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91
291/외전15
외전 4. 검성 알란아스터 (2)
근래 들어 알란아스터에게 신경 쓰이는 존재가 나타났다.
일전에 마주친 하녀였다.
처음엔 고용인들 사이에서 얼핏 두드러지게 보이는 듯하더니.
이제는 그녀가 있을 법한 자리에선 자신이 먼저 이리저리 훑으며 찾아보곤 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왜 이렇게 마음 쓰이는 거지.’
바보가 아닌 이상, 본인 스스로도 그걸 자각하고 난감한 마음을 가졌다.
외모가 자신의 취향이었나?
물론 평민 사이에서 보기 힘든 생김새이긴 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꾸미고 치장하는 귀족 여인과 비교하자면 흔해빠진 수준이었다.
대화가 잘 통했나?
그럴 리가. 귀족이 평민과 대화가 통한다면 스스로 반성해야 할 문제였다. 몇 마디 나눠 보면 알지만, 그녀는 먹고 살기도 바빠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까막눈이었다.
그럼 나는 왜 신경 쓰이는 걸까.
안 그래도 소드 마이스터에 달한 경지는 한낱 범인으로선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히 넓고도 세밀한 감각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한 사람을 의식하게 되니, 무심코 제 감각 체계가 그 존재를 자꾸만 찾아냈다.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가주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감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랬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목욕 수발을 받으며 대화를 나눴던 순간부터였던 거 같다.
“이곳 크롬벨로 파견 온 이들은 자원을 한 사람들이라 들었는데… 아헨탈을 떠나서 온 이유는 무엇이냐?”
그날, 온탕에 몸을 담군 채 물이 식지 않도록 끊임없이 온수를 가져다 붓는 메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빈 나무 수통을 끌어안고 씁쓸하게 말했다.
“돈 때문이지요. 아헨탈에서보다 곱절은 더 쳐 주신다고 했으니까요.”
“하긴. 너무 뻔한 질문을 했구나.”
평민이라면 더 그럴 테지. 그는 빠르게 수긍했다.
“혼기는 지난 듯하고… 미색이 고운 편이니 여태 혼자는 아닐 터. 서방이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하던가?”
“지금은 저 혼자입니다.”
“……?”
방 안이 수증기로 차 있어서 그런걸까, 메리의 음성이 유난히 물기 젖은 것처럼 들렸다.
그제야 알란아스터는 눈을 떴다.
귀족도 이혼을 함부로 못하던 시대니, 여인이 혼자가 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별했군.”
“예.”
남편이 없으니 그녀가 가장이었다.
남자의 가족을 챙겨야 했을 것이고, 가족 운이 나쁘다면 친가도 신경 써야 하는 환경일 터. 돈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는 사정이 너무 이해가 갔다.
“사정을 말해 줄 수 있겠나? 불편하다면야 미안하군. 그냥 오지랖이라 여겨다오.”
작은 한숨과 뒤이어 나온 그녀의 사정은, 알란아스터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남편은 현 아헨탈 영주대리와 함께 원망의 숲으로 임무를 나갔고, 그곳에서 주군을 모시는 기사로서 충실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내전과 성전을 1년 내내 겪은 크롬벨 영지에선 가족을 잃지 않은 자가 없었다. 특히 전선에서 죽은 자들이 수두룩하니, 저 얘기를 듣고 감흥이 생기는 게 어색한 일이었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떠나고 싶었습니다. 아헨탈에 남으면 자꾸만 그 사람이 생각났으니까요.”
하지만 알란아스터는 묘하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니 그녀의 부탁도 넙죽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 같다.
“소문을 들으니, 백작님은 8왕국 최고의 검이자 기사라 들었습니다. 과분한 부탁이지만은, 제 남편 ‘라우드 에릭센’의 이름을 기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인을 지키다 명예롭게 죽은 기사이니, 백작님 같은 분이 이름을 기억해 주신다면 죽은 남편도 영광으로 알 것입니다.”
“라우드 에릭센… 그래, 기억하지.”
조용히, ‘고맙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
이후로는 온수를 채우는 물소리만이 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뿌연 증기로 가려진 그 안에서.
알란아스터는 못 보던 것을 보았다.
여인의 가느다란 손가락.
뒤로 묶은 머리로 인해 드러난 목덜미.
고생으로 초췌해진 안색에서 느껴지는 가련함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를 되새김질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자신의 이성 취향이 어떤 것인지 문득 깨닫고 만 것이다.
