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35
134화
알현실에 고위 대신들이 자리 잡자 그제야 티스리스트는 늦게 나타나 왕좌를 채웠다.
앉자마자 포도주를 잔에 가득 따라 마시는 게, 목이 말라서라기보단 젊음을 되찾았다는 걸 시위를 하는 듯했다.
바르톨로메오는 왕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거대한 쇠뭉치 같은 그가 인사를 바로 올렸다.
“전하, 소문과 얘기는 익히 들었사옵니다! 건강을 되찾으신 걸 감축드리옵니다!”
음성이 쩌렁쩌렁 울리자 대신 몇몇은 귀를 막았다.
티스리스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고맙네. 그대도 오랜만이군! 어리숙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가이아께서 정해 주신 운명의 이치대로 살아갈 뿐이지요!”
“하하. 그렇다면 가이아께선 이 몸을 참으로 어여쁘게 봐 주신 듯하군!”
바르톨로메오는 ‘정해진 수명대로 살 것이지 왜 역행을 했냐?’라는 의미로 돌려 깠고, 티스리스트 왕은 ‘가이아가 성기사인 너보다 날 사랑하니까 수명을 더 길게 정해 두신 거 아니냐.’라고 말한 셈이었다.
서로가 이렇게까지 기 싸움을 하는 데는 가이아 여신교단과 아시리스 왕국 간의 관계 때문이었다.
“이번 교황께서는 8왕국과의 약속을 어기실 참인가?”
“영문 모를 말입니다, 전하!”
“8왕국과 교단 간의 약조를 잊었다고 말할 참은 아니겠지. 다시 상기시켜 주겠네. 가이아 여신교단은 신성교국의 성립을 지양하는 대신 8왕국 간의 전쟁에 개입하여 중재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고 일정 교무금을 각 왕의 국고에서 매년 받기로 했네.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맺은 약조라 해도 엄연히 잊어서는 안 될 일이야!”
가이아 여신교는 수해 문명의 정신적 근간이었기에 그 잠재력이 어마어마했다.
8왕국의 역대 왕들은 가이아를 따르면서도 항상 교단을 경계했고, 특히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아시리스 왕국은 ‘신성교국’이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사실 이는 대수림에 둘러싸인 인간의 땅이 한정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여신교가 종교에서 끝내지 않고 국가가 되길 원한다면 자연히 따라오는 건 좁은 땅덩이를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한 전쟁뿐이었다.
“이를 말이옵니까?”
“그런데… 교단은 어찌 함부로 출병했는가? 성전을 빌미로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군.”
“하하하하!!”
바르톨로메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너털 웃었다. 굉음이 알현실을 울렸다.
“현 교황 성하이신 요한 바오로 1세께서 이 얘기를 들었다면 저처럼 자지러지셨을 것입니다!”
‘미친놈, 왕 앞에서 자지러지는 건 너뿐이다.’
모든 대신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인가?”
“물론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전쟁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는 아시리스 왕국이 이번 기회를 통해 반성을 해 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반성?”
“여신님의 가르침을 덜 받아들였기에 망측하게도 크롬벨 백작이 이단의 무리와 손을 잡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는 왕국의 책임이니 통렬한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옵니다!”
너희 귀족이 싼 똥 때문에 우리가 대신 처리하러 온 거 아니냐, 볼멘소리를 하는 셈이었다.
바르톨로메오의 진심대로라면 ‘너희 덕분이야, 고마워!’라 외쳤을 듯하지만, 맡은 바 역할이 그런 거였다.
“으음… 크롬벨 백작이 정말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군.”
“믿으셔야 합니다! 이번 성전첩의 발동자는 은빛 성기사, ‘베네딕트 경’입니다. 그가 명성을 떨치던 시기는 조금 되었을지 몰라도, 전하의 연배이시면 익히 들으셨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명성이 이래서 중요했다. 왕도 조금은 납득한 눈치였다.
바르톨로메오는 확실히 하기 위해 비단에 곱게 싸인 성전 포고문을 발젤렘에게 전달했다.
아시리스 왕은 그것을 빠르게 훑었다. 내용은 전형적이었다.
이단의 주구인 크롬벨 백작이 영달을 위해 적십자단을 불러들였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성전을 연다. 아시리스 왕국은 길을 열고 협조를 함으로써 이 위대한 전쟁에 합류하라.
마지막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장이 다른 거 같네만. 교황께서 보내신 게 아니었나?”
“근래 가이아께서 교황 성하께 새로운 사도를 알리는 신탁을 내렸사옵니다. 이번 성전은 그분이 주관하기에 바삐 내려오고 계시지요.”
“사도……?”
