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07
207/206
“…자유를 주러 왔다고? 그리고 당신이 사도라고?”
메시가 본 케브론드 라 팔란티어 3세의 첫인상은 ‘모든 걸 체념한 냉소적인 남자’였다.
그런 그답게, 반응에도 믿음보단 어처구니없음이 묻어 나왔다.
큭큭… 하하하!
케브론드 라 팔란티어 3세는 아주 재미난 농담을 들었다는 듯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어 댔다.
[정신이 나간 거 같다뀨.]뀨의 말에 메시는 천공성의 자료를 되새김질하며 미처 놓친 부분이 있나 고민했다.
「쯧쯧, 미녀가 좋긴 좋나 보군. 여자들이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리 웃다니.」
때마침 바깥의 소리를 실라이온이 실어 왔다.
다행히 에레나와 마드리는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된 듯했다. 이번 미인계는 에레나의 계책이었다.
“아… 그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그때, 웃음을 그친 케브론드가 뜬금없이 혼잣말을 시작했다.
“에이드리언 후작에게 시비를 건 귀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던 건데. 난 또 철없이 두근거렸군. 한심하게도 말이야. 아니 그런가?”
“…무슨 말씀이신지?”
“하하! 그렇게 아직 연기할 건 없네. 이 몸이 아무리 어리숙하고 멍청해 보여도 한 번 당한 걸 또 당할 성싶은가? 그래, 후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코웃음 치는 케브론드의 모습에서 메시는 그가 이미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날 놀려 먹는 수작치곤 제법이야. 이리도 중앙 공용어가 능숙한 검은 머리 이종을 구해다가 연기자로 쓰다니. 사도? 사도라니… 푸하하!”
또 큰 웃음을 터뜨리는 케브론드. 메시는 실라이온을 시켜 방안의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절반만 막았다. 자연스러움을 위해서였다.
“이제 그만하게. 왕의 체통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겠나. 적당히 즐겼으면 후작도 그만 숨어 있고 나오라 하게. 대체 얼마나 날 가지고 놀 셈인가?”
메시는 한숨을 내쉬고 케브론드의 앞에서 황금빛 성화를 살짝 일으켰다.
스아아아―
제 능력을 광고로 쓰는 걸 오흐가나가 좋아하진 않겠지만, 때론 이럴 필요도 있었다.
문제는 케브론드의 불신이 생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움찔.
잠시 그가 이를 보곤 놀라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씩 웃었다.
“이번 건… 위험했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라이트 마법을 응용한 건가? 대단하군. 에이드리언 후작도 자네 같은 이를 찾느라 고생했겠어. 검은 머리 이종에 마법사라니.”
‘아니, 이 새끼가.’
[본때를 보여 줘라뀨!]어디까지 안 믿나 보자. 메시는 성화를 일으켜 케브론드의 몸에 작렬시켰다.
“……!”
나이에 비해 핼쑥하고 초췌해 보이던 케브론드의 얼굴이 활짝 폈다. 메시의 신성 힐이 작용하여 그의 몸속에 있던 독소들을 일거에 날려 버리며 신체 컨디션을 정상화시켰다.
믿지 않던 케브론드도 변화를 느낀 건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좀 믿음이 가십니까?”
덜덜덜…….
“…하, 하하. 대단하군, 대단해. 이, 이번에 에이드리언 후작은 어디까지 준비한 것인가? 사, 사도라더니… 정말… 정말로 믿을 뻔했어.”
메시는 흔들리는 케브론드의 표정을 읽어 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거 같은 기색이었다.
뭐랄까. 입으로는 안 믿긴다고 끊임없이 부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제발 자신이 틀리기를 애원하는 사람 같았다.
때마침 에레나와 마드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예하, 대화는 좀 진행되셨나요?”
“…보시다시피.”
“여, 역시 에이드리언 후작이야……. 내 취향을 적극 반영한 미인이군. 그대는 무슨 역할인가? 내가 도통 믿지 않으니 후작이 그대를 긴급하게 투입했나?”
왕이 에레나만을 보며 얘기하자 마드리가 불만스러운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오늘만큼은 천공성의 릴리로 참여한 사람치곤 너무 솔직한 반응이다.
메시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케브론드는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난처한 환경에 빠져 있었다.
메시는 우선 그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힘쓰기로 했다.
“전하, 그간의 마음고생이 크셨을 테니 주변에 믿음을 갖지 못하는 걸 탓하고 싶진 않습니다. 배역이라 생각하셔도 좋으니, 손님으로 여기고 차라도 한잔 대접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후, 후후. 말발이 보통내기가 아니군. 조… 좋네. 차를 내 대접하지. 왕이 손수 대접하는 차를 마시다니, 일개 광대들치곤 보통 대운이 아니야.”
메시와 여인 둘이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케브론드가 차를 가지고 왔다.
“그래, 후작이 자네들에게 무얼 시키던가? 내가 혹시 이번 대회의에서 쓸데없이 입이라도 놀릴까 떠보기라도 하라던가? 그게 어렵다는 건 잘 알지 않는가. 이미 왕후와 내 아이의 목줄을 움켜쥐어 놓고 무얼 걱정하는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군.’
