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83
182화
만월이 뜬 밤이었다.
완연하게 뜬 밝은 보름달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던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늦은 밤, 메시는 성벽 위에 서서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 떠오른 가설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릴리 양이 그 ‘마드리’일 수 있다……?”
마드리 폰 에이드리언.
사부, 바르셀로의 유일한 여동생이자, 사부의 일기장 내용으론 친모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지녔다고 했다.
그녀는 원망의 숲 유적 내에서 죽은 45인의 벌목꾼 중 하나였으나, 메시는 유적에서 마드리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유적 내의 북문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결국 그 문을 열지 못했지.’
그럼 그녀는 탈출한 걸까, 어딘가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가 사부를 찾지 않았을 리 없다. 적어도 원망의 숲은 다시 한번 와 봤을 테고, 사부는 기적적으로 동생과 재회를 했어야 했다.
…그런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베네딕트로부터 그 이름을 들었을 땐 메시조차 마음의 울렁거림을 참아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이 모든 게 우연이 일치라는 것.’
그저 신의 장난으로 마드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이 33년이 흘러 재탄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사라진 마드리, 그녀를 사랑했던 프로크스, 어린 시절 마드리의 약혼자였던 베네딕트. 그리고 33년이 흘러 그녀와 똑 닮은 얼굴의 릴리.
자신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 우연의 일치들을 정말 우연으로만 봐야 하는가?
‘오흐가나가 1억 666개 나머지 차원의 미래를 내게 연결한 이유가… ‘변수를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랬지. 어쩌면 마드리를 찾는 것도 그 변수에 해당하는 일이 아닐까.’
“예하, 부르셨나요?”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데 릴리가 나타났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마드리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백나비… 그러니까 아헨탈 정보대는 어떻습니까. 말은 좀 듣습니까?”
“뭐, 다들 성격이 안 좋고 손속이 과하며 공감 능력엔 하자가 좀 있는 듯한데… 나쁘진 않아요.”
…말을 안 듣는단 소리군.
백나비는 새롭게 아헨탈 정보대로 편성됐다. 때마침 천공성에서 릴리가 지원을 나오자 메시는 그녀를 임시 고문으로 붙였다.
[천공성의 노하우도 전수해 주시고, 또… 그들에게 백나비가 아닌 평범한 정보원으로서의 삶도 좀 알려 주십시오.]
사실 그녀로선 성가신 부탁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천공성에서 바스카스 후작의 백나비와 전투를 벌여 왔으므로. 얼마 전까지 목숨을 내놓고 싸우던 자들을 가르치라니.
그럼에도 메시는 부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공성의 지부장인 그녀만큼 적절한 인선은 없었다.
메시는 그런 릴리를 향해 물었다.
“혹시, 마드리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마드리? 글쎄요.”
“바르셀로는?”
“바르셀로……. 어디서 들어 봤는데… 아!”
생각난 듯 릴리가 탄성을 질렀다.
“바스카스 후작에게 악몽을 안겨 준 벌목꾼의 이름이 ‘바르셀로’였어요. 그 사람 말하는 거 맞죠?”
제3자처럼 말하는 게 릴리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정말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죠?”
“…갑자기 그건 또 왜요?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시네요. 여자의 나이를 묻다니요. 몰라요. 나, 기분 상했어.”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혹 서른을 넘겼나 싶어서.”
“…서른을 넘기면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목소리에 살기가 담기는 게 뭔가 그릇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여 메시는 말을 바로잡았다.
“아는 분이 릴리 양을 보곤 알던 사람과 닮았다고 해서 말입니다. 혹 릴리 양이 그분의 자식이 아닐까 싶어서……. 그분의 말로는 서른 중반은 되어야 맞으니까요.”
“그거 혹시 베네딕트 경인가요?”
릴리가 관심이 생긴 듯 묻자 메시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를 리가 없죠. 요 며칠간 자꾸 얼굴에 뭐 묻은 것처럼 쳐다보시니.”
“그랬군요.”
“제 나이는 스물여덟이에요.”
‘적어도 베네딕트 경이 바라던 가설은 아닌 듯하군. 그렇다면… 남은 건 세 가지인가. 첫째, 유적을 탈출한 이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았다. 둘째, 신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다. 아니면… 셋째, 마드리 본인이 정체를 숨기고 있다?’
의미 없는 가설 하나를 지웠다. 그러자 남는 건 세 가지. 마드리가 밤하늘의 달을 보며 부연했다.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으음, 말해 주기 싫은데요. 개인적인 거라.”
“…천공성 측에서 뭐든 지원해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필요한 건 릴리 양에 대한 정보입니다.”
“어머, 예하. 천공성은 조직원의 정보를 팔지 않아요. 고로, 이 정보는 천공성의 것이 아닌 제 것이라 별도로 계산하셔야 되겠는데요?”