아시리스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인의 이름이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그 단어에 반응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아헨탈, 짐메리온, 엘더, 하프간 그리고 로드윈 후작까지. 왕당파로 분류되는 대신들만이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왕도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과연……. 그자가 어딜 갔나 했더니… 교단으로 갔었던 것이로구나!’
아시리스 왕의 머릿속에 당돌했던 이종이 떠올랐다. 가이아 여신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알려 줬던 자.
이제야 전말을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근 아헨탈 자작을 통해 찾으려 했으나,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대답만 돌아와 걱정이 되던 찰나였다.
그런데 이리도 화려하게 귀환을 한단 말인가.
‘그가 이번 성전의 주관자라면 전혀 걱정할 게 없지 않은가?’
만일 교단이 개수작을 부리고자 하는 거였다면 그 이전에 신의 사도를 통해 자신을 회춘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며, 가이아가 내린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상기하자 왕의 시선이 바스카스 후작에게로 은밀히 이어졌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에 암약하는 비밀 집단의 존재를 아십니까?]
[가이아께선 제게 ‘검은 나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에게 거대한 기적을 선사했던 신의 사도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가문의 상징이 ‘흑접’인 바스카스 후작은 뚱한 눈빛으로 성기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시리스 왕의 머릿속엔 천천히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거, 단순한 그냥 성전이 아니었군.’
가이아께 계시를 받았다던 신의 사도가 성기사들을 끌고 내려오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을 거였다.
“새로운 사도님은…….”
왕의 상념이 길어지자 바르톨로메오가 사도를 소개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아시리스 왕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직감이랄까, 정치력이 높은 티스리스트는 메시의 이름이 바스카스 후작의 앞에서 노출되는 걸 막았다.
걱정 인형인 바스카스 후작이 혹여나 메시를 의식하고 있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후작에게 단서가 될 정보를 하나라도 넘길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아, 됐네. 어차피 올 텐데. 그때 시간을 들여 대화를 나눠 보면 좋지 않겠는가.”
“오, 그러시다면야.”
‘어차피 올 텐데’라는 말은 이미 성전을 인정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 바르톨로메오는 퍽 만족스러워하며 물러날 수 있었다.
이제 왕과 신하들의 시간이었다.
티스리스트는 대신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과거 왕권이 강한 시절이면 모를까, 아직은 의견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지금 왕도엔 8왕국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상황입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일을 교단이 벌이기엔 보는 눈이 많으니, 아무래도 진정 성전이 목적이라 생각됩니다.”
펜란지 공작.
“허허, 가이아 여신교단은 왕국의 국교 아닙니까. 다른 엄한 이유도 아니고 성전이 목적이라 하는데… 길을 내주지 않으면 다른 왕국들이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저나이스 후작.
“길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왕국이 할 일은 다 했다고 보여집니다. 단, 성전이 이름 그대로 성전만으로 끝날지, 전쟁의 양상을 감시하는 귀족을 보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바스카스 후작. (그가 반대하지 않자 아시리스 왕이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헨탈 자작은 과감하게 후작과 반대되는 의견을 냈다.
“성전인데 저희도 군사를 지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신실하게 믿는 종교인데 길만 내준다면 불만을 품는 이들이 나올 것입니다. 어쩌면 나라가 외면했으니 자신들이라도 참가하겠다며 영지를 무단 이탈 하는 경우도 생길 것입니다.”
바로 직전 자신의 의견과 대립되는 말을 꺼낸 자작을 눈으로 흘기며 바스카스 후작이 다시 왕에게 말을 꺼냈다.
“자작은 돈만 세다 보니 군문의 일을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전쟁은 아이들 장난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일도 아이들 장난은 아니지요. 그리고 저희는 지금 국정을 논하고 있으니 각자가 잘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지요.”
“나라 살림에 1도 책임이 없는 무직자가 어리석게 군사를 소모하자고 주장하는데, 군무 대신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말씀 잘하셨습니다. 저희도 주고받는 게 있다면 어리석은 소모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헨탈 자작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털었다.
“이번 작위 수여식이 얼마만큼 성공하느냐, 각 8왕국에 크게 소문이 날 만큼 입에 오르내리느냐는 수여받는 이의 명성도 관련이 있겠지만, 구경을 온 이들의 명성도 큰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쯤 되자 자작이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다들 깨달았다.
“성전에 군사를 지원하는 대신 신의 사도와 성전십장이 수여식에 함께해 준다면… 교단이 8왕국의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가이아 여신의 축복까지 함께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 된다면 오랫동안 8왕국에 길이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아헨탈 자작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실로 좋은 혜안입니다, 전하.”
로드윈 후작과 하프간 백작마저 뒷받침을 하고 나서자 바스카스 후작의 표정이 나빠졌다.
“흐음… 과연.”
