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83
283/외전7
외전 2. 노기사 라망 (4)
달칵.
문이 열리고 어두운 방 안으로 라파엘이 들어왔다. 구석진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자 은은한 빛이 내부를 감쌌다. 그 따뜻한 빛깔이 작은 위로라도 되는 듯 라파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몸을 떨었다.
뒤돌자마자 보인 건, 누군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으므로.
“…호위기사와 병사들을 질책해야겠군요.”
“제가 백나비 대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 눈치 못 채는 게 당연하지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노기사가 웃었다. 눈가의 주름이 보기 좋게 구부러진다.
“사과하고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치곤 꼴이 말이 아니군요.”
라망의 말 그대로, 라파엘의 옷에는 잉크가 잔뜩 배어 있어 엉망이었다.
“형님께서 단단히 화가 났으니까요.”
조금 전까지 물건을 마구 던지던 친형의 음성이 선연히 들렸다.
[사과한다고? 네놈은 모든 이들 앞에서 날 모욕 주고! 가문의 대공자인 날, 개망신시키고! 이제 와서 사과를 한다고? 당장 저리 꺼져!]“…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한 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금은 어깨를 늘어뜨린 상태였다.
“허나… 동생으로선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동생으로서도 옳은 일을 하신 겁니다. 대공자가 상단을 줄 세워 뇌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가주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으니까요.”
“…….”
내심 누군가 저 말을 해 주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마음을 무겁게 하던 피로감이 약간 가시는 걸 느꼈다.
오는 길 내내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형제의 파벌에 들어간 이들이거나 직접 대공자를 등에 업고 가문의 이권에 개입한 자들이리라.
그들 눈에는 오늘 사건이 마치 후계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출사표처럼 보였을 것이다.
대놓고 표현하지 못해도 두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천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
잘 가고 있던 판을 엎을 셈이냐고.
하루 종일 눈칫밥을 먹은 상황에서, 라망의 위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위안을 주었다.
허나, 라파엘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고 여태 제 방에서 기다린 건 아닐 테지요.”
“허허.”
‘참으로 재미없는 공자로구먼. 나 피곤해요, 하는 음성으로 저리 직설적이게 말하다니.’
라망은 너털 웃었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다 늙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도와준다면 고맙다고 해야겠지.
“오 공자,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한 시간을 생각해 주신다면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인질이 지독하군요.”
“허허, 여태까지 다 알고 받아 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하죠. 말씀해 보세요.”
지친 몸으로 상석에 앉아 질문을 기다리는 라파엘.
그를 향해 라망은 자신의 가설을 끄집어냈다.
그 ‘에레브’의 핏줄을 이은 후계자가 설마 이럴 거라 생각지 못해 일찌감치 폐기한…….
아니, 처음부터 꺼내지도 않았던 가설.
“혹시, 형제들과 다투는 게 싫어서 자신의 대망을 접으신 겁니까?”
질문을 듣고도 오 공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허나 라망은 그 가장된 무덤덤함에 오히려 확신을 느꼈다.
라파엘은 말을 돌렸다.
“너무 예사로운 질문 아닙니까. 형제들과 다투는 게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 그것 때문이셨습니까?”
황당하다는 라망의 어투에, 라파엘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아직 어렸다. 지금껏 자신이 고민한 결과물이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평가받자 조금은 변명하고픈 기분에 휩싸였다.
라파엘은 망설이다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툴툴댔다.
“…그게 뭐 어때서 그럽니까.”
인정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라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깜깜해진 눈앞으로 지금껏 해 온 수많은 고뇌와 가설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 헛발질이었다.
“그런, 그런 간단한 거였다니…….”
“간단하다니요? 라망 경, 그대는 알지 않습니까. 형제의 다툼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말입니다. 돌아가신 큰아버님(에이러스)의 반란을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흠칫.
