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92)
눈을 뜨니 방 안은 아직 어둑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아침 햇살 대신 흐린 하늘 아래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긴 연말이었지.”
12월 26일.
어제가 성탄절이었다. 물론, 몽주의 체감으로는 약 두 달 전이었다.
고려에서는 이제 가을걷이가 시작될 즈음이었으니, 현대에서 일주일이 고려에서 약 두 달인만큼 시간 차이 못지않게 계절도 몽주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지난 꿈속 고려의 일상을 시작할 때는 늦여름 늦더위 때문에 땀을 줄줄 흘렸건만, 그다음 잠들 때는 한파가 몰아친 성탄절 밤이었던 것이다.
“평화롭네.”
창가에 서서, 펑펑 쏟아지는 눈들이 세상 위에 소복하게 쌓이는 걸 보며 중얼거리고 있자니, 간만에 고려에서도 평온한 시절을 보내고 왔음을 깨달았다.
고려에서의 지난 두 달, 아니 그 전 꿈까지 포함해서 거의 네 달은 몽주에게 있어 충분히 평화로웠다.
적어도 몽주의 신상에 위기는 없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평화로웠다.
그 안에도 고려는 수차례나 왜구의 대규모 약탈에 신음하였지만, 적어도 추대현이나 한양부, 혹은 검모포 쪽이 당하지는 않았으니, 충분히 평화로웠다.
신돈의 다른 당여들도 몽주가 제주로 가기로 정해진 이후부터 비웃음을 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이제 집 주변에 수상한 자들이 기웃거리거나 방화, 협박 같은 것도 없어졌다.
제주 토벌 및 이주 문제와 관련해서 수많은 일을 처리하고 여러모로 준비를 해야 했기에 쉴 틈 없이 바쁘게 보냈고, 특히 최근 한두 달 사이에는 검모포를 연신 들락거려야 했지만, 적어도 몸이 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차암 평화로웠네. 어쩌다 평화로움의 기준이 이렇게 낮아졌지.”
……라고 툴툴거리듯 중얼거렸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고려에서 몽주가 보낸 4년에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만든 것 아닌가.
실소를 흘리다 창문에 하얀 김이 서리게 만든 몽주는 몸을 돌려 침대 옆 탁자로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메신저에 문자를 입력하였다.
-내일 제가 출국하는 관계로, 이번 주는 오늘 회의하는 거 아시죠?
* * *
“아, 최무선 실망이네.”
“후후.”
재상의 평가에 몽주가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최무선이라고 해도 폭죽을 보고 당장 질려포(蒺藜砲)나 주화(走火)를 떠올릴 수는 없지. 난 그가 송대 무기도감에서 죽장군(竹將軍)을 본 걸 떠올린 것만 해도 대단해 보인다. 그도 이제야 막 화약을 무기화하는 것에 눈을 뜬 상태잖아.”
이어진 두신의 평가이자 최무선에 대한 두둔에 몽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게다가 아무래도 폭발 사고 이후에 의기소침해진 탓도 있을 거예요. 화약 쪽으로 개선할 생각을 못하니, 멀리 보낼 쪽으로만 연구했고, 그것도 화약에 의한 분사 추진력이 아닌 노를 이용하려 한 거고요.”
신돈과의 담판 이후, 검모포에 들렸을 때, 몽주는 화극에게 ‘폭죽(爆竹)’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가 화극에게 알린 폭죽은 지극히 초기적인 수류탄으로써, 화약을 채운 죽통에 심지를 박고, 땅에 묻거나 손으로 던져 적의 인마를 놀래고 살상하는 무기였다.
아마 현대인이라면, 특히 군 복무 경험이 있는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개선할 여지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수류탄의 기본 원리를 알린 셈이었다.
몽주는 화극에게 ‘폭죽’을 개량할 방법, 살상력을 높이고 사거리를 늘릴 방책을 연구해 보라고 청하였고, 실제로 한양부로 가자마자 모아 두었던 재료로 몸소 화약을 서둘러 만들어, 화극에게 보냈다.
사실 내심 기대하긴 했었다.
