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7)
* * *
고려가 탈탈 털렸다. 왜구의 난동은 그렇게 표현하여도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전라도는 조운 체제가 완전히 무너질 정도로 거덜 났다. 3월 한 달 사이에 승주목(昇州牧 : 순천), 회주목(懷州牧 : 장흥), 탐진현(耽津縣 : 강진), 영암군(靈巖郡 : 영암) 등이 차례차례 털려 버렸다.
털린 것도 털린 것이지만, 그 과정 또한 절로 탄식이 나올 만했다.
고려군이 저항하고, 반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겁을 먹고 오히려 도주를 하는 와중에 민가를 습격하고, 불을 질러 피해를 키우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라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한양부 별시 판관인 몽주는 들어온 녹계를 봄으로써 고려의 경제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의 물산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남 중에서도 전라도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곳의 조창(漕倉)이 털리고 조운선을 빼앗겼으니, 경제의 대동맥이 잘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당에서 급히 조치를 취하긴 했으나, 그게 육로로 세곡을 운반한다는 수준이었다.
말이 쉬워 육로로 운반한다고 하지, 수레 수백 대도 부족할 터인데, 그 많은 걸 어찌 움직인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몽주가 요성으로 양초를 운반해 보았기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야 1만이 넘는 복마군이 있어 밀고 끌 수 있었던 것이고, 세곡을 이동하는 데 그렇게 많은 인원을 움직이려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공산이 컸다.
거기다가 한반도의 강(江)과 천(川)은 태반이 동서로 흐르니, 세곡을 운반하는 중에 숱하게 물을 건너야 한다. 한데 그 강과 천에 놓인 배들이야 대부분 나룻배 수준에 불과하니 그걸 건너는 것도 어려움이 클 게 분명했다.
몽주가 답답하게 여기는 사이에 달이 넘으니, 왜구의 난동은 더 심해졌다.
여전히 전라도의 바다가 꽉 막힌 중에 경상도도 몇 차례 털리더니, 급기야 이성계의 기반이자 그가 부윤으로 있는 화령 지역(和寧 : 강원도 북부 및 함경남도)에 위치한 진명창(鎭溟倉)마저 약탈을 당해 버렸다.
이성계가 그보다 북부에 쳐들어온 왜구를 소탕하러 나간 사이에 중요한 본진 중 한 곳이 털린 셈이었다.
“헬게이트라고 하기에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 진짜 헬게이트로군.”
몽주가 어이없다는 양 중얼거렸으나, 왜구로 인한 헬게이트 고려는 아직 시작일 뿐이었다.
* * *
양팔을 올리더니 이리저리 휘저었다. 양발도 버둥거리며 허공을 차기를 열심히 반복하였다.
그렇게 사지를 마구 놀린 끝에 마침내 몸을 돌렸건만, 머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콩- 바닥에 턱을 찧고 말았다.
“우애애앵!”
“허허, 녀석!”
곁에 놓고 몸 뒤집기 도전을 하는 아기를 지켜보던 몽주가 얼른 딸을 들어 품에 안았다.
“많이 아팠느냐?”
“후애앵…….”
말 못하는 아기라지만, 몽주의 귀에는 딸아이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울음소리의 다름과 칭얼거림의 차이를 통해 아이가 하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요, 턱이 아파요!’
“오냐, 아비가 호오 해 주마. 호오―”
어와둥둥,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고 있자니, 세상만사가 태평한 느낌마저 있었다.
“그만 강영이를 다시 내려놓으세요. 좀 더 훈련을 해야지요.”
“후, 훈련이라니…… 몸을 뒤집는 게 어찌 훈련이오?”
몽주는 앵도의 말에 과하게 놀란 체를 하며 되물었다. 이 연약하고 여린 여아를 자기처럼 만들 셈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앵도는 잔인무도(?)한 표정으로 아기를 몽주로부터 빼앗듯 받아 들더니, 도로 바닥에 뉘였다.
“천 리 길도 첫걸음이 있는 법이지요. 뒤집기 또한 그 첫걸음이 아니겠어요?”
“강영이도 자내처럼 날래게 만들 셈이시오?”
“이 험한 세상에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돼야지요.”
‘아닌데, 제 한 몸 지킬 수준을 넘어 수십 몸 지킬 수준인데…….’
예상보다 높은 앵도의 눈높이에 몽주가 다소 당황하는데, 그사이 강영이가 다시 버둥거리다가 몸을 뒤집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번에는 턱을 찧지도 않았다.
