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98
298/외전22
외전 5. 구도자 메시 (4)
개력 2388년 4월 21일.
가문이 엉망이다.
백부께서는 여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돈을 물쓰듯 탕진하고 있고, 가주인 아버지께서는 왕도의 권력놀음에 빠져 영지를 외면하고 있다.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할 어머니는 내 또래로 보이는 기사들과 꽃놀이하러 다니는데 여념이 없고, 형님들은 제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소인배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폭력에 심취해 있다.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이들은 영지 내의 일이란 일엔 직접 손을 대며 망치고 있으니 능력 있는 실무자들은 사직을 청하기 바쁘다.
윗물이 이런데 아랫물이 맑을 리 없다. 기사들은 권위에 취해 약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하인들은 가문의 이름이 자신들의 것인 줄 알고 뒷돈을 받기 바쁘다.
아! 이것이 어찌 명문가의 작태란 말인가?
한때, 사도 예하의 피를 이었다는 자부심과 주위의 존경을 받던 메시 가문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라도 정신을 차려서 가문을 복구시키고 싶지만, 어린 데다가 후계 순위도 가장 낮은 나 혼자서는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채울 수가 없다. 이미 균열이 너무나도 크다.
어찌해야 하는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개력 2388년 4월 24일.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도 예하가 돌아왔다.
무려 55년 전에 갑자기 사라진 그분이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분의 실물을 뵌 적이 없었으니 그저 이상한 자가 왔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을 사도 메시라 주장하는 자는, 예하가 사라진 이후로 잊을 만하면 나타났고, 이번에도 그런 부류라 예상했다.
하지만 내 예상 따윈 쓰레기통에 처박아야만 했다.
메시 기사단이 모조리 쓰러지고, 소드 마스터에 다다른 기사단장이 손가락 하나에 기절하는 꼴을 보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을 치료할 때 보여 주신 황금빛 성화는 전설로만 들어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분명 메시 가문이 엉망이 되자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가이아께서 다시 내려보내 주신 게 틀림없다.
어서 왕도에 계신 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야겠다.
개력 2388년 4월 30일.
집안이 조용하다.
매일 아침 식사 후 창관으로 출근하던 백부님도 얌전하고, 어머니는 가문의 안주인으로 돌아왔다. 큰 형님은… 엊그제 사도 예하에게 덤볐다가 병신이 되었다. 이제 사도 예하의 얼굴만 봐도 똥을 지린다. 다른 형제들도 겁을 집어먹긴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날이 오다니…….
개력 2388 5월 15일.
아버지가 왕도에서 돌아왔다. 서신을 보낸 날짜를 고려해 보면, 거의 날아오듯 가문으로 돌아오신 셈이다. 곁에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오자마자 두 분은 사도 예하의 발치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무슨 용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특히 할아버지는 사도 예하의 고손자다 보니 더욱 쩔쩔맸다. 저분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다.
순식간에 가문의 모든 게 사도 예하의 발아래에 놓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하의 얼굴을 썩 밝지 않았다. 왜일까?
개력 2388년 6월 1일.
사도 예하는 외로운 사람 같다.
가문의 방계부터 직계까지 수많은 친척과 심지어 아헨탈의 사람까지 와서 달콤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예하의 표정엔 웃음 한 점 떠오르지 않았다.
짜증이 나시는지 가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그게 안 보이는 건가?
내 눈에만 그리 보이는 건, 우리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개력 2388년 9월 10일.
사도 예하가 자주 쓰는 말을 알 거 같다.
‘시끄럽다.’, ‘물러가라.’, ‘관심 없다.’ 이 3가지다.
세 달이 넘게 무시를 당하자, 예하 주위를 얼쩡거리던 친척들도, 귀족들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안타까운 건, 우리 집안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백부는 창관으로, 아버지는 왕도로, 어머니는 바깥으로, 형님들은 시내로 향했다.
예하가 얽힐 생각이 없다는 걸, 몇 달간의 무반응으로 확신한 게 분명했다.
덕분에 안정을 찾아가던 영지에 다시 구멍이 났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 가문을 다시 되살리려면 예하의 영도력이 절실하다.
오늘 난 그분과 대화를 나눠 볼 참이다.
그동안은 아버지의 사람이 항상 예하의 주위를 맴돌며 감시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진 상황.
반드시 이번 기회를 살릴 거다.
개력 2388년 9월 11일.
…입이 아프다.
어제는 홀로 예하의 곁에서 떠들어 댔다.
그분은 도통 나와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으시다. 눈조차 마주치시지 않으니 혼자 말할 수밖에.
예하는 폐쇄적인 분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옛이야기를 들어보면 11영웅과 몹시 친했다고 하는데,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그들과 친했는지 모르겠다.
