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ll-time healer getting stronger and stronger RAW novel - Chapter 301
301/외전25
외전 5. 구도자 메시 (7)
힘겹다.
떨림마저 느껴지는 가냘픈 들숨과 무거운 짐을 더는 듯한 날숨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이란 이런 기분이었구나.’
메시, 부족 연방 국가의 오랜 지도자이자 악타카의 사자. 한때는 가이아의 사도를 자처했으며, 실상은 오흐가나의 사도였던 자.
이제는 늙은 노인이 되어 버린 그가 새하얀 옷을 입고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기다란 머리마저 백발이 되었으니, 오로지 짙은 색을 지닌 거라곤 그의 검은 눈동자뿐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백내장이 진행되어 혼탁했다. 흑차 위에 우유를 몇 방울 흘려 번진 것처럼…….
“바그람…….”
바람 빠지는 가죽 풍선처럼 색색거리는 가쁜 숨이 음성에서 섞여 나온다.
메시의 부름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를 모시던 행정부의 수장들과 군인들이었다. 정치인이며 또는 악타카의 사제들이기도 했다.
“바그람 님을 찾으시는 건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을 어디서 데려온단 말인가.”
“사자님께서 찾으시니, 누구라도 데려와야 하지 않겠소. 호, 혹시 동명이인이라도…….”
“미친 소리 좀 그만하시오.”
모두가 안타까워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그사이 누군가가 걸어나가 메시의 늙은 손을 부여잡았다.
“신이 여기 있습니다. 바그람. 사자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바그람의 후손이었다.
존경하던 일대의 영웅이자 악타카의 사자가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데, 배웅해 줄 신하 하나가 없는 건 잘못된 일이라 생각했다.
바그람의 후예는 스스로 바그람이 되기로 했다. 잠시만이라도.
주변인들은 그 광경에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날드…….”
메시가 또 다른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젊은 군인 하나가 걸어나갔다.
이번엔 날드의 후손이었다.
“신, 날드. 여기 왔습니다.”
메시의 흐릿한 눈동자가 서서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혹여나 자신의 배려가 무리수가 될까 싶어, 젊은 두 사람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으나.
메시는 활짝 웃었다.
“너희가 날 마중 나와 주었구나…….”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정치인 중 하나가 눈가를 훔치며 방을 뛰쳐나갔다. 뒤따라 나서는 사제도 적지 않았다.
그들에겐 절대자였고, 번영으로 이끄는 지도자였다. 일부는 독재자라 칭하며 떠들어 댔으나 그 표현의 자유조차 그가 내린 것이었다.
부족 국가로 수렵과 작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게 당연했던 암흑의 시대를 일찍이 끝내고, 새로운 연방국가의 시대를 연 사람이었으므로.
제 이름조차 못 쓰던 자들이 다분한 시대에 교육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지성을 북돋았으며, 철학을 알려 생각하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이곳에선 만인의 아버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가 뒤늦게서야 섭리에 따라가려는 광경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슥.
두 후손의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실토하듯, 메시는 의미 없는 눈 맞춤을 그만두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너희를 만나서 다행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혼자라는 게 무서웠거든…….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난 어리석었다. 분명 남은 생은 길고도 긴데… 어찌 그 남은 세월이 꼭 혼자일 거라 생각했을까…….”
늙은 손이 주름 하나 없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너희에게 마음을 더 일찍 열었을 텐데. 과거에 묻히지 않고 남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옳았을 텐데… 티프리메이식을 보고도 배움이 모자랐던 것이다…….”
자리를 지키는 이들은, 메시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가 언급하는 말들이 대체 무엇인지, 티프리메이식은 또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계속 들어야 할 때였다.
“그래도 지나온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계속 그리웠기에 홀로 남을 미래가 두려웠고, 즐거웠던 과거가 마음에 밟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티프리메이식을 보고도 난 과거를 잊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사자께서는 누구보다 나아가는 분이셨습니다. 저희가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디 자책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두 후예들이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메시의 속사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영광 속에서 잠들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리 후회와 회한 속에서 스러져 갈 사람이 아니었다.
부하의 충심을 다한 외침에, 메시가 웃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켈룩거리기 바빴다. 숨을 정돈시키자 다시 입을 열었다.
“바그람이여… 오늘 날씨는 어떤가?”
“맑습니다. 몹시 맑지요! 구름 한 점 없어 카울라스크의 꼭대기가 보일 지경입니다!”
“기쁘군. 그렇다면 오늘도 ‘그 일’을 부탁해도 되겠나. 몸이 이러하여… 성벽에 오르기가 힘들 듯하네.”
바그람의 후손은 메시가 무슨 부탁을 하는지 몰라,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날드의 후손은 들은 바가 있는지, 메시가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첨언했다.
