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63
162화
“에이, 더럽게 뭐 하시는 겁니까.”
흘러나온 와인이 튈 거리도 아닌데 에레브는 상체를 뒤로 물려 인상을 찡그렸다.
“미, 미안하네. 너무 황당… 아니, 감격스러운 얘기라서 그만.”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하, 후작님 혼자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할 순 없지요!”
에레브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애버든 후작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 요망한 놈이… 바스카스 후작군과 체계를 날름 삼켜서 지휘관만 바꿀 참이로구나.’
성공만 하면 아헨탈이 얻는 이점이 한둘이 아니다.
성전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바스카스 가문이 다 짊어지게 되고, 영광은 아헨탈이 모조리 갖게 된다.
게다가 성전에서 항병들을 대거 소모한다면 지금처럼 관리한답시고 많은 인력이 투입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전쟁이란 큰일을 겪고 나면 없던 소속감도 생기기 마련이지. 항병들이 녹아들기 딱 좋아.’
그간 세간에 알려져 있던 아헨탈 가문 망나니에 대한 소문이 잘못된 것임이 확실해졌다. 꿍꿍이가 제법이었다.
애버든 후작은 목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위험할 텐데……. 자네가 적십자단과 싸워 본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 쉽지 않은 일이야.”
“엥, 애버든 후작님도 적십자단과 정식으로 부딪치는 건 처음 아니십니까?”
“…….”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긴 했다.
“내 말은 그런 게 아닐세. 살아온 경험치가 다르다, 이 말일세. 나 역시 흑마술사와의 전투는 잘 몰라도 전쟁은…….”
“애버든 후작가도 가주님 대에 전쟁 경험이 전무한 걸로 압니다만. 아, 참고로 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크롬벨 가문과의 전쟁에서 제 활약이 대단했지요.”
‘…이 새끼가?’
애버든 후작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눈치는 챘지만, 저 애송이 놈은 작정을 하고 바스카스 후작군을 먹으러 온 게 분명했다.
적당히 짬과 권위로 눈치를 주면서 눌러 보려 했으나, 에레브는 누를수록 튀어나오는 스프링 같았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
에레브의 약자 멸시가 그에게 적용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사정을 알 턱이 없으니 아직도 에레브를 어린 후계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애버든 후작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노호성을 터뜨렸다.
“내가 이리 돌려 말했는데도 고집을 부리다니. 눈치가 없는 건가, 모른 척하는 겐가? 나는 바스카스 후작과 함께 전하의 어명을 받아 성전에 참여했네. 그런데 후작이 없어졌으니 그의 군대는 내 아래로 편제되어야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에헤이,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두 분이 합작 관계면 모를까, 왕위 계승을 걸고 경쟁을 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잘못 들으면 저들의 지휘권이 애버든 후작님에게도 있는 줄 알겠습니다.”
“그러는 자네도 없지 않나!”
“없지요. 하지만 애버든 후작님, 자알 생각해 보십시오.”
에레브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저들을 관리하는 데 가장 많은 돈과 인력, 정성을 쏟는 게 어딥니까?”
“크흠, 그야… 아헨탈 가문이지. 그 노고엔 차후 내가 따로 감사의 표시를…….”
“크하하하! 감사의 표시 말입니까? 제가 그걸 받자고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들여서 이 개고생을 한단 말입니까? 하하하! 아이고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광소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애버든 후작은 자기가 말하고도 염치가 없었음을 아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만!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흐흐, 손 떼십시오.”
“뭐라?”
“바스카스 후작군에게 관심을 끊으시라, 이 말입니다.”
“허… 싫다면?”
“아, 싫으시다……. 그럼 저도 관리에서 손 떼겠습니다. 어디 애버든 후작님 혼자 해 보시지요. 감옥에 있는 흑접 기사도, 백나비도 넘겨드리겠습니다. 걔네, 많이 무서운 애들입니다. 한번 잘해 보시지요.”
“…….”
애버든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정규 병력이 이천 미만인데, 바스카스 군은 병사만 삼천에 용병만 오백 가까이로 추산됐다. 일이 그리된다면 덩치보다 큰 것을 먹어서 소화해야 하는 구렁이 꼴이 난다.