아시리스 왕은 그 의견에 구미가 당겼다.
아헨탈 자작이 왕당파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의견이라서였다.
그의 입장에선 이번 작위 수여식은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져야만 했고, 성공해야만 했다.
젊음을 되찾은 이후 처음으로 갖는 대외 행사였기에 자신의 모습이 8왕국 전체에 퍼져 전설로 남길 바랐다.
왕은 냉큼 바르톨로메오를 다시 불러들여 물었다.
“우리도 성전을 지원할 터이니 혹… 새로운 사도와 성전십장들이 이번 작위 수여식에 참여할 수 있겠나? 기한이 빠듯할 터인데…….”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단을 쳐 죽이는 일에 조건을 달다니.
바르톨로메오로서는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출발 전 사도, 메시 예하의 명이 있었기에 참았다.
[아마 작위 수여식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해 올 것이다. 성찬을 앞두고 먹음직스러운 호박이 굴러 들어오는데 가만히 두진 않을 것이니……. 그때 왕국의 참전을 요청해라. 만일 마지막까지 그런 부탁이 없다면 경이 언급해 보도록.]
‘역시 가이아께서 직접 택한 사도는 다르구나.’
바르톨로메오는 신묘할 정도로 앞을 예측한 사도를 떠올렸다.
분명 여신께서 알려 주신 거겠지. 그는 가이아의 위대함에 몸을 떨었다.
* * *
교황령 인근의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백나비 하나가 말을 탄 채 신속하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 혼자 사도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백나비 평대원, 글레리크는 야속한 동료, 선배들을 떠올렸다.
기존 교황령 근방으론 백나비 스무 명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열다섯가량이 근래에 다른 곳으로 빠졌다.
따라서 남은 다섯이서 어떻게든 교황령 근방을 커버하게 생겼으니, 인원을 뺄 수 없자 막내인 자신에게만 일을 짬 처리 시킨 것이다.
일단 홀로 쫓아가다가 교단 본대가 멈추면 그 지역의 백나비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보란 수작이었다.
그때부터 지옥의 강행군이 시작됐다.
교단을 빠져나온 전투 사제 300명과 성기사 1,000명, 성전십장 2명 그리고 사도 하나로 이루어진 이단 정복군의 이동 속도가 너무나 빠른 탓이었다.
마차와 기마로 이루어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그를 황당하게 한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돌아 버린 광신자 새끼들, 기적을 쓰면서 달린다니!’
말이나 사람이 지치는 거 같으면 사제의 기적으로 회복을 시켜 버린다.
말은 다시 처음처럼 쌩쌩해지니 훈련을 받은 이들이 쉬엄쉬엄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아주 잠깐 호스텔치안 백작령에서 멈추는 듯하더니 그 이후부터 신들린 듯 달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은 잠도 자지 않았다. 글레리크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그가 백나비 훈련을 견뎌 낸 인재라지만, 며칠째 잠도 자지 않고 홀로 이들을 쫓는 건 무리였다. 거기다 식사 때를 제외하곤 멈추는 일 없이 달리기만 하는 부대에 잠입하여 새로운 사도의 정체를 캐내는 건 더욱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부대의 인원이 점차 늘고 있다는 것도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귀족령을 지나칠 때마다 새로운 부대가 ‘이단! 죽음! 결코! 전쟁!’을 외치며 성전에 합류하니, 어느새 그 수가 2,000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는 중간까지 쫓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시발, 나도 이제 모르겠다.”
되돌아간다면 선배나 조장에게 신나게 털리겠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할 순 없었다. 이미 백나비는 인력난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호스텔치안령에 들러서 혹시 모를 목격자나 찾아봐야겠군……. 이 정도까지 했는데 뭐라 하진 않겠지.’
저런 정신 나간 놈들과 싸우게 될 불쌍한 놈들은 대체 어떤 녀석들일까, 백나비 글레리크는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 * *
아시리스 왕국의 왕도 모어로스가 형형색색의 비단과 깃털, 보석과 장식품으로 치장되는 날은 그 해에 몇 번 없었다.
현왕과 선왕의 탄신일, 가이아 여신의 최초 강림일 그리고 위대한 수해의 모험가이자 초기 벌목꾼의 형태를 정립한 티프리메이식을 기념하는 날. 마지막으로 작위 수여식이 있었다.
작위 수여식이 시작되는 초여름의 날씨는 놀러 다니기 좋아 많은 인파를 몰고 다니는 큰 정례 행사였고,
특히 재물이 많은 귀족이 모이는 관계로 돈 냄새를 맡은 장사꾼들까지 바글거리니…….
이날부터 나흘간은 교황령 이상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도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교황령의 경우 ‘알아서 잘하자’가 모토지만, 여긴 ‘신나게 놀자’가 모토라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도 행사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다.