속으로 혀를 찼다. 가족의 목숨이 자신의 행동에 달렸으니 도통 믿음을 안 주는 것도 이해가 가는 상황.
“어떻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전하의 마음이 편하신 대로 여기시지요. 하나, 맡은 배역은 설명드려야겠습니다. 저는 근래 세상과 질서를 위협하는 이단들을 색출하고자 노력하고 있지요. 근래 제 손에 죽은 바스카스 후작과 펜란지 공작, 저나이스 후작의 얘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들어는 봤네. 괴물로 변했다지.”
“예. 하지만 이런 숨은 이단들은 아시리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각 왕국의 지배층 곳곳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전하와 에이드리언 후작의 관계처럼 즐겁게 인형 놀이를 하면서 말이지요.”
인형 놀이의 인형이 자신임을 안 건지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케브론드였다.
“나, 날… 모욕하라던가, 후작이?”
“전 극의 배경을 충실히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판단은 전하가 알아서 하셔야지요. 이것이 연극 놀음인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금줄인지.”
차를 쥔 케브론드의 손이 달달 떨렸다. 내면의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인 듯했다.
“여, 연극의 배경이 제법 그럴듯하군…….”
“이런 걸 왜 말씀드리겠습니까? 저흰 에이드리언 후작이 이단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독한 악귀.”
“……!”
메시의 말에 케브론드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꽃이 피었다.
“다, 다시 말해 주게.”
“…지독한 악귀.”
“크흐흐.”
“왜 그러십니까?”
“연극이라도 좋군, 씨발. 크흐… 다른 이의 입에서 후작의 욕을 듣는 게 말이야. 흐흐흑.”
케브론드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했는지 손에 얼굴을 묻고는 한참을 울먹였다. 보다 못한 에레나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희 오빠랑 만나시면 굉장히 좋아하시겠군요, 전하.”
“…아름다운 그대의 오빠가 누구인데?”
“에레브 폰 아헨탈. 아헨탈 가문의 영주 대리로 지금 왕도에 와 있지요.”
“그 소문의 망나니 말인가. 크큭.”
망나니가 에이드리언 후작의 면상에다가 욕을 박는다고 상상하니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실실거리는 왕이었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곤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갑작스레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네.”
“……?”
“비록 연극이었지만, 그대들 덕분에 잠시라도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었네. 마음도 조금 풀어진 것 같아. 당분간, 또 당분간을 견딜 기운을 얻은 것만 같네. 고마워.”
고맙다 말하는 케브론드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가 주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그대들이 혼이 날진 모르겠지만… 더 듣다간 그 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 날 무너뜨릴 계획이 없다면… 그만해 주게.”
케브론드의 마음은 얇게 언 강가의 빙판과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연약해진 상황.
자리에서 일어선 메시는 종이에 글귀를 쓴 후, 잉크를 잘 말려 나약한 사내에게 건넸다.
“좋습니다. 오늘 연극은 여기까지. 배역에 몰입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이것만큼은 알아 두셔야 합니다.”
케브론드가 젖은 눈으로 메시를 올려다보았다.
“이 극은 끝나지 않는 극이라는 걸. 그걸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지요. 몇 시간 뒤, 전하는 깨닫게 될 겁니다. 그때 읽어 보십시오. 전하께서 나아가야 할 길이 적혀 있습니다.”
케브론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 읽었다.
점차 그의 두 눈이 커졌다.
이대로… 이대로만 실현된다면…….
메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연극에서 뵙겠습니다.”
*
연회장의 구석에서 대기 중인 에이드리언 후작은 겉으로만 봤을 땐 평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내부에선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그의 부관인 레오메즈만은 알고 있었다.
희번덕대는 눈으로 좌중을 훑던 후작은 맞은편에서 히죽거리는 에레브를 보곤 레오메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고 있나?”
주어가 없음에도 재빨리 대답했다.
“예. 가질란 경이 오고 있다 합니다.”
“가질란. 그래… 그자라면 충분하겠지…….”
에이드리언 후작은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눈앞의 애송이를 노려보았다.
후작은 화를 억눌렀다. 억누르지 못하면 씨근거리는 제 꼴이 드러날 것이다. 이럴 때 평정을 가장하지 않으면 더욱 안 좋은 소문만 날 뿐이다.
‘이번 일은 그저 애새끼 하나에게 도전장을 받은 것뿐이다. 아주, 아주 작은 사건. 그뿐이다. 그렇게 치부되기 위해서라도 흐트러짐을 보여선 안 된다.’
연회장에는 아까보다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애버든 후작의 연회에서 인사한 작자까지 보였다. 명예 결투가 벌어졌다고 소문이 나자 호기심에 뛰어온 듯했다. 그들은 수군대며 뒤늦게 온 이들에게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 바빴다.
“…그때, 아헨탈 영주 대리가 흰 장갑을 빡!”
