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99)
* * *
“아이고, 부처님…….”
아침부터 놀랄 만한 소식에 당황했던 몽주는, 어렵게 임견미와 목호 계집의 시신을 확인하고 나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핏 부처가 몽주를 도와 임견미를 제거했다고 여길 수도 있는 그 일은, 몽주에게는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임견미는 분명 죽어야 했다. 탐관오리를 죽인다는 대의가 있어 그랬고, 몽주가 노리는 목표를 염두에 둘 때도 그랬다.
그래서 초고독불화를 일부러 놓아주고 그에게 살행을 사주한 것이었다.
하나, 동시에 임견미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자였다.
정벌군의 상원수로서 임견미는 객사할지언정,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아서는 안 되었다. 오히려 영광(?)스럽게 전사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러야 할 사람이었고, 목호를 토벌한 공에 대한 상을 사후에 추서(追敍)받아야 할 이었다.
그래야 이인임과 몽주의 사이에 뚜렷한 적대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고, 당장에 밀어닥칠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사령관의 부재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임견미가 수치스럽게 죽음으로써, 그의 휘하 장수들이 고려로 돌아갔을 때의 입지가 몹시 곤란해지고, 그들이 이번 정벌을 통해 얻을 것을 기대하던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었다.
상원수가 죽으면서, 이제 제주 정벌에 대한 장계를 올릴 주체는 오로지 도병마사(都兵馬使)에 속한 염흥방뿐이니, 그간 염흥방과 임견미가 알게 모르게 견제하고 충돌하던 점을 생각하면, 부원수들은 염흥방이 자신들을 위해 장계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할 것이다.
아니, 그저 솔직히 사실대로 장계를 올리는 것 자체부터가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제주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오히려 상원수만 수치스럽게 살해당했다는 결과만 공인된다는 의미였으니, 그들은 정벌의 공훈에 대한 상은커녕 오히려 벌을 받을 가능성만 남게 된 것이다.
몽주는 자신이 부원수들의 입장이라면 어찌할 것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았고, 어렵지 않게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진, 장계를 고치게 만들 만한 수단은 오직 그들에게 매인 1만의 군세뿐이니, 그를 통해 장계의 내용에 개입하려 할 것이다.
물론, 그 개입의 방법은 협박이거나 ‘칼부림’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임견미의 시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부원수들의 심기가 극히 불안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임견미의 시신을 확인하려는 것도 거부당하다가, 염흥방과 주서(注書)가 왕명을 이유로 강요한 끝에 겨우 볼 수 있었으니, 그들 부원수들도 염흥방과 주서가 임견미의 시신을 확인할 권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막으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의 신경이 몹시 예민해진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시신을 확인하고 나왔을 때 더 확실해졌다.
그가 시신이 임시로 안치된 천막에 들어갔을 때, 천막 입구에 세 부원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나올 때는 한 자만 남았을 뿐, 다른 두 장군들은 보이지 않았고, 남은 한 자의 시선에는 적의가 가득했던 것이다.
“그 어린 계집이 손속이 잔인한 걸 보니, 과연 목호가 야만의 것들임을 알겠소만, 임견미 또한 참으로 기가 차는 자 아니오? 어찌 근본도 없는 계집 옆에서 대취하여 잠이 든단 말이오. 볼 장을 다 보았으면, 돌려보내기라도 하든지…….”
주서와 함께 앞서 걸으며 무언가 쑥덕대던 염흥방이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하니, 임견미가 목호의 여식을 겁탈한 것 자체는 그리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 시대의 기준에서, 포획된 호인(胡人)들에 대한 인식이란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몽주의 시선에서는 끔직한 일이었다.
