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68
167화
[지금… 이 몸에게 연기를 하란 건가?]
아스카론(티끌)이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메시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태도였다.
[자넨 내가 너무 편해져서 내 명성이 잘 와닿지 않나 본데… 이 몸은 적십자단의 수장이자 모든 흑마술사들의 아버지. 그리고 극마에 오른 흑마종사. 어쩌면 72악마 군주와 동급의 자리에 올라섰을지도 모르는 위대한…….]
“예에. 위대한 아스카론(이셨던 것)이지요.”
[알면서 그런 걸 시킨단 말인가. 그것도 엘로이에게 하라니!]
“언제는 별개의 존재라면서요. 필요할 땐 아스카론이다가, 필요 없을 땐 별개의 존재가 되면 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끌끌… 그렇다 해서 엘로이의 오라비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 자네가 내게 하라는 건 동생에게 사기를 치란 걸세!]
‘흑마술사 주제에 사기를 따지고 있어…….’
[그 표정, 뭔가 불쾌하구먼그래.]
메시는 턱을 긁적이다 다시 설득에 나섰다.
“약조해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엘로이 부인이 불이익 받는 일 없도록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네.]
“전 지금 최대한 노력해서 그 방안을 얘기한 겁니다. 제 대본대로만 하시면 동생분이 행복해질 수 있는데 왜 그걸 마다하시는 겁니까? 고작 연기가 싫다고?”
[…….]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왠지 아스카론(티끌)의 얼굴은 궁색할 것 같았다.
결국 할 말이 없어진 그는 메시에게 계획의 골자를 전달받으며 디테일한 부분을 잡아 갔다. 어느새 강제 동참 당한 것이다.
[엘로이에겐 흑마술을 가르치지 않았네. 흑마술에 자부심이 없는 건 아니네만, 그 아이가 헤쳐 나가기엔 상당히 잔혹한 세계니까. 별다른 지식이 없을 테니 마법적 오류를 지적하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끌끌… 착한 오라비 흉내를 내라고? 그럼 평소대로 하면 되겠군. 흠. 아까부터 그 표정, 불쾌하군. 어쨌든 자네가 짠 줄거리대로라면 차라리 마신지경에 집착하기 전 내 모습이 엘로이에게 신뢰와 호감을 주기 좋을 걸세.]
[…왜냐고? 그야 지금과 거의 비슷했거든. 더 높은 경지가 보이지 않으니 집착할 것이 없어 평온했네. 지금? 지금은 육체를 잃고 나니 인간으로의 집착이 대부분 사라졌다 할까. 오감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그러할까. 덕분에 이혼대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낼 수 있었지만… 본신의 나로선 힘들 테지.]
* * *
[엘로이.]
“오라버니……?”
엘로이 부인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손을 떼시면 안 됩니다, 부인.”
엘로이는 메시의 지적에 얼른 거울에 손을 댔다.
[그래, 직접 대화는 오래간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이자가 우리의 비밀을 다 알고 있냔 말이에요?”
[진정하거라, 엘로이. 사정을 설명하자면 좀 길단다.]
“지, 진정하게 생겼어요? 대체 무슨 사정이요! 프루논을 통해 연락할 땐 이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게 문제다, 동생아.]
“네?”
엘로이 부인의 음성에 의문이 잔뜩 어리자 메시가 끼어들었다.
주연 배우의 연기력이 별로라면 조연 배우라도 연기파를 섭외해야 하는 법이다.
“엘로이 부인, 혹 지금까지 이상한 걸 못 느끼셨습니까?”
“…나에겐 지금보다 이상한 상황은 더 없어요.”
“그런 걸 묻는 게 아닙니다. 아스카론에 대한 질문이죠.”
아스카론에 대한 질문?
메시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알던 오라비가 다르게 느껴지거나 변했다는 생각이 들 때……. 제 말은 그런 순간이 없었냐는 거지요.”
“그게 무슨…….”
엘로이 부인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하지만 말을 허투루 듣고 흘려넘기는 건 아닌지, 언뜻 생각을 하는 듯 눈동자가 구석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메시는 그런 그녀의 등을 살짝 떠밀어 주기로 했다.
“충격적인 얘기겠지만… 믿으셔야 합니다, 부인.”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를…….”
[엘로이, 난 지금 이 거울에 봉인을 당한 상태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아스카론의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이 거울에 영혼을 봉인당한 상태이지요.”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럼 여태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오라버니는 누구인데요?”
“누구겠습니까?”
오히려 들어온 역질문.
엘로이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지금껏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오라버니가 가짜란 건가요? 그리고 봉인을 한 장본인이고?”
“영명하시군요.”
메시의 확답에 엘로이는 작은 탄성을 흘렸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엘로이, 네가 나를 믿어 줘야 한다. 네가 이 오라비를 믿어 주지 않으면… 이 오라비는 어떡하느냐.]
