그 정도로 베이고 당했으면 패혈증으로 죽었어야 마땅하고, 세균과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 없이 그저 무속 수준의 의료 상황 속에서 고열에 앓아눕기를 반복했다면 그 역시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쓰러져 사경에 이르기를 숱하게 하였지만, 결국 살았다.
그보다 덜한 부상과 병세를 가진 당대의 인간들이 다 죽었을 때도 몽주는 살아남았던 것이다.
오히려 정작 진짜 죽을 때, 그러니까 첫 천몽을 마쳤을 때에는 너무나 평온한 죽음이었다.
이제 죽을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 체감할 수 있었으니, 죽음에 앞서 인생을 마무리하며 ‘인생이여, 이제 안녕!’이라는 식으로 작별을 한 것이었다.
마치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 동영상 플레이어의 타임 바가 끝자락에 이른 걸 깨닫고, 영화가 끝나 감을 인지한 것과 같은 식이었다.
이번 천몽에서도 몽주는 당대의 인간들이라면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을 이미 몇 번 경험했다.
신돈의 명 아래 태형을 당하여 살이 찢기고 많은 피를 흘렸을 때, 감염과 출혈의 상황이 그러했고, 요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요성에서 이성계가 깨어난 그를 찾아와, 죽지 않은 게 신기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지간하면 죽지 않는다.
어차피 경험론적인 결론이기에 무조건 맞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하나 첫 천몽까지 포함하여, 수십 년 인생의 축적된 데이터는 그 결론이 진실에 수렴됨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었다.
“좋은 건가?”
문득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리니, 묘한 느낌이었다.
어지간한 부상과 병으로는 죽지 않는 게 나쁠 이유가 있을까.
특히나 고려에서 이뤄야 할 게 분명했으니 허무하게 그 꿈을 포기당하기 싫은 상황에서는 매우 대단한 이점이었다.
다만, 궁금한 건 그 ‘어지간한’ 정도가 대체 어느 정도냐는 것이었다.
목이 잘리고, 몸이 오체분시(五體分屍)되어도 살아남는 건 아닐 테고, 팔이 떨어지고 배가 절반쯤 잘리면 어떨까?
‘실험해 볼 수도 없고…… 실험?’
몽주는 문득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실험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상황이 있었다.
만약 의학이 여전히 미비한 상황에서, 그러니까 체계적인 임상 실험의 개념이 전혀 없을 때, 급하게 의약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면, 자신의 몸에 그걸 실험해 볼 수…….
“으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몽주는 고개를 마구 젓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고, 커튼을 활짝 열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맞이하였다.
고려에서는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현대에서는 이상하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었다.
* * *
재단 설립이 완료되었다.
몽린 문화재단(夢麟 文化財團).
비영리 법인이자, 재단 법인으로서 설립 목표는 문화 및 학술 사업 지원이었다.
법인이 소유한 재산은 일단 50억 원으로, 모두 몽주가 출연한 것이었다.
설립과 동시에 바당보름이 몽린 문화 재단의 지원 단체로 지정되었으니, 공증까지 하며 큰 지원을 약속한 몽주는 드디어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사실 이미 약속은 이행 중이었지만.
“이게 저희가 일단 조합해 본 범선의 모습입니다.”
재단 사무실에서, 바당보름의 회장인 이주찬이, 조금 긴장된 모습으로 몽주에게 모니터를 보였다.
명문대 공대생 졸업반인 그는 이미 모 조선 업체에 취업이 확정되었음에도, 그걸 포기하고 이번 일에 투신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아마추어 집단인 바당보름이 뜻하지 않게 온 행운에 취해 놀자판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 분위기를 다지곤 했었다.
몽주는 주찬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모니터…… 대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황진주를 보았다.
첫 만남에서의 강렬한 인상과는 달리, 대학 마크가 새겨진 후드티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지금 몹시 피곤해 보였다.
충혈된 눈자위를 보아하니, 어디 맘 놓고 등 붙일 데가 있다면 곧바로 잠에 빠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기야 대학 역사 연구소 일을 하면서 동시에 바당보름의 일에도 빠지지 않으며 한몫 해내었다고 하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몽주는, 앵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진주의 귀여운 모습에 내심 미소를 짓고는 그제야 주찬이 보인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는 한 편의 일러스트가 떠 있었다. 일종의 청사진이라고 해야 할 그림이었다.