“예하, 제가 바그람을 데리고 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저 없는 사이 제가 예하를 독차지할까 봐 이 친구가 걱정 하나 봅니다!”
“하하… 그런 거였나… 다녀오게…….”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으로 두 사람이 퇴장하자, 메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제 몸 상태를 느꼈다.
침잠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늪 속으로…….
당장이라도 전신에 힘을 풀면, 그 아래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아직 발장구를 치는 건.
마지막 미련 때문이었다.
뀨.
너는 아직 오질 않은 것이냐.
여태 껍질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일이 바빠 시간이 나지 않은 것일까.
출발은 했는가? 마지막 친우여.
죽어 가는 중에도 네가 몹시도 그립구나.
네가 오는지 확인하고 싶을 만큼.
…….
아니다. 여태껏 그러했듯,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일 것이다.
빨래를 하는 여인은 카울라스크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에 제 손을 담글 것이며.
성벽을 지키는 병사는 하품하며 경계를 서다 상관에게 혼이 날 거다.
상인들은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지를 테고.
번 돈으로 고기를 사 그날 밤 가족을 먹일 것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나날만이, 많은 이들에게 평온을 줄 수 있다.
그 평온이 내가 만든 이 세계를 오래 유지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곳에 너는 올 것이다.
밤하늘의 붉은빛이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줄 것이고.
성문의 좌우에 자리 잡은 거대한 장군이의 형상이 너의 경계심을 희석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장군이의 호위를 받아 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사람들은 너에게 온갖 찬사와 찬양을 하며 온몸을 다해 예를 표현할 것이다.
너는, 너의 존재만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 것이고.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인간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걱정이 없다.
이곳에서 너는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뿐인 친구 때문에 마음을 썩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 친구가 네 마음을 어지럽히면, 다른 친구를 만나면 될 것이다.
더는 친구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네가 내킬 때 만나러 가면 그만이다.
가끔씩 옛 친구가 그리워진다면…….
네가 머물 여왕궁의 근방, 친구의 무덤가로 찾아오거라.
그것이면 나는 족하다.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다.
사부의 말처럼, 나는 행복하게 묻힐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이곳에 와, 행복해질 너를 상상하며.
“예하……! 카울라스크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바그람을 보냈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예하!”
*
후우우웅―!
매우 거친 눈보라가 연신 쏟아지고 있었다.
뀨 일행은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황혼의 산맥을 끊임없이 헤맸다.
그러던 와중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 여왕님! 저기… 저기 빛이 보입니다!”
“거짓말이면 진짜 죽는 거야!”
“아닙니다! 진짜예요!”
[……!]장군이까지 반기는 걸 보니, 틀림없었다.
방향 감각조차 삼켜 버리는 매서운 눈발 사이로, 붉은빛이 구원의 동아줄처럼 빛나고 있었으니.
여왕의 일행은 그 붉은빛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곧 그 빛이 어디서 쏘아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황혼의 산맥’의 끝이었다.
웅장한 바람이 부는 절벽 아래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
“진짜… 진짜 있었어! 이곳이 1대조님의 목적지인가!”
1년 동안 아우렌은 자신이 헛고생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며 추위와 싸워 왔으며.
뀨는 산맥 너머에 있을 미지의 공간에서 메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래 펼쳐진 붉은 불빛의 도시는, 그 걱정들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는 듯했다.
그들은 서둘러 하산했다. 저 도시에서 메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리고…….
“저게 뭐야?”
“…장군인데요?”
[……?]멍하니 대답하는 아우렌의 말에 뀨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인가, 왜 저토록 큰 장군이의 석상이 도시의 성문을 가운데 두고 서 있느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는 뻔했다.
“메시가… 만든 거겠지.”
그것을 깨닫자, 뀨는 멈추지 않고 성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원래라면 한참을 경계하며 접근했을 인간의 영역이었지만, 메시가 저리 노골적으로 남긴 흔적이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철컹!
기다렸다는 듯이 성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는 많은 이들이 서 있었다. 뀨와 아우렌, 장군 개미가 놀랄 만큼.
허나 더 놀라운 건, 그들은 적대 의사를 표현하기는커녕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와아아아……!
“악타카 님! 여길 봐주세요!”
“드디어 오셨군요! 악타카 님! 환영합니다!”
“진짜 오셨어! 오셨다고!”
당혹스러울 만큼 선명한 ‘감격’과 ‘반가움’의 감정 물질들. 심지어는 ‘존경’과 ‘놀라움’, ‘행복’의 감정까지 치솟고 있었으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뀨는 당황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이 모든 게… 메시가 준비해 놓은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뀨는 일행의 선두에 서서, 길가를 따라 이어진 인파 사이를 걸었다.
