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97)
* * *
고작 네 시진 만이었다.
제주현남이 성주청을 떠나고, 그가 남겨 둔 스무 명 남짓한 사병들의 가벼운 감시 속에 장차 일이 어찌 돌아갈지를 고민한 시간이 그쯤이었으니, 고민의 무게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급히 흐른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고실개 성주는 밤이 깊어 가던 중에 제주현남이 한 무리의 사병들을 보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뭐라도 잊고 안 가져간 것이 있는 줄 알았다.
하나, 그들은 제주현남이 목호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목성(牧城), 즉 항파두리성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제주현남의 명에 따라 자신을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일 것이다.’
무슨 흉계를 꾸미느라 자신을 밖으로 데려갈 요량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안 가려고 버텼지만, 잠시 후 아들 신걸이 다가와 밖에서 돌고 있는 소문을 전하니, 고 성주의 발걸음이 절로 성주청 밖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성주청의 부서진 대문 앞에 서자마자 목호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성주청 앞에 현 내 백성들이 모여 즐겁게 떠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즐거운 소란스러움은 이내 환호로 바뀌었으니, 현민들이 성주를 보고는 ‘천세, 천세!’ 손을 들어 함성을 내지른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성주가 목호를 무찌른 일에 기여하였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이제 저희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탄탄한 음성이 들려 성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제주현남이 보낸 자들의 우두머리였다.
과연 그의 표정은 물론, 그의 뒤로 있는 여남은 명의 사병들의 얼굴에 뿌듯함과 자부심이 서려 있었으니, 고 성주는 더 이상 그 기운을 두고 거짓이라 여기기 어려웠다.
“이미 많이 늦었으니, 서둘러 가시지요. 현남께서 성주를 몹시 기다리십니다.”
“……알겠소.”
고 성주는 가복들이 가져온 말에 올라타, 환호하는 현민들 사이로, 제주현남의 사병들과 함께 항파두리성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급히 가는 터라, 고령의 고 성주가 말 위에서 힘겨워하였으나, 그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해 몸이 힘든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목호를 쳐 없애면, 내게 복종하겠는가.’
‘제주는 한이 많은 곳이더군. 그 한을 풀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게.’
머릿속 상념 중에 유독 그 두 말이 떠돌았으니, 둘 다 제주현남이 한 말이었다.
앞선 것은 그가 목호를 무찌르겠노라 장담한 후에 던진 것이고, 뒤의 것은 사병들을 이끌고 성주청을 떠나기 직전에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고 성주 역시 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였었다.
‘목호를 없앤다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소.’
‘제주의 한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뭍의 사람이 어찌 제주의 한을 푼다 할 수 있겠소?’
앞선 대답은, 진심이자 동시에 현남의 오만함에 기름을 끼얹어 그가 목호에게 크게 당하기를 기대한 바이기도 하였고, 뒤의 대답은 입을 함부로 놀리는 제주현남에 대한, 겨우 억누른 노여움 끝에 넌지시 그를 탓한 말이었다.
현남은 웃었다.
대답을 들을 때마다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그건 그가 가진 자신감의 표현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듯한 비웃음이기도 하였다.
불쾌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였다. 젊디젊은 자의 섣부른 패기와는 다르게 느껴졌었다.
하나, 그래도 세상의 벽을 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 벽이 다름 아닌 야만스러운 목호의 창과 검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의 호기는 채 피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사그라질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 성주는 흔들리는 말 위에서 문득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젊은이의 패기와 호기가 성공을 만나면, 곧잘 타협을 모르는 강압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가 뱉었던 말도 있으니, 고 성주는 제주현남이 자신에게 무엇을 강요할지 벌써부터 두려워지고 있었다.
반 시진가량 말을 달리다 걷다를 반복한 끝에 항파두리성에 닿았다. 내성으로 들어가자 고 성주의 눈에 기이한 장면이 들어왔다.