그 죽은 계집은, 겉보기에 완전 어린아이였으니, 비록 이때의 사람들 체구가 작아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어린아이 같은 체구가 많다고는 하나, 그 계집은 정말 앳된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아마도 십 대 초반이었을 그 아이, 아무리 조혼의 풍습이 채 걷히지 않은 시대라고 해도, 분명 어리다 여길 수밖에 없는 그런 아이를 겁탈한 것 자체도 잔인했고, 그 목호의 여식이 그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도 죽을 마음을 품고 실행한 것 자체도, 우울할 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비단 자신을 겁탈한 자를 죽인 것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아비, 혹은 오라비, 어쩌면 둘 다 죽게 만든 고려에 대한 복수를 나름대로 감행한 것일 수도 있었다.
즉, 진정한 살계(殺計)의 대상은 몽주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마음 깊이 박힌 원한이 오직 그 여아에게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아니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니, 몽주는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그가 목호를 무찌름에 있어, 손속을 잔인하게 굴긴 했으나, 그것이 고려인 석몽린의 기준에서는 옳을지언정, 현대인 진몽주의 기준에서는 트라우마라도 남을 만한 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물론, 첫 천몽 덕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진 일이긴 했다.
그렇게 속내로 우울함을 곱씹으며 걷고 있을 때, 문득 탁가 무인 일인이 다가와 몽주의 뒤를 따르던 탁기에게 무어라 고하였다.
슬쩍 보니, 보고를 받은 탁기의 표정이 일순 굳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명하신 대로 탐보케 하였는데, 고려군 군영에 장령(將領)들이 모여 수상한 논의를 하고 있다 합니다.”
그 수상한 논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몽주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몽주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결심하곤, 탁기에게 무어라 명하여 먼저 움직이게 한 후, 그의 곁에 있던 앵도에게도 지침을 알려 주었다.
“여무사들 중 절반을 시켜, 우리 짐과 천막을 목호의 수용소 앞으로 옮기게 하고, 남은 이들과 함께 나를 따르시오.”
“……알겠어요.”
앵도도, 앞서 몽주가 탁기에게 명한 것을 들어 대략 눈치를 차렸는지 이내 대답하고는 그녀가 부리는 여무사들에게 지시하였다.
그사이 몽주는 앞서 걷는 염흥방의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걸음을 빨리 하십시오.”
“그게 무슨……? 왜 이러시오?”
염흥방이 멈칫하며 걸음을 세우려는 걸 몽주가 등을 밀어 더 빨리 움직이게 하였다.
“속히 처소로 가서 짐을 챙기십시오. 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급하게 되고 있습니다.”
“……?”
여전히 그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몽주는 더욱 걸음을 재촉하며 대충 설명을 늘어놓았다.
고려군 내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그 주된 맥락이었으니, 설명을 들은 염흥방도 그제야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깨닫고, 안색이 하얗게 변하였다.
“서, 설마…….”
“저들은 지금 벼랑 끝에 몰린 처지입니다. 돌아가 모든 것을 잃은 것을 감수하느니, 여기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훈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협박과 피로 조작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피……!”
이제 얼굴이 하얗다 못해, 퍼렇게 변하는 염흥방과 주서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짐을 챙겨 처소를 벗어났다.
“수용소 쪽으로 가시지요. 아직까진 저들도 결단을 내리진 않은 듯합니다.”
다행히 몽주가 염흥방과 주서를 데리고, 앵도의 호위를 받으며 목호의 수용소 쪽으로 가는 것을 방해받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으니, 그들이 수용소 앞에 진을 새로 친 사병들 안에 들어가자마자, 고려군의 부원수들이 일군을 데리고 몰려왔다.
“염흥방 영감,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그 목소리는 세 부원수들 중 연장자인 신태중이었다.
진 안 몽주의 천막 안에서 염흥방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몽주를 바라보았다.
잠시 기다리라 전하게 한 몽주는 급히 그에게 말하였다.
“저들은 장계를 자신들이 올리거나, 자신들이 고쳐 쓰게 해 줄 것을 요구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당하면 무력을 동원하기로 합의하였을 것입니다. 저들은 군부에 입지가 크지 않고, 오직 임견미를 출세의 줄로 잡고 있던 자들입니다. 임견미가 죽은 지금, 저들은 이번 정벌의 상황을 어떻게든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고쳐 차후의 안정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니 결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들의 요구에 따르실 것입니까?”