“…그걸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그 일은 집안의 비사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세간의 풍문은 과거 바스카스 후작이 자선회에서 떠든 내용을 사실인 양 읊고 있었다.
‘에레브가 후계자의 자리를 위해 에이러스를 처리했다’는 이야기가 은연중에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헨탈을 견제하기 위한 타 귀족 가문들의 획책이었다.
그런데 차라리 그걸 말했다면 놀랍지나 않았을 텐데. 라파엘은 정확히 숨겨 둔 사실을 지목한 거다.
“오래전 둘째 형님에게 들었습니다.”
“라후헬 공자가……?”
“물론 자세한 얘기는 조부님께 여쭈었습니다. 놀라시긴 해도 사정을 들려주시더군요.”
전대 가주에게 얘기를 직접 들었다고 하니, 발뺌할 것도 아니었다. 침묵으로 긍정하는 라망에게 라파엘은 슬픈 어조로 말했다.
“조부님은,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시더군요.”
“…그렇지요.”
자식을 잃은 슬픔이란, 시간이 흐른다고 가셔지는 게 아니었다.
첫째 아들을 잃은 라망도 그 마음을 안다는 듯 주억거렸다.
그저 세월이 가면 다른 일상으로 죽은 자식을 대신하는데 익숙해지는 것일 뿐이었다.
슬픔의 질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문득 떠오르는 자식 생각에 무너지곤 하는 게 부모라는 존재들이었다.
전대 가주 로안은 아직도 때때로 슬픔에 잠겼고, 그 모습을 라파엘은 보았다.
“라망 경, 저는 조부님께 투전을 배우면서, 그분이 가진 슬픔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아픔을 아버지께 대물림시키고 싶지가 않습니다.”
라망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청년은… 나름 자신의 기준과 성품에 맞게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아버지에게 자식을 잃는 슬픔을 주느니.
그리고 형제와 피 튀기는 상전을 벌이느니.
자신이 먼저 욕심을 접는다.
그럼으로써 문제를 키우지 않는다.
‘그런다고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건 아닙니다. 오 공자.’
라망은 속내에 꾹꾹 참아 왔던 불만을 터뜨렸다.
“오늘 대공자의 행동을 말리시고도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분이 가주에 앉으면 어떤 짓을 할지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큰 형님은 후계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 무리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공고해지면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테지요. 또한, 재물욕이 큰 만큼 가문의 사업을 키우는 데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변호가 막힘 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지금껏 고민해서 내린 결론인 것 같았다.
하지만 라망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 이 공자는 어떻습니까? 지난주부터 순찰을 빌미로 기사단을 대동한 채 도시를 돌며 힘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걸로도 모자라, 곁에서 아부하기 바쁜 기사들의 행패를 눈감아 줬지요. 그뿐입니까? 도둑을 즉결 처분했다더군요. 아무리 범죄자라지만, 전시 상황도 아니며 엄연히 영지법이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둘째 형님은 성정이 잔혹하고 무력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문이 이익을 내는 만큼, 앞으로도 적이 생길 테니 무력을 꾸준히 키우고 그 성과를 내세울 사람은 필요합니다.”
“거기에 이 공자가 적임이다, 그 말입니까?”
“자기중심적인 둘째 형님은 자신의 세를 선보일 방도가 제한되어 불필요한 힘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차후 걸맞은 자리에 오른다면,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추구할 겁니다. 또한 영지법을 가볍게 여기는 건 스스로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영지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과 직결되는 자리에 오른다면 자연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더는 견디지 못하고 라망은 웃어 버렸다.
라파엘의 말은 듣기엔 그럴듯하고, 형제 각각에 대해 이해가 있는 것 같았으나. 또 어찌 보면 인간에 대해 순진한 시각이 있었다.
귀여운 손자를 보는 눈으로 라망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공자가 제 나이다워 보이는군요.”
“…절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나름의 판단으로 내린 결과입니다.”