이미 외성에서부터 시체가 쌓여 있는 걸 본 데다, 성 안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는데, 성안에 들어와 그 소리를 내는 자를 볼 수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목호 일인이 두 구의 시신들 사이에서 넋을 놓고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광기 어린 곡소리를 앞에 두고, 제주현남이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며 불을 든 측근들 사이에서 태연히 문서를 뒤적거리고 있었으니, 그의 귀에는 저 절절한 곡성(哭聲)이 들리지 않는 건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 오셨소?”
문득 제주현남이 자신을 발견하여 알은척을 하니, 고 성주는 얼결에 크게 읍하곤 공손하게 다가갔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렇소. 사정이 있어, 늦은 밤에라도 모셔 와야 했소. 암튼 오시느라 수고하였소.”
“무슨 사정이 있으신 건지…….”
“아, 그게…… 난 저들이 목호라 하고 원의 백성들이라기에 당연히 중원의 말을 할 줄 안다 여겼는데, 이제 와 살피니 말이 통하지 않았소. 아마 몽고의 말과 여기 제주의 말만 아는 모양이더군. 그러니 통역을 도와주시오.”
“통역을…… 말입니까?”
“그렇소. 하기 어려운 일이오?”
태연히 묻는 제주현남을 보니, 고 성주는 오는 내내 긴장했던 게 맥없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제주현남이 그를 보면 당장에 신복하라 강요부터 할 것이라 여겼는데, 극히 실무적인 일로 불렀다고 하니, 괜히 가슴 졸였는가 싶었던 것이다.
“아, 물론 통역의 일로만 성주를 부른 건 아니오. 우리는 해야 할 말이 많지 않소?”
“…….”
빙긋 웃는 제주현남의 얼굴에 천진한 느낌마저 묻어 있었으나, 고 성주는 잠시 풀어졌던 긴장감을 다시 느껴야 했다.
그 천진함 속에 묻은 날카로움을 느낀 탓이다.
아마 오늘 밤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 밤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일단 저자에게 말을 전해 주시오.”
“무어라 하리까.”
“좀 조용히 하라 하시오. 죽일까 하던 걸 살려 두었더니, 시끄러워서 일을 보기 어려울 지경이오. 만약 소리를 그치지 않는다면 저자를 죽이는 건 물론, 처자식마저 목을 벨 것이라고 하시오. 그러면 조용해지겠지.”
“……알겠습니다.”
고 성주가 대답을 하고 울부짖다 지쳐 흐느끼고 있던 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직후에 크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칠 뻔하였다.
그자가 앞에 두고 있는 두 구의 시체.
스쳐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시신의 상태가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한 구는 그나마 목만 부러져 있을 뿐 사지가 붙어 있었지만, 다른 한 구는 큰 칼로 몇 번이나 조각 낸 것처럼 너덜너덜한 상태로, 신체의 조각들을 대충 위치에 맞춰 널어놓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토악질이 나오는 걸 참고, 애써 시신에 시선이 가지 않게 노력하면서, 폐인의 모습으로 있는 자를 가만히 보니, 그가 목호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인 초고독불화임을 깨달았다.
그걸 알자, 고 성주가 얼결에 다시 시선을 시신들로 향하였으니, 몸이 그나마 붙어 있는 것이 관음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얼굴과 머리마저 깨져, 도저히 보는 것만으로는 쉽게 정체를 알기 어려운 살덩이들은 석질리필사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 목호의 세 우두머리들은, 고 성주가 언제나 속으로 저주하던 자들이었는데, 막상 지금 참혹한 꼴로 변한 것을 보니, 고소하기에 앞서 불쌍함을 먼저 느꼈다.
그만큼이나 그들이 죽은 모습이 참혹했던 것이다.
“이보오, 초고독불화.”
불렀으나, 초고독불화는 흐어흐어 숨넘어가듯 흐느낄 뿐이었다.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도 죽을 것이라 하오. 게다가 그대의 처자식도 함께 죽일 것이라고 하니, 그만 소리 내는 걸 멈추시오.”
“……!”
초고독불화의 눈매가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이자, 고 성주가 급히, 그리고 나직이 말하였다.
“화를 삭이시오. 이미 알겠지만, 저자는 그대들의 목숨에 아무런 미련이 없소. 분기를 터뜨려 속이 시원할 수는 있겠으나, 그 후에 더 큰 원통함을 얻을 것이니, 지금 당장 진정하시오.”