영업 직원처럼 말하는 릴리였다. 메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만일 가르쳐 준다면 제게 쓸 수 있는 질문권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천공성이라면 제 개인 정보가 꽤 탐나지 않겠습니까.”
“호오… 이제 좀 구미가 당기네요. 우리 예하는 거래할 줄 아신다니까.”
릴리는 그제야 숨기고 있던 사실을 밝혔다.
“전 살아온 생에 비해 기억이 별로 없어요. 대부분 천공성의 성주님께 주워진 이후뿐이라서.”
“…그게 언제입니까?”
“8년 전쯤?”
‘내가 사부님에게 주워진 시기와 같다.’
메시의 눈썹이 구겨졌다. 이건 뭔가 있다고, 자신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제 나이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저 성주님이 절 데려온 날을 스무 번째 생일로 정한 거죠.”
“어디서 데려오셨죠?”
“너무 자세히 캐물으신다. 아세마르 왕국이라고 아나요? 아시리스 근처긴 한데, 탈렌 백작령의 바로 옆에 있는 소국이라 잘 모를 거예요. 아무튼, 그곳의 외곽숲에 천공성의 훈련장이 있어요. 참, 이건 비밀이에요.”
익숙한 이름이다. 탈렌 백작령, 원망의 숲이 있던 영지였다.
메시는 작은 가설을 하나 만들었다.
‘나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힘이 그녀에게도 똑같이 작용했다면?’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그녀도 이 시대로 끌려 들어와 작은 오차로 인해 한 사람은 원망의 숲에, 또 한 사람은 그 바로 옆 외곽 숲에 불시착했다면…….
‘1억 666개의 다른 이은호의 기억을 뒤져 보아도 첫 출발지가 원망의 숲이 아닌 경우도 제법 있었다. 마드리 역시 그리되지 말란 법은 없지.’
그렇다면…….
‘작은 확률이지만… 이 사람이 정말 사부의 여동생일 가능성도 있다.’
메시는 릴리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릴리는 눈을 피하곤 휘파람을 불었다.
‘그걸 확인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사람의 기억을 되찾아 주는 거다.’
릴리의 기억을 찾아 줄 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나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아마 높은 확률로 통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 사실로 밝혀진다면.
자신의 감이 확실하다면.
그토록 궁금했던 그날의 진상에 훌쩍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 *
알란아스터도 볼프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볼프 성의 방비는 며칠 전부터 더욱 엄중해진 상태.
비축한 장작 덕에 화롯불은 활활 타올랐고, 무기와 화살도 수거해 둔 덕분에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해졌다. 군사들도 연회 기간 동안 마음을 놓고 푹 쉬었기 때문인지 사기가 팽배했다.
알란아스터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예하 덕분이군. 적이 오는 날을 알고 미리 대비를 한 후에 싸울 수 있다니.’
이 모든 일은 메시와 아헨탈 후작 부인으로부터 시작됐다.
두 사람이 웬 하녀를 데려와 적십자단의 간자라 밝히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 하녀를 심문해 본 결과, 놀랍게도 진짜 적십자단의 간자임이 밝혀졌다.
조금 정신이 이상한 건지 헛소리도 하긴 했지만 말이다.
‘후작 부인이 흑마종사 아스카론의 여동생이라는 개소리를 해 댔지.’
마도를 신봉하는 자답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아스카론의 혈육이라면 적십자단의 간자를 왜 고발하겠는가?
예하께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더니.
[아헨탈 후작 부인에 대한 소문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대단한 여걸입니다. 적십자단의 숨겨진 지원자였던 바스카스 후작을 목숨 걸고 고발하여 가문을 지킨 분이지요. 그런 고결한 분을 모욕하여 끌어내리는 것도 흑마술사들의 악취미일 겁니다.]
과연, 실로 그렇다며 베네딕트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알란아스터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아헨탈 자작… 아니, 이제 후작님이군. 정말 부러운 사내가 아닌가. 훌륭한 안주인을 가문에 두었으니 아헨탈 가문의 성세가 뻗어 나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
쾌락분독의 영향으로 방황하다 보니 여태 짝이 없었던 노총각 알란아스터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었다. 전쟁을 치르기 전, 그가 달에 시선을 빼앗긴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쿠르르릉…….
새벽이 되자 여름밤답지 않게 기온이 내려갔다.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끼는지 만월을 천천히 지우고 있었다. 달을 보던 알란도 상념에서 벗어났다. 간간이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성벽에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가라앉은 긴장을 다시 끌어올렸다. 악전고투를 치르면서 언데드가 몰려올 때 어떤 징조가 있는지 잘 알았다.
“왔다.”
