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9)
* * *
“그래도 말을 하고 나니 좀 풀리네요.”
몽주는 조금은 후련한 기색으로 말했다.
“원래 짜증과 분노는 속으로 삭히는 것보다는 누구에게라도 토로하는 게 낫죠. 말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니까요.”
두신이 웃으며 위로하였지만, 곁에 재상은 반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네요. 진짜 위기예요. 구체적으로 몽주 씨가 타깃이니까요.”
재상의 말에 몽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두 번째 천몽을 시작한 뒤, 숱한 위기를 겪었지만, 그 위기가 몽주를 타깃으로 계획되고 실행된 적은 없었다.
그저 어떤 권력자가 자기 이익이나 음모를 추구하는 도중에 몽주가 ‘걸려든’ 것이지, 몽주 자체가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몽주의 기반을 흔들고, 그의 축출과 몰락이 목표인 것이다.
“그냥 말로만 하는 협박이 아니라, 대놓고 위협을 가하는 건 저들이 몽주 씨를 신돈의 아래에서 배제하기로 마음먹었고, 그에 합의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행동한 것일 테고요. 어쩌면 신돈도 알고 허락해 주었을 수도 있겠죠. 아니더라도, 그들의 판단에 신돈이 나중에 알더라도 몽주 씨가 아닌 자기들을 선택할 거라 믿고 있을 수도 있고요. 하기야 이인임까지 손수 거들고 있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재상의 말마따나 진짜 위기였고, 몽주는 그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인임의 세가(世家)에서 나온 후, 몽주는 그의 권유 내지 협박에 따라 곧바로 신돈에게 가서 그에게 제주의 일을 맡겠노라 청할지를 고민하다가 일단 한양부로 돌아왔다.
조만간 잠이 깰 것이니, 현대에서 논의를 한 후에 신돈을 만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나, 한양부로 내려와 잠이 깨기까지 며칠 사이에 몽주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수상한 자들이 자택과 시전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니, 급기야 시전 점포에 난데없이 화재가 일어나 두 개의 창고가 불타 버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두 창고들 모두 거의 비어 있던 탓에 재산상의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불이 난 것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면, 점포가 홀라당 타 버렸을 수도 있었고, 그에 숙식하던 가복들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불이 크게 번져 한양별시 자체를 태울 수도 있었다.
시전 상인으로서도 그렇고, 한양별시를 책임지는 판관으로서도 그렇고, 몽주로서는 가슴이 철렁거릴 만한 일이었다.
잠이 깨기 바로 전날에는 석 호장댁 대문 앞에 배가 갈라져 죽은 개 네 마리의 사체가 나란히 놓여 있어, 아침에 대문을 열었던 여노비가 그것을 발견하고 기절하는 일도 있었다.
몽주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자가 있는 게 차라리 낫지, 가족과 ‘직원’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으니, 절로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자, 짜증이 좀 풀리셨으면, 우선 정리 좀 하죠.”
재상이 일어나 화이트보드에 무어라 적었다.
‘몽주 왕따 상황’
“…….”
네이밍이 참 허탈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두 신돈의 당여들이 몽주를 따돌리느라 벌인 일이었으니까.
재상은 그 ‘왕따’의 이유로 몽주가 신돈의 총애를 받게 되고, 그에 기존의 측근들이 그들의 입지에 위기감을 가지고 몽주를 질시하게 된 것을 적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라면, 따돌림을 하는 학생들이 무조건 잘못이지만, 이건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몽주 씨에게도 잘못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튀어나온 못이 장도리에 얻어맞는 건 그 바닥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죠.”
“좀 억울하지만, 넘어가죠.”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것도 아니고,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고 민족의 미래를 개선하게 하겠노라는 포부로 열심히 움직이다가 그런 것이지만, 당대의 인물들이 그걸 알아줄 것도 아니니, 몽주가 억울해할 여지가 없었다.
“저들이 선택한 건, 몽주 씨를 신돈의 곁에서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저들의 시야에서는 몽주 씨는 신돈이 아니라면 별거 아닌 부자, 언제든 눌러 버릴 수 있는 인물이니까요. 그리고 그 수단으로 제주 목호들을 토벌하는 걸 선택했죠. 자, 여기서 한 가지 짐작할 만한 게 있네요.”
재상은 탐정이라도 되는 양 몽주와 두신을 번갈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마치 알아맞혀 보라는 듯이.