“끄으……!”
입술을 깨무는 초고독불화의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렸고,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고통의 신음도 함께 새어 나왔다.
손발이 뒤로 묶여 겨우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그자가 할 수 있는, 마음의 고통에 대한 유일한 표현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때, 문득 제주현남이 남녀 호위 두 사람을 양측에 끼고 다가왔다.
“잘 설득하시는군. 하시는 김에 이 말도 전해 주시오. 이따 다시 부를 것이니, 그때 이자도 살고, 목호의 일족들도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거라고. 그러니 그때까지는 입 닥치고 찌그러져 있으라고.”
고 성주가 제주현남의 말을 전하니, 그도 그렇고, 초고독불화도 그렇고, 의아한 시선을 제주현남에게 던져야 했다.
대체 무슨 기회를 준다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 형제들의 죽음에 넋을 놓다 못해 폐인의 모습이 되었던 초고독불화마저도, 슬픔을 잊고 그 말의 의미를 애원하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하나, 제주현남은 부연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려 멀어졌다.
* * *
전투 자체는 삽시간에 끝나, 오후 늦게 시작하였음에도 노을이 지기 전에 항파두리성을 점령하였다.
물론, 전역(戰役) 자체가 마무리되는 건 그보다 오래 걸렸고, 아직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목호에 딸린 일족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가두는 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이미 잡기는 했으나, 1만 안팎에 이르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가두는 일은 한참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일이 쉬웠던 건 항파두리성의 노예들 덕이었다. 정확히 노예라 불리는 자들은 아니었으나, 노예나 다름없었으니, 그들 대부분이 제주의 양(梁)가와 부(夫)가의 일족들이었다.
목호들이 떼로 죽어 나가는 걸 본 그들은 즉시 반기를 들어, 성벽을 넘은 탁가 무인들에게 성안의 지리를 알렸고, 덕분에 목호의 일족들 중 일부가 성 밖으로 도주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성의 북면에 석굴이 있고, 그곳에도 목호의 일족들 중 일부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알려, 몽주의 사병들이 그곳으로 달려가 그들의 신변을 확보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운이 좋았다. 그건 단지 양가, 부가가 안에서 내응을 해 준 것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전투 자체가 행운이었다. 그것도 굉장한 행운.
솔직히 폭죽만으로 목호들을 완전히 꺾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었다면, 돈 들여서 목호들의 기마를 막기 위해 그 많은 준비들, 그러니까 튼튼한 방패를 마련하고, 보군이 기마를 상대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창(槍)과 극(戟)에 밀려난 모(矛)와 과(戈)를 따로 준비하여 사병들이 그에 익숙해지게 훈련시키는 등의 일에 그렇게 공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폭죽의 위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형태 자체야 조선시대에 나올 소질려포통(小疾藜砲筒)의 ‘다운그레이드’ 판이었지만, 화약은 오히려 순정하여 위력이 더한 것이었고, 마름쇠 대신 넣은 철편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하나, 그렇다고 폭죽 자체의 위력이 목호들을 몰살시킨 건 결코 아니었다.
목호 인마(人馬)의 시체를 수습하여 대략 살피니, 말이나 기수가 철편이나 화염에 직접 당한 건 삼분지 일에 불과하였다.
나머지는 앞선 기마가 쓰러진 것에 부딪쳐 나뒹굴거나 폭음과 불길에 놀란 말이 난동을 부려 기수가 낙마하여 당한 것이었다.
목호들이 일체 기마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제주마가 폭음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었다면, 그리고 요격하길 피하지 않았다는 역사의 기록으로 예상한 바이기는 하나, 고려군을 경시하여 쐐기꼴로 돌진, 일거에 진형을 찢어 버리려 하지 않았다면, 목호들이 그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몽주의 군이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몽주는 태연히 마치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표정과 태도를 관리하였다.
성을 점령한 후,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사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제주의 양가와 부가 일족들마저 나서, 함부로 만세를 외칠 때도 자신만만한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화답해 주었다.