얼핏 보면 쌍돛대의 동양식 범선. 그러나 범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본다면, 이게 뭔가 싶은 잡종 범선이었다.
몽주는 가만히 모니터 안의 잡종 범선을 보다가, 문득 주찬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냥 보이고 마는 겁니까?”
“아! 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입 사원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주찬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짚으면서 설명을 시작하였다.
선체 하부는 중국 정크선, 그중에서도 복선을 기본으로 하였다는 말로 시작한 설명은 다소 중구난방이었다.
첨원저형(尖圓低形) 배 밑 구조를 설명하다 말고 갑자기 편용골(扁龍骨)에 대해 한참 떠들더니, 고물은 한선(韓船) 식 평저선 형태로 바꿨다는 말을 한 후에는 키의 구조와 작동 원리에 대해 입을 놀렸다.
그렇게 대략 이십여 분을 인내심을 가지고 듣고 있자, 문득 진주가 주찬의 어깨를 짚으며 자신이 설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피로감이 가득한, 아니 피로가 더한 얼굴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얘가 프레젠테이션에 좀 약하네요. 제가 요약해 드리죠. 일단 말씀드릴 건, 저희가 이 범선을 설계, 아니 설계 수준은 아니니 조합이라고 하죠. 이 범선을 조합하면서 세운 기준이 있어요. 하나는 몽주 씨, 아니 이사장님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적용하는 것이고…….”
“이사장님이라고 하지 마시고, 그냥 몽주 씨라고 하세요. 쑥스럽네요.”
“알겠어요. 몽주 씨의 요구 사항에 집중하는 게 첫 번째 기준이었다면, 두 번째 기준은 안정성이에요. 여러 지역의 범선을 한데 모은다는 게 자칫 부분별로 따로 놀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범선 기술이 탁월하다고 해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범선의 안정성에 해를 미친다면 과감하게 배제했어요. 쉽게 말해서 보수적으로 범선 기술들을 접목했다는 거죠.”
진주는 그녀의 설명을 그렇게 시작하곤 구체적인 내용으로 넘어갔다.
“주찬이가 말한 대로 선체 하부는 기본적으로 복선(福船) 그러니까 복건성(福建省)식 정크선을 토대로 했어요. 복선은 첨원저선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첨저선과 평저선의 중간 형태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V’자와 ‘ㅁ’자 사이의 ‘U’자 형태죠. 다만, 배 밑 구조에 있어서 중간 부위부터 고물 쪽, 즉 선미 쪽은 평저선처럼 바닥을 평평하게 했어요. 사실 원양 항해를 생각하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지만, 몽주 씨의 요구 사항 중에 십오 세기에 항해하는 범선이라는 것도 있었기에 이렇게 했죠. 그 시대라면 부두의 수심이 깊지 않으니, 가능한 흘수선의 높이가 낮아야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해변에 그냥 정박할 수도 있으니까요. 해변에 정박했다가 썰물이라도 만나면 첨저선은 그냥 누워 버릴 거예요. 그리고 선체 하부에 들어간 범선 기술들 중에 특이할 만한 건…….”
진주는 목을 길게 빼어 스스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수밀 격벽 구조는 이미 아시니 넘어가고…….’라고 중얼거리곤, 이어서 편용골을 언급하며, 바닥 목재 중 가운데 놓이는 좀 두꺼운 목재로 용골인 척하는 가짜 용골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대신하였다.
몽주는 알겠노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그녀의 설명보다는 그녀가 고개를 빼어 몸을 숙이고 모니터를 보느라, 그녀의 헐렁한 후드티 안쪽이 보이자, 거기에 시선이 자꾸 가는 바람에 전혀 설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미녀의 가슴을 훔쳐보는 입장에서도 그랬고, 그녀의 가슴 아래 점이 있을지 궁금한 입장에서도 그랬다.
‘근데, 겨울에 왜 후드티 안에 다른 옷이 없는 걸까? 아무리 외투가 따로 있다지만…….’이라는 생각을 할 때, 진주는 숙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몽주를 바라보았다.
