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53
152화
오랜만에 만난 메시와 에레브가 해후를 하는 동안.
응접관 별실에 머물고 있는 바스카스 후작은 조금 전 목격한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헨탈 후작의 부인이 그 이종을 적대시한다?’
비록 이종의 기세에 꺾여 겁에 질린 초식동물처럼 시선을 회피했으나, 그녀는 마나연공법 하나 익히지 못한 평범한 여인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사도를 향해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쏘아볼 수 있는 그 기개와 배짱을 높이 평가해야만 했다.
쿵쿵. 노크 소리가 들리자 바스카스 후작은 기다리던 게 왔다는 듯 방문을 허가했다.
손님은 병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나비가 일반 사병으로 변장한 모습이었다.
“알아보았습니다.”
“수고했다. 후작 부인이 왜 그 이종을 싫어하는 거지?”
“오랫동안 내부적으로만 알려진 문제였습니다. 아헨탈 후작 부인이 이 공자를 싫어한다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대공자만을 신경 썼고 이 공자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흐음. 그제야 바스카스 후작은 엘로이 부인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공자를 데려온 이종이 가문의 은인이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이 공자를 뒤에서 밀어줬겠군. 엘로이 부인에겐 당연히 거슬리는 존재였을 테고, 그러다가…….”
에이러스가 죽었다.
아헨탈 후작과 그 이종을 따라나섰다가 왕도로 가는 길에서 사망.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시신조차 찾지 못한 죽음이라 하니 엘로이 부인의 마음은 찢어졌을 터.
아니, 애초에 그 사인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되레 큰 의문을 품고 있을 듯했다.
‘이거 뭔가 있군……. 대형 스캔들의 냄새가 나.’
“예. 대공자가 사망함으로써 결국 이 공자가 후계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가장 이득을 본 건 이 공자인 셈이지요. 그 탓에 후작 부인이 이종에게 강한 증오심을 품은 게 아닐까, 높은 확률로 짐작됩니다.”
“그 이종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흉수가 아닐까 의문을 품었겠군. 거기다 싫어하는 아들을 후계자로 격상시켰으니 원수와도 같겠어.”
그녀가 왜 둘째 아들을 외면하는가에 관한 이유도 알고 싶었으나, 그에 관해서는 백나비도 파악을 못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왜 싫어하는가’와 같은 이유가 아니라 ‘싫어한다’는 현상 자체였다.
“그 시기면 백나비의 정보망이 멀쩡할 때군. 대공자 사망에 대한 정보가 있나?”
“하이리언 백작령이 워낙 험지인데다가 별 영양가도 없는 곳이라… 파견 나간 대원이 없었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 사건 중요도를 하급으로 판별하여 3명이 파견되어 나갔는데, 전말은 못 알아냈지만 수상한 점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때라면 바스카스 가문과 아헨탈 가문과의 큰 접점이 없었고, 아헨탈 정보대가 바스카스 가문의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경계’ 정도만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중요도를 최하가 아닌 하급으로 변별했다.
“말해 봐라.”
“하이리언 백작령은 콜튼 산맥을 가까이 뒀기에 몬스터의 인간 사냥이 잦습니다. 아헨탈 후작이 방문했을 동안에도 몇 차례나 영지의 마을들이 습격받았지요.”
큼큼, 백나비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몬스터의 습격은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럼 그 이후 보이는 현상은 명백합니다. 건물 수복과 마을 재건을 위해 목재를 들여오고, 환자 치료를 위해 약초를 사들이고 치료사를 부르지요.”
“한데?”
“하이리언 성까지 몬스터 웨이브가 있었다면 거기까지 이르는 데 몬스터가 지나쳐야 할 마을이 무려 3개나 됩니다. 당시 그 마을들은 습격 이후에 보여야 할 현상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그린 스킨들이 먹잇감을 놔두고 견고한 하이리언 성만을 노려 공격했을 리는 없었다.
재밌는 사실들이 밝혀지자 바스카스 후작도 드물게 웃음을 보였다. 그걸 보자 기세를 탄 백나비는 더 열심히 떠벌렸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이리언 성 안의 귀족이 몬스터 웨이브로 사망하려면 그만큼 인적 피해가 극심했다는 말인데… 대공자 사망 이후로도 고용인을 보충하거나 병사를 모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몬스터 웨이브가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하구나. 그에 관한 증거는?”
당시 하이리언령을 오가는 유일한 상단의 장부를 확보했다고 백나비가 대답했다. 평소 그 상단을 통해 약초나 노예를 구입할 테니 적합한 증거가 될 것이다.
전후 관계가 대략 파악되자 바스카스 후작은 이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했다.