다만, 본래 목호의 우두머리들이 쓰던 몽고식 천막(게르, 파오)을 차지하여 그 안에 홀로 남았을 때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 속에 감춰져 있던 식은땀을 털어 내야 했다.
몽주는 그래도 그렇게 긴장감을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행복했었다.
목호들의 무지와 방심, 그리고 준비한 것 이상의 능력을 보인 사병들, 특히 폭노대와 폭죽의 합이 맞아 떨어진 덕에 피해 없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덕이었다.
“나리, 고 성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막 안에서 지난 시간을 돌이키고 있던 몽주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그를 들이게 하였다.
앞서, 성 안팎을 정리하는 데에 통역이 필요한 곳에서 일을 돕게 하였는데, 그 일들을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고 성주의 표정은 한결 주눅 들어 있었다.
목호를 물리친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안을 둘러보며 그 전과(戰果)의 참혹함을 천천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들어와 몽주의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문득 물어 왔다.
“목호들의 처자식들을 어찌 처리하실 요량이십니까. 혹 다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임견미 상원수가 나중에 처분하셔야 마땅한 것이오.”
몽주가 답하니, 고 성주가 마른 입술을 비비며 안타까워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현남께서 저들이 살 수 있도록 임견미 장군에게 부탁해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살리고 싶소?”
“목호들이야 야만의 것들이나, 그 처들은 대개 제주의 백성들이고, 모두 강제로 혼인한 이들입니다. 단지 목호의 처라는 이유만으로 죽게 된다면, 그들이 원통함은 물론, 그들의 아비이고 어미이며 형제인 제주의 백성들도 분하게 여길 것입니다.”
고 성주는 임견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목호들의 일족들도 죽은 목숨이라 여겼기에 몽주에게 그리 부탁한 것이었다.
“딱한 일이기도 하겠군. 하나, 임견미 상원수가 내 말을 들어줄지는 나도 모를 일이오.”
“그야 그렇겠지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령의 고 성주가 얼굴에 한가득 그늘이 지니 몽주는 그가 더 딱해 보였다.
하나, 그에 대해 동정을 표하는 대신, 몽주는 고 성주를 조금 더 압박하였다.
“한데, 내게 할 말이 그뿐이오? 다른 할 말이 많을 듯하오만.”
“어찌 없겠습니까.”
고 성주는 옅은 한숨과 함께 상심 어린 표정을 지우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말하였듯, 현남께서 목호들을 물리치셨으니, 저희가 신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현남께서 가지신 힘을 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 고려가 아닌 현남께 신복하라는 의미는 쉬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목호들을 무찌르셨으니, 조만간 뭍으로 돌아가실 현남께 저희들이 신복한다 하여 무슨 의미가…….”
“난 제주에 남을 것이오.”
“……?”
“설명하기 복잡하나, 그리될 것이오. 나의 일가도 아마 지금쯤 바다를 건너고 있을 것이고.”
“그, 그렇습니까.”
“왜 맘에 안 드시오?”
몽주가 비소(誹笑)를 띠며 묻자, 고 성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땅에 큰 힘을 가지신 분께서 자리 잡아 저희 호족들과 백성들을 이끌어 주신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꼭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그 말, 믿어 보겠소.”
“다만…….”
고 성주가 문득 몽주를 직시하며 말을 늘리니, 그의 얼굴에 애간장이 녹는 심정이 묻어 있었다.
“현남께서 단지 제주를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것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신복(信服)을 넘어 심복(心服;心悅誠服 : 심열성복)하라시는 것 같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이곳 제주의 한을 어찌 풀려고 하시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 물음에 몽주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가 그리 물어 올 것을 예견하였으니, 이미 목호를 치러 떠나기 전에 넌지시 그에 대해 언급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제주 토박이라면 충분히 마음에 담을 만한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한(恨)이 무엇이오?”
“…….”