그 뜬금없는 퀴즈에 몽주나 두신이나 눈만 껌뻑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주목해야 할 건 저들의 목표가 몽주 씨를 신돈의 곁에서 치워 버리는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지 제주 목호를 몽주 씨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죠. 토벌하고 돌아오면 오히려 몽주 씨의 위상만 높아질 테니까요.”
“아…… 절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겠군요.”
“그렇죠. 그리고 몽주 씨가 제주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건 크게 두 가지 방도가 있을 겁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마지막 말은 두신이 한 말로, 영화 제목에 비유한 것으로 몽주의 귀에는 애매했지만, 재상은 통하는 게 있는 건지 손가락을 튕기며 옳다는 제스처를 하였다.
“몽주 씨가 제주에서 죽거나, 제주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는 거죠. 죽는다는 건 공식적으로는 토벌 중에 사망하는 겁니다. 물론, 그건 공식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저들이 몽주 씨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암살이든 뭐든, 신돈의 당여들이 움직이면 몽주 씨가 제주로 갈 때 그들의 입김이 닿은 장수 하나 정도야 충분히 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크게 보면 토벌에 실패하는 것 자체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죠. 실패하고 돌아오면 그 책임을 물어 죽이거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
재밌다는 듯이 말하는 재상을 보고 있자니, 몽주는 그가 괜히 얄미웠다.
‘자기 목숨 아니라고 참…….’
“몽주 씨가 암살에 당하지도 않고, 토벌에 성공하기도 한다면, 저들은 도당과 신돈을 움직여 몽주 씨를 제주에 눌러 앉게 만들 겁니다. 이미 제주현남이라는 작위도 있겠다, 몽주 씨를 제주 목사나 기타 비슷한 직위에 임명하게 하면 되겠죠.”
“그건 저로서는 나쁜 일만은 아닌데요.”
“그렇죠. 애초에 제주로 가급적 빨리 가고 싶었으니까요.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주는 격이죠. 하나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걸 모르니까요. 다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들이 방해를 멈추지 않으려 할 테니까?”
재상은 이번에도 손가락을 튕기며 정답이라고 표현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신돈의 마음에서 몽주 씨를 지워 버리려고 하겠죠.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도 멀어지는 건 인지상정이죠. 몽주 씨가 안 보이는데, 신돈이 계속 몽주 씨를 심중에 둘 리가 없을 거예요. 옆에서 측근들이 계속 험담과 참언을 일삼을 거고요. 그렇게 하다가 신돈이 더는 몽주 씨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면, 결정타를 날리려 하겠죠. 게다가 더 위험한 건 몽주 씨를 축출하면 신돈과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게 많다는 거예요.”
재상의 마지막 말에 몽주는 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역모의 죄라도 뒤집어씌우면 자신은 물론 집안 자체가 거덜 날 것이다. 아마 처가 쪽에도 피해가 갈 것이고.
자신을 몰락시킨다면, 자신과 남양 석씨 가문이 가진 것으로 그들은 잔치를 벌일 것이다. 신돈 또한 곁에 두고 쓰지도 못할 거라면 차라리 배를 갈라 잡아먹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예상하는 것인지, 몽주는 잠시 자문하였다.
아무래도 재상의 성향이 그러하다는 걸 알고 있는 입장이니, 그의 말을 듣는 중에 최악의 상황만을 염두에 두게 되는 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본 것이다.
하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치 싸움, 파벌 싸움은 단지 정치적인 승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듯 피비린내나는 진짜 목숨을 건 싸움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진짜 목숨을 빼앗으려는 정치를 가졌다는 것이 그 사회와 나라가 전근대 수준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미 신돈의 당여들은 지금 정치적으로 승부를 걸어왔고, 몽주는 그 시대의 수준에 맞춰 대비해야 마땅할 것이다.
“자, 여기까지 말한 중에 이견이 있으신 분 계신가요? 없다면, 일단 상황은 대략 정리가 되었네요. 이제 대응책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음, 먼저 정해야 할 건 어디다가 전선을 둘 건지겠군요.”
전선? 전선(戰線)을 말하는 건가.
“네, 정치적으로 밀고 당기며 싸울 위치라고나 할까요.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나뉘겠죠. 아예 제주로 가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할 전선이 있겠고, 제주로 가되 고려로 무사히 돌아올 싸움을 할 전선도 있을 것이며, 제주에 눌러 앉되 그 후의 무사함을 보장하기 위한 싸움을 할 전선도 있겠죠. 사실 몽주 씨가 선택해야 할 전선이 뭔지는 대충 보이죠.”