“한 가지만 더 묻지요. 공자께서 포기를 한다 해도, 대공자와 이 공자는 대립할 겁니다. 거기선 어쩔 생각이십니까?”
“두 형님은 공존공영할 수 있습니다. 팔란티어 교국의 아헨탈 령이 있으니까요. 고모님은 영주 대리일 뿐, 정식 영지의 주인이 아닙니다. 또한 사촌들은 영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작은 형님에게 기회가 돌아올 겁니다.”
“대공자나 이 공자의 욕심은 대단합니다. 나누려고 하겠습니까?”
“제가 그리하게 만들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라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오 공자의 손가락에 생긴 굳은살들이 불현듯 두 눈에 들어왔다.
“설마… 지금껏 단련해 온 게…….”
매일 땀방울을 흘리며, 수련을 거르지 않던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제 욕심을 감추면서 해 온 모든 일에 이유는 있었다.
“전 소드 마스터에 다다를 겁니다. 아니, 단련을 계속한다면 그 이상의 경지도 보겠지요. 전 제 자질을 압니다.”
“균형자 역할을 자청하겠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라망은 탄식했다.
선한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 좋은 결과만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게, 이토록 확연히 와 닿을 수 있을까.
좋은 본바탕을 지닌 후계자가 스스로 제 가능성을 도려내 가며 주저앉으려 하다니.
이 무슨, 참담한 일이냔 말이다.
라망은 30년 전, 그날이 돌연히 떠올랐다.
[당신의 그 미련할 정도의 충심, 우직함만이 기사의 본분이라 생각하는 삶. 그게 참… 싫었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제 미래 같아서요. 무작 귀족, 라망 스트라디무스… 무작 귀족, 라우드 에릭센…….]젊은 소드 마스터의 재목이자 가문의 미래가 한 줌 재로 화하여 바람에 흩날리던 광경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운 심정.
가문의 정치에 휘말려 제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타락해야만 했던… 한 젊은 기사의 사정.
그것이 또 다른 형태로 눈앞에 나타나고 있음을 라망을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그제야 말년의 기사는 자신에게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직은 덜 여문 헛똑똑이 공자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것.
가문의 미래가 되어 줄 마지막 주군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것.
선심으로 내린 결정이 무조건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했다.
*
이 공자 라후헬은 가신 기사로부터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조소를 그렸다.
“어리석은 돼지 녀석, 제대로 혼났군.”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대공자에 대한 평이 최악입니다. 특히 오 공자의 위압에 쩔쩔매다가 뇌물을 도로 토해 내는 부분에선 다들 비웃기 바쁩니다. 하하!”
“주제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려 드니, 그따위 꼴을 당하지. 헌데…….”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뒷말을 흐리던 라후헬은, 일순간 냉기가 가득한 시선을 기사에게 쏘아 보냈다.
한창 웃던 기사는 놀라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너 따위가 귀족을 비웃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이 공자님!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기사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으며 오체투지를 하자, 라후헬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이 기사의 뒤통수를 지긋이 지르밟았다.
“네놈같이 분수도 모르는 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인데… 웃어?”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다 해결되나?”
“그, 그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징 박힌 라후헬의 장화가 기사의 안면을 후렸다. 피와 이빨이 후두두 튀어나오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참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가죽 터지는 소리가 고기 다지는 소리로 바뀔 때쯤에서야, 그의 동작이 멈췄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있고, 비릿한 향이 방 안에 가득했다. 라후헬은 그게 못내 만족스럽다는 듯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끌고 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기사를 ‘수거’해 갔다. 양팔, 양다리가 모조리 으깨진 상태였다.
아헨탈 가문에서 육성하는 치료사의 능력은 사도 메시로부터 직접 교육받아 수준이 높았다. 별문제 없이 회복되겠지만, 자신에 대한 공포심만큼은 아로새겨졌을 거다.
그것이 놈을 평생 따라다니며 속삭일 테지.
