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6
전업 힐러는 점점 강해진다
(25)
라망과 라우드는 주위를 살피며, 유적 주변을 정찰했다.
경계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몬스터의 흔적이 없었다. 대변이나, 버려진 무기나, 발자국이라든가.
소름 돋는 건, 새와 벌레 같은 자연 생물들도 도통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라망은 그런 것보단 라우드가 더 신경 쓰였다. 정령이 한 말 때문이었다.
“라우드, 요즘 힘든 건 없고?”
“지금이 힘들지요. 아내가 기다리는데 이렇게 바깥 일만 한다는 게…”
“메리랑은 괜찮나? 하녀 중 가장 인기 많던 아이를 자네가 데려갈 줄은 몰랐지.”
“좋은 아내라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쉽군. 괜찮은 귀족 가문의 여식을 이 공자가 주선이라도 해서 이어졌으면 자네 앞날에 도움이 많이 될 텐데.”
“저 같은 무작 귀족 가문 넷째에게 시집올 귀한 집 딸이 어딨겠습니까. 하하.”
무작 귀족.
작위가 없는 귀족, 영지가 없는 귀족, 몰락 귀족, 성씨만 남은 귀족을 뜻했다.
라우드 에릭센은 주제를 안다는 듯, 겸손하게 대꾸했지만 그럴수록 라망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섭섭하지 않았나? 자넨 이 공자의 측근이야. 공자가 무리를 해줬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글쎄요. 이 공자께선 아무리 오래 함께했다 해도 완전히 믿음을 주시거나, 선물을 주시거나 하는 분이 아니니까요.”
흠칫.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불만 있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불만은 없는가?”
“하하. 라망 경. 저는 개가 아닙니다. 개는 주인이 원하는 짝과 합사시켜 교배를 시키지만, 전 무작 귀족이라해도 귀족은 귀족. 짝 정도는 주체적으로 찾고 싶습니다.”
“으음, 그렇군.”
말은 저렇게 하는데, 왜 불만이 있다는 것처럼 구구절절하게 들릴까?
“자네라면 처가의 배경 따윈 없어도 얼마든지 아헨탈 가의 기사로서 높은 자리에 오를 걸세. 내 보증하지.”
“…그럴까요?”
“당연하지 않나. 현 아헨탈 가문의 가주님은 현명한 분일세. 꾸준히, 우직하게만 주인에게 충성하면 알아주실 분이지.”
“후후.”
싸늘한 조소에 라망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라우드의 다리는 멈춰있었다.
“왜 그리 웃나.”
“라망 경. 제가 언제부턴가 당신과 거리를 둔다고 느끼셨지요?”
“그랬었지…”
“방금, 제가 왜 당신을 싫어하고 멀리했는지 다시 떠올라버렸습니다.”
“무슨 뜻인가?”
“당신의 그 미련할 정도의 충심, 우직함만이 기사의 본분이라 생각하는 삶. 그게 참… 싫었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
“제 미래 같아서요. 무작 귀족, 라망 스트라디무스… 무작 귀족, 라우드 에릭센…”
눈앞에 사람을 놔두고 민망해질 정도의 폄하를 한 셈이지만, 라망은 화내지 않았다. 저런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라우드, 자넨 훌륭한 기사 재목이야. 이 공자가 ‘신뢰 관계’라는 걸 얼마나 혐오하는지 잘 알잖나. 그런데도 자넨 믿지. 주인에게 믿음을 얻는 것, 그만큼 좋은 기사 재목은 없네.”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습니다. 하하. 어제 이종에게 약조하는 것 못 보셨습니까?”
“…메시는 그럴 만한 가치를 보여주지 않았나. 똑똑한 녀석일세.”
“그럼 이 공자와 함께 보낸 제 17년 세월은 그 정도 가치가 안 됩니까?”
역으로 훅 들어오는 라우드의 말에 라망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17년을 이 공자 옆에서 지낸 저는… 공적이 없습니까? 귀족가의 여식 하나 못 붙여줄 정도로?”
“자네… 불만이 많았군.”
그제야 이전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라우드였다.
“그럼, 없겠습니까?”
“그래서, 배신했나?”
“…”
슥, 말없이 거리를 벌리는 라우드였다. 라망의 아헨탈 검술이 닿지 못할 만큼의 간격. 전투를 예상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태도였다.
“눈치가 아예 없는 바보는 아니었군요. 라망 경. 계속 모를 줄 알았습니다.”
“언제부터였나, 무슨 짓을 한 거지?”
“글쎄요… 당신에게 천공성의 직원을 소개해 줄 때부터였나?”
“진짜 직원이 아니었군.”
“경이 뭐라고 천공성의 직원이 집무실까지 찾아와 얘길 들어주고 자료를 찾아다 바치겠습니까?”
“…그렇긴 하군.”
빠르게 인정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패착이었다.
자신이 건네준 자료가 하마터면 에레브를 사지로 몰 뻔했고, 지금의 위기도 만들었으니까.
“누가 시켰나?”
“뻔하지 않습니까.”