몽주는 자신이 택해야 할 선택지가 무엇인지, 당연히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단 제주로 간다면, 그곳에 터전을 잡고 눌러 앉아야 한다.
그 시대에 제주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만약 재상이 추측한 대로 저들이 신돈으로부터 자신을 떼어 내기 위해 명분마저 만들어 눌러 앉히려 한다면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할 것이다.
제주로 가게 만들어 주는 것 자체는 ‘때땡큐!’인 것이다.
재상과 두신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겠죠. 몽주 씨가 제주로 가서 토벌에 성공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 일단 이겨 내야 하고…… 아, 사실 이미 이건 시작된 거겠죠. 이인임이 별 지원도 안 해 주고 무리한 원정을 책임지게 압박하는 것 자체가 그거죠.”
재상이 토벌에 대한 운을 띄우자 잠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역사에서 목호의 난 때, 최영 장군이 2만 5천여에 이르는 많은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토벌을 일거에 성공하진 못했다.
대체 당시 제주의 반도(?)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기에 최영이 많은 병력으로도 애로를 겪었던 것일까.
“그 시기에 제주도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조선 초기, 그러니까 세종 때 호구 조사로 파악한 인구가 대략 만구천 명 정도였습니다. 고려 시대라면 더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았을 거예요. 변수가 있다면 원나라 출신의 목호들이 얼마나 제주로 이주했었고, 그때까지 얼마나 남아 있느냐일 건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주의 인구가 최영의 병력보다 많았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울 겁니다.”
당시 제주에 대해 조사한 바가 있었던 것인지, 두신이 간단하게 추론해 주었다.
“그럼, 제주 인구를 이만 명이라고 치면, 여자 빼고, 어린아이랑 노인들 빼고, 성인 남성들이 다 대적했다고 해도 오륙천 명 정도라는 거 아니에요? 또, 설마 모든 남자들이 다 싸운 것도 아닐 테니, 실제로는 더 적을 거고요.”
“그렇겠죠. 아마 대략 이삼천 명? 어쨌든 이만 오천 병력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게다가 제주에 수성에 적합한 성벽을 가진 성이 있었다는 기록도 본 적이 없고요. 아마 지형지물의 이점을 얻어 싸운 것 같아요. 정사에 남은 기록은 없지만, 제주도 야사에 전해지는 내용을 따르면, 최영 장군이 어려움을 겪다가 들판에 수수를 심어 키운 후 그 수수에 불을 질러 이겼다고 했거든요.”
재상의 말에 몽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판? 그게 지형지물의 이점인가요? 야전에서 맞서 싸웠다는 거잖아요?”
“그게…… 아무래도 원나라 목호들이 중심이니, 그들이 기마로 잘 싸운 모양이죠. 근데 야사라 진짜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죠. 워낙에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요.”
재상은 몽주의 캐물음에 대답하다가, 답할 거리가 궁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역사에 남은 기록 자체가 드무니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저 확실한 건, 분명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을, 그것도 공격이 수비에 비해 어려운 걸 감안해서 적정 공수(攻守) 비율을 계산하더라도, 수비에 비해 공격 측이 수적으로 월등히 유리함에도, 최영 장군이 고전했다는 점이었다.
몽주로서는 제주 목호 토벌에 대해 좀 더 보수적이고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부분이었다.
역사에서 최영 장군이 이끈 토벌군보다 더 적은 병력, 아마도 질적으로도 더 낮은 군병들을 이끌고 제주로 가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제주에서 목호들을 토벌하는 것 자체에 대한 논의는 그쯤에서 일단락하였다. 정보가 없으니, 논의를 진척시키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 후의 다른 논의 또한 구체적인 계획 수준에 이를 수가 없었다.
대략적인 행동방침은 의견을 나누어 중지를 모을 수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고려의 상황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것은 오로지 몽주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위기는 종종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몽주 씨가 고려에서 처한 상황도 그에 해당하겠죠. 제 생각에 어떤 방침을 세우든 토벌 준비를 이유로 최대한 시간을 벌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토벌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보다 면밀히 마련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겠죠.”