출납원은 제대로 돈을 뿌렸고 왕실 행사를 주관하는 궁내부가 뭐 빠지게 일했으며, 군무부가 담당하여 치안을 도맡은 결과였다.
마침내.
큰 의전이나 행사를 치루는 왕궁 홀의 거대한 문이 개방되며 높은 등급의 초대장을 가진 이들부터 순차적으로 입장이 시작됐다.
네 번째 순으로 들어간 아헨탈 자작은 오늘 새로운 작위를 받는 이답게 양껏 화려하게 치장한 채였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에레나는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목발을 짚고 있지 않았다.
“메시 경을 찾는 것이냐?”
“쉿. 그 이름을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요.”
“허허, 무슨 이름을 불러선 안 되는 자도 아니고… 여긴 사람들이 빽빽하고 소란스러워서 누가 훔쳐 듣지도 못할 게다.”
자작은 에레나의 신중함을 귀여워하며 그 역시 마찬가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당파에 속했거나 평소 알고 지내던 귀족들도 많았지만, 그가 바라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교단 쪽은 도착하지 않았지…….’
그가 기대하고 있는 건 교단 측 대표로 나타날 메시의 모습이었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허황된 상상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아시리스 왕과 왕당파 소속 고위 귀족 네 명은 메시가 ‘신의 사도’라고 했던 걸 진짜로 여긴 바람에 당연히 메시가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새 사도에 대해 질문할 틈도 없이 돌아가 버린 바르톨로메오를 생각하며 아헨탈 자작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품게 됐다.
‘분명 나타날 것이다… 그리 믿자.’
시간은 흘러 수여식이 시작되려 했다.
아쉽게도 메시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행사 진행을 위해 왕궁 홀의 문은 닫혔고, 자작만큼이나 교단을 기다리던 아시리스 왕도 아쉬워하며 손짓했다. 시작하란 신호였다.
꽃잎이 허공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며 관악기의 웅장한 음이 홀을 가득 채웠고, 오르간의 풍부한 음색이 높은 천장의 홀과 만나 경건함을 더했다.
작고 간단한 상부터 시작하여 낮은 작위 그리고 점차 높은 작위를 받는 순으로 식은 진행됐다.
아헨탈 자작은 식의 가장 끝 순서였다.
기존에 약속된 백작위가 아닌, 아시리스 왕의 결단으로 후작위를 받게 된 탓이었다.
백작위는 어디까지나 에이러스의 공으로 얻어 낸 것이었고, 거기에 추가적인 아헨탈 자작의 공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메시를 데려와 왕의 젊음을 되찾아 준 일이나 왕당파를 끌어모아 왕의 수족을 자청한 공은 아시리스 왕의 입장에서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아헨탈 자작은 앞으로 나오라!”
결국 그의 순서가 됐다. 메시가 받기로 예정된 자작위는 지나간 지 오래였다.
아헨탈 자작은 열리지 않는 왕실 홀의 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곁에 서 있던 에레나와 바실러스가 다녀오라 손짓하자 그제야 발을 뗐다.
금실로 수놓아진 기나긴 붉은 카펫을 밟으며 아헨탈 자작은 홀의 가장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까지 오는데 오래 걸렸구나…….’
아헨탈 가문의 오랜 한이 풀리는 기쁨, 에이러스가 없는 슬픔, 메시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
자작은 복잡한 심정이 되어 붉은 길을 걸었다.
모든 이가 그런 자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들도 스쳐 지나갔다.
왕당파의 일원들은 물론이고 다섯 손가락까지.
펜란지 공작과 저나이스 후작은 느긋하게 박수를 치며 새 동지에게 축하를 보냈고,
로힐 백작은 험악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이내 표정을 바꿔 씩 웃어 주곤 다시 얼굴을 굳혔다.
마지막으로 왕의 단상 가까이에 자리 잡은 바스카스 후작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묵묵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아헨탈 자작은 이윽고 아시리스 왕의 앞에 섰다.
이제 한쪽 무릎을 꿇을 차례.
왕의 명령과 함께 아헨탈 자작의 몸이 천천히 숙여졌다.
그 순간이었다.
철컹!
홀의 문이 열리는 쇳소리와 함께 홀 바깥의 소음이 내부로 밀려들어 왔다.
홀 안의 웅성거림은 커져만 갔고,
모두가 새로 입장한 ‘누군가’에게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를 쳐다보지 않고 등을 돌리고 있는 건 아헨탈 자작만이 유일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누가 방금 도착했는지, 돌아보지 않아도 아헨탈 자작은 곁눈질로 알 수 있었으니까.
“이런… 미친…….”
고개를 돌린 바스카스 후작의 얼굴이 흉신 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