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98)
“실로 대단하시오. 정말이지, 소식을 듣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소.”
염흥방이 연신 감탄하니, 그는 고려군이 명월포에 닿자마자 먼저 출발하여 항파두리성에 도착한 지 이미 한 시진이 넘은 상태였다.
성내를 살피고, 사로잡은 반도들과 외성 한쪽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았으니, 몽주가 지난밤에 보낸 사병들이 전한 소식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고,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운이 많이 따랐습니다. 목호들이 크게 방심한 덕이지요.”
“허어, 어찌 운이고 적의 방심이기만 하겠소. 운도 노력하는 자를 따르고, 방심 또한 대비하지 않으면 무소용이 아니겠소. 이게 다 현남의 능력이라 할 것이오.”
염흥방은 연신 몽주를 추켜세우며, 자신이 장계에 그 공을 일일이 써 올리겠노라 하곤, 후에 더욱 출세하면 잘 좀 봐 달라 농을 던지며 친근함까지 보였다.
“한데, 상원수가 몹시 늦는군요.”
“에이, 그 사람 말은 하지도 마시오. 지난밤에 현남께서 목호들을 도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자가 보인 작태를 짐작이나 하시겠소? 현남을 두고 욕을 한 사발은 해 대더니, 술이나 퍼마시며 분을 풀더이다. 명색이 토벌군을 이끄는 장군이라면, 뒤늦게라도 이곳으로 달려와 전장을 정리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것인데,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술로 좁디좁은 속이나 푸는 모습이라니…… 에잉!”
“뭐, 본의는 아니나, 임견미 장군이 그런 심정인 것도 이해할 법합니다.”
“어허, 어찌 그리 사람 좋은 소리만 하시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따 임견미 장군이 왔을 때 조심하시오. 그자가 또 무슨 트집을 잡아…… 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제야 기어 들어오는구려.”
멀리서 상원수 임견미 행차랍시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게 들리고 있었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웠으니, 어지간히 늑장을 부린 모양이었다.
몽주는 염흥방과 함께 나가 내성 입구에서 임견미가 오는 걸 맞이하였는데, 그는 치장한 가마에 삐딱하게 타고 있었다.
“저 꼬락서니하곤…….”
“…….”
그가 무관인 건 둘째치고, 비록 이곳이 이제는 적진이랄 수는 없으나, 엄연히 전장이었음에도 이런 식으로 행차할 줄은 몽주도 짐작하지 못한 바였다.
게다가 내성 문에 몽주가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올렸음에도, 가마는 멈추지도 않고 그를 그냥 지나쳤고, 그 위에 앉은 임견미 또한 눈가를 실룩거리며 몽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몽주는 염흥방과 함께 가마의 뒤를 따라갔으니, 임견미는 성내 중앙에서야 가마에서 내려 곧바로 가장 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 천막을 임견미에게 내어 줄 생각으로 안을 비우고 정리하긴 했으나, 공을 세운 몽주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외면한 것은 예를 벗어나도 많이 벗어난 모습이었다.
하여, 비단 염흥방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상원수의 행차를 지켜보던 몽주의 사병들이 모두 사나운 눈빛으로 임견미가 들어간 천막을 노려보았으니, 자연히 주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사실 몽주로선, 임견미가 강짜를 부릴 거라 예상했던 바였기에, 어이없는 마음과는 별개로 겉으로는 그러려니 하였는데, 이어 고려군들이 항파두리 성 내외에 진을 치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잡졸들로 이루어져 군기가 형편없고, 병졸들 중 적잖은 자들이 범죄자나 다름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성 내외에서 저지르는 행태는 결코 그 습성이 형편없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던 탓이다.