“아이쿠, 내 새끼. 잘도 하는구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몽주는 얼른 아기를 들어 품에 꼭 안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아기 또한 아비의 품이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석강영(昔剛英). 태명 강이를 두고 해민이 지어 준 이름이었다.
다른 이름 후보로 강희, 강매, 강숙이 있었는데, 몽주가 강매와 강숙은 절대 안 된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해민이 강희와 견주다가 강영으로 택한 것이었다.
참고로 몽주의 아우 이름은 몽건이었다. 석몽건.
마찬가지로 태명 건이를 두고, 몽 자 돌림으로 지은 것이었다.
“아직 몽건이는 뒤집기를 전혀 못하던데, 우리 강영이는 늦게 나서도 먼저 몸을 가누니, 아마도 자내를 많이 닮은 듯하네.”
그렇게 말을 하니, 앵도가 문득 몽주의 팔뚝을 툭 쳤다.
“아이쿠, 왜 치는 것이오?”
“강영이는 무조건 서방님을 닮아야 해요. 나처럼 검은 피부면…….”
“…….”
하기야 콤플렉스가 그리 쉽게 없어질 리 없었다.
“나는 자내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참으로 좋소. 진심이오.”
몽주는 그리 말하며 앵도를 당겨 안았다. 품 안에, 아니 품을 좀 넘긴 했지만, 어쨌든 아내와 아기를 같이 푹 안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이만 불을 끄는 게 어떻겠소?”
“……강영이를 먼저 재워야지요.”
은근히 몽주가 청하니, 앵도가 새치름하게 응하였다.
하여, 급히 아기를 이부자리 위에 놓고 잠을 재우려 하는데, 녀석은 밤이 늦도록 몸 뒤집기 훈련(!)에 열중할 뿐이었다.
“……안 졸리니?”
“꺄르르!”
* * *
“나리, 나리!”
소란스런 석삼의 목소리에 잠을 깬 건, 강영이 덕에 아무 일 없이 잠든 지 채 두 시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째서 석삼이가……?’
그가 급하게 부르는 것이 이상하기에 앞서, 어제 오늘은 그가 시전에서 숙식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가 추대현에 나타난 것이 이상했다.
하여, 몽주가 잠을 서둘러 쫓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 먼 곳 동쪽에 이제야 겨우 푸르스름한 기운이 솟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요. 인주가 왜구에 당했는데, 그놈들이 이곳 한양부로 몰려오고 있습니다요!”
“……그게 참말이냐!”
“그렇습니다요! 인주에서 열수로 도망쳐 온 어민이 말하길, 이미 인주가 당하고 왜구들이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안으로 진군하려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요!”
‘어째서 벌써 왜구가 한양부를……!’
몽주가 겁내고 놀라기에 앞서 의아했던 건, 역사적으로 한양부가 왜구에 침탈당하기까지 아직 1년은 족히 남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와 꼭 맞게 왜구가 습격한 것도 아니고, 역사 기록에 누락되는 것도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기는 했다.
하나, 왜구가 아무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하더라도, 그 이동 경로는 알려지기 마련이니, 지금 왜구의 주된 침략지는 남해 서부와 동해 북부였다.
그걸 알기에 적어도 당장 한양부가 침탈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고 있지만은 않았기에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나리,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시행할깝쇼?!”
석삼이 급히 물으니, 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라! 아직 깨지 않은 현민들이 많을 것이다!”
“예이!”
석삼이 급하게 발을 움직여, 먼저 가복들을 마저 깨우곤 서둘러 현남댁을 나갔다.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게 사실이에요?”
몽주가 안방에 들어오니, 밖의 대화를 들었는지 앵도가 그새 일어나 흐트러진 차림을 단정히 하고 있다가 물어 왔다.
“그렇소. 인주가 이미 당했고, 그 왜구들이 한양부로 향하고 있다고 하오. 어쩌면 이미 서쪽을 침탈하고 있을 수도 있소. 하니, 지난번에 꾸려 놓은 짐과 강영이를 챙기시오. 나는 집안 살림을 챙기겠소.”
“알았어요.”
앵도는 그리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가 무인의 심장을 가진 여인이라는 것이 지금 순간에는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다.
어쨌든 다시 문을 나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가복들을 지휘하였다.