요리법에 따라 아헨탈 가문의 세를 크게 갉아먹거나 회복하기 힘든 갈등을 심어 줄 수 있으며, 또는 아헨탈 후작에게 튼튼한 목줄을 채울 수 있는 큼직한 재료였던 것이다.
‘만일 대공자의 죽음에 아헨탈 후작과 그 이종의 관여가 있었다면… 이보다 큰 추문은 없지. 자식을 죽인 비정한 귀족과 그것에 개입한 사도라?’
명분보다 힘이 앞서는 세상이라지만, 그렇다 해서 명분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의 재밌는 가설이 세워졌다. 이 가설이 맞고 그른지는 중요치 않다.
심증뿐인 이 추문이 구체적으로 살을 입고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
아헨탈 후작과 이종이 앞으로 하려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해 온 일 모두가 재평가받게 될 터.
예를 들면, 아헨탈 후작에겐 작위 취소도 가능하다.
후작위를 받은 건 아헨탈 후작 본인의 공일지 모르나, 백작위는 에이러스가 얻어 낸 공이었다. 그런 에이러스의 죽음에 후작이 관여된 사실이 밝혀진다면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아시리스 왕이 비호한다 해도 줄어든 왕권으론 뒷배가 되어 봐야 악영향만 끼칠 거다. 도리어 아시리스 왕이 먼저 손을 놓는 재밌는 광경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사도에겐 어떨까?
제아무리 신탁을 받아 사도로 삼았다 주장하지만, 신탁에 대한 진위 여부는 교황의 말일 뿐이다. 아직 사도로서의 능력도 보여 주기 전이니…….
이런 상황에 도덕적 결점을 지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큰 파장이 일어날 거다. 지금 벌이고 있는 ‘성전’부터가 옳고 그른지를 따져 보는 재판대 앞에 세워져 처음부터 살펴보게 되겠지.
특히 교단의 교국 성립을 항시 염려하고 견제하려는 다른 8왕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안 그래도 지금 ‘신탁’과 ‘사도’의 등장으로 교단의 영향력이 커질까 전전긍긍하며 관심을 두고 있을 텐데, 먹이를 던진다면 재빨리 각국에서 물어뜯을 것이리라.
그들이 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무엇이 맞고 그른지는 중요치 않다. 오로지 상대를 이기기 위한 자존심과 권력 투쟁이 될 뿐이다.
바스카스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모든 게 성립되기 위해선 당위성을 보충해 줄 더욱 치명적인 증거나 증인이 필요하다.’
백나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먼저 후작에게 제안했다.
“중요도를 최상으로 정정하고 하이리언령에 백나비를 일부 파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확실한 증거나 증인을 찾겠습니다. 하이리언 백작을 회유한다거나…….”
바스카스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헨탈 후작이나 그 이종은 바보가 아니다. 증거라면 이미 치웠을 테고, 그 영지에서 공신력이 있을 만한 증인은 하이리언 백작뿐인데 진작 구워삶았겠지. 아니면 맹약이라도 걸어 놨거나.”
침묵의 맹약은 어느 귀족 가문이든 비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쓴다. 한 마디로 널리 퍼진 금제법이나 다름없다. 그 손쉽고도 간단한 방법을 안 썼을 리가 없다.
이리되면 사건의 정확한 증명이 어려운데도 바스카스 후작은 노련했다. 그 역시 중앙의 정치에서 오래 살아남은 자인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았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꼭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숫자 놀음처럼 증명할 수 있는 것들로만 딱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 말씀은…….”
“사람의 상상력은 불과 같은 법이다. 적당한 땔감과 부채질을 할 인간만 있으면 아주 활활 타오르지. 우리가 확보한 상단의 장부로 의혹을 제기할 땔감은 찾은 듯한데… 그걸 타오르게 할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이미 바스카스 후작의 머릿속엔 명확하게 한 사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완벽한 사람이었다.
‘아헨탈 후작의 아내. 그녀가 나서서 의혹을 제기한다면… 아주 강렬하겠군.’
이미 바스카스 후작의 눈앞에선 통곡하는 엘로이 부인이 그려졌다. 수많은 귀족 앞에서 제 아들의 죽음을 밝혀 달라 외치며 의혹의 증거물을 내던진다.
충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자신은 적당한 무대와 용기를 낼 합당한 대가만 그녀에게 준비해 주면 된다.
“엘로이 부인을 회유해야겠다.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 봐야겠구나.”
“가능할까요? 지금 있는 후작 부인의 자리를 포기하는 셈인데.”
“자식을 잃은 어미는 생각보다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안락한 삶이 꼭 아헨탈 후작의 부인일 때만 얻어지는 건 아니지.”
“그럼 내일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보고를 마친 백나비가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떴다.
치명적인 맹독을 하나 빚어낸 후작은 이제 취침을 할 법한데도 멈추지 않고 다음 수를 생각해 나갔다.