“크, 역시 진짜는 사고를 쳐도 평범하게 치지 않아. 명예 결투라니.”
“그런데 우리 왕국 법에 명예 결투가 존재하기는 해?”
“다른 왕국들에선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고, 우리도 오래되어 사장되긴 했지만 있긴 하지. 애초 근간은 퍼리언 왕가의 법을 보완한 거니까. 하지만 그걸 알고 써먹었다는 게…….”
사람이 몰려 주변이 소란스럽다. 일이 이리되었으니 아주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떤 누구도 다신 까불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격차를 눈에 아로새겨 줘야만 했다.
만약 그리된다면 아헨탈과의 이번 충돌은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확실히… 아헨탈은 명성만으로는 8왕국의 어떤 가문도 쉽게 볼 수 없는 위치다. 성전으로 인해 떠오르는 태양이 되었으니… 이번에 에이드리언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 명성이 우리에게로 쏠릴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좀 진정된다.
아예 기분 좋은 상상만 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아헨탈의 대표로 나온 기사가 사지가 분리되어 죽어 가고, 저 빌어먹을 애송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그런 상상.
애송이의 곁에 선 기사가 보였다. 아마 저자가 대표가 아닐까 추정됐다.
“바실러스 폰 하와이어. 아헨탈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입니다. 현재 아헨탈 기사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예상했어. 소드 마스터가 있으니 저리 발 뻗을 자리를 못 가리지.”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바실러스의 공식적인 전적도 없습니다. 명성을 쌓을 자리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했을 겁니다.”
“큭, 그런 소드 마스터가 허무하게 목이 달아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빨리 보고 싶군.”
“아, 가질란 경이 도착했습니다.”
레오메즈의 말대로 인파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위풍당당하게 산적 같은 사내가 양날 도끼를 든 채로 걸어 들어왔다.
“와… 살벌하구만.”
“저게 에이드리언 가문의 기사란 말인가? 기사 같진 않은데.”
“대리전에 무슨 자격 제한이 있겠나. 잘나가는 외국 용병이라도 데려왔나 보지.”
가질란은 자신을 쳐다보는 무수한 시선을 즐기는 듯 상기된 표정으로 천천히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리곤 인파 사이의 드라이엔델을 발견하곤 그 앞으로 걸어왔다.
“가질란 경, 쉬고 있을 때 불러 미안하게 됐군.”
“괜찮습니다. 너무 오래 쉬어서… 감각이나 찾을 겸 온 겁니다.”
우드득.
가질란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자 관절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상대는 누굽니까?”
“저기 저자일세. 아헨탈의 소드 마스터지. 이름은 가르쳐 줄 필요 없겠지?”
“어차피 뒈질 놈 이름을 알아 봐야 뭐 하겠습니까.”
드라이엔델이 웃었다.
“믿음직해. 부탁 하나만 하지.”
“말씀하시죠.”
“최대한 잔인하게 찢어 죽여 버려.”
“분부대로. 같은 소드 마스터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니까.”
가질란은 연회장의 중앙에 섰다. 어느새 그 중앙은 철저히 비워진 상황.
구경꾼들이 모두 벽과 문에 가까이 붙자 널따란 공간이 생겼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경외하며, 배려한다. 이 같은 상황이 가질란에겐 퍽 만족스러웠다.
‘그래, 나 같은 강자에겐 진작 이런 대접이 어울렸다. 그 더러운 숲과 늪, 진창을 건너는 삶 따윈 더 이상 원치 않아.’
오는 길에 병사에게 들었다.
아헨탈 가문이 현 아시리스 왕국에서 첫 번째, 두 번째 가는 실세 가문이 분명하다고.
그런 가문의 기사를 토막 낸다면 자신의 명성과 이름은 퍼지고 말 것이다.
‘그리되면 본부에서는 날 계속 8왕국에 풀어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복귀시킨다면 벌목꾼을 8왕국에 풀어 뒀다는 걸 8왕국이 알게 될 테고, 그럼 본부가 추궁당할 테니까.’
멍청한 게일러와 도미니크는 거기까지 생각 못 한 듯했다.
덕분에 제대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오늘로서 나, 가질란의 시대가 열린다.’
가질란은 자신만만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아헨탈의 대표는 나와라! 나, 가질란이 상대해 주겠다! 혹시 나를 보고 소변이 갑자기 마렵다면 화장실을 다녀올 시간은 주마!”
에레브 곁의 바실러스를 보며 조롱했다.
기사라는 놈들은 워낙 명예에 집착이 강해서 시작부터 멘탈을 흔들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바실러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뭐지? 겁을 집어먹었나?
가질란이 인상을 찌푸리곤 다시 한 마디 하려는데.
순간 인파가 갈라지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저벅저벅…….
그를 알아본 이들이 흔히 알려진 그의 명호를 읊조리며 감탄을 흘렸다.
“방탕한 소드 마스터…….”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명호로 더욱 많이 불리는 자.
“크롬벨 최후의 검……!”
모두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외쳤다.
“알란아스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