“분함, 원통함, 억울함. 드러나는 감정의 응어리는 그런 것들이나, 진실로 한을 품게 만드는 기저는 결국 배신당한 정(情)이 아니겠소.”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어려울 것 없소. 그대들이 품은 마음이니까. 탐라였던 시절에 전조에 입조하였고, 이후, 고려에 복속하여, 고려인으로서 정을 붙이고 살려 하였으나, 신라든 고려든 그대들을 진정한 백성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천시하고 착취할 뿐이었소. 당대에 이르러 기록을 살피니, 지난날 고려에서 온 관원들 중 제대로 된 이가 드물 지경이더군. 그 학정이 심하여 그대들이 고변하여 개선해 줄 것을 청하여도 고려의 도당은 이를 가납하지 않았고, 계속 수탈할 자들만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제주에서 연이어 민란이 일어났던 건 단지 이곳 백성들의 습성이 거친 탓은 아닐 것이오. 이것이 배반당한 정이니, 고려에 정을 주었으나 고려에 배신당한 제주의 백성들이 고려에 한을 품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오.”
“…….”
그쯤에 이르러 고 성주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아직 제주의 한을 어찌 풀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으나, 그저 제주의 심정을 헤아려 주는 현남의 말만으로도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면, 그 한을 어찌 풀려 하십니까.”
“간단한 것 아니겠소. 배반당한 정은 정을 얻는 것으로만 해결될 터이니, 고려가 제주에 정을 품게 해야 할 것이오. 물론, 말만 간단한 것이지. 하나, 나는 그리할 자신이 있고,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하오.”
“혹여 이 땅을 기반으로 고려를 도모하려 하십니까.”
고 성주가 불길한 표정으로 물으니, 이 젊은이가 패기와 호기가 지나쳐 제주를 기반으로 역신이 되려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웠던 탓이었다.
“고려를 도모한다라…… 내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하나, 이 땅의 호족으로서 할 말은 아니나, 이곳은 고려에 있어 말의 생산이 아니면 그다지 쓸모가 없으니, 고려가 굳이 제주를 아끼고 정을 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고 성주는 ‘만약 제주에서 고려의 왕이 나지 않는다면.’이라는 뒷말을 삼켰다. 그가 보기에 고려의 제주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 위한 방법은 오직 그뿐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를 내가 만들 것이오. 고려를 도모하는 걸 넘어, 고려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갈 것이고, 고려가 제주에 매달리게 만들 것이라는 말이오.”
“……?”
“별로 기대가 안 되는 모양이군.”
“그것이 아니라…….”
아니라면서도 딱히 둘러댈 말이 없는 지 고 성주는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 마음으로 복종하리라 기대하지 않소. 하나, 적어도 신복하긴 해야 할 것이니, 만약 반기를 든다면, 내가 아무리 제주의 백성들 전부를 위무할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런 자들은 서슴없이 베어 버릴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고 성주는 몸을 더욱 숙였다. 제주현남의 말마따나, 아직 마음으로 따를 수는 없지만, 이 제주를 지배할 무력을 갖춘 자가 적어도 제주의 백성을 학대할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 그 짐작이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문득 천막 밖에서 다시 호위사병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두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몽주에게 크게 절을 하더니, 문득 고 성주를 보고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고 성주 역시 그들을 보곤 당황하는 표정이었고, 이내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버렸다.
몽주는 그런 모습들을 눈여겨보며 다시 비소를 띠었다.
“제주의 한을 어찌 풀지는 차차 두고 행해야 할 것이나, 당장에 제주에 남아 있는 문제부터 풀어야 하지 않겠소. 하여 이들을 불렀으니, 고 성주는 너무 당황하지 마시오.”
“……!”
그 말에, 그리고 현남의 입가에 걸린 웃음에, 고 성주는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양가와 부가의 가주들을 이 자리에 대령한 것이 의도한 것이라면, 제주현남이 고 성주는 물론 고씨 일가마저 역도(逆徒)로 몰 수도 있음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고실개 성주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으니, 그 순간 제주현남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몽주에게 그날 밤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았으니, 제주의 삼성(三姓)들 간에 남은 문제를 살펴야 했고, 이어 초고독불화를 도로 불러 긴요한 이야기도 나눠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날이 밝았고, 그제야 고려군이 명월포에 닿았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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