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90
290/외전14
외전 4. 검성 알란아스터 (1)
쾅!
크롬벨 가문. 가주의 집무실.
영주 대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로윈 폰 크롬벨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자, 기사와 고용인들이 찔끔했다.
“또 거절이란 말이야?”
매우 황당하다는 어조.
얼굴이 붉어진 로윈의 말에, 모두가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곧 기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것이… 가주님에 관한 소문이 너무 좋지가 않아서…….”
“끙.”
로윈은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의 손에 쥐어진 고급 편지지는 우겨진 지 오래였다. 그 내용은, 혼인을 하기로 약속했으나 딸이 울고불고 난리라 결국 하기 어렵겠다는 간곡한 거절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랬다.
이 심각한 자리는.
오로지 8왕국 최강의 검, 알란아스터의 혼인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던 것이다.
로윈은 프로크스와 마드리의 결혼식을 갔다 와서 즉각 해당 사업팀을 발족시켰고.
마흔여덟 가문의 연이은 거절 끝에, 낙혼落婚이긴 하나 그럭저럭 평판 괜찮은 외국의 남작 가문과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오늘 허사가 됐다.
‘이 사실을 알면 아버지가 상심할 텐데… 어찌한다?’
양아버지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줬을 뿐 아니라, 가주직을 약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전과 성전으로 피폐해진 크롬벨을 외부의 하이에나들로부터 지키고 있는 수호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 양아버지가 유일하게 원하는 게, 어처구니없게도 혼처였다.
여태 혼자 잘 살던 사람이 무슨 계기로 허파에 바람이 들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로윈은 그 정도쯤은 고마운 양아버지에게 해 주고 싶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키슨 경. 홀슨 남작에게 잘 설명하라 하지 않았나. 어디 내 아버지가 성격에 결함이 있나? 자네도 알지 않나? 옛 소문은 그저―”
“알지요. 왜 모르겠습니까. 저희가 가주님의 성품을 모르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수십 년을 방탕하게 살며 누적된 소문들을 마냥 외면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번 혼인 사업의 일익을 담당한 키슨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쾌락분독에 30년간 중독되어 있었다는 건 8왕국 모두가 소문으로 압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건 아무리 상대가 많은 장점을 지녔어도 작은 결점을 찾아 흠을 잡는 게 보통입니다. 헌데,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가주님에겐 감당 안 되는 소문들이 너무 많습니다.”
“큭…….”
알란아스터의 추문은 조카였던 시절 로윈도 듣고 혀를 찼던 수준이니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창관을 몇 달간 대여하여 창녀 100명과 질펀하게 놀고 먹었다는 건 낭설이 아니라 진짜였다.
“거기다 기실, 귀족들은 ‘쾌락분독’이라는 독의 존재 유무조차도 의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30년간 술과 여자에 빠져살던 사람이 독 하나 때문에 그리되었다는 것도 믿기 힘든 데다가, 설령 쾌락분독이 진실이라 해도 과거를 씻어 내기 위한 꾀라고 여길 뿐입니다.”
로윈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 같아도… 방탕하게 살던 귀족 누군가가 알고 봤더니 독 때문에 그러했고, 치료해서 개과천선했으니 댁의 따님과 연을 맺고 싶다고 혼첩을 보낸다면 당장 군사를 내보낼 것 같았다.
상대가 소드 마이스터에 달한 알란아스터라 얌전한 거지, 아니었다면 공식적인 외교 경로를 통해 항의 서한이라도 보냈을 거다.
‘가문을 보고 딸을 보내기엔 우리 크롬벨의 실정이 대단히 엉망이고… 아버지의 경지만을 보고 혼인을 고려하기에도 홀로 크롬벨을 지키기에 급급한 처지이니 8왕국 최강이 무슨 소용이냐 싶을 테지.’
더군다나 다음 가주도 자신이 예정된 상황. 혼인을 하여 자식을 봐도 아무 짝에 쓸모도 없으니 누가 딸을 시집 보내려 하겠는가.
이쯤되니 거절하는 입장도 이해 못 할 게 아니었다.
로윈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곤, 고용인들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는… 방에 계시지?”
“예. 홀슨 남작가가 혼첩을 받아들인 이후로 기분이 아주 좋으시지 않습니까. 티는 안 내시지만 외모 관리에 여념이 없으셔서 햇빛조차 잘 안 보려고 하십니다.”