몽주는 명에서 돌아오는 길에 왜구에 당한 황해도 지방을 본 적이 있었다. 하여 집에 와서 해민과 논의하여 혹시 모를 왜구의 침략에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가내(家內)에서는 미리 귀중품을 꾸려 놓고, 천마산 깊은 곳에 피난처를 마련해 두어 그곳이 여분의 식량을 두게 하였고, 현내(縣內)에서는 백성들에게 미리 준비하도록 명령하면서, 가까운 호들을 묶어 연락책을 지정하여, 호장으로부터 피난을 명하면 곧바로 지정된 가까운 호에 전파하게 한 것이었다.
덕분에 현남댁과 호장댁에서는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피난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하나, 현민들은 준비가 늦었으니, 전파되는 시간에 피난할 짐을 꾸리는 시간, 그리고 천마산에 가까운 현남댁 근처로 다시 모이는 시간까지 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호장의 명을 따르지 않고, 미리 피난 준비를 하지 않은 호들도 꽤 많을 것이기에 더 늦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몽주의 머릿속 계획으로는 반 시진 안에 추대현의 현민들이 모여들어야 함에도, 한 시진이 다 되도록 절반도 채 오지 못하였다.
“허어, 늦는구나, 늦어!”
해민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니, 금방이라도 왜구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아 조바심이 난 탓이었다.
추대현이 한양부에서도 동북부 끝에 위치한 터라 왜구가 한양부를 쳐들어와도 상대적으로 피난할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안 되겠습니다. 일단 모인 자들 먼저 데리고 올라가시지요.”
“그리해야겠지. 하나, 나는 남아 있어야 해. 호장씩이나 되어 어찌 먼저 줄행랑을 놓을까. 그러니 네가 먼저 저들을 데리고 올라가거라.”
향리 중 으뜸이라는 호장이면 뭐할까. 군병을 부릴 권한이 없는 그는 당면한 상황에서 그저 일반 백성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애초에 추대현에는 수령이 없어 군관 또한 없었다.
해민이 그렇게 고집을 부리니, 몽주는 하는 수 없이 앵도에게 일찍 온 현민들을 데리고 천마산으로 올라가라 하였다. 몽주도 아비를 두고 먼저 도망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앞서 모인 현민들이 현남댁 뒤쪽의 천마산으로 오르니, 산세가 깊은 것이 이번에는 참으로 이득이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현민들의 수가 제법 많음에도 산세에 가리어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데…….
“아니, 어찌 남아 있는 것이오? 강영이는 또 어쩌고?”
같이 올라간 줄 알았던 앵도가 홀로 도로 내려왔다.
그녀는 치마저고리 대신 근래에는 보기 어려웠던 연재복 차림이었고 허리에는 검마저 착용하고 있었다.
“지아비께서 계시는 곳에 어찌 계집이 따르지 않겠어요. 그리고 강영이는 걱정 마세요. 점녀와 종옥이에게 맡겼으니, 목숨으로 지켜 줄 거예요.”
“……허어.”
이걸 감동해야 하는 건가 싶어 아리송한 몽주였다. 물론, 제 딸인 양 강영이를 어여삐 여기는 점녀와 종옥이라면 앵도의 말대로 최선을 다해 지켜 줄 것이다. 종옥의 무예도 출중하고, 또 가복들도 다 같이 올라갔으니, 왜구와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위기는 없을 것이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어미만 하겠는가. 또 원래 모성애라면, 만사 제치고 심지어 남편도 뒤로 미루고 아이부터 챙기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지아비는 또 얻을 수 없지요.”
“……허어.”
앵도가 보무도 당당히 몽주의 뒤에 서고, 그 뒤로 다시 탁기가 서니, 두 명의 뛰어난 무인을 등 뒤에 세운 몽주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어쨌든 몽주와 해민 등 몇 명 남지 않아, 기다리고 있으니, 연신 현민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무리를 지어 계속 피난처를 향하게 하여 올려 보내는데 막바지에 온 현민들을 보자니, 몽주는 절로 복장이 터졌다.
간단히 챙기라 명했음에도 많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중에, 어떤 자들은 심지어 수레를 끌고 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정신이 있는 자들인가! 산으로 올라야 하는데 어찌 수레를 끌고 오는 게야!”
몽주가 버럭 소리치니, 수레를 끌고 온 자들이 주눅 든 와중에도 목숨보다 귀한 재산이니 어쩌니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장 들고 질 수 있는 짐만 챙겨라! 아니면 떼어 놓고 갈 것이다!”
“나리, 제발 가지고 가게 해 주십시오! 조금만 도와주시면 끌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미친!’