그날 회의를 마치기 전에 두신이 한 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몽주에게 닥친 위기는 분명 기회이기도 했다. 그저 그 기회를 잡을 순간이 너무 급박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 *
고려로 돌아와 아침을 맞이하여 방을 나온 몽주가 처음 본 장면은, 몽둥이를 들고 안뜰로 돌아오는 탁기의 모습이었다.
그 몽둥이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수상한 자들이 어젯밤에도 연신 어슬렁거렸습니다. 하여, 쫓아내느라 다소 손을 썼습니다만, 죽은 자와 크게 다친 자는 없습니다.”
탁기의 보고에 몽주는 잘했노라 치하하였다.
짜증 나고 화가 난다고, 다 때려잡을 수는 없었다. 괜히 시비에 걸려 들 수 있었으니까.
하여 쫓아내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명해 둔 것이었다.
그저 적절한 수준에서 다친 정도라면, 그걸로 트집을 잡는 이가 있다하더라도, 몽주가 가진 직위와 작위로 무마가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몽주는, 아마 밤을 지새우며 자택을 지켰을 탁기에게 수고하였으니 그만 물러나 쉬라고 하였다.
한데, 그가 바로 물러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할 말이 있는 겐가.”
“그렇습니다.”
서둘러 대답하는 걸 보니, 하고픈 말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여, 몽주는 사랑방으로 그를 청하여 마주 앉았다. 그에게 할 말을 하라 말하자, 탁기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꽤 말하기 어려운 일인가 보군. 괜히 불안하게 하지 말고, 그만 말하게.”
“제가 거둔 아이들은, 사실 제 친척들입니다. 다 연배는 비슷하지만, 제 조카이고 사촌이고 팔촌입습죠.”
“그랬던가. 하면, 미리 말해 주지 그랬나. 내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을 터인데.”
그러자 탁기가 당치 않다는 양 이미 충분히 잘 대우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지난날 탁기가 세 어린 청년들을 데려왔을 때, 탁기가 제자를 들인다고 여겨 그들을 위해 따로 거처와 양식을 마련해 주었다.
탁기가 이미 자신이 많은 봉금(俸金)을 받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 모습이 더 기꺼워 기어이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근데, 탁기의 말을 듣고 가벼이 여기다 보니, 어느 순간 그 고백(?)이 의미심장했다.
“혹시 내게 하고픈 말이 자네의 친척과 관련이 있는 겐가?”
“……그렇습니다.”
탁기가 송구한 듯 입을 열었으니, 그의 일족에 대한 청이었다.
그의 일족은 황해도 곡주(谷州 : 곡산군)에 성씨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대략 40호에 300여 명 정도였다.
“저희들이 있는 곳은 몹시 궁벽하여 땅조차 기름지지 못하니, 흉년이 들면 굶기를 밥 먹듯이 할 정도입니다. 하여, 농사만 짓고는 살 수가 없어, 젊은이들 중 일부가 황해도 세족들의 사병이 되어, 그곳에서 얻고 구한 곡식을 씨촌에 보내어 도움이 되게 하였습니다. 한데, 얼마 전에 황해도를 습격한 왜구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것도 슬픈 일이나, 당장 그들이 보내는 양곡이 없어졌으니, 탁가촌이 크게 어려운 지경이 되었지요.”
이어, 탁기가 사병의 대우도 보잘 것이 없어, 고생만 심할 뿐 얻는 것이 별로 없다는 말도 하였고, 그래서 그가 관군으로 출세하려 했었다는 고백도 있었다.
그의 집안이 관군에서 크게 쓰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력을 믿고 투신해 보았던 것이었다.
탁기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들으며 몽주는 명에서 귀국하는 길에 보았던 황해도 일대의 참상을 떠올렸다.
왜구들이라 하나, 해변가나 습격하여 약탈하고 서둘러 도망가는 수준의 왜구가 아니었으니, 수백, 수천의 무리가 내륙 깊숙이 쳐들어와 관군마저 박살 내고 사방 백수십 리 고을을 모조리 털어 버릴 정도였다.
당연히 그들이 고려의 세족들이라고 봐줄 리는 없었으니, 세족들도 죽는 와중에 사병들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몽주는 고개를 끄덕여, 탁가촌(拓家村)의 어려움을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하면, 내게 탁가촌에 양식을 보내 달라 청하려는 것인가.”
당연히 그 부탁을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탁기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 일족을…… 거두어 주십시오.”
“…….”
“거두어만 주신다면, 결코 아깝다 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솔직히 어려운 부탁이었다.
