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94)
야거리 한 척이 포구에 닿자마자 뱃전에서 대기 중이던 한 사람이 급히 뛰어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몹시도 급한 용무가 있는 듯 그는 달리다가 부딪쳐 쓰러진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서둘러 닿은 곳은 성주청(星主廳)이었다.
“고작 1만이라 했더냐?”
“그렇사옵니다. 게다가 기마는 사백 기에 불과하고 궁수도 칠백에 그쳤으며, 나머지는 그야말로 잡졸 중에 잡졸이라 하였사옵니다.”
성주 고실개(高實開)의 물음에 수하가 공손하게 대답하니, 성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허, 이런…… 어찌 고려는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인가. 이곳의 호인들이 비록 3천여에 불과하다곤 하나, 그들 모두가 기마로 싸움에 능하거늘…….”
고 성주는 한탄해 마지못했으니, 목호의 실력이라면 고려의 잡졸을 상대로 일당십은 능히 이겨 낼 만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네가 지금에야 도착한 것을 보면, 며칠 전에야 나주에 토벌군이 도착했다는 의미일 터. 이는 매우 늦은 속도라 할 수 있으니, 혹여 토벌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특별한 문제는 없는 듯했습니다. 다만, 토벌군을 이끄는 상원수 임견미라는 자가 늑장을 부리는 모양이었습니다.”
고 성주의 수하는 고려에서 제주 목호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후, 몰래 나주(羅州)로 나가 토벌군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주는 예성강 하구에서 출발한 고려군이 제주를 가기 전에 반드시 들려 마지막 점검을 할 곳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수하가 토벌군이 출병하였다는 소식을 전한 뒤 열흘째야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이는 고려군이 예성강 하구에서 나주까지 온 시간 또한 그만큼이라는 의미였다.
“정확히 8일째 신시(申時 : 오후 3-5시)가 다 지난 때에야 나주에 도착했사옵니다. 시기가 북풍이 부는 때임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 것입니다. 게다가…….”
수하가 문득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잇지 않자, 고 성주가 얼른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고려군은 나주에서 사흘째 머물고 있는데, 제가 먼저 나주를 떠나기 전에도 좀처럼 출병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알아보았느냐.”
성주의 물음에 수하가 무어라 대답하니, 그의 표정이 한결 더 어두워졌다.
“큰일이로구나. 고려군이 목호를 토벌한다기에 부디 범 같은 장수가 많은 병사들을 휘몰아서 일거에 성공해 내길 기원하였건만, 지금 상황은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성주는 탄식을 쉬이 멈추지 못한 채, 수하를 물러나게 하였다.
수하가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성주의 아들이 뵙기를 청해 왔다.
“들어오너라.”
고실개 성주의 장남 고신걸(高臣傑)은 들어오자마자 먼저 아버지의 안색부터 살폈다.
고령의 아버지가 걱정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그의 안색을 통해 전해진 소식이 낭보인지 비보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나쁜 소식이었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봐야겠구나. 토벌군을 이끄는 장수가 형편없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군병의 수가 잡졸 1만에 불과하다고 하니, 지리에 익숙하고 말에 타 싸우는 데에 능숙한 호인들을 그들이 이길 가능성이 없지 않겠느냐.”
아비의 말을 듣고 있으니, 고신걸의 표정도 어둑해졌다. 아니, 어둑한 것 넘어 분기가 피어올랐다.
“고려는 진정 이곳 제주를 포기한 것이란 말입니까. 이래서야 탐라의 이름을 버리고, 몸을 숙인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하기야, 애초에 임견미가 군을 이끈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기대를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자는 본성이 사갈과 같은 자로, 위로 아첨을 일삼고 아래로는 학대하기를 즐긴다 하였습니다. 그런 자가 설령 거병을 이끌고 목호를 토벌한다고 해도, 이곳 백성들을 위무할 리가 있겠습니까.”
“…….”
아들의 험한 말이 귀에 쏟아져 들어왔으나, 고실개는 눈을 감은 채 반응하지 않았다.
사실 속내로는 아들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고 싶었으나, 성주로서 제주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그로서는 한낱 사랑방 안의 독대일지라도 함부로 감정을 따를 수 없었다.
고봉례의 격언(激言)은 계속 이어졌다.
“아버님, 고려의 군이 목호를 무찌를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차라리 목호를 도와 그들로부터 작은 이익이라도 얻어 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목호들이 지금 자신만만해하고는 있으나, 상황을 아직 모르니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도와주는 대신, 세비를 낮추게 하고 양(梁) 가와 부(夫) 가를 해방시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압니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진정한 성주로서의…….”