몽주는 화가 치밀었다. 정말 그냥 두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래도 그럴 수 없기에 탁기에게 눈짓을 보내니 그가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퍽! 퍽! 퍽!
연달아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세 대의 수레들이 한쪽 바퀴씩 다 박살이 나버렸다.
“나리!”
“당장 짐을 챙겨 따르라!”
소리친 후에 곧바로 몽주가 몸을 돌려 천마산으로 향하였다. 한데, 그럼에도 현민들 중 몇이 수레에 실은 재산을 도로 집에 숨기고 오겠다며 돌아가는 게 보였다.
기가 막혀 진실로 버리고 갈 것이라 작심하는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자들이 어어- 하며 우뚝 서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하였는데, 서남쪽에서 함성이, 고함과 비명이 뒤섞인 소란한 소음이 작게나마 들렸다.
“이런! 서둘러라!”
몽주가 일행을 채근하여 천마산을 향하니, 재산을 숨기려 가던 현민들도 제 목숨이 귀한 줄은 아는 듯 그것들을 포기하고 들 수 있는 짐만 챙겨서 몽주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첫 고개의 중턱에 이르러, 마을을 돌아보니, 추대현에도 왜구가 이르렀는지 여기저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왜구로 보이는 자들이 드문드문 거리를 달리는 게 보였다.
또, 말을 탄 자들이 거리를 질주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발각되어 큰일 날 뻔했다 싶어 안도하고, 다시 발길을 놀려 고개 위에 마침내 올랐다.
다들 지쳐 그곳에서 잠시 쉬고자 하였다.
한데, 고개 위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어느 현민이 문득 아이쿠 하며 놀란 음성을 토하였다.
그가 산 아래를 가리키니, 아까 현민들이 모이던 곳에 남아 있는, 바퀴가 부서진 수레들 주위에 왜구들 십여 명이 모여 있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천마산을 가리켜 손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어이 수레 때문에 들통이 나는구나 싶어 분기가 차는 와중에도, 몽주와 해민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뜻을 나누었다.
이대로 피난처로 가면, 왜구가 기어이 그곳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왜구가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두 부자간에 통한 뜻이었다.
하여, 다시 일어서 움직이려는 일행들을 몽주가 잡아 세웠다.
“이쪽으로 갈 것이다.”
몽주가 가리킨 방향은 산의 능선을 따라 오르는 쪽이었다.
피난처로 가려면 고개를 반대편으로 내려가 계곡을 건너, 다시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야 했으니,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에 앵도와 탁기 등은 왜구를 유인하려는 속셈임을 알아차렸으나 입을 다물었다.
현민들 중에서도 몇몇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방향이 아니지 않느냐 물었지만, 몽주는 다른 피난처가 있다고 둘러댔다.
그들을 따로 피난처로 가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로 인해 늦어진 탓에 천마산 피난처가 들통 나게 생겼으니, 그들의 편의를 봐줄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빼고 나면 무리의 수가 너무 적어져 왜구들이 유인당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능선을 따라 오르니, 과연 왜구들 수십이 산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고, 몽주 일행을 목격한 듯 연신 몽주 쪽을 가리키고 바라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몽주는 그들을 더욱 유인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들이 혹여 피난처로 가는 쪽에 사람이 발걸음을 한 흔적을 볼까 두려웠던 탓이다.
왜구들을 도발해야 한다 결정하자, 몽주는 능선 중에 나무가 드문 곳에 몸을 드러내고는 크게 소리쳤다.
“빠! 카! 야! 로!”
그렇게 소리치니, 메아리가 천마산에 울려 퍼졌다.
빠바아아- 카가아아-야야아아-로로오오-!
한 번 더 소리치고 나서야, 몽주는 이 시대에도 그 욕이 통용되는지 잠시 의심스러웠지만, 왜구들 쪽에서 성이 나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마구 들려왔으니, 적어도 저들이 욕으로 받아들이긴 한 모양이었다.
이제 되었다 싶어, 몸을 돌리니 수많은 시선들이 그에게 박히고 있었다.
현민들이 ‘저 미친놈이!’하며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고, 해민이 잘했다는 듯 미소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중에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선망이 가득한 시선의 앵도도 있었다.
“왜어도 하실 줄 아셨어요? 정말 대단하시어요.”
“흠흠, 말 몇 마디 알 뿐이오. 흠흠.”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인 와중에도 다시 일행은 움직였다. 아니, 이제 거의 달리다시피 하였다.