아무리 남양 석가의 재산이 많고, 아내 앵도가 가져온 지참금이 많다고는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쓴 재산도 많고, 묶여 있는 재산도 많았다.
솔직히 다소나마 ‘유동성(流動性)’에 경색이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300여 명의 입을 책임지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가 데려온 아이들은 탁가촌에서도 날래고 용맹하기로 손꼽히는 녀석들이나,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 중에도 그 아이들에 못지않은 이들이 수십에 이릅니다. 다들 제몫 이상을 감당할 자들이지요.”
“탁가촌 전체가 삼백여 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찌 그중에 수십 명이 그처럼 날래고 용맹할 수 있겠는가.”
몽주는 지난번 천마산에서 왜구와 맞서 싸우던 탁기와 그의 제자(?)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탁기가 발군이긴 했으나, 다른 세 청년들도 굉장한 실력을 보여 주었으니, 결코 백에 하나 나올 법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여, 속으로 탁기를 거둔 덕에 그런 뛰어난 무인들을 셋이나 얻을 수 있겠다 싶어 좋아라 했었는데, 300여 명의 성씨촌에서 셋이 아니라 수십이라니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몽주가 쉬이 믿지 않자, 탁기가 마침내 탁가촌의 비밀을 밝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무예가 있다?”
“그렇습니다.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저희 씨족은 이백여 년 전, 북방에서 전공을 크게 떨친 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분께서 후에 정쟁에 휘말리고 밀려 곡주로 귀향하신 후, 그분이 익히고 깨달은 무예를 남기시는 데에 열성을 다하셨으니, 오늘까지 탁가촌에 전해지고, 탁가의 젊은이들이 모두 연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몽주는 겉으로는 담담했으나,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그가 말한 북방에서 전공을 크게 떨친 자는 당연히 척준경일 것이다. 그의 무업이 크게 퍼진 것이 호인들과의 싸움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이자겸의 일당이 되어 출세하고, 국사에 개입했다가 궁을 불태우는 짓까지 하게 되어, 결국 귀향의 처분을 받은 것도 기록된 바였다.
귀향(歸鄕)이란, 단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닌, 차후에 본인은 물론 자손들까지 벼슬을 못하게 하는 본관에 묶어 두는 벌로써, 유배형인 ‘귀양’보다 더 심한 처분이었다.
후에 사면되었고, 척준경 역시 다시 벼슬을 얻기도 했지만, 직후에 그가 사망하면서 그의 일족은 폐가망신한 채 잊혔던 것이다.
그런데 척준경이 귀향 중에 무예를 남겼다고 하니, 분명 그럴싸하였다.
흔히 척준경이 정사(政事)에 수월히 적응하지 못한 것을 두고 무식하다 여기지만, 당시 임금인 인종에 자문(諮問)한 것이 기록에 남은 걸로 보면, 그는 의외로 학문과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그 스스로 익히고 깨우친 것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을 법했고, 남길 능력도 있었을 것이다.
몽주는 고개를 숙인 채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탁기를 보았다.
현대에서 장난스럽지만 결코 장난이 아닌 ‘소드 마스터’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무업(武業)을 인정받는 척준경의 후예.
보고 있자면 척준경의 DNA를 진하게 물려받았다 절로 여겨질 만한 자.
만약 그 유전의 맥이 유독 탁기에게만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척준경이 남긴 무예를 유지하고 단련하는 데에 탁가촌이 힘쓴 것이 사실이라면, 몽주는 어쩌면 대단한 무인들을 수십이나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게다가 탁기가 데려왔던 그 세 청년 또한 꽤 그럴싸한 증거이지 않은가.
잠시 생각 끝에 몽주가 선택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곧 개경에 가야 하니, 자네는 그 길에 황해도로 가서 촌장을 뫼셔 오게.”
“알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탁기는 몽주의 말을 알아듣고, 연신 고마움을 표하였다.
물론, 몽주의 입장에서는, 그가 더 고마웠다.
며칠 후, 몽주는 개경으로 상경하였으니, 그사이 숱한 고민과 구상 끝에 마침내 그가 해야 할 것에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속으로 품은 것이 있었으니, 갈 땐 가더라도 ‘빅 엿’을 먹이고 갈 참이었다.
그게 ‘칼춤’일지, 음모일지는 몽주도 아직 정하진 못했으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고, 그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의 한계는, 현대인 진몽주가 아닌 고려인 석몽린의 한계에 해당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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