화극이이라면 살상력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후에 개발했을 질려포 수준까지, 그리고 투사력은, 화차(火車)를 이용한 신기전(神機箭)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로 그가 후에 개발했을 오룡전(五龍箭)과 주화(走火)의 조합 수준에까지 개량하거나, 적어도 개량할 단초를 얻을 수는 있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하나, 집안 재산 정리 문제로 한동안 신경 쓰지 못하다가 지난 꿈에서 약 두 달이 지나 검모포에 갔을 때, 화극이 선보인 것은 고작 ‘폭죽노(弩)’였다.
그러니까 폭죽을 날리는 쇠뇌였으니, 흔히 석궁이라고 불리는 노를 개조하여 폭죽을 사로(射路)에 놓아 발사할 수 있게 하고, 폭죽에 화살대를 꽂아 탄도를 안정시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래도 생각보다 성능이 나쁘진 않았다. 바람 없는 날에는 100보 가까이 날아갈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 정도 성능을 얻기 위해 노를 크게 만들다 보니 안 그래도 활에 비해 많이 무거운 노가 더 무거워졌다. 일인이 홀로 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화극이 2인이나 3인이 한 조가 되어 쏘거나 폭죽노 아래 수레를 달아 쓰는 것이 어떠하냐고 구상을 제안하였는데, 그걸 들은 몽주로선 그 생각이 화차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사거리를 늘이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여 그나마 기특한(?) 면이 있긴 했지만, ‘폭죽’ 자체의 위력을 늘리는 방책은 아예 없었다.
고민했음에도 방법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죽장군을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랬고…….
“어허허, 좀 무서워서 말일세.”
큰 눈을 끔뻑이며 그렇게 말한 화극의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폭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여전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사고로 조카사위(?)가 죽을 뻔했으니, 몽주의 장인이자 그의 친우를 하늘로 보낸 죄책감을 가진 그에게는 더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었다면, 역사에서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장이 되어 군기(軍器)와 화기(火器)를 개발하면서 모르긴 몰라도 폭발 사고를 경험했을 그가 이처럼 두려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계속 최무선에게만 맡겨 둘 겁니까?”
“글쎄요.”
몽주는 다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자 두신이 무슨 고민인지 짐작한다는 듯이 물었다.
“새어 나갈 것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네. 아무래도 제주로 가는 관군들 중 대부분은 고려로 돌아갈 테니까요. 너무 인상이 깊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 있겠죠.”
만약 폭죽을 개선하여 위력을 크게 하고, 그것으로 전세를 얻는 것에 크게 이바지한다면, 관군의 입을 통해 고려에 소문이 퍼질 것이고, 당연히 도당에서 폭죽에 대해 알아내려 할 것이다.
몽주가 제주로 갔다고 해도, 궁벽한 제주의 상황상 한동안은 본토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 폭죽의 제조에 대해 알려 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고려는 역사보다 일찍 화약 무기에 눈을 뜰 수도 있었다.
왜구에 신음하는 고려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몽주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수도 없었다.
고려의 정국이 어떻게 변하여 언제 몽주를 적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험을 해 봤는데, 기대치가 너무 낮아서 그랬는지 제법 쓸모가 있어 보이더군요. 소리도 쾅! 하고 엄청 커서 말이 놀라 자빠질 만하고, 죽통의 파편도 날카롭게 찢어져서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면 부상을 입힐 수 있겠더라고요.”
폭죽에 대해 몽주가 긍정적인 평가를 하자, 재상과 두신도 화약 무기의 태동기에 폭발의 위력보단 폭음 자체가 대단한 효과를 보였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실험은 어디서 했어요?”
“무인도요. 어선들이 나가는 데에 섞여서 나가서 몇 번 실험하고 낚시나 하며 시간 보내다가 어선들이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죠.”
“그래도 소리는 들렸을 텐데요.”
“뭐, 멀리서 청천벽력이라도 떨어졌나 보다 생각했다더군요.”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낚시 도구 사이에 봇짐 하나 더 있는 정도였으니까요. 계속 나가면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할 필요가 없죠.”
고려 시대와 현대를 동시에 살 수 있다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지식 중 큰 부분이 최적화된 데이터였다.