아무렇게나 대충 진을 세우고 난 후, 성 안팎을 무리 지어 다니며, 애써 정리한 성 안을 어지럽히지 않나, 포로로 가둔 목호의 처나 여식들은 물론이고, 엄연히 양인인 양가와 부가의 여인들을 희롱하려 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보다 못해 몽주가 고려 장수들에게 고하여 그들을 처벌하라 청하였으나, 그들은 대충 흘려듣고 말 뿐이니, 병졸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방종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사주한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성 안이 난장판이 되어가길 한 시진쯤을 애써 참고 있었는데, 그제야 임견미가 몽주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기다리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니, 문득 앵도가 나직이 말하였다.
“조심하세요.”
“……계속 걱정해 주시오. 여차하면 탁기와 더불어 뛰어들어도 좋소.”
실소와 함께 솔직한 심정을 말하곤, 몽주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천막의 덮개가 닫히자마자 무언가가 날아들더니, 몽주의 발 앞에 떨어지며 쨍그랑 깨졌다.
보니, 자기로 만든 잔이 박살 난 것이었고, 날아온 방향은 호상(胡牀)에 대충 몸을 기울여 앉은 임견미가 있는 쪽이었다.
앞에 술병이 놓여 있고 잔은 없었으니, 누가 던진 것인지는 뻔하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천막 안에 술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임견미의 얼굴도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참, 인간 한번 일관되네. 아주 평면적이야.’
몽주는 문득 언젠가 탁기가 앵도를 두고 말하길, 여인이라 죽여도 될 만한 자를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라 한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현대인의 입장에서 사람을 두고 죽여도 될 만하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에 다소 위화감을 느꼈었는데, 오늘 문득 그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물론, 위화감은 그때만큼 크지 않았다. 그건 고려의 삶에 그만큼 익숙해진 탓이기도 했고 또…….
“이보오, 현남. 자네 곁을 내내 따르던 추녀가 그 유명한 흑나찰인 겐가? 자네 부인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허허, 자네는 참 비위도 좋구먼. 어찌 그렇게 검은 여인과 한 침방을 쓸 수 있는 겐가? 게다가 보아하니, 야들야들한 살결의 감촉도 없을 듯하던데…….”
“……대신 탱탱하지요.”
부인을 두고 희롱하는 말에도 몽주가 발끈함 없이 오히려 농으로 대꾸하자, 임견미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게다가 자네는 어찌 여인을 전장에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심지어 침소에 붙여 두는 것도 아니고, 여인의 호위를 받다니, 그래서야 어디 사내라 하겠는가.”
“……저도 가끔 창피하기도 합니다.”
“그런 걸 알면, 데리고 다니질 말지 그러나. 아니면 그 하물을 떼고 차라리 환관이 되게. 그러면 아무도 흉보지 않을 터이니.”
몽주는 이번에는 작게나마 실소하고 말았다. 유치한 수작이 너무 눈에 뻔히 보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속으로 ‘성능이 좋은 그걸’ 왜 떼어 내냐고 한마디 중얼거리긴 하였다.
어쨌든 웃기는 짓에 웃음을 보이니, 그것을 본 임견미가 크게 호통을 쳤다.
“감히 내 말에 웃음을 보이는 것인가!”
“송구합니다. 코에 먼지가 들어가 몹시 가려운 터라…….”
몽주가 과장되게 코를 비비적대었다.
“어디서 거짓을 고하는 게냐! 지금 네놈이 목호를 함부로 쳐 놓고 오만한 마음으로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
임견미가 분한 마음에 얼핏 진실 된 속내를 비추니, 몽주는 슬쩍 그쪽으로 말을 돌렸다.
“오해십니다. 저는 그저 상원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웃기는 소리! 나는 이곳 토호들을 포섭하라 하였지, 목호를 치라 하지 않았다!”
“이곳의 목호가 전란을 원치 않는 듯하기에 목호에게 항복을 권하였던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포섭이 아니겠습니까?”
“망발이다! 누가 멋대로 항복을 권하라 하였더냐!”
“하여, 수군에 일러 장군께 고하지 않았습니까.”
“뭣이!”