거기다 흑접 기사단과 백나비의 무력은 그날 야외 행사장에서 보지 않았던가? 애버든 기사단만으론 절대 감당 불가였다.
그래서 아헨탈을 지원하며 옆에서 조금씩 소화시킬 참이었거늘…….
‘…이놈이 내 앞에서 배를 까고 드러누워?’
지금까지 아헨탈이 적극적으로 포로를 관리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도시 아헨탈이기 때문이었다. 관리에 실패해 반란군으로 돌변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니까.
그런데 저 미친놈은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저들 먹일 식량도 알아서 하시고 관리할 인력도 알아서 하시고. 아! 교단에서 심문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도 달라는데, 그것도 알아서 하십시오. 그 뒤에 발생하는 일의 책임만 오롯이 후작님께서 짊어지시면 됩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일개 영지전이 아닌 성전이고, 나는 왕명을 받아 성전에 참여하는 몸이야! 당연히 아헨탈은 우리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단 말일세!”
저도 모르게 저번 바스카스 후작이 에레브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반응은 달랐다.
애버든 후작은 바스카스 후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쾅!
분노로 테이블을 내려치자마자 요리가 담긴 그릇이 와장창 산산조각 났다.
“자, 자네…….”
“아이 참, 손이 미끄러졌네.”
물 마시다가 살짝 흘린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어투였다. 그런데 눈빛은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물 곳을 찾는 그것과 같았다.
“후작님… 자꾸 의무, 의무 하시는데… 아헨탈 가문은 자원봉사 단체가 아닙니다. 자꾸 그러시면 저도 선을 넘을 거 같습니다만…….”
속으로는 ‘이미 선 넘었어!’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애버든 후작은 살살 달래듯이 에레브를 다독거렸다.
“…이보게, 영주 대리.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잘 생각해 보게. 괜히 아헨탈의 의무와 역할을 말하겠나? 나 혼자 저들을 관리하다 일을 그르치면 도시 앞에서 큰 난리가 터지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나?”
“그런 일이 터지면 저희가 어련히 알아서 잘 막지 않겠습니까. 웬 걱정이십니까……. 그리고 일이 터지면 애버든 후작님, 자신부터 먼저 걱정하셔야지요.”
“…나?”
“반란이라도 일으켜서 눈 뒤집히면 쟤들이 성벽 튼튼한 도시를 먼저 공격할까요, 아님 여태 관리한답시고 깝죽거린 애버든 후작군을 공격할까요?”
애버든 후작은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친놈이 말하니 일이 진짜 그리될 것 같다.
“아, 그리고…….”
그런 와중에 에레브가 조곤조곤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운 좋게 바스카스 후작군을 잘 흡수해서 크롬벨령으로 출발했다고 칩시다. 그럼 보급을 받을 곳이 아헨탈뿐일 텐데… 후작님이 보기엔 제가 뒤끝이 있어 보입니까, 없어 보입니까?”
“…자, 자네!”
푸들푸들…….
애버든 후작의 늘어진 볼살이 분노로 떨렸다. 이 미친놈이 자신을 겁박하는 건가?
다른 놈이 저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성전을 방해했다간 상상도 못 할 역풍에 직면할 테니까.
하지만 미친놈이 저런 소릴 하니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비난조차 감수하고 일을 낼 것만 같았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저 눈을 보라. 진짜 저지를 놈이었다.
“저희, 과식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요. 괜히 먹다 체해서 다 된 성전까지 조지지 마시고… 각자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는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러니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이런… 나쁜 놈……!’
하지만 애버든 후작은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왕위 계승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도 큰 성과였다. 욕심을 포기하는 대신 아헨탈의 지원을 받아 성전을 빈틈없이 수행하는 게 더 남는 장사였다.
“…항병들은 어찌 포섭할 참인가? 내부의 이단은 물론 불순분자까지 있을 텐데. 지금처럼 솎아 낼 참이라면 난 못 돕네. 내 병력은 다 뺄 참이니까.”
“흐흐, 사소한 복수입니까? 다 빼셔도 됩니다. 솎아 낼 방법이 있으니까요.”
에레브의 시건방진 웃음에 후작은 혀를 찼다. 저 망나니가 대체 무슨 속셈일까…….
* * *
바스카스 후작군에 소속된 자유민, 릭커스는 자신의 귓가에 맴도는 소문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같이 훈련을 받았던 동료가 이런 낭설을 제 앞에서 몰래 떠들어 대도 마찬가지였다.