“…빌어먹을.”
며칠 전, 복도에서 휘파람을 불며 망측하게 엉덩이를 씰룩이는 알란아스터를 목격했다. 뒤늦게 자신을 발견하곤 민망해서인지 하체 훈련으로 둔근이 뻐근하다며 변명했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자 로윈은 왠지 머리가 아파 왔다. 평소 안 그러던 사람이 그리 기뻐했으니 더욱 부담스럽다.
“…다녀오겠네.”
“힘내십시오. 영주 대리.”
주위의 응원을 받으며 로윈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
분위기를 보며 이실직고를 하려 했으나, 알란아스터는 로윈이 뜬금없이 찾아온 그 순간부터 뭔가를 눈치챈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설마… 취소됐느냐?”
먼저 강속구를 날렸다.
로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안 되겠답니다. 그쪽 딸이 우느라 난리라고…….”
“그, 그래? 울기까지나?”
희망고문도 아니고, 허락했다가 일방적으로 취소를 당하니 열이 뻗치던 알란아스터였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그 가문의 여식이 울었다는 말을 듣곤 화를 내는 것조차 민망한 일임을 깨달았다.
“하긴… 그 가문과 딸이 무슨 잘못이겠느냐. 다 내가 가진 업보 때문이지.”
꽃단장을 한 알란아스터가 씁쓸하게 자조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게 더 슬퍼 보였다.
“누가 나 같은 녀석과 가정을 꾸리고 싶겠느냐. 상품으로 치자면 오물에 오랫동안 담군 걸 잘 말려 청소한 재활용품이 아니겠느냐…….”
“아니, 비유가 무슨 그따위……. 아버지가 뭐 어때서 그럽니까. 8왕국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분이!”
“최강의 검? 난 그 호칭도 우습다. 예하가 있는데 무슨.”
“…그분은 예외로 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두 부자는 사이좋게 침묵했다.
로윈은 양아버지를 어찌 위로하면 좋을까 고민했고.
40대 중반의 알란아스터는 현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체념의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젊은 시절, 자신에게 들어온 몇 번의 혼사를 오만하게 걷어찬 걸 후회했다.
머리가 쾌락에 찌들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기도 했고, 가주를 맡은 친형 알바라옌은 혹시라도 알란아스터의 힘이 될 인척의 등장을 원치 않았다.
여러 가지 사정이 맞물려 지금의 노총각이 된 셈.
‘차라리… 베네딕트 경의 말대로 출가라도 해 버릴까.’
알란아스터는 근래에 맺은 약속을 되새김질했다.
괜히 욕심을 부려 주변과 다른 귀족들을 난처하게 하지 말고.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어떻게든 크롬벨 가문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뒤 이른 은퇴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 와중에 로윈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아버지. 혹시 다른 방안을 고려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른 방안?”
“아헨탈 공작님이나 메시 예하의 보증을 받는 겁니다.”
“아서라. 혼인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집안일이다. 아무리 각별한 사이라 해도, 두 분의 이름과 믿음을 빌려서 해야 될 정도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로윈이 수긍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이번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방안이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가문의 자존심도 놓고, 혼인으로 발생할 이익도 완전히 포기하는 거지요.”
“……?”
알란아스터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금방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설마…….”
“예. 귀족이 아니라 평민 중에서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 말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과거 지체 높은 귀족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었던 로윈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알란아스터는 믿기지 않았다.
그 시선을 읽은 건지, 로윈이 쓰게 웃었다.
“처지에 맞게 고민하자는 것뿐입니다. 제가 아헨탈 공작님 밑에서 실무를 익히며 배운 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법입니다.”
“내 위치가 그런 처지란 것이구나.”
“아닙니다. ‘우리’의 위치가 그런 처지인 것이지요.”
로윈은 그의 말을 정정했다. 알란아스터가 짝을 못 찾는 건 단순히 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크롬벨의 현 상황이 그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말을 이해한 듯, 알란아스터가 대답했다.
“꼭 그렇게까지 반려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건… 가문에 폐를 끼치는 일이야. 스스로 귀족의 피를 흐리는 짓이니 방계도 반발할 테고, 주변 가문에서 손가락질하기 바쁠 거다. 차후 가주가 될 네게는 또 어떻고?”