과학과 기술이 낮은 시대에 무언가를 최적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무차별적인 실험만이 능사였는데, 현대에서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 단번에 최적 상태에 이를 수 있으니, 굳이 수많은 실험을 경험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시대를 월등히 넘어서는 기술이 필요한 걸 개발하는 상황이라면 말이 조금 다르겠지만, 적어도 ‘폭죽’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죽통 안에 철편을 넣어 살상력을 늘린 폭죽도 만들어 보기는 했어요. 보통 폭죽으로는 부족한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틈을 봐서 섞어 쓰면 들통 나지 않겠죠? 후후.”
폭죽에 대한 이야기를 일단락한 세 사람은 다시 이런저런 논의를 잇다가, 남양 석가의 재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토지 일천오십이 결과 산 전체를 처분했어요. 역시 신돈 백이 좋더군요.”
남양 석가가 대량의 토지를 매매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승냥이 같은 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신돈의 당여들이 대리인을 보내 득달같이 달려들었는데, 몽주의 일가가 제주로 갈 것임을 아는 그들은 상황을 이용해서 헐값에 땅을 사들일 속셈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팔지 않으면 그만이라 여겼지만, 그들이 권세를 이용해서 다른 ‘구매 희망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매매에 응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잠시 골치가 아팠는데, 참다못해 신돈에게 몽주가 고하자, 일거에 해결되었다.
신돈은 남양 석가의 땅을 사들이려 한 당여들에게 명하여, 그 땅을 정당한 값에 매입하게 한 것이었다.
덕분에 헐값이 아니라면 안 사고 말았을 당여들마저도 의무적으로 땅을 비싸게 사들여야 했다.
“다른 재산들 중 가져가기 어려운 것들은 거의 다 처분했으니, 이제 남양 석가는 홀가분하게 제주로 떠날 준비가 된 셈이죠.”
몽주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몽린의 부모를 떠올렸다. 그들이 허락하긴 했으나, 역시나 미련이 많았는지 토지를 처분할 때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곤 했었다. 특히 어머니 주이는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물론, 몽주는 그때마다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설득해야 했으니, 그로서도 진이 빠지고 감정이 소모될 일이었다.
몽주가 고려의 부모를 떠올리다가 문득 두신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걸 느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아직도 신기해서요. 신돈, 최무선, 정몽주, 주원장…… 역사 속 위인들을 몽주 씨가 직접 만났다는 게 신기할 수밖에 없고 또…….”
“또 여전히 의심스럽기도 하다고요?”
“그런 면도 남아 있긴 하죠.”
“제가 내일 런던으로 가는 이유를 생각해도요?”
몽주가 묻자, 두신이 실소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황이나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과 합리의 문제니까요.”
“이해합니다. 그래도 믿어 주세요.”
그쯤에서 재상이 끼어들어 물었다.
“근데, 런던 쪽 분위기는 어때요?”
“나쁘진 않다더군요.”
몽주는 씨익 웃어 주었다.
* * *
런던의 분위기, 즉 크리스티 본사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고가 경매에 익숙한 그들의 시야에서도, 몽주의 경매 물품 수준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하여 경매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준비하던 연말 경매 이벤트의 규모를 키우면서, 주요 고객들 중 불참하려는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참석을 권하였으니, 방지영이 전하기를 이참에 소더비에 다소 밀린 위상을 되찾을 속셈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 크리스티 본사 내의 열기 덕에 몽주가 런던에 도착하여 회사 측이 제공한 특급 호텔에서 하루 쉬고 본사를 방문했을 때, 대표 이사를 포함한 이사단 전체의 마중과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몽주는 경매 진행을 담당하는 책임 이사로부터 경매 진행에 대해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는데, 크리스티 측은 몽주가 내놓은 ‘물건’들의 경매를 아예 특별 섹션으로 꾸밀 참이었고, 메인 경매품들, 즉 세 시첩들의 경우에는 그 경매품의 가치를 설명할 영상물까지 따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번에 참가할 고객들이라면 그 시첩들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각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재확인시켜 주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저녁에는 따로 조촐한(?) 만찬을 열어, 크리스티 임원들과 함께 어울렸으니, 몽주는 괜히 들떠 상류층 인사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만찬 중에 책임 이사로부터 썩 맘에 드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억 7천만 파운드?”