“아, 이건 설명해 드려야겠군요. 복선의 특징인데, 활수창(活水艙)이라는 게 있어요. 일종의 밸러스트 탱크인데, 선미나 선수에 위치해서 흘수선 아래 구멍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배가 파도를 헤치며 가다 보면 선수나 선미가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잖아요. 그럴 때 자연히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면 물이 빠져나가게 되죠. 그런 식으로 밸러스트가 조절되면서 배의 안정성을 높여 주는 기술이에요. 원양 항해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하기야 이 복선이라는 게 정화가 대원정에 쓴 대보선과 같은 계열이라는 게 현재 정설이니 애초에 원양 항해에 이점이 있죠.”
진주는 정말 신기하고, 재밌지 않느냐는 말투로 설명하였고, 몽주는 짐짓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어, 진주는 선미에 위치할 조타키에 대해서는 개공타(開孔舵 : 구멍 난 키)이되, 한선 식으로 키가 길고 깊어 현대 서양 요트의 센터 보드(center board) 즉, 선박 밑에서 수면 아래로 칼날처럼 길게 뻗어 배가 밀리거나 쉽게 전복되지 않게 해 주는 장치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한다는 설명을 끝으로 선체 구조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상부 구조에 있어서는 사실 서양 범선의 방식을 많이 도입했어요. 아무래도 대형 선박으로의 발전을 염두에 두면, 복잡한 돛 조절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갑판 구조나 교옥(㢗屋)의 위치 그리고 여러 장구류가 범선 기술의 끝자락까지 발전한 서양 범선이 탁월하니까요. 굳이 동양 범선에서 빌려온 게 있다면, 돛 자체겠죠. 동양식 횡범장(橫帆裝 : 사각돛) 아시죠? 서양 돛과 달리 대가 틈틈이 끼워져서 축 처져 있는 돛 말이에요. 그게 장단점이 있는데, 좀 무거워서 약한 바람에는 충분한 추력을 얻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 빵빵하게 부푸는 서양 돛보다는 그렇게 축 처져 있는 돛이 센 바람에는 더 많은 추력을 얻을 수 있어요. 뭐, 섞어서 써도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면 동남아에서는 여전히 쓰이는 정크 스쿠너 식으로 해도 되고요.”
몽주는 상부 구조에 대해 듣고 있다 보니, 왜 진주가 대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건지 의아했다.
“아, 대굽을 아시네요? 개밥통이라고도 하죠. 후후.”
“그렇더군요. 그걸 도입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대굽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죠, 저희도. 근데 아까 처음 말씀드린 대로, 안정성이라는 기준에서 탈락했어요. 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하거나, 돛대가 고정되지 않아 축처럼 자체적으로 회전이 된다는 건 항행성에서는 상당히 탁월하지만, 고정되지 못한 돛대는 크기가 클수록 그리고 바람이 거셀 경우 구조적으로 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제외했어요.”
몽주는 고려에서 대굽을 쓰는 걸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주 돛대는 고정시키되 부 돛대는 대굽을 쓰는 게 어떨까요?”
“대굽에 애착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신기해서요. 그리고 얕은 지식이긴 합니다만, 조범(操帆)을 하는 인원의 수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아, 그건 그렇겠죠. 바람에 따라 자연스레 돛대가 움직여 주니까요. 특히 대형 범선일수록, 그래서 대굽을 쓰는 돛대가 많을수록 비율적으로 조범에 손이 덜 가겠죠. 음…… 그건 생각 못했던 부분이네요.”
진주가 대단하다는 듯 몽주를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한번 생각해 보시죠.”
“알겠어요. 아,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희가 작은 배의 경우 설계도 해 보았고, 관련된 작업들도 경험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건 잘 아실 거예요. 아무리 이 범선이 기존에 없던 종류라곤 하지만, 그래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프로들이 있어야 할 거예요. 저희가 다 맡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잖아요.”
“아, 그거라면 저도 드릴 말씀이 있죠. 안 그래도 조만간 영국에 갈 일이 있어서, 북유럽의 범선 제조 기업 몇 곳과 만날 예정이거든요. 그중 한 곳과 설계 협약을 맺을 예정이에요. 건조 자체야 한국에서 하지만, 설계에서 조력을 받고, 또 공학적으로 감사와 점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죠.”