“모르긴 몰라도 장군께서 소식을 들은 뒤 무려 두세 시진은 지난 후에야 항복을 권하였으니, 장군께서 원치 않으셨다면 얼마든지 그만두라 명을 전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그렇기에 장군께서도 바라시는 바라 여겨, 저도 항복을 권하였으나, 목호들이 성을 나와 저를 치려고 해서 그것을 막았던 것뿐입니다. 또, 그러다 보니 의외로 전황이 좋아 역전(逆戰)에 나섰고, 운이 하늘에 닿아 목호를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장군께서 격노할 일이라 하겠습니까?”
“…….”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임견미는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길 잠시 후, 겨우 입을 열어 한다는 말은 우습지도 않은 트집이었다.
“네 이놈! 네놈이 어디로 가서 항복을 권하는지 나에게 알렸더냐! 명을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게 하여 놓고, 무엇이 어째……?!”
“예? 하면, 장군께서는 그간 명월포에 탐보선(探報船)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이곳 제주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이곳 항파두리성을 목성(牧城)이라 부르며 목호들의 본거지가 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나 붙잡아 하문하시면 금세 아실 수 있는 일이건만 어찌…….”
“…….”
임견미가 입을 뗐다 닫았다 하며 반박하지 못하였고, 눈알을 굴리며 천막 안 한쪽에 작은 상을 펴놓고, 자리 잡아 붓을 놀리고 있는 주서(主書)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껏 제주로 진군 중에 한 짓은 물론이고, 조금 전 자신을 두고 비아냥댈 때는 상관도 안 하더니, 이제 와 전적(戰績)의 책임을 두고 말에서 밀리니, 주서가 그에 대해 기록할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라. 네 변명을 듣자고 부른 것이 아니다. 잔말 말고, 어찌 목호들을 이겨 낸 것인지 고하기나 하라.”
더는 트집 잡기도 어려웠는지, 조금 풀이 죽은 표정으로 임견미가 설명을 요구하자, 몽주는 담담히 그리고 소상히 전황에 대해 말하였다.
혹여 정말 운이 하늘에 닿아 전승을 거둔 것일까 싶었고, 만약 그러하다면 폄하할 요량이었던 모양인데, 정작 몽주의 이야기를 들으니, 임견미는 오히려 그것이 철저한 준비에 의한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몹시 못마땅한 일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그나마 자신이 후에 책잡히지 않을 만한 건수가 있음도 알 수 있었다.
“폭죽이라면 과거 연등회나 팔관회에서 보던 그것이더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폭죽이 한쪽을 터놓아 불꽃이 하늘로 피어오르게 한 것이라면, 제가 쓴 폭죽은 사방이 막혀 있어, 그 폭발이 죽통을 박살 내며 큰 소음과 함께 죽편(竹片)을 날리게 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호…….”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몽주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몽주의 설명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 폭죽이란 것을 다 쓴 것이냐.”
“많이 쓰긴 했으나, 조금 남은 것이 있습니다.”
“하면, 그것을 내게 보여 주시게.”
말투도 조금 달라졌으니, 본 후에는 달라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줄 생각이었다.
몽주는 고개를 숙여 입가에 뜨는 비소를 감추며 대답하였다.
“상원수께서 궁금히 여기실 거라 여겨, 미리 시연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저 겉으로만 보실 게 아니라, 그 폭발을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오, 그럼, 그러세.”
“……그러시지요.”
배알도 없이 넙죽 권유를 받아들이는 임견미를 보며 몽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째서 이인임 같은 고단수가 임견미 같은 자를 가장 가까운 수족으로 부리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긴, 오히려 임견미 같은 자가 더 믿을 만할 것이다. 먹이만 주면 자존심도, 염치도 모르는 자였으니, 괜히 짐작하기 어려운 마음속 충심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물론, 함께 가는 그 길이 무척 쉽고 편한 길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 * *
밤이 깊은 가운데, 항파두리성의 한쪽 성벽에 붙여 만든 감옥에도 고요함이 가득하였다.