답답하여 떠들다 지치기를 몇 번. 도망칠까 고민을 했는데 나중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계속 떠들었다.
덕분에 내가 3시간 동안 떠들어 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평소에 스스로를 말 없는 사람이라 평가해 왔는데, 신기하다.
문제는… 그렇게 떠들고도 본론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뻥긋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인지 모르겠다.
창가 의자에 앉아 내 얘기를 귓등으로 흘리는 예하의 모습이 쓸쓸해 보여서일까.
아니면… 석 달간 예하의 주변에서 예하를 괴롭혔던 이들과 나 역시 똑같아질 것 같아서일까.
개력 2388년 10월 3일.
오늘은 엄청난 날이다.
처음으로 예하께서 내게 말문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내용이 ‘시끄럽다.’였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은 게 어디인가? 난 그분이 혹시 말을 잊어버린 게 아닌가 고민하던 차였다.
대답을 들려주셨으니, 내일부터는 더 많은 말을 들을 수 있겠지?
기대된다!
개력 2388년 10월 4일.
사도 예하를 너무 얕보았다.
그런 일은 없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개력 2388년 10월 7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 건가?
오늘은 ‘물러가라.’까지 들었다!
…기뻐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렇습니다, 예하. 제가 예하의 핏줄이자 후손인 ‘호날드 폰 메시’입니다! 와하하!
그러나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인상을 찡그리신 건 왜일까……?
개력 2388년 12월 24일.
오늘 처음으로 예하와 대화다운 대화를 했다.
눈이 내리는 걸 보시더니, 날짜를 물으셨다.
12월 24일이 예하께는 특별한 날인 걸까?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러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악마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날마다 벽난로 배연구를 통해 침입하는 늙은 도둑에 관한 이야기였다. 악마답게 취향도 괴랄했는데, 속옷부터 외투까지 붉은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그 악마는 집안의 어린이가 평생 울지 않으면 선물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도둑질을 한다는데… 내가 볼 땐 그냥 도둑질을 하고 싶은 걸로 해석됐다.
왜 그런 날을 이리 즐겁게 말씀하시는지 나로선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화의 물꼬를 터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개력 2389년 1월 7일.
예하를 따라 여행을 왔다.
이제는 내가 좀 편하신가 보다.
따라와서 잔심부름하라고 명하시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방향으로 너무 편해지신 거 아닌가……?
아무튼, 여행의 목적지가 외곽 숲이라고 할 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지만.
8왕국 최강자의 곁인데 두려울 게 무엇인가 싶었다. 설마 죽게 내버려둘 리 없지. 아무렴.
숲에 들어가기 전, 예하는 ‘베누다 마을’이라는 곳을 들러 필요한 도구와 생필품 몇 가지를 샀다.
예하는 마을을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는데, 외곽 숲과 가까이 붙은 마을치곤 꽤 번성한 탓에 그러시는 듯했다.
이곳은 질 좋은 약초의 재배지로 8왕국에 알려져 제법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약초꾼이었던 2대 촌장이 약초의 씨를 지력 좋은 숲에다 군데군데 뿌리고 시간을 들여 재배한 게 최근 들어 성과를 보는 중이라 했다.
대단한 사람이 틀림없다. 적어도 수백 년 후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거니까.
그래서 그런지 마을 중앙에는 2대 촌장의 석상이 놓여 있었다. 예하는 그걸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셨는데, 나중엔 꽃을 사서 가져다 놓으셨다. 혹시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뭐, 예하는 워낙 오래 사신 분이니까.
개력 2389년 1월 16일.
이곳이 왜 원망의 숲인지 알 거 같다.
여긴 같이 들어온 사람을 무조건 원망하게 되어 있어서다. 난 예하를 원망한다.
오는 내내 죽을 고비가 대체 몇 번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나를 쫓아오던 보랏빛 트롤의 모습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예술적으로 빚은 근육질 육체에 녹슨 대도를 든 모습은 몹시 위협적이었다. 소리는 또 왜 그리 지르는지… 아직도 귀가 따갑다.
사도 예하가 녀석의 머리를 땅에 처박아 버려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난 상체를 놔둔 채 하체만 뛰어다녔을 거다.
여튼, 이제야 일기를 쓸 틈이 좀 생겼다.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이곳은 웬 을씨년스러운 무덤가인데, 여기가 목적지라는 말을 듣고 혈압이 오를 뻔했다.
하지만 스승님이 묻힌 자리라는 말을 듣자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이후엔 온종일 낫으로 풀을 신 나게 베었다.
허리가 아프다.
난 예하를 원망한다.
개력 2389년 3월 3일.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예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날. 기필코 허락을 받을 참이다.
이날을 위해 땅꼬마 주술사에게 날짜까지 점지를 받았다. 그 녀석은 날 보더니, 귀인의 인도를 받을 상이라고 했다.