몽주는 지영이 통역해 주기도 전에 알아듣고 되물었다.
“네, 한화로 거의 삼천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죠.”
“음, 그러니까 기대치가 그 정도라는 거죠?”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다시 물으니, 방지영이 잠시 책임이사와 대화를 나눈 후에 답해 주었다.
“본사에 경매 예상 금액을 산정하는 팀이 있다네요. 거기서 참여 고객들의 여유 재산과 경매 의지, 그리고 경매품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등을 수치화해서 계산한대요. 근데 그간 누적된 예상치와 실제결과 사이에 오차가 좀 커요. 십오 퍼센트래요.”
“……잘은 모르겠지만, 오차가 크다는 건 예상치보다 많이 높을 수도 있다는 거겠죠?”
“그렇기도 하죠. 호호, 기대가 많나 봐요?”
“안 그럴 수 있나요.”
몽주는 지영을 보며 씨익 웃은 뒤, 이어서 책임 이사를 향해서도 웃어 주었다. 그도 활짝 웃음을 보여 주었다.
몽주의 입장에선 오차만큼 차이가 나도 상관없었다. 플러스 15퍼센트면 3천억 원이 훌쩍 넘으니 쾌재하면 되고, 마이너스 15퍼센트라고 해도 2천 5백억 원은 될 테니 그게 어딘가.
어느 쪽이든 몽주가 보수적으로 기대한 금액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건배합시다, 건배.”
기분이 좋아진 몽주가 건배를 청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샴페인 잔을 들었다.
“자, 따라 해 보세요. 건. 배. 건배. 컨베이 말고, 건배.”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건배를 숙달시킨 몽주가 선창하였다.
“성공적인 경매를 위하여, 건배!”
“컨베이!”
그날 만찬이 끝나기 전까지 몽주는 세 번이나 더 건배하였다.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취한 탓인 듯했다.
경매일은 30일이었기에 하루가 남았지만, 몽주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세 개의 범선 건조 회사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각각 스웨덴과 미국, 그리고 네덜란드의 회사들로 모두 런던에서 순서대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런던에 있는 만큼 영국의 범선 건조 회사와도 컨택하면 좋았을 텐데 적당한 회사가 없었다.
적당한 회사가 없다는 건 영국의 범선 건조 회사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몽주의 범선이 그만큼 특이하고, 계약 내용도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범선 건조 회사들이 거부한 경우가 많았다.
중대형 범선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유럽과 미국의 이십여 회사들에 몽주가 사업 제안서를 돌렸지만, 반응이 온 게 그 세 회사뿐이었던 것이다.
일단 동서양의 ‘클래식’한 범선들을 조합한다는 점에서 많이 떨어져 나갔고, 설계부터 건조 일체를 의뢰하는 게 아니라, 일부 업무에 대한 수주, 즉 설계 검토와 항해 시뮬레이션을 포함한 항행 능력 검사, 그리고 항해 시스템 설치 쪽에 편중한 일이라는 점에서 또 많이 떨어져 나갔으니, 그쪽 회사들 입장에서는 회사 역량을 소비하는 것에 비해 돈벌이가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처음 건조할 범선 외에 차후에 건조할 대형 범선, 아무래도 서양 범선에 가까울 그 배는 건조까지 의뢰할 예정이라고 사업 제안서에 넣긴 했지만, 단지 ‘예정’만으로는 부족했다.
하기야 선박의 수주와 건조라는 게 단지 고객이 주문한다고 회사가 넙죽 받아 시행하는 일일 순 없었다. 회사 측에서도 고객이 차후에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거나 인도를 거부할 가능성은 없는지를 살피는데, 몽주는 그와 관련하여 아직 충분한 신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세 회사라도 연락이 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각 회사마다 두 시간씩 릴레이 면담을 한 후, 몽주는 한 회사의 소개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질란트-판 담 세일보트 빌더(Zeeland-Van Dam Sailboat Builder).’
네덜란드 회사로, 면담으로 판단하였을 때 가장 적극적인 회사였다.
그리고 사업 대금에 대해 대략 협상을 해 봐도 가장 합리적인 안을 제시한 회사이기도 했다.