“어찌 장계를 거짓으로 고할 수 있겠소? 하나, 만약 저들이 피를 보기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막기 어렵지 않소?”
“각오만 하신다면, 제 사병들이 막아 보겠습니다.”
몽주가 말을 하며 이를 악물자, 염흥방이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역사에 임견미와 더불어 고려 말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남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초년(初年)의 뜻을 잃지 않은 유자(儒者)였다.
그가 변절한 것은 그가 바르게 살고자 하다 크게 곤경에 빠지고 좌절한 이후였으니, 비록 계기가 다르다고는 하나, 만약 오늘 그가 뜻을 스스로 꺾거나 달리 꺾인다면 그를 계기로 변절할지 모를 일이었다.
결코 길지는 않지만, 그의 인생에 가장 진한 고민 끝에 염흥방이 말하니,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를 살려만 내시오. 하면, 고려에 돌아가 저들의 무도함을 낱낱이 세상에 알리겠소.”
“맡겨 주십시오.”
마침내 염흥방이 그와 같이 각오를 다지니, 몽주가 속으로 내심 안도하였다.
“신 장군에게 들라하게.”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신태중은 오만한 태도와 살기어린 시선으로 용무를 밝혔으니, 그건 몽주가 염흥방에게 예측하여 알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감히 금상과 도당을 기만하고 능멸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반란이고 역모에 다름 아님을 모르는 것인가!”
몽주가 크게 일갈하니, 신태중이 크게 분개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서릿발 치며 몸을 돌려 나갔다.
항파두리성 안에 불온한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 * *
먼저 움직인 것은 몽주의 사병들이었으나, 먼저 공격한 것은 고려군이었다.
탁기가 탁가 무인들을 부려, 사병들로 하여금 견진(堅陳)을 세우게 하니, 본디 목호들을 막을 요량으로 준비시켰던 방패수들이 고려군 군영 방향으로 큰 방패를 앞세웠다.
그것을 본 고려군 측도 움직임이 더욱 부산해지더니, 신태중을 비롯한 부원수들의 호령이 있은 후, 고려군 또한 뭉쳤다.
군기의 엄정함을 보자면, 몽주의 사병들과 고려군은 비교하기가 무색할 만큼 사병들이 우위에 있었으나, 수적으로 월등한 고려군의 기세도 쩌릿쩌릿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기세의 본질은 탐욕이었다.
이미 부원수들이 휘하 장령들과 병졸들에게 일러, 사병들을 쳐부수면 후한 상을 내리겠노라 장담하였던 것이다.
하기야, 고려에서 온 장졸들은 모두 그 사병들이 누구의 사병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몽주만 잡으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에 더욱 욕심 어린 마음을 품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지난날에 보았던 폭죽이었으나, 그들이 본 폭죽은 폭음만 거셀 뿐, 그 파편의 위력이나 화염의 크기는 소리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으니,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고, 아마도 나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어차피 좁은 성내에서 맞부딪치면 그 폭죽도 함부로 쓰지 못할 것이니 그리 위협적이지 못하다 판단한 것이다.
하나, 고려군 또한 싸움의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그들이 가진 기마와 궁수를 제대로 쓸 수 없음은 마찬가지였다.
“다시 봐도 오합지중(烏合之衆)이군.”
허리에 찬 검의 자루를 손으로 잡은 채 방패수 앞에 서 있던 탁기는 고려군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평가를 그리할 뿐이었다.
아주 무시하기에는 숫자가 경계할 만하였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사병들 하나가 고려군 열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니, 오히려 두려워해야 마땅했다.
“하나, 그건 전세와 군기에 따라 다른 법이지 않은가.”