절대 귀족을, 그중에서도 ‘라후헬 폰 아헨탈’만큼은 두려워하라고.
그는 ‘공포’가 주는 효과를 알았다.
그리고 공포를 만들어 내는 ‘힘’을 믿었다.
지금껏 그것을 통해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해 왔고, 모두로부터 존중을 얻어 냈다.
이 공자 라후헬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 방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녀석도 있지만 말이지.’
라후헬은 동생을 떠올렸다.
다섯 번째 아이, 라파엘.
머리도 좋고, 포용력이 뛰어나다. 외적으로는 매력이 가득했다. 그리고… 선했다.
녀석이 마음만 먹는다면, 가주가 되는 데 있어 큰형보다 더한 걸림돌이 될 거라는 걸 그는 예전부터 알았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존재… 였다.
하지만.
뒤로 공작하려 해도,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있을 백나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직접 손을 쓰자니, 어린 시절부터 검수로서의 자질도 뛰어나 승패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외를 뒀다.
비록 제 취향의 방법은 아니지만…….
모로 가도 목적지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선백부와 아버지 사이의 얘기를 할아버지께 직접 듣는다면, 그 물렁한 녀석이 백기를 들 거라 예상했는데… 잘 흘러가던 계획에서 뭐가 어긋난 거지?’
라후헬은 턱을 괴고 상념에 빠졌다.
‘역시, 아버지가 붙여 준 라망이 문제였나? 그자가 라파엘에게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건가?’
이제, 일흔이 넘은 퇴물 중의 퇴물.
검이나 휘두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 가는… 기사라고 할 수도 없는 다 늙어빠진 존재.
구 시대의 유령과도 같은 작자가 제 일을 방해하려 든다니.
라후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녀석과 함께 ‘처리’해 버려야 하는데…….”
툭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금일 보고입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백나비였다.
영주 대리로 아헨탈의 무력 부분을 담당하게 되며 백나비까지 아우르게 된 라후헬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아직도 그림자 속에서 느닷없이 들리는 목소리는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보고를 받았다.
백나비 대원이 바친 종이를 눈으로 훑어내리다, 어느 지점에서 눈동자가 고정됐다.
“이거, 틀림없는 사실이냐? 적십자단의 잔당이 도시로 숨어들어 왔다고?”
“예. 흑마술사로 추정되는 자들이 관찰됐습니다. 현재 대원들이 감시 중입니다.”
“목적은? 아니… 물어볼 것도 없지. 이 새끼들은 아헨탈하면 치를 떠는 놈들이니까.”
흑마술사들은 아헨탈을 숫제 원수로 취급했다. 적십자단을 붕괴시키고, 흑마종사 아스카론을 해치운 게 아헨탈의 메시였으니까.
“명령만 내려 주시면 오늘 밤에라도 조용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처리? 그래, 처리해야지… 하긴 하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라후헬의 머릿속으로 묘한 생각이 이어졌다.
처리를 하는 건 좋다.
헌데… 같이할 순 없을까?
걸리적거리는 것들끼리 상잔하다가, 자신이 뒤늦게 나타나 모조리 해치운다면…….
‘그림이 된다.’
라후헬이 음습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들은… 보나 마나 이 주일 뒤의 축제 기간을 노리는 걸 테지?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테니까.”
질문이었지만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라후헬은 제 계획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아헨탈의 힘을 대중들 앞에서 톡톡히 보여 주는 거다.”
두 눈이 흉심으로 가득했다.
*
이 공자의 방을 빠져나온 백나비 대원은 어둠을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특히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별실.
그 내부로 조용히 숨어들어간 백나비는, 한복판에 앉아 있는 수장을 향해 보고를 올렸다.
하우엘 글리스터.
이제는 60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현역 시절만큼의 역량을 자랑하는 노익장이 눈을 떴다.
보고를 들은 그가 말했다.
“즉시 그분에게 보고를 올려라.”
백나비의 밤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