“설마, 내가… ‘미망인’이라는 말에 관심이 생긴 거란 말인가.”
돌이켜 보니 외로움을 자각했던 그 순간도.
아헨탈 공작부인을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었나.
‘내가 그런 쓰레기라니! 아니야… 난 크롬벨 최후의 검이며, 검공의 맞수… 예하와 함께한 11 영웅 중 하나인 알란아스터다. 내가 남의 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니, 그럴 리가 없어!’
쿵쿵.
책상에 이마를 두들기는데, 그 와중에도 그녀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누구와 마주치는지 그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중증이었다.
순간, 알란아스터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크흠.”
그의 수상한 기행을 쳐다보던 로윈이 움찔 놀라며 시선을 돌렸으나, 알란아스터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어 갔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크롬벨에 넘치는 게 과부인데… 왜 하필 그중에서 평민 하녀가 갑자기 마음에 훅 들어온단 말인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아무렴.’
외로운 환경인 데다가, 자신의 비단결 같은 성정 때문일 것이다.
추악한 성향 탓이 아닌 그저 남편을 잃고 가장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측은지심을 느낀 것이리라!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벌떡.
“잠시 나갔다 오마.”
“예?”
다시 마주한다면 정확히 알 수 있겠지.
알란아스터는 로윈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쏜살같이 방을 나섰다.
서류가 흩날리는 방 안에서, 로윈은 조금 전 알란아스터가 중얼거린 혼잣말을 떠올렸다. 그중 한 단어가 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미망인……? 설마, 아버지가 그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신 건가?”
로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헌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재혼 시장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흠결이 상쇄될 것이다. 여태 왜 이걸 떠올리지 못했단 말인가.
‘평민과 가정을 꾸리느니 차라리 귀족이지만 미망인이라면……!’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여행자라도 되듯, 황급히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나 이내 멈췄다. 하나의 의문이 문득 든 것이다.
‘그런데… 먼저 생각하셨으면서 왜 내게 말씀을 안 하셨지?’
…….
아, 그런가.
“차마 본인 입으로 꺼내기 뭐하신가 보군. 하긴… 부끄러우실 테지. 후후.”
로윈의 오해는 깊어만 갔다.
양아버지의 진짜 마음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해석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곧 호출 당한 기사 키슨이 다급히 올라오고, ‘알란아스터 결혼 사업팀’은 또다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
“오… 늘도 업무가 늦었구나.”
“네?”
가주의 침소를 정리 중인 메리가 울상이 되었다.
저번과 달리 일찍 방청소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시간에 청소를 했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며칠 전보다 훨씬 일찍 크롬벨 백작이 나타난 게 문제였으나, 그걸 입 밖에 꺼낼 순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르게 퇴근한 거 같구나. 하던 일을 마저 하거라. 난 쉴 테니.”
“예…….”
알란아스터는 능청스럽게 소파 상석에 몸을 파묻곤 눈을 감았다.
“…….”
실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실눈을 뜬 상태로 유리창을 닦는 메리를 관찰 중이었다.
시선을 느낀 걸까.
창을 닦던 메리가 뒤돌아 알란아스터를 슬쩍 바라보다가, 다시 묵묵히 창을 닦아 나갔다.
‘후우.’
들켰을까 봐, 하마터면 눈썹을 꿈틀거릴 뻔했다.
알란아스터는 자괴감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눌렀다.
그때, 다시 돌아서는 메리.
이번엔 다가와서 뜬금없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 저번 일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번 일? 그게 뭐지?”
알란아스터는 눈을 감은 채로.
처음 듣는 얘기라도 되는 양 능청을 떨었다.
“저처럼 파견 온 동료들에게 들었습니다. 백작님께서 가문의 고용인들을 직접 단속해 주셨다고요…….”
그제야 알란아스터는 눈을 떠, 메리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크롬벨 백작이다. 집안사람들을 관리하고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하는 입장이니, 나로선 당연한 일을 하고 감사의 인사를 듣는 것과 같다. 너는 내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아, 네…….”
도도하고도 무심한 그의 대답에 조금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창가로 돌아가는 메리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알란아스터는 혼자 생각했다.
‘나란 놈… 멋있군.’
나름 쿨한 상남자를 잘 연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상황을 되감기하다 보니 뒤늦게 후회가 몰려온다.