감옥에 갇힌 자들이 잠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애초에 감옥이 크지 않고, 그 안에 갇힌 자들도 별로 없는 탓이 컸다.
목호의 일족들은 이동이 제한되고 감시당하고 있긴 하지만, 성내 북면 절반에 해당하는 곳에 수용소를 지어 그곳에 있었으니, 따로 감옥에 갇힌 자들은 목호들 중 살아남은 몇 사람과 목호의 일족들 중 행패가 심했다고 고변된 십여 명뿐이었다.
초고독불화도 감옥에 있었는데, 다른 목호 셋과 더불어 한 옥사에 있었다.
낮 동안 머리를 감싸 쥐며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그는 밤이 되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 상태였다.
하필 낮에 그 빌어먹을 폭음이 몇 번이나 들려와, 지난 날 성 앞 들판에서 당한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사위(四圍)가 조용해지자 그 고통스러운 회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맑은 정신은 이내 그에게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였으니, 지난 새벽에 형제들을 도륙한 고려 귀족의 제안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을 하나 죽여 준다면 너와 너의 가족은 물론, 다른 목호들 대부분도 살려 주겠다.’
‘실패하여 붙잡힌다 해도 혼자 죽어라. 만약 입을 뻥끗하면 다 죽는다. 물론, 도망치거나 딴 맘을 먹는다면, 그 역시도 다 죽을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내일 밤에 다시 알려 주겠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죽은 형제들에게 미안하고, 그 형제들을 몰살시킨 자가 원망스럽다 하나, 그 스스로의 목숨과 일족 전체의 생명이 달린 이상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제안을 한 자는 분명 죽이려 마음먹는다면 다 죽이고도 남을 자였다.
자박, 자박.
문득 발걸음 소리들이 들리자, 초고독불화는 긴장한 채 그 걸음의 주인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한 명의 건장한 사내와 왜소한 늙은이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등불도 없이 감옥 근처에 떨어져 있는 횃불의 미미한 불빛을 등지고 나타난 그들이나, 초고독불화는 그들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같은 옥사에 있는, 살아남은 목호 셋도 잠이 깬 듯, 옥에 다가온 자들이 누군지 수군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이보게, 이리 가까이 오게.”
역시나 예상했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고 성주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곁에 선 건장한 사내는 아마도 그 고려 귀족을 따르던 그 무인인 게 틀림없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는가.”
초고독불화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러자 고 성주가 고려 무인에게 무어라 말하였고, 그 무인이 고 성주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고 성주는 그걸 받아 감옥 안 초고독불화의 등 뒤쪽 바닥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그것은 단도, 아니 단도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작은 날붙이였다. 하나, 그 날만큼은 무척 예리하게 갈려 있어 어지간한 것은 자를 만하였다.
예컨대, 포승(捕繩) 같은…….
“내 말을 잘 듣게. 이따 축시(밤 1-3시)가 되면, 이곳을 지키는 초병들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네. 자네는 그 전에 그걸로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탈출하게. 그 후에는 새별오름 목마장 중 원일(元一) 축사 근처에 숨어 있게. 기다리다보면 이자가 찾아갈 것이니, 그때 모습을 드러내게.”
“고 성주님, 하면 그 후에는 어찌해야 합니까.”
초고독불화가 서둘러 묻자, 고 성주가 고려 무인에게 다시 무어라 말하였고, 그 무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 성주가 말해 줘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 무인이 허락한 듯하였다.
고 성주는 이어 그가 탈출하면, 전공을 노린 고려군이 출병하여 새별오름 쪽으로 갈 것이라 말하며 설명을 이었다.
“이제 폭죽이 무언지 자네도 알겠지. 자네가 죽여야 할 그 사람이 그 폭죽이 든 상자를 애지중지하여 보관할 것이니, 자네는 그자의 영채에 불을 붙여야 할 것이네.”