도발은 했고, 왜구는 쫓아오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스피드’였으니, 몽주가 영 자신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헉헉, 탁기, 나 좀 밀어 주게나.”
* * *
“개경이 멀지 않은 한양부마저 왜구에 당하다니, 이래서야 조만간 개경마저도 당하지 않겠는가!”
수문하시중 이인임이 크게 호통을 치니, 당상관들이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곳은 영공 신돈의 자택인 영당각.
인주(仁州 : 인천)가 당하였고, 한양부가 위태롭다는 소식이 있자, 곧바로 도당이 모였는데, 조정이 아닌 그곳에 모였던 것이었다.
이미 나라의 대소사(大小事)가 영공의 손에 의해 처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모이자마자 상황이 급하여, 군병부터 내려 보냈으니, 신돈의 당여인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이춘부(李春富)와 그의 아들 이옥(李沃)으로 하여금 한양부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자, 이인임이 문득 노하여 당상관들을 향해 분기를 터뜨렸다.
신돈이 상석에 있기는 했으나, 그는 눈을 감은 채 이인임의 행동을 무언으로 허락하고 있었으므로, 영공 또한 분노를 함께 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려가 온통 왜구에 당하여 난리인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개경 주변에까지 왜구가 활보하는 것만큼은 개경의 권세가들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인임이 관리들을 혼내고 있을 때, 문득 장계가 도착하였는데, 인주가 당하기 전 그곳의 어느 수령이 보낸 것이 이제야 뒤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장계에는 인주를 습격한 왜구의 규모에 대한 추정과 구원에 대한 요청 등이 내용으로 담겨 있었고, 말미에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는 첩보도 함께 있었다.
“왜구 중에 목호로 보이는 자들도 있고, 왜구의 말 중에 토마도 있다는 것인가…….”
장계의 내용을 들은 신돈이 무거운 음성을 뱉으니, 그의 분기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목호(牧胡)라 함은 제주에 남은 원나라 출신의 목자(牧子)를 의미했고, 토마(土馬)라 함은 목호들이 제주에서 키운 말, 즉 조랑말을 가리켰다.
아랫것들을 불러 이춘부에게 첩보의 진위를 확인하라는 파발을 보내게 한 이인임이, 이에 역시나 무거운 음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주원장의 주장이 틀림이 없던 모양입니다.”
“…….”
지난달에 왔다가 돌아간 명의 사신은 고려에 주원장의 친서를 전하였었다.
이미 왜구의 준동은 명나라에도 전해져, 천자 또한 걱정이 없지 않았는데, 이는 혹여 고려가 왜구에 무너져 왜구가 명에까지 이를까 저어한 탓이었다.
그 친서에는 주원장이 제주의 목호와 왜구가 연계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있었다.
주원장은 과거 고려가 제주에 보낸 목사(牧使) 윤재상(尹宰相)이 피살된 것까지 거론하며, 반란의 무리들을 당장 처단하지 않고 대체 무엇하느냐면서 야단을 치기까지 하였다.
그걸 본 도당에서도 그에 대해 논의가 있기는 했으나, 어찌 먼 명나라 땅에 있는 천자가 고려의 일을 제대로 알 것겠느냐며 무시하였었다.
사실 왜구와의 연계는 둘째치고, 고려의 관리가 살해당한 것만으로도 군사를 보내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이제 와 인주 땅에 들어선 왜구들 중에 목호가 섞여 있고, 왜구들이 타는 말 중에 토마도 보였다 하니, 주원장의 경고가 결코 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하기야 정작 왜에서는 보기 힘든 대규모 기마병들을 오히려 왜구들이 운용하여 고려를 난도질하고 있었으니, 그 정황만 보아도 왜구들에게 따로 말을 공급하는 세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당각 내부가 고요해졌다. 다들 무어라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파악되었고, 마땅히 왜구와 목호 간의 연계를 막아야 하는데, 본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던 탓이다.
“어찌하오리까.”
수시중이 조심스레 물으니, 영공이 마침내 눈을 부릅뜨며 말하였다.
“어쩌긴, 반란의 무리들은 토벌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오나, 방도가 …….”
“몹시 궁하면 통할 길이 보이지 않겠는가.”
신돈이 뜻을 굽히지 않음을 확실히 하자, 영당각 내 모든 이들의 머릿속이 비상하게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혼란스런 와중에 원정군까지 구성한다는 것은 정국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인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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