“대공자겠지. 하지만 이 공자와의 17년이 잊힐 만큼 매력적인 조건이었나?”
“자꾸 17년 얘길 하시는데. 제 남은 인생만 해도 50년은 될 겁니다. 17년 동안 헛물만 켰으면, 남은 50년은 부귀영화를 누려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부귀영화라…”
“이번 8왕국 대회전에서 대공자는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가문의 위상을 높였으니 아헨탈 가도 곧 백작위를 하사받겠지요.”
8왕국 대회전, 여덟 왕국이 서로의 군사를 겨루는 가상 모의전이었다. 3년마다 있는 큰 행사로 그곳에서 공을 세우는 건 8왕국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것과 같았다.
“그렇군. 백작은 작위 제안권이 있으니 자넬 남작 위로 올려달라는 주청을 넣어주겠다고 했겠군.”
“크크, 지금까지 바보 연기 하신 겁니까? 눈치가 전혀 없지 않으신데요.”
비웃음 서린 놀림에 라망은 화를 낼만도 했지만,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계속 라우드를 설득하려고 했다.
“자네, 아직은 돌이킬 수 있네. 지금 상황은 나와 메시밖에 몰라.”
“사람 참 좋으시군요. 배신자를 알아보고도 그걸 숨겨주려 하시다니. 제가 알던 그 깐깐한 라망 경이 맞습니까?”
“내가 아무리 매뉴얼을 따진다 해도, 자네처럼 앞날이 창창한 기사가 잘못되는 걸 두고 보진 않아. 자넨 뛰어난 재능을 가졌네.”
고오오오오……
멀리서 울리는 격한 몬스터들의 외침. 둘의 시선이 숲속 저 먼 곳을 바라보다 다시 돌아왔다.
“이제 돌아가긴 그른 거 같군요. 방금 그 이종은 죽었을 겁니다. 몬스터들이 피 냄새에 행복해하는 소릴 들으셨잖습니까.”
“아니야, 메시는 괜찮을 걸세.”
“라망 경이나 이 공자나 전부 그 이종에게 단단히 홀려도 홀린 거 같습니다. 현실까지 파악을 못 하다니…”
라우드는 품에서 붉은 스크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리석은 라망 경을 위한 작품입니다. 돈이 꽤 들었죠.”
“붉은 스크롤…? 자네 설마…”
“아, 오해하지 마시길. 전 흑마술에 관심 없습니다. 그저 적십자단에 의뢰했을 뿐이니까요.”
적십자단, 다른 말로는 ‘적십자 마도대학’.
음지에서 흑마술을 연구, 개발하며 흑마술사를 키우는 집단이었다. 의뢰를 받아 스크롤이나 물품을 제작하곤 했는데, 그것들은 붉은색을 띠는 게 특징이었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접촉을 한단 말인가, 자네 제정신이야?”
“제정신이면 애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라망의 질책을 비웃으며, 스크롤을 그대로 찢었다.
점에서 시작된 어둠이 선과 면으로 뒤바뀌며 하나의 공간을 점유해가기 시작했다.
무채색 공간으로 주위가 뒤덮이자, 생전 처음 겪는 기이한 현상에 라망은 몸을 떨었다.
“놀라지 마시죠. 이 숲을 위해 특별히 개량된 다크 필드입니다. 이 공간에 있으면… 냄새도 기척도 새어나가지 않지요.”
“이만한 준비를 할 만큼… 우리가 원망스러웠나?”
“원망은 무슨. 전 그저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쁘게 바랐을 뿐입니다. 제 기쁨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보시겠습니까?”
쾅!!! 라우드의 몸에서 기운이 폭사 되어 나왔다. 라망도 지금껏 몰랐던 숨겨진 그의 경지였다.
‘라비쉬… 그것도 나처럼 끝에 도달한 수준이다.’
24살의 나이에 42살인 자신과 동급의 경지라니… 라망마저도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한계를 느꼈다.
“라비쉬에 오른 지 3년은 됐지요. 가주에게 말했더니 오히려 비밀로 하랍디다. 쓸데없이 주머니에서 튀어나올 생각하지 말라고요. 정치놀음을 해야 하니, 가신 귀족들을 앉힐 자리를 탐내지 말란 겁니다. 저보고 주제 파악하란 소리지요.”
“그건 잘못되었네. 내가 돌아가서 건의하겠어.”
“늦었습니다. 그딴 것보단 당신과 이 공자 모두를 죽여버린 뒤, 유적을 털어 대공자께 바치는 게 깔끔하지요.”
다시 꺼내 드는 붉은 스크롤, 흑마술에 지식이 없던 라망은 긴장한 듯 자세를 갖췄다.
부욱! 찢어진 스크롤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붉은 기운이 라우드의 몸 주변을 넘실거렸다.
그의 기운이 더 강맹해졌다. 방금까지 동급이었다면 지금은…
“브릴란트…?”
“흑마술엔 신기한 게 많더군요. 잠깐 경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마술이지요.”
소드 익스퍼트의 영역에 있는 ‘브릴란트’.