거기까지 말한 고 성주가 다시 무인에게 무어라 하고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아마 자네에게 폭죽도 하나 내어 줄 모양일세. 불을 지른 후, 점화한 그걸 영채 안에 던져 넣게. 어떤가, 해 볼 셈인가.”
“해 보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무언인지를 깨달은 초고독불화를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어떻게 고려군 대장의 영채(營寨)로 다가가는지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이미 옥 안에 있는 동안 창살 너머로 본 고려군의 군율이 엉망인 것을 보았으니, 충분히 해 볼 만하다 여겼던 것이다.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해낼 생각이기도 했다.
그때, 문득 무인이 말을 하니, 이번에는 고 성주가 아닌 초고독불화를 향한 것이었다.
“만약 헛된 맘을 품는다면, 네 아들은 온몸에 창상을 입은 채 소금에 절여져 죽어 갈 것이다. 물론 너도 어디로 도망가든, 그곳이 설사 지옥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잡아 오체분시할 것이다.”
그 말은 이내 고 성주의 입으로 다시 통역되어 전해졌지만, 초고독불화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고려 무인이 다시 고 성주에게 무어라 하니, 초고독불화에게 저들도 데려가고 싶으면 그리하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저들이란, 같은 옥사에 있는 세 목호들이었다. 그들도 내내 고 성주의 말을 엿듣고 있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지 짐작하고 있다가 그 말에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분명히 해낼 것입니다.”
초고독불화가 말하니, 고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이내 떠났다. 고려 무인도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물러났으니, 옥사 안은 다시 조금 전처럼 고요해졌다.
그런데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초고독불화가 애써 바닥의 날붙이를 쥐어 자신의 포승을 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감각만으로 날붙이를 놀리다가 손이 베여 따끔하고 쓰라렸으나, 상관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은 해내고 죽어야 했다.
* * *
“아버님, 이미 많이 취하셨습니다. 그만 드시지요.”
밤이 깊어 새벽으로 가는 시간에 고실개가 다시 잔에 술을 따르니, 아들 신걸이 손을 뻗어 만류하였다.
“신걸아, 오늘은 취해야 한다. 이대로 취해서 정신을 잃고 며칠 후에야 깨어났으면 좋겠구나.”
고 성주가 아들의 손을 뿌리쳐 다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저녁에 따로 찾아와, 자신을 보좌하기 시작한 아들의 걱정스런 눈빛이 진하게 느껴졌으나, 대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아들아, 장차 이곳에서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저 승냥이 같은 현남 아래서는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현남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에 양가와 부가가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니, 그들이 백성들을 부추기면 제주의 온 고을이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서러워 울음이라도 토할 듯한 모습에 고신걸도 함께 울상을 지으면서도 아버지를 위로하였다.
“어찌 그리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십니까. 현남의 사병들에게 물으니, 그가 너그러운 자라는 평이 자자하였습니다. 설마하니 그런 자가 과한 짓이라도 하겠습니까. 또, 양가와 부가가 지난 몇 년을 목호들에게 붙잡혀 부려진 것도, 실상은 그들이 섣불리 목호들을 도모하려다 실패한 탓이 아닙니까? 그들은 우리 집안이 거들지 않은 것을 탓하나, 시류가 아닌 때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우리를 비난할 이유는 안 될 것입니다.”