“문제는 대형 범선을 제조해 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건데…….”
질란트-판 담 사는 레저 및 레이싱용 범선에 중점을 둔 회사로 주력 선박의 사이즈는 20미터 안팎에 불과했다.
정말 작은 범선을 건조하는 회사들, 그러니까 포켓 크루져(Pocket cruiser)나 스포츠보트(Sportsboat) 혹은 위드서퍼(Wind Surfer) 수준의 미니 선박이 중심이 된 제조사는 애초에 제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질란트-판 담 사는 몽주가 사업 제안을 한 회사들 중 가장 작은 범선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 회사가 몽주의 사업 제안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질란트-판 담 사는 회사가 성장하면서 점점 대형 고급 요트와 세일보트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몽주의 사업을 수주하여 실적을 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몽주의 첫 범선이야 실제 건조 실적은 아니지만, 추후에 대형 범선은 충분히 사업 실적으로 남을 수 있으니, 대형 요트와 범선 사업으로 진출하는 데 내세울 만한 이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회사들의 제안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요? 비싸다고는 하지만, 이제 몽주 씨에게 그리 부담될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렇긴 한데, 절대적인 결격 사유가 있잖아요.”
방지영이 커피를 가져다주며 말한 대로 스웨덴과 미국의 회사들도 좀 비싸게 굴기는 했지만, 몽주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 두 회사들은 대형 범선을 다수 건조한 경험이 있어, 건조 능력에 대해 의심할 바도 없었다. 아니, 의심할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보스턴 티 포트 트로피 대회(최고속 범선 대회)에서 입상한 대형 범선들을 다수 제작한 곳들이었다.
하나 몽주는 그들과 계약할 수 없었다.
“참관인들을 거부한 거요?”
“네, 그건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든요.”
스웨덴과 미국의 회사들과 틀어진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대형 범선 건조 때, 한국인 몇 명이 건조 과정을 참관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두 회사는 극구 거부한 것이었다.
혹시 기술을 얻어 한국에서 회사를 세울까 우려하는 것 같아서, 몽주는 자신이 절대 선박 건조 회사를 세우지 않겠다고 문서로 약속하겠노라 하였지만, 그래도 통하지 않았다.
몽주를 간판으로 내세워서 배후에서 기술을 빼돌리려는 자, 내지는 세력을 의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해할 만한 의심이기는 하지만, 몽주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로서 명성이 높은 한국 출신인 게 걸림돌이 되었네요.”
“그러게요. 아, 진짜 영리 사업할 거 아닌데…….”
진의야 따로 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학술 문화적인 차원에서만 건조할 생각인 몽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근데 꼭 그 조건이 필요해요? 어차피 배 두 척이나 있고, 그것도 한 척은 되게 크게 만들려는 모양이던데, 또 배를 만들 것도 아니잖아요?”
“만들 건데요.”
“또요? 왜요?”
“많이 타고 다니려고요.”
“…….”
방지영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냥 취미 삼아(?) 타려고 대형 범선을 건조하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 따로 또 배를 만들려고 한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나, 몽주에게는 필요한 일이었다. 유럽 회사와 손을 잡고 만들 두 척은 물론, 바당보름을 견학시키고 공부시켜서 고려에서 몽주가 추구할 ‘완성형’ 대형 범선, 즉 동서양 조합의 대형 범선을 시범 건조해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몽주는 다시 질란트-판 담 사의 프로필을 보았다.
아직 결정할 시간적 여유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 회사와 손을 잡아야 할 듯했다.
그들은 5인의 참관인들을 허락했으니까.
그때, 문득 방지영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 몽주를 향해 입모양을 뻐끔거렸는데, 크리스티의 책임 이사가 한 전화인 모양이었다.
잠시 영어로 대화를 한 끝에 송화기 부분을 손으로 막은 지영이 몽주에게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태클이 들어온 모양이에요.”
“……?”
“중국 정부에서 직접 인수하겠다고 제시해 왔나 봐요. 그 시첩들 말이에요.”
몽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중국산 고미술품이 중국에게 넘어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에요?”
다시 지영이 전화로 물은 후 대답해 주었고, 그 대답을 들은 몽주의 얼굴이 애매모호하게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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