“아들아…….”
문득 고 성주가 말문을 열어 아들의 격언을 막았다.
“내가 일전에 만약 고려가 토벌군을 보낸다면 그들을 맞이하여 목호에 대항해 함께 싸워야 하는 이유를 말했던 걸 벌써 잊은 것이냐? 너 또한 그때 내 말이 옳다 하지 않았더냐.”
“하오나…… 지금 고려의 행태가 너무나 무도하지 않습니까?”
고신걸의 대꾸에 울분이 진하게 묻어 있었고, 그의 눈가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탐라를 이끌어 온 우리 가문을 박대하는 건 그렇다 치지요. 하나 탐라의 백성들을 해민(海民)이라 하여 업신여기고, 원의 잔당을 몰아내 달라 청함에도 일절 대꾸도 없던 것을 떠올리면, 고려의 왕과 관리들은 제주를 결코 그들과 같다 여기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고려의 군병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소자 또한 이치에 맞다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이 변하여 이곳 탐라만으로는 홀로 서기 어려움이 분명하니까요. 그렇기에 오래전에 조상들께서 신라에 입조하고 고려에 신복하신 것이지요. 하나, 이 세상이 이치만을 따져서 살 곳이 아닌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리 치이나, 저리 치이나, 어차피 괴롭고 힘든 것은 매한가지이니, 차라리 이 맘속 울분이라도 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울분이 어찌 네게만 있겠느냐. 네 나이 또한 적지 않은데 어찌 감정에 휘둘리려 하느냐. 네가 그리하면 너뿐만이 아니라 이곳 백성들 모두가 크게 당하게 될 수 있음을 정녕 모르더냐.”
성주의 타이름에도 아들은 쉬이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탐라가 홀로 설 수 없다 함은 맞으나, 그것은 이곳 탐라만으로 서고자 할 때의 말일 것입니다. 저 명나라의 홍무제는 비렁뱅이에서 우뚝 서서 천자에 올랐고, 가까운 고려의 태조 또한 많고 많은 호족들 중에 났으니,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고려가 혼란에 빠져 나라가 나라 같지 않으니, 이것이 어쩌면 탐라에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네 말에 빠진 부분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목호가 저리 강성하게 버티고 있는 이상 네 말은 그저 망상에 불과하지 않느냐.”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어허…….”
그는 아들 신걸이 명확히 답하지 못하며 얼버무리는 걸 보며 탄식하였다.
그것은 아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에 대한 탄식 이전에, 제주가 처한 작금의 상황에 대한 탄식이었다.
이치를 따져 살 길을 도모하려 하여도 상황이 돕지 않고, 차라리 울분이라도 토해 보려 하더라도, 그럴 능력조차 되지 않았음이니, 한탄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일은 가문과 제주의 앞날을 결정지을 것이니 절대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만 물러가라.”
고신걸이 물러난 후, 성주 홀로 방에 앉아 고민에 빠지니, 그 고민의 그림자는 좀처럼 그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군선이 제주 명월포에 나타날 때까지도.
* * *
‘모두들 무사해야 할 터인데…… 특히 석 현남은 그러했으면 좋겠군.’
‘전장에서는 때로 예측불변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 아니겠소.’
이인임은 손가락을 두드리며 출병식 때 영공과 나눴던 대화의 말미를 떠올렸다.
그날, 금상이 술에 취한 양 횡설수설하며, 특별히 뽑은 100명의 군병들과 장수들 앞에서 한참이나 떠드는 중에 영공이 문득 그에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목호 토벌군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에 영공이 석 현남을 언급하며 그를 향해 던진 시선은 분명 의미심장하였다.
몇 번이나 석 현남의 안전을 강조하는 듯했으니, 자신에게 석 현남을 두고 엄한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아니, 단순한 암시나 해석의 여지가 아니었다.
‘임견미 상원수에게 시중께서 특별히 부탁을 해 주시오.’
이미 임견미에게 석 현남이 전사하도록 유도하라는 비명을 내린 바 있던 이인임을 충분히 곤란하게 만들 만한, 직접적인 요구도 있었던 것이다.
“흐음, 어찌 영공이 마음을 돌렸는가.”
문득 중얼거리니, 이인임은 그의 손가락이 보료를 툭툭 치고, 눈을 감은 채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언가 석연찮아 고심 중일 때의 버릇이었다.