“저는 괜찮습니다.”
“귀족인 너에게 신분의 격차가 있는 어미가 생기는 일이다. 안 그래도 뒤바뀐 가문의 사정에 조롱을 당하는 처지일 텐데, 온갖 비웃음을 사겠지. 내 결혼이 뭐라고 너와 가문에 그런 부담을 안긴단 말이냐.”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남들은 다 만드는 가정을 자신은 이룰 수 없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고 화도 났지만.
인간 알란아스터는 외롭고 쓸쓸하다지만.
사건 사고 속에서 겨우 살려 낸 가문에 제 손으로 흠집을 낼 정도까진 아니었다.
“되었다. 네가 그만큼 노력해 준 걸 알았으니, 나머지는 온전히 내 문제다. 안 되는 것임을 알았으니 마음을 정리해야지.”
“아버지…….”
“그리 딱하게 쳐다볼 필요는 없다. 솔직히 8왕국에서 나만큼 놀아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억울할 게 무에 있겠어. 하하.”
아쉬운 결정을 내렸으나 알란아스터는 밝았다. 물론, 그런 ‘척’에 불과했다.
과거의 그림자로 인해 현재의 삶이 영향을 받는 데 유쾌할 리가 없다.
이런 일로 회한을 느낀다는 게 못내 우습고 한심하지만.
오늘따라…….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 좀 더 현명하지 못했던 자기자신에 대한 원망이 문득 들었다.
*
그날을 기점으로 알란아스터는 혼인의 ‘혼’자도 꺼내지 않게 됐다.
영원히 꺼내 입어 볼 수 없는 옷임을 알았으니, 더는 제 몸에 가져다 대보며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그래… 원래 하던 일이나 집중하는 거다.’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크롬벨 가문을 추스르는 데 전력을 다했다.
옛 크롬벨 기사단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기사 지망생을 모아 가문에 대한 충성을 약속받았고.
영지의 치안이 엉망이 되어 도둑떼가 들끓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병사를 훈련시켰다.
크롬벨은 아헨탈 근방의 가장 큰 영지였기에, 경제적 부흥이 일어난 대도시 아헨탈로 향하는 좋은 길목이었다.
이를 근거로 아헨탈 공작과 접선하여 인력과 물자를 지원받고, 투자까지 약속받았다.
그렇게 가주 알란아스터의 헌신에 따라 크롬벨의 복구는 잘 진행되는 듯했으나.
이를 지켜보는 알란아스터의 주변 사람들은 마음이 썩 좋지 못했다.
“요즘 통 웃는 모습을 못 뵈었단 말이야. 혼사가 깨진 것 때문에 그러신가.”
“혼인 좀 못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금방 털어내실 테니 걱정 마. 우리 가주님이 어디 보통 분인가? 11영웅 중 한 분인데.”
“그래도… 요즘 개인 연무장에도 통 안 가시잖아. 그만큼 속이 상하신 거겠지.”
멈칫.
이런 말이 지나가던 알란아스터의 귀에 들려올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생각해 보니 개인 훈련을 해 본 지 제법 시간이 흘렀군.’
체념의 반작용인지, 가문을 재건하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신에게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쾌락분독에서 빠져나온 이후로는 한 번도 놓지 않았던 검인데…….
쯧쯧, 알란아스터는 혀를 찼다.
아직도 자신은 멀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좀 흔들렸다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다니.
즉시 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목적지는 개인 연무장이었다.
스르릉.
모처럼 뽑아 낸 검이, 자신을 타박하듯 울어 댔다. 왜 이제야 꺼냈냐고.
알란아스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주인이 변변치 못해서.’
사죄를 하듯, 알란아스터는 검을 휘둘렀다.
혼란한 마음을 털어 내고자.
검이 있음에 더는 외롭지 않다고 여기고자.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알고, 더는 미혹에 빠지지 않고자.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만큼 휘둘렀다.
칼을 타고 흘러간 물기가 검 끝에 맺힐 때쯤, 알란아스터는 검무를 추는 걸 멈췄다.
‘진작 너를 찾을 걸 그랬구나.’
한바탕 몸을 움직이며 땀을 빼고 나니 답답한 마음이 한결 가셨다.
단련을 마친 알란아스터는 가뿐한 걸음으로 방을 향했다.