자신의 수가 상대를 완전히 몰락시키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철두철미함이 지금의 바스카스 후작을 있게 했다.
다음 화두는 적십자단이었다.
‘놈들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가. 적대적으로 돌아서도 할 말이 없는데 아직도 반응이 없다니…….’
며칠 전, 후작의 진영에서 적십자단의 흑마술사들을 본의 아니게 제거해야만 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나, 흑마술사 하나가 살아 돌아갔다. 그러니 보복이 돌아와도 진즉 왔어야 했다.
연락을 따로 취해 봤지만, 돌아온 건 단 한 줄의 글귀가 적힌 서신이었다.
[우리가 따로 찾아갈 것이다.]
‘알아서 올 거라고? 이게 암살 협박인 건지, 아니면 만나서 대화를 해 보자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으니…….’
후작은 어떻게든 그들의 화를 가라앉힐 작정이었다. 아스카론과의 전투는 손해만 막심할 것이다. 사이좋게 공멸을 하면 좋아죽는 건 그 이종뿐일 터.
어떻게든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적십자단의 마음을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쿵쿵.
누군가 별실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일 것이다.
문틈이 살짝 열리고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작님, 아헨탈 후작 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자신이 찾기도 전에 이 야밤에 왔단 말인가.
“안으로 뫼셔라.”
허락이 떨어지자 금발의 현숙해 보이는 미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헨탈 후작 부인은 나이와 거리가 먼 아름다움이 있었다.
바스카스 후작은 그런 그녀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후작의 물음에도 그녀는 후후,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엘로이 부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바스카스 후작이 멈칫했다.
이내 그 진의를 깨닫고서야,
그는 박장대소를 터트릴 수 있었다.
“하하하, 이미 아헨탈 가문은 독이 골수까지 침범한 상태였단 말인가! 아, 참으로 안됐구나, 가련한 로안이여! 등잔 아래가 가장 어두운 법이거늘!”
* * *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성전 집행군의 지휘부는 아헨탈 후작의 집무실에 모이도록 약속이 잡혔다.
집무실은 대리 영주인 에레브가 계속 써 온 곳이었기에 산더미 같은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에레브와 메시, 레토가 먼저 와서 정리를 하게 됐다.
메시는 신혼여행을 보내고 온 축구 선수처럼 하룻밤 사이 피부가 거뭇거뭇하게 좀비가 되어 버린 에레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토 아저씨, 잘 지내신 것 같아 보이네요.”
“그래. 잘 지냈다. 교단의 사도가 됐다지? 정말이지… 형님이 들으셨으면 감격하셨을 거다. 장하다.”
오랜만에 보는 레토와 인사를 나누며 서류를 치웠다.
이걸 보니 그동안 에레브가 고생을 한 게 새삼 느껴졌다.
“이런데도 아직 가주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냥 말 놓으랬지? 에휴… 됐다, 말을 말자. 힘들어 죽겠는데 너한테까지 힘 빼면 뭐 하겠냐.”
에레브는 투덜거리며 서류를 보이지 않는 곳에 쌓았다. 그리곤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부연했다.
“크크, 내가 지금 열심히 일하는 걸로 보이지?”
“……?”
레토는 저게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레브를 쳐다봤다.
“잘 생각해 봐라, 메시. 지금은 이렇게 개고생해서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가주가 된 이후 언젠가 아헨탈의 성장도 멈출 거란 말이지. 세상에 영원히 성장하는 가문은 없으니깐 말이다.”
“그렇겠죠.”
“그때부터 가주의 일은 지금처럼 많지 않을 거다. 현상 유지만 하면 된다는 거야. 그럼 나는 시간도 널널해지니 바깥으로 돌아다닐 기회가 많겠지?”
“…그렇겠죠.”
슬슬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지 감이 왔다.
“젊었을 때 고생해서 기반을 닦아 놓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가주로 떵떵거리며 놀 수 있단 말이다! 흐흐. 어떠냐, 무릎을 탁 칠 만큼 뛰어난 계획이 아니냐?”
“무릎을 칠 거 같진 않고, 후작님이 들으셨다면 뺨을 칠 거 같군요.”
“크하하! 그때쯤이면 아버지도 은퇴하셨을 텐데 누가 날 말릴 수 있단 말이냐!”
으음, 조금 성장한 줄 알았더니…….
역시 망나니의 근본은 어디 가는 게 아닌 듯했다.
에레브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더듬더듬 뒷말을 덧붙였다.
“메시, 그땐… 너도 한가할 테니… 같이 여행이나 다니면서 실컷 노는 거다. 어때? 에레나도 끼워서 말이다. 음… 거기 약초꾼, 네 녀석도 함께하는 걸 허락해 주지.”