신돈에게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즉 신돈의 다른 당여들과 이인임이 몽주를 축출하겠노라 고한 바는 없으나, 정황상 신돈도 자신들의 의도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벌군을 구성하고 인적 편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신돈이 그걸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내심 신돈도 석 현남을 포기했다 싶었는데, 출병하는 날에 그렇게 석 현남을 감싸려 하니, 이인임으로서도 속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신돈이 마음을 바꾼 듯하였으니, 문제는 대체 신돈이 어째서 변심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석 현남이라는 자가 눈치가 좋고 간사한 면모가 있어, 자신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자, 신돈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렸을 수도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신돈이 그의 애원을 쉬이 가납할 리 없었을 것이니, 그건 석 현남을 축출하려고 중지를 모은 이들 중에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계를 함께 꾸미고 있는 자신이 석 현남을 제거하는 데에 한몫을 하고 있는 이상, 신돈은 어지간한 명분으로는 자신에게 석 현남을 구원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이는 자신과 영공 사이가 수직적 위계가 아니기 때문이었으니, 그런 부탁을 하기 위해서는 신돈은 물론, 자신도 수긍할 만한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라면, 이인임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대계를 위해서 신돈의 요구를 받아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이건 신돈이 이인임 자신은 물론, 자신의 당여들과 더불어 신돈의 다른 당여들마저 배척하는 모양새나 다름없기 때문이었으니, 특히 이인임의 위신을 크게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대계를 앞두고 ‘연합’에 큰 균열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려 한다면, 신돈에게 그런 것들을 무마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때, 기다리고 있던 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현이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속히 들라고 명하자, 급한 발걸음 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기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상당히 급하게 발을 놀린 듯,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상태였다.
“수시중, 황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황망한 일?”
그 기현이 황망한 일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신돈이 가지고 있을 ‘명분’에 대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알아보게 했으니까.
“석 현남이 그의 가문에 남은 토지를 영공 저하께 바치려는 모양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쉬이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묻자, 기현이 숨을 크게 쉬어 고른 후, 차근히 설명하였다.
“1천 결의 토지를 영공 저하께 맡겼다?”
“그러합니다. 완전히 드린 것이 아니라, 맡긴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것을 두고 석 현남이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 듯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영공께서도 석 현남이 제주로 간 후에 일이 어찌 돌아갈 줄 짐작하셨을 터이니, 어차피 석 현남의 토지 중 상당 부분을 취하실 수 있을 거라는 걸 아셨을 것이 아닌가.”
“상당 부분이 아닌 전부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신이 사정을 알고 고민을 해 보니, 만약 석 현남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영공께 맡긴다고 약조하였다면, 영공 저하께서도 석 현남이 살아 있길 바라시지 않겠습니까.”
“…….”
기현의 추정이 제법 이치에 닿았다. 만약 자신이 석 현남이고, 무엇을 버려서라도 연명코자 한다면, 그런 방도를 택할 것을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인인은 신돈이 가졌을 명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허어, 영공께서는 괜히 땅을 빼앗았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으시겠구나. 그걸 내세워 부탁을 해 온다면, 만약 거부할 때 오히려 내 쪽에서 대계를 앞두고 균열을 초래하게 만드는 셈이니……. 석 현남, 그자가 제법 머리를 쓰지 않았는가.”
“저희도 설마하니, 그 많은 토지를 버릴 작정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인임도 과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가문의 토지 중 절반을, 신돈을 내세워 강매하듯 다른 당여들에게 팔아치울 때도 석 현남이 토지에 미련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 바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은 1천 결의 토지를 신돈에게 맡겨…… 아니, 실상은 그냥 줘 버리는 선택을 할 줄은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대토지를 소유한 일반적인 세가에서라면, 그럴 경우 차라리 세가의 일원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걸 택하지, 결코 토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영공과 석 현남 사이의 거래에 든 내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드러나고 짐작한 것만으로도 이인임은 자신이 신돈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임 장군에게 내린 명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고민을 하는 이인임에게 기현이 참지 못하고 물어 오니,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사정이 변하였으니, 사람을 보내 새로이 명을 내려야겠지.”
“이미 늦었으면 어찌 합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임 장군에게 석 현남을 제주에서 전투 중에 죽게 하라 하였지, 가는 길에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네. 게다가 일부러 진군 속도를 늦추라 하였으니, 아직 제주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
기현은 영문을 모를 표정을 지었다. 수시중이 토벌군의 속도를 늦게 한 것은 그도 몰랐던 것이다.