“바스카스 후작님이 괴물로 변했다고? 적십자단의 간자라니?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쉿. 그게 진짜든 아니든 지금 우리 꼴을 봐. 저놈들이 뭐라 하든 따르지 않으면 가만히 안 놔둘 작정이라고!”
동료의 말처럼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무장 해제를 당한 후 50명씩 나뉘어 따로 생활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루에도 두세 번씩 사제들이 찾아와 뜬금없이 축언을 외우게 하며 자신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거기다 심각한 건 막사 앞에다가 바스카스 후작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 깔렸는데, 이를 밟아 보라는 둥 억압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저, 전 못 하겠습니다. 수십 년이나 우리를 다스린 영주님이신데……!”
“저 이단을 끌고 가시오.”
“사, 살려 주십시오! 난 이단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사제가 손짓을 하자 거부권을 행사한 병사들이 성기사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런 광경이 이어지자 살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그림을 밟아 대기 시작했다. 릭커스도 어느새 동참했다.
닳고 닳아 감정이 무뎌지고 그림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졌을 때쯤.
사제들은 50명의 병사들을 한 명씩 순차적으로 앞에 세워 후작에 관한 불만과 악담을 퍼붓도록 시켰다.
“바, 바스카스 후작님은… 크흑,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내 가족이 겨울을 나게 해 주셨…….”
“저놈도 끌고 가시오.”
릭커스는 자신에게 경고를 해 주던 동료가 끌려가는 모습을 씁쓸하게 쳐다봤다.
이 모든 과정을 넘겼다 해도 24시간 항시 통제하는 성기사와 사제들은 자신들을 더러운 오물 보듯 대했다.
감시를 위해 가림막이나 천막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제공되는 식사엔 벌레와 모래 따위가 섞여 나오는 등 대우는 최악이었다.
메시와 에레브가 이들 앞에 나선 시기는 그런 때였다.
불만이 최고조로 이르렀으나 살기 위하여 입을 꾹 닫고 오로지 반란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을 시기.
모처럼 다시 모인 기천의 바스카스 후작군은 끓는점에 도달하기 직전의 물과 같았으며, 서로가 눈빛만으로 일치단결하고 있었다.
‘몸을 던져서라도 싸우는 거다!’
릭커스는 단상 위에 오른 에레브를 노려봤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 준비가 될 무렵.
“그간 모두 고생이 많았다!”
“……?”
음성 마법으로 확대된 에레브의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단이니 뭐니 헛소리가 나오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격려가 돌아온 것이다.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힘들었을 것이다. 가이아의 영광을 위하여, 악을 물리치기 위하여 성전에 참여한 자신들이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했겠는가!”
수천의 병사가 주춤거렸다.
이 세상의 사람 중 가이아 여신교를 믿지 않는 자는 드물었다. 태어나자마자 숨 쉬듯이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게 신앙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단 취급을 당했으니 이는 모욕적이고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걸 에레브가 긁어 준 것이다.
“너희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 난 끊임없이 너희의 결백을 주장했다. 세상 어느 천지에 성전을 위해 전쟁터로 오는 이단이 있단 말이냐! 소중한 가족을 고향에 두고 목숨을 바치러 말이다!”
크흑.
눈물이 많은 병사들이 가족 얘기에 벌써부터 울먹였다. 분노에 젖어 있던 릭커스도 거기선 입술을 깨물었다.
“나, 에레브 폰 아헨탈이 너희가 겪은 수모를 어찌 다 위로해 줄 수 있겠느냐마는, 이렇게라도 사과를 하고 싶다! 미안하다―!”
에레브가 눈을 질끈 감고 허공에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 절실함이 닿은 걸까. 후작군의 병사들도 어느새 끌어올리던 기세를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때, 백인장급 병사 하나가 외쳤다.
“이런 병신들, 고작 저 말에 우리가 받은 부당한 대우를 잊고 넘어갈 참이냐! 후작님의 초상화를 밟지 않는다고,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끌려가 죽은 동료들을 생각해라, 이 머저리들아!”
그 일갈에 릭커스도 끌려간 동료가 문득 떠올랐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희생된 친구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에레브가 웃으며 말했다.