“전 사양하겠습니다.”
“뭐야, 기껏 말해 줬더니!”
레토의 칼 같은 거절에 얼굴이 빨개진 에레브가 발광을 하기 직전이었다.
벌컥,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왕태자 계파를 대표하여 성전에 참여한 애버든 후작.
그다음은 이 왕자 계파를 대표하여 성전에 온 바스카스 후작.
그리고… 성전 의용군을 이끌게 된 호스텔치안 백작가의 셋째인 란폴드였다. 자기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닌 걸 아는지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애석하게도 의용군 참여 가문 중 호스텔치안 가문이 가장 성세가 컸다.
애버든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영주 대리가 젊어서 그런지 기운이 넘치는군.”
“아헨탈 후작과는 영 딴판인 거 같군요.”
바스카스 후작의 뒷말이 사실상 호부견자를 의미하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슬쩍 메시와 레토가 곁눈질로 에레브를 보자 그의 이마 힘줄이 살짝 불거진 게 눈에 보였다.
자리를 치운 집무실에 다섯이 책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착석했다.
레토는 비서처럼 차를 내왔고, 미식가로 유명한 애버든 후작이 차를 음미하며 전형적인 귀족의 수다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호응하는 상대가 있을 때 가능한 법.
메시는 아랫사람도 아니니 애버든 후작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고, 에레브는 입을 꾹 닫고 바스카스 후작을 눈으로 흘기고 있었고, 바스카스 후작은 차만 마시며 귀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오직 란폴드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애버든 후작의 대화 상대가 되었으나, 그것이 한계에 도달하자 싸늘한 침묵만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그때 먼저 입을 연 건 바스카스 후작이었다.
“이제 좀 회의를 할 수 있겠군. 첫 번째 안건이오. 이 공자, 오는 길에 바스카스군의 치중 물자가 불에 타는 사고가 있었네. 그래서 아헨탈 령에서 보충을 해야 하는데, 도움을 좀 줬으면 좋겠네.”
기다렸다는 듯 에레브가 입을 열었다.
“이 공자가 아니라 아헨탈 영주 대리입니다, 정정해 주시고… 공적인 자리에선 제가 아헨탈 후작을 대리하고 있으니 제게 존중을 표하지 않는 건 제 아버지께 존중을 생략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밝힙니다.”
“…좋소, 아헨탈 영주 대리. 그럼 앞서 내가 말한 부분에 대답해 주겠소?”
“그래야지요. 물론 거절입니다.”
푸훗.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시던 란폴드가 입에서 찻물을 뿜었다.
바스카스 후작의 언성이 조금 올라갔다.
“영주 대리, 내가 부탁을 하는 식으로 말하니 착각을 하나 본데…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일개 영지전이 아닌 성전이고, 왕의 명을 받아 집행하는 일이오. 당연히 그대 영지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사안이고, 그대 가문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은 흔쾌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오.”
“크크, 아… 그렇습니까?”
“이제 아셨소?”
메시가 에레브의 웃는 낯짝을 볼 땐 전혀 알아먹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알았지만, 답은 똑같습니다. 거절합니다.”
“크… 크흐음…….”
애버든 후작이 고개를 살짝 돌려 웃음을 참는 눈치였다.
바스카스 후작이 분노하려는데 에레브가 재빨리 설명을 끼워 넣었다.
“지금 우리 영지도 식량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크롬벨령이 엉망이 된 덕분에 그쪽의 인구가 아헨탈로 집중된 상황입니다. 우리 영지민들과 피난민들을 먹여 살릴 것도 시중에 부족한데… 무슨 얼어 뒈질 치중 물자입니까?”
“흠… 푸흠… 음, 그래. 그렇겠소, 아헨탈 영주 대리.”
애버든 후작이 힘겹게 그 말을 수긍했다.
“그리고 지금 입에 처넣을 수 있는 건 죄다 가격이 폭등한 상태입니다. 이거 물가 잡는 것도 죽겠는데… 치, 치중 물자요?”
끝에 말을 더듬는 건 꼭 놀리는 어투였다. 바스카스 후작의 안면 근육이 흔들리는 게, 평정심이 곧 깨질 거 같았다.
강약약강의 스킬로 위험을 감지한 에레브는 이내 조금 더 정중한 목소리로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아까 오시기 전에 치우던 서류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최대한 각지의 상단들과 연락해서 필요한 물품들을 적절한 가격에 들이는 일 말입니다. 바스카스 후작님, 부디 기분 나빠 하지 마시고 우리 영지의 사정도 좀 생각해 주시지요. 성전을 한다고 다 굶어 죽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메시는 테이블 아래로 들리지 않는 박수를 짝짝짝 치고 있었다.
에레브는 성장했다.
그것도 아주 그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