곁에 있는 아군이 죽어 감에도 마음을 다잡고 적병을 향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정병과 겁에 질려 기세가 꺾이고 도망갈 마음을 품는 이들 사이에서 수의 차이는 승패의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없을 것이라 탁기는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다.
탁기는 문득 자신의 뒤에 선 방패수들이 열과 오, 그리고 간격을 자로 잰 듯이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곰 같은 방패수들이 지키고, 범 같은 창검병들이 기회를 도사리고 있으며, 매 같은 노병들이 적을 응시한 채 다가올 전투를 흔들림 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괜히 시끄럽게 소리만 지르는 까마귀 떼들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그때, 고려군에서 신태중이 말을 타고 나왔으니, 몹시 가까워 말이 몇 달음 치기도 전에 탁기의 앞으로 다가왔다. 탁기는 이 좁은 곳에서 말을 타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비소(誹笑)를 보일 뻔하였으나, 애써 감추었다.
신태중이 말 위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염흥방 영감께 전하라. 마지막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
“불가.”
“네 이놈! 감히 네놈이 나를 능멸하는 게냐! 당장 가서 고하지……!”
“불가.”
탁기는 끝내 비소를 보여야 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전투를 치를 사이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냐고 묻는 듯하였다.
“이이…… 네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 또한 불가.”
그렇게 탁기로부터 불가하다는 대답만 세 번 들은 신태중이 분기를 풀풀 풍기며 돌아가니, 곧이어 고려군에서 공격의 호령이 터져 나왔다.
먼저, 고려군이 위치한 방향의 성벽 위에 있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는데, 그들의 군기가 형편없는 것과는 달리, 제법 일사불란하게 목표한 대로 날아들었다.
하나, 뒤쪽 본진에까지 이르기에는 멀었고, 방패수들에 닿은 화살들은 제2열의 방패수들이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방패에 막혀 맥없이 튕겨 나갈 뿐이었다.
마치 영상을 되풀이하듯 비슷한 상황, 아무런 소득도 없는 화살 공격을 두어 번 더 되풀이한 뒤, 고려군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었다.
화적떼마냥 고함을 치며 달려드는 전위(前衛)의 창병들이 창끝으로 방패를 꿰뚫을 수 있는 양 내질렀으나, 방패는 일체 뚫리지 않았고, 충격에 준비하고 있던 방패수들이 그 힘을 버텨 내었다.
공세가 막힌 전위의 고려군 창병들이 다시 창을 내질러야 함이 마땅하나, 뒤에서 밀려드는 아군 때문에 창을 내지를 겨를도 없이 방패에 몸을 대어 밀어야 했다.
아마도 방패수들만 밀어 넘어뜨리면 수의 우위를 이용하여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하나, 그 순간에 방패마다 작은 틈이 벌어지며 긴 창이 불쑥 튀어나왔으니, 그 날카로운 끝마다 인명이 두엇씩 비명과 함께 꿰뚫렸다.
그 지옥의 절규 같은 소음 속에서 잠시 방패수 뒤로 물러나 있던 탁기의 신호에 따라 화극이 호령하니, 폭노대가 일제히 폭죽을 쏘아 고려군의 전위 뒤편을 향해 멀리 날렸다.
그 폭죽은 임견미와 고려군에게 보인 소리만 큰 폭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화승이 짧은 폭죽은 탄착한 후 이내 쾅쾅 터졌다.
물론, 그 폭음이 터지는 곳마다 근처에 밀집되어 있던 고려군 여남은 명이 죽거나 다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졌다.
첫 폭음들에 놀란 후에도, 연신 날아드는 폭죽에 고려군의 전위마저 고개를 돌려 후위의 참상을 똑똑히 보니, 절로 마음속에 겁을 품게 되었다.
그때, 탁기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격하라!”
그 직후에 터진 마지막 폭음과 함께 방패수 좌우로 검을 든 병사들이 뛰쳐나왔고, 안 그래도 식겁한 고려군이 크게 놀라 집중력이 더욱 흐트러졌다.