“…….”
[삼촌이 습격자들에게 돌아가신 그날, 불타는 언덕에서 약속하지 않았더냐. 무너진 아인하르츠 가문과 피를 잇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말기로. 아무도 믿지 말고 서로만을 믿기로 하지 않았더냐!]
생각보다 격정 연기를 잘하는데.
메시가 만족스러워할 정도였으니 엘로이 부인이 안 넘어가고 배길 수 없었다.
구체적인 기억까지 곁들이니 그녀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신 거예요?”
넘어왔군.
[악마에게 속아 버렸다. 더 높은 경지로 날 안내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 이리되고 몸을 빼앗기고 말았지…….]
“그런, 맙소사…….”
“엘로이 부인, 전 우연히 아스카론이 봉인된 거울을 주워 지금까지 쭉 함께해 왔습니다. 전 그의 몸을 찾아 주기로 약조했지요.”
그 말에 복잡한 눈길을 보내는 엘로이였다. 사랑하는 아들의 원수지만, 한편으론 사랑하는 오라비의 구원자인 셈이었다.
“왜 이런 사실을 좀 더 빨리 말하지 않았죠? 미리 알았더라면…….”
“왕도에서 거울을 주웠으니, 가장 빨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엘로이 부인은 긴 탄식을 내쉬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현실에 흔들리는 정신줄을 부여잡는 낌새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던 엘로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뭔가 이상하긴 했었죠. 오라버니는 점차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갔으니까……. 아인하르츠 가문을 재건하자는 약속보단 어느새 흑마술에 빠져 그 끝을 보고자 했지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거군요.”
“눈치를……? 그래요. 지금 얘기를 들으니 그런 것도 같군요. 가장 이상했을 때는… 아인하르츠의 순혈을 지키기 위해 낳았던 에이러스를 그릇으로 쓰자고 말할 때였죠. 오라버니의 계획엔 더 이상 ‘아인하르츠’라는 이름은 없었어요.”
마신지경에 집착하게 된 아스카론은 제 동생이 느끼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했다.
기존의 계획대로만 갔더라면 아인하르츠의 혈맥은 아헨탈이라는 껍질을 입고 그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아스카론은 아인하르츠를 이용의 대상으로만 봤다.
“같은 혈족은 이혼대법의 그릇으로 보았고, 둥지로 선택한 아헨탈은 적십자단이 뿌리내릴 거름 정도로 봤군요.”
모든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메시는 엘로이 부인의 입장과 심리가 조금씩 이해되고 있었다.
“맞아요. 오라버니가 아헨탈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드러냈죠. 하지만… 난 그래도 믿었어요. 우리가 한 약속을 오라버니도 잊지 않고 있으리란 걸.”
“…….”
“그 때문에 난 에이러스를 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아이로 키워 내기 위해 얼마나 안달복달했는지 몰라요. 온갖 이른 교육을 시키고 뒤에서 채찍질을 했죠……. 제, 제대로 사랑 한 번 못 주고…….”
그녀가 훌쩍이며 울먹였다.
“나, 난… 그날이 오면 오라버니에게 떳떳하게 우리 아이를 자랑스레 보여 주고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의 아이가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다. 우리가 약속한 대로… 아인하르츠의 순혈이 제대로 이어졌다고. 그리 말하면 오라버니도 다른 마음을… 먹을 줄 알았어요.”
‘그런 거였나.’
저 설명을 듣고 나서야 메시는 그림 하나가 완성됨을 느꼈다.
엘로이 부인이 그려 낸 그림.
그것은…….
“오라비를 설득해 에레브 이 공자를 그릇으로 삼을 참이었군요.”
끄덕.
그녀의 입장에선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안이었다.
제 오라비는 아인하르츠의 피가 이어진 그릇을 찾았으니 만족할 테고, 잘 자란 에이러스는 아인하르츠의 진혈로서 아헨탈의 가주가 될 테니 만족스럽고,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니 행복할 터였다.
다만 그 행복에 ‘에레브’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게 비극이었을 뿐…….
“그래서 이 공자에게 정을 붙이지 않았고.”
어째서 제 자식인데 그리 홀대를 했을까.
매번 수많은 가설이 머릿속에 만들어지지만, 어째서 단 하나의 진실은 항상 그 모든 걸 압도할 만큼 가혹한 걸까.
“일이 이리될 줄 알았다면… 그냥 이쁘다, 이쁘다만 할걸……. 훌륭하게 안 자라도 되니 건강하게만 자라라 할걸…….”
엘로이 부인은 통곡을 하며 후회의 읊조림을 흘려 댔다. 에이러스를 생각하면 눈물만 나오는 듯했다.