“늦게 가야 저들도 소식을 듣고 만반의 준비를 갖출 시간을 벌지 않겠나. 그래야 저 한 줌밖에 안 되는 반도들과의 전투에서도 격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 와중에 석 현남이 죽을 일도 일어나지 않겠는가.”
“아……! 과연 현명하십니다.”
물론, 이제는 필요 없어진 현명함이었다.
그쯤에서 이인임은 명령장를 작성한다는 이유로 기현을 돌려보내었다.
하나, 기현을 돌려보낸 후에도 이인임은 바로 영장을 쓰는 대신 잠시 고민하였으니, 석 현남의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제 목숨을 구하려고 고려 내 가문의 토지를 모두 버린다는 건 억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한데, 그 정도 결단을 할 줄 아는 자라면, 자신이 제주로 갔을 때 다시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또한 알았을 것이니, 도무지 그것을 각오한 연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저 목숨만 잇는다면 족한 것인가. 그 궁벽한 섬에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만으로 낫다 여기는 것인가.’
이인임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하는 수 없지. 차선을 택할 수밖에. 어쩌면 차라리 봉신(封臣)의 전례로 삼아 훗날에 도움이 되게 함이 마땅하겠지.”
이인임은 가늠할 수 없는 석 현남의 속에 대한 고민은 이내 떨쳐 내었다.
사실 약간의 께름칙함이 남아 있긴 했으나, 제주에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을 리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석 현남을 죽이지는 못하게 되었으나, 자신이 석 현남에게 큰 적의를 느끼지 않은 데다가 그저 신돈의 다른 당여들에게 영향력을 스며들게 하려 한 일에 불과했으니,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아니, 그를 제주에 묶어 두게만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신돈이 석 현남의 토지를 맡은 것은, 석 현남을 죽이지 못하게는 만들 수 있겠지만, 석 현남이 제주에서 고려로 돌아오는 것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네놈이 무슨 의도로 제주로 가려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고려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이인임은 머나먼 곳의 누군가를 향해 마른 웃음을 흘려보냈다.
* * *
“대체 상원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도통 알 수가 없소.”
“…….”
술잔을 기울이며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 앞에서 몽주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불만에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어차피 임견미가 어떤 자인지는 알고 있었던 바, 작금의 행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행태란 일단 몹시도 늑장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예성강의 수군진에서 나주까지 오는 데에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도중에 제법 크다 싶은 포구에는 어김없이 들렸던 것이다.
특히, 나주에서는 마지막 정비라는 명분으로 닷새나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그렇게 늑장을 부린 것에 모자라, 임견미는 들리는 곳곳에서 향응을 받고 뇌물을 챙기느라 바빴다.
그중 나주에서는 주변 고을에까지 파발을 보내 군량과 군자금을 빌미로 양곡과 금은을 뜯어내었으니, 아무리 정벌군이 비상시에 그 지방의 물자를 징발할 수 있다고는 하나, 가는 길에서도 그런 작태를 보이는 건 해도 해도 너무 하다는 평이 대세였다.
“수시중께서 어찌 저런 이리와 같은 자를 가까이 두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내 이번 싸움이 끝나 도당에 돌아가거든 임 장군의 행태와 그를 상원수에 앉힌 수시중을 고발할 작정이오.”
“…….”
다시 흥분한 목소리가 들리니, 몽주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선실에 마주 앉아 술을 들이켜는 그자는 바로 염흥방(廉興邦)이기 때문이었다.
역사에서라면 몇 년 안에 임견미의 사위가 되어 그와 이인임의 말이라면 똥물도 삼킬 것처럼 복종하는 인물이 지금은 그 둘을 고발하겠노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아직은 염흥방이 신진사대부들 중 하나로서, 유학을 통해 배운 것을 따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였고, 정몽주 등과 어울리기를 즐기던 때였다.
몽주는 문득 역사 속 ‘목호의 난’을 토벌할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았다.
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최영이 이끈 그 토벌군과 지금 임견미가 이끄는 토벌군은 격이 달라도 무척 달랐다.
당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영이 총사령관이 되어 휘하에 숱한 전란을 경험한 백전의 용사들을 상원수로 임명한 그 토벌군과 고작 임견미 따위가 상원수가 되어 세 명의 무명(無名) 장수들을 부원수로 삼아 편성된 지금의 토벌군.