“…여긴 도대체.”
도시를 한참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신비로움을 느꼈다.
이 도시엔, 자신이 모르는 자신이 너무도 많이 남겨져 있었다.
어린 인간은 유아기의 자신과 닮은 인형을 들고 있었고, 집집마다 만년 개미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며, 심심찮게 장군이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비유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뀨는 고민했으나, 현대인이라면 금방 테마파크를 떠올릴 법했다.
뀨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라도 된 것처럼 기묘한 기분을 맛보았다.
이곳의 인간들은 자신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적대하지도 않았다.
인간의 형태에 개미의 둔부를, 개미의 더듬이를 지닌 걸 보고도 잠깐 놀람과 동시에 환호성을 내지를 뿐.
그 뒤를 따르는 장군이를 향해서도 온갖 추파를 날리며 반가워할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의 세상이 있을 수 있나.
모든 인간이 자신을 환영해 주는 세상이라니. 뀨는 그들의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란 걸 알자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준비해 둔 사람이 생각났다.
‘메시가… 메시가 아니면 누가 이리 해 놓았겠어. 여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뀨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이 길의 끝에, 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라면.
그때와 한 점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뛰어왔다.
다급한 얼굴로 뀨와 장군 개미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둘을 향해 말했다.
“악타카의 사자가 곧 영면에 드십니다! 악타카시여, 이날을 그분께서 계속 기다렸습니다!”
영문 모를 칭호였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기다렸다던 그 누군가가 메시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영면이라는 말에, 뀨는 바그람의 후예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다급히 달렸다.
뛰는 와중에도, 도시 ‘카울라스크토라’ 곳곳에 남겨진 만년 개미들의 그림과 흔적이 뀨의 눈에 담겼다.
메시의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어째서 이 도시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지 그녀는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이곳에 올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갈 동산을 가꾸면서.
“비켜라, 전부 비켜서라! 사자님이 기다리시던 손님이 오셨단 말이다! 길을 막으면 베어 버리겠다!!”
바그람의 후예가 검을 뽑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궁을 지키던 병사가 황급히 놀라 비켜서고, 문지기가 문을 서둘러 열었다.
신분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악타카.
흉상으로만 보았던 악타카가 그곳에 있었다. 웬 여인의 뒤를 따르면서.
……!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바그람의 후예와 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더욱 속도를 높였으나, 침소 앞에 도착했을 땐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이 더욱 커져 있었다.
철컹.
문이 열리고, 뀨는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다, 그녀와 장군 개미를 보고는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물러섰다.
침상 앞.
뀨는 익숙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하지만, 달라진 얼굴.
이 나이를 먹은 노인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메시라는 걸 알았다.
그런 그가, 자신이 왔는데도 거짓말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메시……?”
부름에도 눈은 떠지지 않았다.
뀨는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누군가 말리려고 했으나, 바그람의 후예가 도리어 막아섰다.
“메시… 일어나 봐.”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음성.
물기 젖은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메시를 가까이서 모시던 자들.
사자가 누군가를 항상 기다렸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었다.
뀨의 몸이 점점 무너져 내렸다.
“제발, 제발 일어나. 내가… 내가 왔단 말이야.”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 험난한 길을 따라 이곳까지 왔는데.
왜 우린 또다시 엇갈려야만 하는 거야.
“미안해… 내가 너무 기다리게 해서. 난 그저… 네가 더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그저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른 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와 계속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녀는 자책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
메시는 눈을 떴다.
익숙한 풍경. 오흐가나의 신전 내부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반갑구나.]“…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거대한 북문 앞에 빛으로 전신을 휘감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나타났다.
오흐가나.
메시는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네가 있는 차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무척이나 오랜만이지. 900년을 넘겼으니.]“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그사이 얼굴 한번 비추시질 않는지…….”
[…너무하긴 너 역시 너무하지 않으냐. 가이아의 사도도 모자라 이젠 악타카의 사자까지 참칭하다니…….]“서로 비긴 걸로 하지요.”
넙죽 따질 구멍조차 막아 버리자, 오흐가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쓰는 건 여전하구나. 날 본 순간부터 불리한 것부터 치워 버리다니…….]“다 아시고 부른 거 아닙니까.”
[말버릇도 나빠졌고.]“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겠다. 무서울 게 없지요.”
[하. 하. 하.]여전히 고저가 없는 음성으로 오흐가나는 웃었다. 감정을 연기하는 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람처럼 웃음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이해하려는 오흐가나의 노력이라고 이해했다.
메시는 오흐가나를 향해 대뜸 물었다.
“저는 죽은 것입니까?”