몸속에 쌓아온 마나로 인해 자신의 신체와 마나홀이 하나가 되는 경지였다.
자신이 곧 마나홀이며, 마나홀이 자신이 되어 전신에 마나를 쌓게 된다. 이는 ‘나’에 대한 지배력이 극에 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특이점이라면, 검에 얇은 실 같은 빛이 묻어나오는 시기기도 했다.
라우드의 검에도 그런 징조가 보였다. 완벽해 보이진 않았지만, 밤하늘의 은하수 별빛처럼 검 주변이 빛으로 알알이 번쩍였다.
“인제 그만 죽으십쇼. 수고 많으셨습니다.”
땅을 박차고 라우드가 접근해왔다. 둘 다 검을 뽑진 않았다. 아헨탈 검술은 쾌속과 간격을 지배하는 검술.
서로의 검이 닿는 간격에 도달했다. 귀신처럼 검이 뽑혀 나와 불똥을 튀기며 만났다.
컁!
밀리는 건… 당연히 라망이었다. 몇 합을 받아내긴 했으나, 검에 실린 힘이 자신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말도 못 하게 무거웠다. 검에서 받은 충격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허벅지와 허리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밀어내려고 용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팟, 두 사람의 검이 약속이나 했다는 듯 다시 검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검의 시작이 검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아헨탈 검식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시 튀어나오는 쾌검의 갈래. 검과 검이 빛과 같은 속도로 부딪쳤다.
경지만 오르면 가벼움의 상징인 쾌검마저 이리 무거워진다는 걸 라망은 깨달았다.
쾅쾅쾅!
검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나의 덩어리를 철갑을 두른 인간이 육탄전으로 막아내서 나는 소리였다.
라망은 라우드의 검에서 오는 충격을 받아내기 위해 검을 자신의 어깨로 지지했다. 전신과 딛고 있는 땅으로 충격량을 퍼지게 하는 기술이었다.
철갑 어깨걸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신체가 잘릴 수 있는 데도, 상대의 힘을 조금씩 흘리며 버텼다. 라망 나름의 비법이었다.
한계는 곧 찾아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자 뒤로 박차며 간격을 벌었다. 이내 섬광을 쏘아 보낸 라우드가 추격했다.
“큭, 빌어먹을!”
검집에서 발출되는 아헨탈 검술이 두 빛의 실을 조각냈지만, 그 사이 라망의 뒤를 점한 라우드가 냅다 라망을 걷어차 버렸다.
쾅!
철갑과 철갑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라망이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라우드는 재빨리 다시 뛰어와 쉴 틈도 주지 않고 마무리를 넣으려 했다.
라망도 그냥 당할 인물은 아니었다. 바닥에서 흙을 한 움큼 쥐어 그대로 뿌리며 뒤구르기를 시전해 피했다.
“크하하, 천하의 라망 경이 이런 비겁한 공격을 다 하시다니!”
“…전투에 비겁이고 그런 게 어딨겠나.”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럼 이제 저도 동료들과 공격해도 괜찮겠지요?”
라우드의 시선이 건너편의 숲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오고 있었다. 나무와 수풀을 가르는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오직 속도만 고려한 움직임이었다.
저런 속도는 소드 유저만이 가능했다.
즉, 메시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라망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기어코 죽었단 말이냐. 차라리 아까 그곳에서 전투를 치렀다면 날 희생해서라도 메시를 이 공자에게 보냈을 것인데…’
아헨탈 기사 둘이면 최소 동패 용병 스물을 도륙해버리는 전력이다. 자신은 대체 뭘 믿고 메시에게 그들을 맡긴 것이었나?
후회됐다. 제아무리 메시가 똑똑하고 유능했어도, 마나 한 톨 쌓지 못한 사람이었다. 뛰어나다고 해도 조금만 덜 믿었어야 했다.
라망은 메시를 탓하기보다, 자신을 탓했다. 멍청한 자신이 라우드에게 속아 이 공자의 일이 잘못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능성이 컸던 한 재능을 일찍 죽게 했다.
“라망 경. 답지 않게 안색이 나쁘십니다. 이제 슬슬 현실 파악이 좀 되셨습니까?”
아무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거 같았다. 라망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기 혼자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가, 지금 닥친 상황을 이 공자에게 알려야만 했다.
배신자가 라우드임을 모른다면, 이 공자는 틀림없이 큰 화를 입을 게 분명했다.
주인이 직접 자신에게 맡긴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배신자의 음모에 불명예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와라, 명예를 모르는 배신자.”
목숨을 건 대치상황, 긴말은 필요 없었다. 라망의 손목이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발끈한 라우드가 뛰쳐나가며 선공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휘이이이익!
“뭐야!”
황급히 고개를 틀어 회피했다. 뺨을 스치고 지나간 건 분명 돌멩이였다.
“…나를 공격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라망의 고개가 숲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무릿매를 붕붕 돌리고 있는 메시가 있었다.
“저, 이종놈이 대체 어떻게…?”
혼란스러운 라우드의 말과 대비되게, 라망의 표정이 밝아졌다.
끝
ⓒ 10억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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