“현남이 너그럽기만 하다면, 그가 목호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학살하였겠느냐. 그 폭죽이라는 것으로 목호들을 죽였다고는 하나, 실상 시신에 남은 흔적으로는 그들 대부분이 날붙이에 절명하였으니, 살 수도 있는 자들마저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냉정할 줄 아는 그가 가엾은 백성들에게는 너그러울지언정, 결코 우리 가문을 두고 너그러움을 먼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입으로 말하고도 상황이 난감했는지 한숨을 푹 내쉰 고실개가 아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또, 지난 몇 년간 양가와 부가의 우리 가문에 대한 원한이 깊어졌으니, 저들은 그 계획이 탄로 난 것이 우리 집안의 고변 때문이라 여기고 있지 않느냐? 자신들이 목호들과 싸우고 박해받을 때, 우리만 목호들과 작당하여 호의호식하였다고 여기고 있으니, 그 오해의 깊이가 너무나 무섭구나. 만약 현남이 우리 가문을 없애려 한다면, 고려 도당에 양가와 부가의 증언을 받아 고할 수 있을 것이고, 더 손쉽게는 양가와 부가를 부추겨 원한을 직접 풀게 하려 할 것이다.”
“하나, 저희도 양가와 부가를 해방시키기 위해 많이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노력이 대수겠느냐. 아무런 결과도 없었으니, 양가와 부가가 그것을 인정해 주겠느냔 말이다. 오히려 거짓된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여길 것이다.”
아버지의 한탄 섞인 말을 듣자니, 신걸의 눈앞도 캄캄해졌다.
제주는 큰 섬이나 그 안의 세상은 좁다. 제주에서 고씨 가문은 최고이나, 세상 밖과는 아무런 연도 없다.
그렇기에 고씨 가문이 당면한 모든 문제는 고씨 가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작금에 도래한 문제들은 어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하면, 살기 위해 현남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설령 그것이 가문에 크게 해가 되는 것이라도요?”
답답한 마음에 신걸이 물으니, 고 성주는 그저 술잔만 더 기울일 뿐이었다.
“차라리, 차후에 기회를 보아 현남을 죽…….”
탁!
신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 성주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으니, 아들의 섣부른 입방정을 막기 위함이었다.
“어찌 함부로……! 현남의 사병들을 너도 보았지 않았느냐.”
나직하나 호통과 같이 아들을 혼내니, 신걸도 자신이 답답한 마음에 해서는 안 될 생각을 입 밖에 내었음을 깨달았다.
그 범 같은 무인들과 군기가 엄정한 사병들, 그런 자들과 더불어 있는 현남을 죽이기란 불가능한 것에 가까운 일이었다.
설령 해낸다 하더라도, 그의 사병들이 복수를 위해 고씨 가문을 도륙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신걸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으니, 혹여 그곳에서 그가 한 말을 누군가 들은 건 아닐까 염려된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신걸은 아버지에게 그리고 혹여 이곳을 감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에게 사죄하곤 물러났다.
다시 홀로 남은 고 성주는 술을 마셨으니, 술이 물 같이 느껴져 취하지 않는 건 그의 속내가 바싹 마른 탓인 듯했다.
한데, 잠시 후, 문득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인가 싶을 때, 물러났던 아들이 다시 뛰어들어 왔으니, 아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하자, 고 성주의 얼굴에도 경악이 물들었다.
“임견미가 죽었다고? 벌써?!”
“……?”
놀란 맘에 말이 헛나왔고, 그것을 들은 아들 신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아버지가 벌써라고 되물은 것의 의미가 너무나 컸던 탓이다.
자신의 실수를 느낀 고 성주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상원수가 어찌 죽었다는 것이냐?”
“……그것이, 지난밤에 목호의 어린 계집 중 하나를 데려가 품은 모양인데, 그 계집이 잠자던 상원수를 해한 모양입니다.”
의아함이 남은 표정의 아들이 고하자, 고 성주는 절로 탄식하였다.
그대로 자리에서 살짝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과연 고려군의 영채 쪽이 난리통이었고, 군병들이 피에 물든 어떤 헐벗은 여인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 여인의 목에 기다란 젓가락이 꽂혀 있는 것도 보였으니, 고 성주는 절로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졌다.
아마도 저 계집이 술상과 함께 들어온 젓가락으로 잠자는 상원수의 목을 찌르고, 자결을 한 것이리라.
고 성주는 마치 그의 마음처럼 시리도록 파리하게 물들어가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처께서 그를 도우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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