이거, 된다는 뜻이지?
예하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그간 수다도 제법 떨었으니. 꽤 친하다고 생각한다. 별문제 없을 거다.
…아마도.
개력 2389년 3월 4일.
어제는 너무 화가 나서 일기를 더 쓰지 못했다.
예하의 대답은 ‘관심 없다.’였다.
저 말만큼은 안 들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가문의 일에 어찌 그리 무심하냐며, 책임감이란 걸 못 느끼냐고 따져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만든 가문이 아니다. 내 아들이 만들었지. 난 원래 귀족이 될 생각도 없었어.’
이런 빌어먹을, 그런 비사가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느냔 말이야.
개력 2389년 3월 10일.
예하께 오히려 역으로 제안을 받았다.
함께 가문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뭐지? 연인의 도피도 아니고… 조손 간의 도피인가? 퍽 당황스러웠다.
헌데, 예하의 얘길 들어보니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저 외곽 숲, 그 끝 모를 곳 너머에 8왕국이 모르는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고 한다.
원래는 가문으로 돌아와서 몇 달만 쉬다가 챙길 거 챙겨서 아무도 모르는 그리로 훌쩍 떠나 버릴 생각이었지만.
붙임성이 좋은 나 때문에 조금 더 있었던 것뿐이라고 하신다.
이거 칭찬인가……?
그리로 가셔서 무얼 할 거냐고 묻자, 아직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휴, 진짜 예하만 아니었으면 한 대 때렸다.
그럼 굳이 왜 가려는 거냐고 묻자, 마지막까지 남을 친구가 외롭지 않게 살아갈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친구……? 저 성격에 친구가 있었어……?
개력 2389년 4월 10일.
나도 내가 잘한 결정을 내린 건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하를 따라가기로 했다.
한 달을 고민한 결과. 예하의 말처럼 나날이 기울어져 가는 가문을 살려 보겠다고 혼자 고군분투하느니 새로운 곳에서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더군다나… 여긴 나 혼자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예하와 함께가 아닌가.
물론 맨바닥부터 다지면서 시작하겠지만, 이제 스물에 불과한 내가 그걸 두려워할쏘냐.
스스로도 미친 선택 같지만 어쩌겠나. 나 역시 예하의 핏줄을 타고나서 그런지 그분이 가려는 길이 궁금한 것을.
근데 가족의 반응을 보니 이런 선택을 하길 잘한 듯싶다.
형들은 하나라도 더 가질 수 있으니 내 등을 떠밀기 바쁘고.
아버지·어머니도 떠나는 막내아들을 불러서 예하를 다시 영지로 끌어들이면 나부터 죽일 거란 협박을 해 댄다.
하물며 할아버지는 생전 주지 않던 돈까지 넉넉하게 챙겨 주시니…….
대체 이런 인간들이 있는 가문을 왜 그리 살려 보겠다고 아등바등했는지 의문이다. 그랬던 내가 진짜 전설이다.
(잔뜩 빗금이 그어져 있다. 아마, 원색적인 욕을 썼다가 아니다 싶어서 지운 듯하다.)
다 써 가는 이 일기장은 금방 짐덩이가 될 테니, 여기다 둘 참이다. 빌어먹을, 일기를 쓰는 것도 이걸로 끝이군. 속이 다 시원하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메시 가문이여. 침이라도 뱉고 싶지만 내 일기장이 더러워질까 봐 참는―
“언제까지 그걸 쓸 생각이냐? 오늘 출발하긴 할 참이냐?”
삐긋.
일기장 위를 뛰놀던 깃펜이 칸을 벗어난다. 나는 한창 집중하는데 방해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 금방 나간다니까요.”
“자꾸 그러면 놔두고 간다.”
“예이예이, 그러지도 못하실 거면서.”
“훌란 같은 녀석.”
“…그거 욕이죠? 이상하다, 훌란이면 11영웅인데.”
나는 일기장을 덮고 책상의 이중 서랍에 밀어 넣었다. 혹시라도 돌아오게 되면, 남들이 발견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누군가 발견한다면…….
뭐, 예하와 관련된 이야기가 제법 적혀 있으니 재미나게 읽지 않을까?
설마, 이걸 보고 그 발자취를 좇겠다느니 그러는 놈이 있으려고.
“편지지는 챙겼지? 오랫동안 썩지 않을 만큼 보존 처리가 된 것이어야만 한다. 최소 500년은 가야 돼.”
“에이, 걱정 마세요. 땅속에 묻어 둬도 천 년은 안 썩을 겁니다.”
“불안한데.”
“이 호날드만 믿으시라니까요.”
“그 이름을 들으니 더 불안해서 말이다…….”
탁.
문이 닫히고, 이 서재는 몇백 년 후 ‘아우렌 폰 메시’에게 발견될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