‘감사의 빚을 달아 둘 수 있는 기회였는데. 바보 같은 녀석!’
원래 소심한 남자란 자신이 한 행동이나 말을 뒤늦게 되새김질하며 후회하는 족속이었다.
알란아스터는 속으로 수많은 가정을 재생해 보다가, 어렵게 다시 말을 열었다.
“뭐. 정 감사하다면야… 오늘 목욕 수발도 네가 해 주면 되겠구나.”
“네?”
한참 있다가 저게 무슨 말이지?
메리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알란아스터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온갖 내적갈등을 하며 시뮬레이션을 돌리다 지나간 시간이 무려 10분이나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아까 전의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말과도 같지 않은가.
속을 보인 듯하여, 알란아스터는 살짝 귀가 빨개진 채로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네가 맞춰 주는 목욕물의 온도가 참으로 좋아서…….”
푸훗.
메리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감사의 인사는 따로 할게요. 임시지만 저도 크롬벨 가문의 고용인이고, 영주님의 수발은 제가 원래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렇군.”
멋진 대답이었다.
자신의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그녀의 현명함.
거기에 또다시 울렁이는 마음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는, 마음의 진동수를 세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알란아스터, 46세.
사랑에 빠진 듯했다.
*
그날을 기점으로, 알란아스터의 퇴근 시간은 점점 빨라졌다.
“오늘도 업무가 늦다.”
“아, 벌써 오셨어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메리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침소의 청소 시간뿐.
이젠 메리조차도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았다.
“오늘도 늦구나.”
“저는 제때 왔는데요… 심지어 방금 왔어요…….”
알란아스터는 짧은 대화라도 나누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였고.
마침내.
“이제 왔느냐? 쉬엄쉬엄 하거라. 여기 다과도 좀 들고.”
“…집무실엔 안 나가세요?”
아예 일을 나가지 않고 침소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를 보조하던 로윈이나 다른 가신들은 이 현상을 심각하게 이해하여, 혼처를 구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나 이는 알란아스터가 모르는 일.
그는 어쨌거나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즐거움은 비밀스러운 유희와도 같아, 어린 시절 유모가 숨겨 놓은 간식거리를 몰래 꺼내먹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을 티내지 않고 유지하는 건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에서)
“넌 뭐지?”
“예? 저… 저는… 이번에 새로 고용된 하녀…….”
“아니, 왜 여길 왔냐고 묻는 거다.”
“그, 그게… 가주님의 방청소를 하러…….”
“네가?”
하녀가 정해진 일만 할 순 없는 법.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자 알란아스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한 달 간격으로 바뀌는 하녀들의 근무 루틴을 다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 악마가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여기 먼지가 있지 않느냐! 여기 내 손가락 끝을 잘 봐라!”
“젠장, 천의 물을 제대로 짜고 책장을 닦아야지! 책이 물기를 머금어 망가지지 않았느냐!”
“커튼이 누렇구나. 세탁을 해 오도록. 뭐, 그저께 새로 단 거라고? 그럼 네가 세탁을 제대로 안 한 거겠지.”
매일같이 바뀌는 하녀들.
한 명, 한 명 쫓아 보내자 메리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건 금방이었다.
알란아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네에.”
“그럼 시작하거라.”
무심하게 다시 보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알란아스터.
메리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근래 고용인들 사이에선, ‘가주가 혼처를 찾지 못해 미쳤다’, ‘원래 성격이 망가져 있었는데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거다’, ‘독을 늦게 치료해서 후유증이 심각하다’ 등등…….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이걸 그녀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메리는 긴장한 채 가주의 방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걸레의 물기는 확실하게 짰고… 괜찮겠지? 분명 내가 일할 때는 정말 편하게 해 주셨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
부스럭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메리는 긴장한 상태로 걸레질을 했다.
선배들이 들려준 절망적인 상황들이 자신에게도 벌어질까 봐 온 신경을 쏟았다. 덕분에 실수 없이 청소를 이어 갈 수 있었다.
“…….”
가끔씩 무심한 듯하지만 다정한 한 마디를 해 주던 예전과 달리, 조용하게 지켜만 보는 백작의 모습에 안 나던 땀마저 이마에 맺힐 지경이었다.
결국 모든 청소가 끝났다.
긴장된 평가의 순간.
알란아스터가 입술을 살며시 떼자, 메리는 긴장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수고했다. 내일 또 보자꾸나.”
“……?”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