“다행이네요. 근데 한선이나 정크선 쪽 전문가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있으면 좋겠죠. 진주 씨가 추천해 주실래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진주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오픈 마인드였으면 좋겠군요. 잡종 범선인 만큼.”
“물론이죠.”
* * *
몽주가 석몽린의 육체로 정신을 차린 건, 다시 꿈을 꾼 지 사흘이 지난 후였다.
눈을 뜨고 나니, 정말 엉망진창인 신체 상태가 느껴졌는데, 배에 남은 상처로 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열흘 가까이 물로 제대로 못 마셨기에 기력이 일절 상실된 상태인 탓이 컸다.
몽주가 깨어나자, 태산 같은 근심에 쌓여 있던 앵도가 울음을 터뜨렸고, 몽린의 부모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부처님을 찾으며 감사를 올리니, 그래도 사랑받고 있는 느낌이 들어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물을 마시고 미음을 삼켜 기력을 회복하면서 시간을 두고 상처를 확인하니, 이 시대의 믿기 힘든 의원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나아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달에 이르자, 몽주가 다시 바깥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경칩(양력 3월 5, 6일)에 이르러서였다.
1372년 3월.
역사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상황이었다.
같은 것은 왜구의 거센 준동이었으니, 화령부윤(和寧府尹)에 임한 이성계가 벌써 왜구를 소탕하는 공을 세워 고려 천지가 그를 칭찬하느라 바빴다.
또, 역사와 다른 것은 신돈이 여전히 영공이라는 호칭으로, 금상 아래에서 독재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신, 신돈에 대한 백성들의 선망은 다소 희석되었는데, 이는 금상이 신돈을 견제하려는 것인지 신돈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착취한 탓이기도 했고, 또 신돈 스스로도 이전까지는 명분이든 실제든, 개혁의 기치를 따르던 것에 반해, 지금은 당여들을 크게 늘려 권세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열중한 탓이기도 했다.
그리고 임금은…….
“이러다 죽겠네.”
백성들 사이에서도 금상의 난잡한 횡음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널리 퍼질 정도였다.
자제위의 수는 더욱 늘어, 곱상한 외모의 어린 사내들이 금상의 처소에서 밤을 보낸다고 하니, 세상이 그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사를 돌보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대해 상소를 올리고 탄원하는 신료들에게 오히려 벌을 내리고 있으니, 심지어 당대 유자들의 스승이라 할 목은 이색의 상소마저 보는 자리에서 찢어 버리며 수치를 줄 정도였다.
그나마 이색 정도 되는 명망 있는 자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태를 맞거나, 귀양이라도 갔었을 것이다.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짐과 더불어 이인임에 대한 원성도 거세졌다.
이인임은 여전히 임금의 복인처럼 굴었으니, 임금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노력하였고, 그럴수록 임금을 망치는 자로 낙인찍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몽주는 지난날 조정에서의 연회에서 신돈과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누었던 이인임을 기억하기에, 그의 그런 행동들이 금상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려는 의도적 노림수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만약 그러하다면, 신돈을 제외하곤 지금의 고려 정국이 역사대로 흘러간다 할 것이고, 나아가 공민왕의 시해에 대한 역사의 의혹이 진실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했다.
공민왕의 시해에 대한 정설이야, 자제위 중 홍륜(洪倫)이라는 자가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 한 씨를 임신시키는 바람에 왕이 그를 죽여 은폐하려 하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한 것이다. 그리고 공민왕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던, 후에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측이 그것을 정식으로 차용하고, 후에 정사로서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하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이인임이 배후에서 왕을 살해하게 하였다는 설이 대표적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정사인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이인임이 왕을 시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공민왕이 죽은 후 이인임이 엄청난 정치적 이익을 얻은 정황을 보아도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만약 그 의혹이 진실이라면, 단지 홍륜이라는 자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면, 금상은 이번에도 이인임의 손에, 어쩌면 신돈도 가담하여, 시해당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해야 마땅했다.
왕이 죽는다.
공민왕이 죽는다.