그런데.
덜그럭, 덜그럭.
“……?”
이미 누군가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영지가 엉망이라지만 설마 가주의 침실에 도둑이 들었나 싶어 은밀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침입자는 도둑이 아니었다.
방 안을 정리·청소하고 있는 하녀였다.
‘잡무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처리를 해 두는 게 보통인데…….’
알란아스터는 자신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꼼꼼하게 책장을 닦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업무가 늦었구나. 내가 평소보다 이르게 온 건 아닌 듯한데.”
“앗!”
개인 훈련까지 마치고 왔으니 시간이 이를 리가 없었다. 놀란 하녀가 서둘러 수습했다.
“죄, 죄송해요. 아직 이곳의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다고?”
알란아스터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제야 여인의 얼굴이 여태 보지 못한 얼굴임을 알았다.
“아헨탈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군. 가문 내의 고용인들도 지원받았지…….”
성전 당시 크롬벨의 저택에서 일하던 남자는 볼프 성의 병사로 죽었고, 여자는 고립된 도시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대거 아사했다.
그러니 가문을 관리할 일손도 모자랄 수밖에.
새로 모집해 일을 가르치기엔 여력이 모자랐다.
가문에 내부인을 들이는 일이니 신분도 검사해야 했는데, 이는 일손을 늘리려다 일을 더 만드는 격이었다.
결국, 그냥 지원 받기로 했다. 아헨탈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상대였으므로.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번 일이 가볍게 지나칠 문제는 아니었다.
“혼자인가? 아무리 인력이 모자라다지만 임시 파견을 온 네게 내 침소의 정리를 맡기다니…….”
외부인에게 영지의 급소를 공개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군.’
알란아스터는 쓴소리가 나오려 했으나 다시 삼켰다.
눈앞의 하녀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녀를 질책을 한단 말인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건 아는지, 이미 하녀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게… 같이 온 다른 분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제게 여길 맡기고…….”
‘질 나쁜 장난에 당했군.’
대략 전후사정을 알 거 같았다.
어쨌거나 아헨탈은 크롬벨에게서 승리를 거둔 가문이며, 크롬벨이 폭삭 주저앉으며 그 반사이익을 누리게 된 가문이었다.
크롬벨 사람들의 눈에 그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아헨탈 출신에게 불만을 품었고, 그 화는 도움을 주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
이 하녀도 거기에 휘말린 것이리라.
“하아… 미안하구나. 내 아랫 사람의 장난을 대신 사과하마.”
“괘, 괜찮습니다…….”
“주의를 충분히 줄 테니,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거다. 이만 나가 보거라.”
가 보란 손짓에 하녀는 꾸뻑 허리를 숙였다.
다시 혼자가 된 알란아스터는 지친 몸을 소파에 뉘였다.
당장 장난을 친 하녀들을 잡아다가 죄를 묻고 싶지만.
그들이 그리된 것도 자신과 가문의 탓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몸과 마음을 피로하게 했다.
‘영주를 이용해 파견 온 하녀를 골탕 먹이려 하다니. 가문의 기강이 말이 아니구나. 실로 엉망이다.’
다시금 크롬벨의 실정을 의식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 판국에 아내를 들여 외로움이나 해결하려 들었다니. 난 참으로 못났다.’
철부지가 된 기분이었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알란아스터는 우울한 기분 속으로 침잠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똑똑.
노크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저…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의 그 하녀였다.
자신은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놀라 방문을 열었다.
주제 넘은 짓을 한 걸까 봐, 하녀는 초조하게 양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몸이 젖으셔서요… 훈련을 하고 오신 게 아닌가 싶어서…….”
떨면서도 제 할 말을 다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리고 이것이 하녀의 선의임을 알았다.
알란아스터는 슬쩍 웃으며 이를 받아들였다.
“고맙다. 목욕 수발은 네가 들어다오.”
“제가요? 알겠습니다……!”
그는 하녀를 지나쳐 걸음을 먼저 옮겼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다시 돌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귀족은 평민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니 이름 또한 알 필요가 없었다. 오래된 수족이면 모를까.
헌데도 이름을 묻는다는 건, 이제부터 기억을 해 두겠다는 뜻이었다. 나쁜 신호가 아니었다.
하녀는 웃으며 제 이름을 밝혔다.
“저는 ‘메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