하나, 몽주의 사병들이 공격하는 방향은 좌우가 전부가 아니었다.
고려군의 전위를 막고 있던 방패들이 압박이 사라진 틈에 비켜서더니, 그와 동시에 방패수들 사이로 창병들이 크게 나서 창을 내질렀다.
좌우에서 탁가 무인들이 이끄는 검병들이 삽시간에 수십의 고려군을 베어 죽이고, 방패수들을 등지고 앞으로 나선 창병들이 진격하며 적을 마구 꿰뚫었다.
탁가 무인들이 이끄는 좌우의 검병들은 두 자루의 거대한 창과 같았고, 수 명이 한 조를 이뤄 마치 한 몸인 양 일제히 파공(破空)하여 창을 지르는 창병들은 수십 발의 거대한 화살과 같았다.
그리고 그사이로 독세상(獨世上)인 양 홀로 적진을 돌파하는 탁기는 그야말로 한 자루의 거대한 검이었다.
그 거대한 창과 검, 그리고 화살 앞에 고려군이 기세를 잃는 것을 넘어 우르르 무너지니, 아직 9천에 이르는 병력들이 남아 있음에도 겁에 질려 뒷걸음질하였다.
“네 이놈들! 어찌 적전하여 명 없이 물러나는 것이냐!”
고려군의 중앙에 있던 신태중이 크게 소리치며 군병들을 잡고자 하였으나, 기강이 없는 병졸들 사이에는 이미 패퇴가 대세를 이루고 있어 불가능했다.
그에 신태중이 검은 기를 손수 흔들어 후미에 신호하였으니, 성 안이라 활약하지 못한 채 뒤에 대기하고 있던 기마병들이 움직여 도망치는 고려 병졸들을 참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번 전투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 바로 독전(督戰)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씩씩대며 다시 주변에 남은 고려 군병을 향해 재차 전진을 명하려던 신태중의 귓가에 문득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신태중이 그 소리의 진원지가 너무 가깝고, 말을 타고 있는 그의 높이와도 비슷하다고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건 하나의 번뜩임이었다.
촤악!
어느새 군중을 돌파하여 그에게까지 닿은 탁기가 몸을 날려 신태중을 향해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끄윽!”
쥐고 있던 삭(槊)마저 놓치고 양손으로 피를 뿜는 목을 감싸 쥔 신태중은, 다음 순간 자신이 감싸 쥘 목이 없음을 깨달으며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정신을 잃어야 했다.
죽음으로 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말 위에서 피를 뿜고 있는 목 없는 자기 자신의 육신이었으며, 동시에 그 피 분수 옆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탁기의 냉정한 얼굴이었다.
부원수들 중 그나마 앞서 군졸들을 지휘하던 신태중이 처참하게 죽자, 안 그래도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고려군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저마다 이 지옥에서 저 야차 같은 자들을 피해 성 밖으로 나가려고 아우성이었으니, 좁은 성문 앞에서 자기들끼리 밀치다 쓰러지고, 그렇게 쓰러진 자들을 짓밟으며 사상자들을 늘리고 있었다.
그렇게 밝혀 죽고 등을 맞아 죽는 자들은 앞서 도망친 자들을 원망하며 죽어 갔지만, 실상 성 밖으로 나가는 것에 성공한 자들마저도 이미 성문 밖에까지 닿은 몽주의 검병들에 의해 하나하나 도륙되고 있음은 알지 못하였다.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십시오!”
누군가 머리를 땅에 닿듯 조아리며 생을 구걸하기 시작하자, 그 항복의 물결이 고려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살기(殺氣)에 정신이 팔려 적을 주살하던 사병들도 무기도 던져 버리고 삶을 애걸하는 고려군들을 죽이지는 못하겠는지 다음 명을 기다리는 시선들을 탁기 쪽으로 던졌고, 그 시선을 받은 탁기는 몽주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저, 정말로 대, 대단하…… 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사색이 되어 천막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염흥방이 전세가 비범함을 알고 숨어서 밖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전황이 선명히 드러나자, 몽주에게 감탄하였다.