몽주는 자신이 그것을 기정사실이라고 여기며 생각하자, 이율배반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현대에서 개혁 군주로 명성이 높은 공민왕, 그리고 고려 당대에서 보는 폐인급 암군(暗君)인 공민왕, 어느 쪽의 공민왕을 떠올리느냐에 따라서 안타까움과 후련함이 번갈아 심상을 장악했던 것이다.
“허어, 사람이 살해당하는 걸 두고 후련함이라니…….”
몽주가 문득 자신의 감정을 깨닫곤 몸서리를 쳤다. 자신 또한 전근대 사회 속의 살벌한 정치에 물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하기야 정 오품의 벼슬아치에 제주현남이라는 작위까지 얻은 그가 당대 정치와 아무런 상호 작용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일 것이다.
머쓱한 기분에 한숨을 가벼이 쉰 몽주는 상 위에 수북이 쌓인 녹계를 바라보았다.
한 달이나 정무를 보지 못하여, 아래 벼슬아치들은 처리 불가능한 문서들이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몽주는 다시 일하기 시작하였다.
* * *
“지금 죽는다 해도 원망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인임이 차를 따르며 고하자, 신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상께서 이토록 타락하는 걸 보자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군.”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초년의 상께서는 진정 현군이셨지요.”
“……하나, 지금은 암군이실 뿐이지.”
찻잔을 들며 말하니, 이인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들어 마셨다.
“하나, 경거망동은 삼가시게. 상께서 혜안을 잃으셨다 하나, 욕심은 여전하시지 않은가. 상께 불리한 움직임에 대해서만큼은 눈과 귀를 열어 두셨음일세.”
“하여, 장구한 대계를 세우지 않았겠습니까.”
“……쓸 만한 자가 있던가?”
“홍륜이라는 놈이 있지요. 제법 미모가 있어, 상께서 몸소 거두셨습니다.”
그 말에 신돈이 이맛살을 찌푸렸으니, 아무리 듣고 보아도 임금의 남색은 적응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어떤 자인가?”
“도순문사(都巡問使) 홍사우(洪師禹)의 아들로, 소문이 좋지 못한 놈이지요. 홍사우마저도 아들을 훈계하는 데에 지쳐 포기하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요. 다만, 불쌍한 면도 있습니다.”
“불쌍하다?”
“형으로 홍이(洪彛)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워낙에 출중하여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하더이다. 그 탓에 크면서 일탈하게 된 것이겠지요. 게다가 이번에 자제위에 든 것도 홍륜은 거부하려고 애를 썼는데, 상께서 강요하신 것이기도 하지요. 하기야 계집을 하도 밝힌 탓에 집안에서 일찍이 혼인시켜 그 성미를 잡아보려 할 정도였던 자가 남색이라니…… 금상의 강요가 아니었다면 절대 할 일이 없었겠지요.”
형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삐뚤어졌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던 신돈도, 홍륜이 본디 남색에 질색하던 자임에도 강요를 받은 것임을 알게 되니, 확실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까지 있는 사내를 억지로 들였다라…… 그자의 불만이 크긴 크겠군.”
“그렇습니다. 그러니 쓸 만한 자라 하겠지요.”
과연 그렇다 싶어 신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제위의 수를 늘리는 것에 대해 물었다.
“상께서 기뻐하시니 어찌 늘리지 못하겠습니까. 하여, 저 또한 여러 가문에서 골고루 뽑게 하여 바치고 있습니다.”
“그대의 손을 많이 더렵혔겠군.”
“어차피 깨끗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들 상의 눈에 들고자 하니, 아들 하나 바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이다.”
자제위의 수를 크게 늘리면서, 고려 내 여러 가문에서 골고루 뽑았는데, 이는 후에 ‘대계’가 이루어지면, 자제위 자체가 역모에 얽힐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역모에 아들이 얽힌 집안은 그대로 풍비박산이 날 것이니, 그 참에 여러 껄끄러운 가문들을 치워 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죄에 대한 벌을 두고 가문 자체를 쥐고 흔들 수 있을 것이다.
“아 참, 석 현남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그렇게 상하고도 쾌차하여 다시 등청하였다 하더이다.”
“그런가. 명줄 한번 길군. 난 그 사람이 참 맘에 드네. 어디다 던져 놔도 살아 돌아올 것 같거든. 끌끌.”
신돈은 석몽린을 떠올리곤 한참이나 웃음을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