물론 그녀의 후회나 슬픔 따위는 메시에게 어떠한 공감도 일으키지 못했다.
자신이 처리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피해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공자에 대한 미안함은 조금도 없는 건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을수록 메시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갔다.
아스카론(티끌)은 제 여동생의 슬픔과 고뇌에 절절하게 감화되었는지 젖은 목소리로 냉큼 사과를 했다.
[…미안하구나.]
“오라버니가 미안할 일이 뭐 있겠어요.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모든 게 다 악마의 놀음이었다니……. 이제야 이해가 갈 뿐이에요.”
어쩌면 자신이 짜 맞춘 이야기는 그녀에겐 구원이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 이야기에선 원망할 대상이 뚜렷하며 사랑하는 오라버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셈이었으니까.
뒤늦게 이 이야기가 전부 거짓이었다고 말해 줘도, 도리어 그녀는 안 믿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자. 어차피 이 여자를 이용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보다 훌륭한 패는 없겠군.’
그리 마음을 먹자 다시 뱀의 혀가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엘로이 부인, 이제 서로 간의 처지를 알았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말해 보세요.”
메시의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이번 성전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오라버니를 위해, 우리들의 눈과 입으로 그대가 나서 주길 원합니다.”
“……!”
돌려 말했지만, 간자가 되란 소리다.
엘로이 후작 부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떨려 왔다. 그것은 분노나 당황으로 인한 떨림이 아닌 듯했다.
한번 꺼졌던 증오라는 잔불에 불이 도로 붙었기 때문이다. 그 목표가 이번엔 뒤바뀐 듯했다.
“비밀은 지켜지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더는 제 사람들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으니까요.”
메시가 무거운 의미를 담아 말했다.
‘적어도 당신이 속인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내란 말이다.’
그 뜻을 알아차린 건지 엘로이는 메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 * *
그날.
엘로이 후작 부인의 창가엔 아주 작은 리본이 달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깊은 밤이 되자 그녀의 방에는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프루논, 잘도 왔구나. 성전십장이 셋이나 머무르고 있는 곳에…….”
“엘로이 님, 이게 다 아스카론 님의 위대함 덕분 아니겠습니까.”
프루논의 주변은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무채색의 영역도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원망의 숲에서 쓰였던 다크 필드의 응용 같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난 내일은 되어야 올 줄 알았어. 그래서 차림새가 좀 그런데…….”
엘로이 후작 부인은 매우 고혹적인 실루엣을 드러내는 보랏빛 실크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남심을 자극하는 묘한 살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50대 여성으론 보이지 않는 여체에 프루논의 목울대가 잠시 꿀렁거렸다.
“크흠. 좋습니… 아니, 괘, 괜찮습니다.”
“뭔 소리야? 내가 안 괜찮다는 건데.”
“시, 실례했습니다.”
“호호, 흑마술사도 이리 보면 아주 귀엽단 말이지.”
40대면 흑마술사로서 한창 기량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리 귀요미 취급을 받으니. 마음 같아선 그냥 확……. 프루논은 ‘빌어먹을 혈연’을 원망해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너야말로 일찍 온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나 본데?”
“기뻐하십시오, 엘로이 님. 아스카론 님이 이번 성전에 직접 참여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정말?”
엘로이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엘로이의 거대한 흉부와 다리 사이에 시선이 팔려 있던 프루눈은 그걸 미처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예. 이번 기회에 아헨탈까지 밀어닥칠 작정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오랜만에 가족이 회포를 푸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 그건 아주 반가운 소식이네. 전해 줘서 고마워.”
“그럼, 엘로이 님께선 무슨 일이셨는지…….”
엘로이 후작 부인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네 얘길 들으니 때마침 내가 좋은 생각을 한 거 같아.”
“무슨?”
“나, 이번 성전에 따라갈 생각이야.”
“……?”
프루논은 이해를 못 한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확인 사살을 했다.
“그러니까… 참전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좋잖아? 오라버니도 일찍 볼 수 있고, 내가 부대에 있으면 정보도 물어다 줄 수 있고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교단 쪽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걱정 마. ‘바스카스 후작의 위협 덕분에 이번 성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깨닫게 되었다. 아녀자의 몸이지만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후방에라도 참여하여 한 손 거들고 싶다.’라고 하니 넙죽 허락해 주던데. 상징성도 있을 거라 하고.”
“역시, 아스카론 님의 혈육다우신 놀라운 지모이십니다!”
프루논은 넙죽 몸을 숙이며 생활화된 아부를 펼쳤다.
“후후, 이미 정보도 있어. 이틀 뒤가 출정식이래. 오라버니한테 잘 전달해 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그날 밤.
반가운 손님은 후작 부인의 침실에만 온 게 아니었다.
부스럭… 부스럭…….
[…뀨?]
오랫동안 잠에 빠져 있던 공주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