그 감탄에는 몽주에 대한 경외감마저 묻어 있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직 불온함이 남아 있으니, 여기 계십시오. 저는 나가서 마무리를 지휘토록 하겠습니다.”
“그, 그러시오. 호, 혹 아직 거짓으로 하, 항복하여 방심을 틈타려는 자가 이, 있을 수 있으니, 조, 조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몽주가 앵도와 탁가 여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득 앵도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으니,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열기가 남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손수 나아가 싸우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오?”
“그렇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아비를 지키는 일에 비할 바겠어요?”
“고맙소. 자내가 군중에 있길 원했고, 또 자내의 실력을 묻어 두기 아쉽긴 하나, 솔직히 말해서, 자내가 피를 뒤집어쓰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소.”
“치, 지난날 천마산에서는 어여쁘다 하셨잖아요?”
괜히 새치름하게 불퉁거리는 앵도의 모습에 몽주는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내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어여쁠 수밖에 없고, 당시에는 자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잖소.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그저 내 옆에서 불측한 상황에 대비해 주길 바랄 뿐이오.”
앵도가 입술을 삐죽이며 다소 볼멘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몽주는 하마터면 그녀의 두 볼을 감싸고 키스할 뻔했으나, 최후에 자제하여 그녀의 한쪽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물론, 그들이 천천히 걷고 있는 곳엔 고려군의 참혹한 시신들이 흩어져 있었으니, 그 와중에 둘의 정다운 모습은 이미 충분히 엽기적이었다.
그때, 앞서 몽주의 명을 받아 항복한 고려군들을 처분케 하고 전과(戰果)를 확인하던 탁기가 몽주에게 달려왔다.
“승전을 경하드립니다.”
“내가 할 소리를 자네가 하는군. 다 자네와 탁가 무인들이 사병들을 훌륭히 훈육한 덕이 아니겠는가. 나야말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주…… 인 나리.”
탁기가 주군(主君)이라 부를 뻔한 것을 고쳐 말한 것을 느낀 몽주는 그의 충심이 더욱 깊어진 것을 알고 속으로 기뻐하였으나, 겉으로는 말을 돌릴 뿐이었다.
“사병들 중 사상한 자들은 몇이나 되는가.”
“죽은 자가 일곱에, 크게 다친 자가 열다섯입니다.”
“그중 탁가 무인들도 있는가.”
“성문 밖 있던 이들 중 둘이 다쳤으나,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세히 사정을 물으니, 고려군이 무너진 후, 성문 밖에 나아가 탈주하는 자들을 참살하던 검병들 중에 부상당한 자들이 많았는데, 고려군의 기마병들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리되었다는 것이었다.
“하면, 성을 벗어난 고려군이 제법 있겠군.”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중 대부분이 기마병들이라는 점이 걱정될 뿐입니다.”
“수괴들 중에도 탈주한 자가 있나?”
“둘은 죽었으나, 이씨 성을 가진 자가 기마병들과 함께 도주하였습니다.”
수괴(首魁)라 함은 이번 난리를 이끈 세 명의 부원수들이었으니, 그중 도망친 자는 이진성이라는 자가 틀림없었다.
“잡아야겠지. 전투에 지쳤겠으나, 속히 추적할 군을 추슬러 보내게.”
“알겠습니다. 속하가 반드시 잡아내겠습니다.”
하나, 몽주는 고개를 저으며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듯한 그를 붙잡았다.
“아니, 자네는 따로 할 일이 있네.”
“……?”
“가서 초고독불화와 목호들을 데려와야지 않겠나.”
“아! 알겠습니다.”
탁기가 명을 전하고 수행하러 서둘러 떠나니, 앵도가 물었다.
“그들을 어찌할 셈이세요?”
그녀의 물음에 몽주는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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