[영혼이 몸을 떠나긴 했지. 다만 네 심상세계를 빌려 영혼을 이쪽으로 끌어당겼다.]“그렇군요…….”
어렵게 말했지만, 죽었다는 소리 같았다.
아쉬웠다.
마지막 언뜻 들린 음성이 있었는데.
분명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다고 했는데.
‘뀨였을까……?’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오흐가나가 자신을 왜 불렀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너는 원래 이 세계의 영혼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에서 대가를 치르고 데려온 ‘예외’였지. 죽는다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그런가.
그리운 이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는 일은 없는 건가. 영혼의 세계가 있다면,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늘.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메시가 아쉬움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흐가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죽는다면 말이다.]“……?”
[아직 너는 나의 사도이자, 이 세계에 소속된 존재지.]오흐가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빛의 구체들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메시의 주변을 감돌았다.
메시는 이것이 무엇일까, 손을 가져다 대는데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무척이나 그리운 감각이었다.
그제야 메시는 이들이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이공자……? 에레나? 프로크스……? 알란 경까지……?”
보고 싶었던 이들이 남긴 영혼의 잔재였다.
새로운 누군가로 다시 태어났음에도, 이곳에 올 메시를 위해 남겨 놓은 일종의 편지였다.
메시는 그 빛과 빛 사이에서 자신을 쓰다듬는 온기를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메시는 위로를 받았다.
지금까지 고생했다고, 지지 않고 잘 버텼다고 칭찬을 해 주는 듯했다.
[그것은 먼저 간 이들이 남긴 선물. 그리고…….]오흐가나의 전신에서 황금빛 성화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결말은, 모든 차원을 구해 준 네게 감사의 의미로 주는 나의 선물이다.]빛이 메시를 감쌌다.
*
뀨.
울고 있는 그녀의 몸에서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어떤 기운이 서서히 일어났다.
그것은 막대한 생명 에너지였다.
마치, 타이머를 맞춘 알람 시계처럼.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꿈틀대며 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강렬하고도 적나라한 생명력은 그곳에 자리한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몹시도 오랜 세월을 건너온 이 ‘태고 시절’의 힘은, 조금씩 뀨의 몸에서부터 눈을 감은 메시의 육신으로 건너갔다.
뀨는 이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메가둠.”
인과의 성유물을 통해 만났던, 제1대격변 시대의 거인.
[미래에서의 너는 메시라는 인간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분명 네게 소중한 친구겠지. 그렇지?] [맞다뀨! 내겐 하나뿐인 인간 친구다뀨.] [그 인간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본다면 너는 대단히 슬퍼하겠지. 아마도 그래서 우는 거라 생각했다.]“아… 아…….”
멀리 보는 메가둠.
만물은 그를 그리 불렀다.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오르며, 뀨는 입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난 지금부터 대법을 펼칠 것이야. 신에게 강대한 육신을 돌려주는 대신 내 생명의 일부를 넘겨주고 깊은 잠을 자려 한다.] [잔다고? 왜? 누구한테 넘겨주냐뀨?] [네게. 정확히는 네 일족에게 나의 힘을 아로 새길 생각이다.] [뀨? 왜 그런 걸 하냐뀨? 내가 언제 달랬냐뀨!] [나는 네가 여기까지 온 까닭을 알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비로소 알았다. 또, 무지한 존재로 소멸했을 하찮은 거인 하나를 너는 존중하고, 우정으로 대했으며, 지식을 가르쳐 암흑의 세상에서 눈뜨게 하였다. 이에 따라, 나 메가둠 역시 은인인 너를 돕기 위해 하나의 길을 선택하려 하는 것이며, 네가 내려준 가르침을 따르고자 함이니 당황할 것은 없다.] [뀨… 뭔 말인지 모르겠다뀨. 너무 어려운 꿈이다뀨.]하하하하!
멀리서 메가둠의 웃음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이해할 거 없다. 너는 모르는 게 재미있느니라. 뀨.]번쩍!
빛이 강림했고, 그 새하얀 생명의 빛은 모두의 시야를 빼앗았다.
뀨의 몸에서 터져 나온 빛은 정확히 메시를 휘감았으며, 그 힘은 지금까지 메시가 보여 주었던 기적처럼 작용했다.
천천히 메시의 백발은 검은 빛깔을 되찾아 갔으며, 주름진 피부는 팽팽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잃어버렸던 엔조 무에테의 근육은 다시 팽창되어 인간의 몸에 거력을 담았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조금씩 사그라질 때쯤.
눈을 감고 있는 뀨의 머리 위로 갑자기 익숙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 옛날 제 솜털을 빗겨 주던 손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온기에, 뀨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렸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기다렸어. 뀨.”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