그건 2만 5천과 1만이라는 병력의 차이보다도 더 큰 격차였다.
실제로 최영의 토벌군에도 임견미가 동참하였으나, 그때 그가 부원수들 중 일인에 불과했었던 걸 떠올리면 금번 토벌대는 지난 역사 속의 목호의 난 토벌군에 비해 격이 무척 떨어지는 셈이었다.
다만, 두 토벌대 사이에 공히 같은 인물이 비슷한 직위를 가지고 임하였으니, 그가 바로 밀직제학(密直提學) 염흥방이었다.
그는 도병마사(都兵馬使)의 부사(副使)를 겸임하여 토벌군에 합류, 군사(軍事)의 감찰과 보고를 담당하고 있었으니, 이는 최영의 토벌군에서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러고 보면 염흥방의 처지가 몽주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직에 있으나, 문관 출신으로서 토벌군을 따라온 데다 맡은 임무가 임무인 만큼, 임견미를 비롯한 다른 무관들과는 서먹하다 못해 경계하는 사이였다.
당연히 토벌군 내에 외톨이 신세가 되었고, 그 또한 말붙일 곳이 없어, 결국 몽주에게로 와 한탄을 털어 내는 것이었다.
몽주 자신이야 신돈의 다른 당여들과 이인임의 심계에 걸려 외톨이 신세이자, 일종의 토사구팽을 당한 셈인 데다, 이곳 토벌대에서도 염흥방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천대받는 입장이었다.
정3품의 밀직제학인 데다 정4품의 도병마사 부사인 염흥방에 비하자면, 정5품의 한양별시 판관에 불과한 몽주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제주현남이고, 토벌군을 편성하는 데에 많은 공이 있어 대놓고 무시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사병 1천을 따로 데리고 있는 덕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번 토벌에 대한 역사에 무어라 기록될까.’
애매한 일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종군(從軍)이었으니, 문자 그대로 군을 따라간 것이었다.
하나, 토벌군에서의 직위는 없었다. 있지도 않은 참모나 군사(軍使)가 아닌 것은 물론, 그의 사병에 관한 일을 제외한 군사(軍事)에 관여할 권리조차 없었다.
이는, 유독 이번 토벌군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 시기의 고려군 내에 일반적인 일이었다.
종군한 문관의 임무와 지위는 본인의 정치력과 총사령관과의 관계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으니, 몽주의 경우에는 정치력도 미미하지만, 임견미가 몽주를 같잖게 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였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나쁘지마는 않았다. 지위가 애매하다는 건 임견미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위치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임견미가 자신에게 무어라도 시키고자 한다면, 그건 명령이 아닌 부탁이어야 했고, 군사에 위해가 생기지 않는 이상 몽주는 무슨 일을 하든 임견미의 처분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제발 임 장군이 이번에는 어디 들르지 말고 곧장 제주에 닿게 하였으면 좋겠군. 물결이 잔잔하다고는 하나, 뱃길이 길어지는 건 탐탁지 않으니 말이오.”
한참을 분개하던 염흥방이 어느새 분기를 가라앉힌 듯했다.
하나, 그의 염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도중에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이틀을 보낸 후에야 다시 제주로 출발하였고, 또 이틀의 뱃길 끝에 그제야 제주 명월포(明月浦) 근방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계산해 보면, 그때가 11월 27일이었으니, 예성강 수군진을 떠난 지 보름이 넘은 날이었다.
여름철 역풍에 가까운 바람을 받으며 오는 시간과 비슷했으니, 순풍의 겨울철임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늦은 것이었다.
고려군이 명월포가 멀리 보이는 곳에 일단 정선하였을 때, 문득 임견미 상원수가 몽주를 불렀다.
하여 나룻배를 타고 상원수의 배로 건너가니, 그가 웃는 낯으로 정중히 청해 왔다.
“제주의 백성들이 목호와 결탁하였을 수도 있는 바, 목호와 싸우기 전에 제주의 성주와 왕자를 설득하여 목호를 돕지 않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대는 제주현남으로서 명분이 있고, 지난 날 많은 공을 세워 그 능력이 입증된 바, 그대가 먼저 뭍으로 가서 제주의 성주와 왕자를 구슬려 아군의 안전과 전황의 개선을 도모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임견미가 말을 마치자 그와 함께 있던 부원수들이 눈을 부라리며 거절하지 말라 압박하였다.
몽주는 속으로 실소하였다.
‘나를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거로군. 후후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