“죽었다니 무슨 말인가?”
“……?”
“그들은 건강하게 잘 있다. 따로 심문을 위해 데려갔던 것일 뿐,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았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때마침 저기 오는군.”
에레브가 가리킨 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릭커스는 헤어졌던 동료가 멀쩡히 걸어오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대들을 모욕하는 것도 미안한데 어찌 목숨까지 앗아가겠는가? 나, 에레브 폰 아헨탈이 저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음을 알아다오!”
그 말에 모두가 에레브를 다시 보았다.
옛날부터 소문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지금 보니 그 평판이 완전 잘못된 게 아닌가?
따지고 보면 뺏었다가 돌려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 순간엔 아무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스카스군의 눈에는 에레브가 그 누구보다 자애롭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제 생각과 다르게 흐르자 조금 전의 병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전부 정신 차려! 억울하게 죽은 후작님이 눈도 못 감고 구천을 떠돌고 계실 거다! 우리가 그분의 초상화를 밟고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욕을 했던 건 오늘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나!”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메시가 입을 열었다.
“흐음, 거기 병사는 이름이 뭔가?”
“간악한 네놈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영주님에게 이단의 오명을 씌워 죽인 개자식아!”
“어이가 없군. 교단의 사도이자 가이아 여신께서 선택한 내가 바스카스 후작에게 누명을 씌웠단 말인가? 내가 왜?”
“그, 그건……!”
병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고, 메시는 예상했다는 듯 자신의 뒤편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큰 짐수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괴, 괴물이다.”
“저게 뭐야? 트롤인가? 아니… 악마?”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의 시체가 실려 있었다.
사도가 저걸 왜 보여 주는 걸까, 그 의도를 생각해 보자 금세 정체가 예상됐다.
“설마, 저게 후작님이라고……?”
“거짓말이다! 괴물의 사체가 어찌 후작님이란 증거가 된단 말이야!”
메시가 또 한 번 신호를 주자 다른 짐수레가 끌려왔다. 이번엔 살아 있는 괴물이 그 안에 있었다. 입에 찬 구속구를 풀자마자 원한 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네놈을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거야, 이종!]
할리스였다.
사지를 다 잃은 채 몸통만으로 살아서 펄떡거리는 충격적인 광경에 바스카스군 전원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괴물로 변했다 해도 기존의 얼굴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바스카스 후작군 중에서 할리스의 얼굴을 모르는 무신경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바스카스 가문의 소드 마스터조차 이런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흑접 기사들도 이런 꼴이 되었지. 정녕 이걸 보고도 바스카스 후작이 무관하다 생각하는 것이더냐!”
음성 마법으로 인해 확대된 메시의 일갈이 쩌렁쩌렁 울렸다.
수천의 바스카스 후작군이 창백해진 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저런 물증이 눈앞에 있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수장의 죄만으로도 아랫사람 전체가 연루되었다 보고 몰살시키는 게 일반적인 시대였다.
후작군의 병사, 릭커스도 이 순간 한탄했다.
‘아, 이래서 저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뒤편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제 죽은 목숨이구나……. 모두가 사도의 처분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예상 밖의 말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네놈들 전부를 이단 재판에 세우려 했으나…….”
“……?”
“감사히 여겨라. 너희를 믿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에레브가 넉넉한 미소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어찌 결백한 그대들에게 책임을 지운단 말인가? 이 몸이 사도께 몇 날 며칠을 무릎 꿇고 빌어 확답을 받았다! 그대들이 나와 함께 성전에서 공을 쌓는다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오명을 깨끗이 씻겨 주겠다고. 그러니 그대들은 하등 걱정할 것이 없다! 오직 나, ‘에레브 폰 아헨탈’만 믿고 따라오면 되는 것이다! 내 직접 바스카스 후작의 후계를 죽여 그 피로 너희의 순수를 증명하고, 성전에서 그대들을 이끌어 무궁한 영광을 직접 안겨 주겠다!”
―와아아아아!
―에레브 폰 아헨탈, 만세! 만세!
에레브가 4선 당선이 확정된 국회의원처럼 두 손을 높이 들어 제 인기를 즐기자 수많은 병사가 그 이름을 연호했고.
그들 사이에서 눈을 빛내며 호시탐탐 이 형세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