알란아스터의 말을 신호로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번쩍! 하고 지평선 너머로 수백, 수천에 달하는 검은 인영들이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놈들이 온다아―!”
“언데드 군단이다!”
투다다다다… 크와아악…….
수천이 일시에 만들어 내는 발걸음 소리는 압박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름 먹인 불화살을 준비하라!”
대응책을 훈련받은 기사들이 호령을 내렸다. 불화살이 준비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쏴라아아아!”
파바바바밧―!
기천에 달하는 불화살이 일시에 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수놓았다. 불을 머금은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다가 달려오는 언데드의 신체를 뚫거나 땅에 박혔다.
우연히 머리에 맞은 구울, 전신에 불이 번져 타오르는 마물, 몸에 불화살이 꽂히고도 꿈쩍도 하지 않고 뛰어오는 마수.
미리 땅에 펼쳐 놓은 기름 먹은 가죽에 불이 잔뜩 붙자 그걸 밟고 지나가다 발에 얽힌 괴물들은 삽시간에 재가 됐다.
불은 번져 나가 빛이 밝혀 시야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그제야 기사들은 불화살 쏘는 걸 중단시키고 화살을 아끼게 명했다.
전방에 빛이 환해지자 뛰어오는 괴물들이 더욱 잘 보였다. 사기가 높아진 군사들이라 해도 기가 질릴 만했다.
알란아스터가 이를 감지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장병들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볼프 성의 전 장병들이여.”
마나를 섞은 음성이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앞을 바라보며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의 귀가 쫑긋했다.
“그동안 나를 따라 이 성에서 함께 싸워 준 것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전방의 적들에게 가 있던 군사들의 신경이 점차 뒤로 쏠렸다.
“처음부터 나와 함께 군을 일으킨 기사와 용병도 이곳에 있을 것이고, 형님의 진형에서 도망쳐 나온 기사와 병사도 많을 것이다. 또, 농기구나 장부를 만지던 손으로도 한 팔 거들겠다고 합류한 이들도 있겠지.”
―구아아아악!
시체들이 볼프 성 근처에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다. 알란아스터의 평온하고도 진중한 목소리와 뛰어오는 시체들의 풍경은 묘한 대비를 이뤘다.
“각기 머물던 영지도 다르고 살아오던 삶의 방식도 달랐던 너희가, 알란아스터라는 내 이름하에 이리도 모여 자랑스럽게 싸워 왔다는 게 나는 너무도 감사하다. 적들을 마주하고도 떨지 않으며 당당히 서 있는 너희의 뒷모습을 보자니… 감사의 인사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진심이다, 내 전우들아.”
그의 차분한 어조에서 참된 마음이 느껴졌다.
때문에 긴장에 떨고 있던 병사들도, 곧 다가올 부하들의 죽음이 걱정되던 기사도 마음의 묘한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떨고 있었지?’
‘그래……. 난 이 지옥에서 두 달이나 버틴 용사다. 이제 와 두려울 게 무엇인가.’
전장을 이끌던 존경하는 소드 마스터의 감사 인사. 그 진심에 수성군의 마음은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언데드들이 성벽에 달라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싸우자. 우리는 해 왔던 대로 하면 된다. 그럼 또다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은 기사가 먼저 외쳤다. 그리고 연이어 명령을 내렸다.
“마수 기름에 불을 붙여라!”
냄비에 담긴 기름이 거세게 타올랐다. 두꺼운 장갑을 낀 병사들이 기름이 담긴 큰 냄비를 성벽 아래로 부었다.
기껏 올라오던 언데드들은 불타는 기름에 직격탄을 맞았다. 몸부림을 치다 떨어져 내렸다. 뒤따라 올라오던 것들까지 끌어 내리면서. 불덩이가 된 것들은 성벽 아래의 시체들까지 같이 태워 나갔다.
“우리도 불을 붙여라! 소드 마스터의 전우인 우리가 겁에 질려서야 되겠는가!”
불벼락이 성벽에서 계속 투하되며 공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방해라도 할 작정인지 하늘에서 붉은 벼락이 성벽과 성 안에 떨어져 내렸다. 그 벼락 속에서 약속되었다는 듯 상위 종 언데드들이 등장했다.
원래라면 저들이 오자마자 바빠졌어야 했던 알란아스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가만히 제자리를 지켰다.
그 이유는 금세 드러났다.
“흑접 기사들은 명령받은 대로 상위 종 언데드들만 상대하라!”
흑접 기사 소속, 리오게이트가 외치자 검은 나비 문양을 가슴에 단 아헨탈 기사들이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알란아스터를 대신하여 이제 그들이 나선 것이다.
“강하다…….”
병사 하나가 감탄을 흘릴 만큼 그들은 강했다. 어블레이즈급에 이르는 스물 명의 흑접 기사가 상위 종 마물들을 무참하게 도륙하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전의 힘들었던 수성전과는 판세가 전혀 다름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겐 볼프 성과 강한 전사들이 있다!”
“알란아스터 님의 말씀대로 여태껏 승리해 온 우리인 데다가 지원군까지 합류했으니… 질 수가 없지!”
“전우들, 모두 싸우자! 우리가 버티면 이 전쟁은 승리한다!”
알란아스터의 연설과 달라진 판세로 군사들은 용기백배했다. 몰아치는 군단 앞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몸에 아무리 썩은 피가 묻어도 그들의 눈만큼은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크, 귀엽군. 질 수가 없다고?]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다. 그 사념은 볼프 성에 있는 모든 이의 귀에 일제히 때려 박혔다. 그 충격에 일순간 전 병력이 휘청거렸다.
이를 무심히 견뎌 낸 알란아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는 성벽 바깥이 아닌, 성 내부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볼프 성의 내성 위.
한 명의 인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어떻게 소리 소문도 없이 내성에 들어왔지?’
알란아스터와 베네딕트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대단한 강자라면 특유의 기세 때문에라도 알란아스터에게 읽혔을 것이고, 흑마종사라 불릴 만큼 강대한 흑마술사라면 베네딕트에게 감지되었을 것이다.
하나, 둘 모두 의미가 없었다.
“당신이 아스카론인가?”
[그래. 이 몸이 바로 흑마종사 아스카론이다. 천고에 다시 나올 수 없는 만마의 주인이자, 너희를 지배할 존재지.]
“미친놈이었군.”
[예속의 기쁨을 모르는 이는 항상 불만이 많지.]
아스카론이 손을 휘젓자 볼프 성 주변으로 검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이들을 보라. 얼마나 기뻐하는가? 또 얼마나 행복해하는가? 절대자의 밑에서 제 본능에 충실할 수 있음이 진정한 즐거움이니라.]
검은 유령들이 그 사이에서 흘러나와 귀곡성을 울려 댔다. 베네딕트는 이들의 정체를 눈치챈 듯 경악했다.
‘이럴 수가. 지금껏 정화시킨 언데드들의 영혼을 손짓 하나로 전부 악귀로 둔갑시키다니……. 제 놈이 악마 군주라도 된단 말인가.’
밤하늘의 구름마저 싹 가리는 무수한 유령은 성벽 높이와 상관없이 움직이며 병사들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알란아스터는 재빨리 도약하여 아스카론과 그 사이의 수백 걸음을 일시에 좁혔다. 그의 오러가 크롬벨 검술을 만나 패도적으로 뿜어졌다.
달을 반으로 쪼갤 듯한 내려 베기였다.
하나 아스카론은 혀를 쯧쯧 찼다.
[나약한지고…….]
붉은 빛살 여섯 개가 아스카론의 발밑에서 쏘아졌다. 그것은 한 점이 되어 알란의 오러를 갈라 버렸다.
콰과과광!
흩뿌려진 오러는 내성의 지붕을 모조리 뒤집었으나, 아스카론은 평온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역풍이 불었다.
붉은 궤적을 그리는 6개의 검은 창은 허공에 뜬 알란아스터를 이리저리 괴롭히기 시작했다.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수십 번의 충돌이 벌어졌다.
콰쾅!
바닥에 떨어진 알란아스터. 그의 주변으로 6개의 창이 각 급소를 절묘하게 스쳐 지나간 상태로 땅에 꽂혔다.
얼마든지 급소에 꽂을 수 있었으나 한번 봐줬다는 듯이.
[여섯 소드 마스터의 원혼이 담긴 육마병기, 마창 ‘테세우스’다. 네놈은 그것과 놀고 있거라.]
낯빛이 불쾌해진 알란아스터는 재빨리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그게 신호탄인 것처럼 여섯 마창은 공중으로 떠올라 빛살처럼 알란의 전신을 찔러 갔다. 창은 때론 검처럼, 때론 채찍처럼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챙, 채챙 챙!
그사이 아스카론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왜 저놈밖에 없지? 사도는 어디로 간 거지?’
가장 경계하고 있는 대상.
자신이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여기까지 나타나야만 했던 이유.
[이놈이… 도망이라도 갔단 말인가.]
“그럴 리가.”
[……!]
낯선 음성에 놀라 뒤로 고개를 돌리자 은신의 망토를 벗으며 달려드는 메시가 보였다.
“너 따위에게 도망갈 거면 사부의 복수도 진작 포기했지.”
[이 더러운 놈이, 어딜 갔나 했더니……!]
아스카론은 서둘러 어디서 본 칠종 보호막을 앞에 둘렀으나.
메시의 주먹은 태산이라도 가를 기세로 거침없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