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슬라임이 너무 강해 (8)
[초보자 마을의 수호석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퀘스트 실패! 슬라임들이 인간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이…… 이게 무슨.”
3일 동안 초보자 마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힘들었지만, 수많은 희생을 딛고 끝내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던 인간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검붉은 핏빛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다 녹슨 철검을 든 채 그야말로 박살이 나 버린 수호석 앞에 서 있는 소문의 주인공을 바라보며 말이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마치 실수로 그랬다는 듯,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하는 재영.
그의 반응에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저, 저 새끼 도대체 뭐야!”
“야 이 미친놈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망할 트롤이!”
3일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초보자 마을을 지키려고 했던 노력이 단 한 명의 트롤링 때문에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허탈감과 좌절감이 저절로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 이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외쳤다.
“저 새끼 잡아!”
“닉네임! 닉네임부터 확인해!”
“이제부터 내 겜생은 네놈 척살에 바친다!”
마치 잡히기라도 하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듯한 험악한 시선으로 달려오는 이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멀어 재영을 향해 달려가던 이들은 보지 못했다. 수호석이 파괴된 광장에서부터 벌어지는 이상 현상을.
[메인 시나리오, Act. 1 태동하는 잊힌 어둠] [연계 퀘스트, 슬라임의 분노. 실패.] [초보자 마을이 영구히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사항을 적용합니다.]촤아아아아아악-
“크으윽? 이, 이게 뭐야?”
“에에엑! 느낌 이상해!”
“으으으…… 끈적거려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갑자기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초록빛의 진액. 그 초록빛의 진액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고, 그 끈적거리며 출렁거리는 젤리 같은 무언가가 유저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마을 이곳저곳에서 무언가가 통통 튀어 다니기 시작했다.
“뀨우우우!”
“뀨웅! 뀨웅!”
“꾸아아아앙?”
마치 이곳은 또 어디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신기하다는 듯 통통 튀어 다니기 시작한 슬라임들. 그런 슬라임들을 보며 유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갑자기?”
“아니,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슬라임들이 재생성될 수 없는 초보자 마을. 하지만 어느새 가득 불어나 마을 전체를 이리저리 튀어 다니고 있는 수천, 수만의 슬라임들을 보며 이들은 비로소 퀘스트 말미의 문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천대받던 슬라임들. 이들은 자신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던 인간들에게 맞서 싸웠으며, 결국 승리해 이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뀨우우우웅!”
“뀨우우우우!”
마치 승리했다는 듯이 일제히 포효하는 슬라임들. 이들의 초롱초롱하고 귀여운 눈망울에는 마치 ‘우리가 이겼다!’라는 듯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슬라임들은 옛 인간들의 영역에서 번성할 것입니다. 이들을 이끄는 군주와 함께.]콰앙.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마을의 광장이었던 곳으로 도약한 킹 슬라임.
공교롭게도 재영과 인간들 사이를 파고든 이 거대한 슬라임은 적대적인 표정으로 아직 남아 있는 유저 무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뀨우우우웅-.”
[‘초보자 마을’이 ‘슬라임의 성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슬라임 종족의 레벨과 능력치가 조정되었습니다.] [주의. 권장 레벨 80의 사냥터에 진입하셨습니다. 플레이에 유의하세요.]분명 초보자 마을에 있었던 유저들. 하지만 순식간에 초록빛으로 가득한 사냥터 한복판에 서 있게 된 이들은 권장 레벨을 확인하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하…… 씨발.”
이날, 이들은 지금껏 아무런 감흥 없이 무참하게 사냥하던 슬라임에게 역으로 사냥당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진정한 주객전도의 의미를 말이다.
* * *
[오늘의 게임 소식! TVG의 이나영입니다! 반가워요, 여러분!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으로 요즘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아르카디아! 그곳에서 벌어진 일단의 사태로 유저 여러분들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요. 초보자 마을에서 이루어진 메인 시나리오로 인해서…….] [게임 기자로 5년 그리고 게이머로서 20년 넘게 활동한 저로서도 퀘스트의 실패 유무로 기존의 마을을 삭제하고 던전으로 바꿔 버리는 이런 식의 운영은 처음 보고 있어서 정말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게임사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실패.
초보자 마을의 삭제 및 사냥터로의 변경.
그리고 슬라임의 능력치 조절.
이번 일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게임 커뮤니티는 물론 각 게임 방송에서도 심도 있게 다룰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 진짜 장난없네. 삭제한다더니 진짜 없애 버리네.
-게임 수준 ㅋㅋㅋㅋㅋ. 개발자 무슨 약 빨았냐?
-ㅋㅋㅋㅋㅋㅋ. 이제 시작한 신규 유저들 공중분해 잼.
-그러게? 게임 시작하면 일단 슬라임 소굴에서 뒤지는 것부터 시작하나?
-초보자 마을 다시 살려 내라, 이 망할 게임사야.
이미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유저들의 원성. 그도 그럴 것이 하루아침에 마을 자체가 공중분해되고 슬라임들이 가득한 초록빛 점액질로 뒤바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 어떤 게임에서도 전례가 없는 상황에 사람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하지만 유저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주)아르카디아의 입장은 확고했다.
[아르카디아를 만들어 가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유저 여러분입니다. 인간과 슬라임 사이에서 벌어진 영역 분쟁에서, 슬라임이 승리하였고 그로 인한 결과가 현 상황입니다. 이에 관한 어떠한 복원이나 조정은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에서 본 회사가 개입할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자유.
이 두 개의 모토를 강조하며 ‘아 몰랑. 돌아가, 안 바꿔 줘!’를 시전해 버리는 개발사.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은 있는지, 후속 조치를 몇 가지 내리긴 했다.
[앞으로 한국 유저들이 플레이 하고 있는 아르카디아의 제2 대륙에서는 초보자 마을이 없는 상태가 유지될 것이며, 신규 유저의 경우는 제2 대륙에 존재하는 마을이나 영지에 무작위로 배치될 수 있도록 조정하겠습니다. 또한…….](주)아르카디아의 발표에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은 한 가지 있었다.
-그 초보자 살인마? 걔는 누군지 모르지만 진짜 대단하다.
-ㅇㅈ. 게임하면서 그렇게 어그로 끌기도 쉽지 않을 텐데.
-안 그래도 걔 때문에 피 본 사람들 눈에 불을 켜고 후드 쓴 놈만 족치고 다니던데.
-그 새끼 부모님은 아마 천수를 누리면서 만수무강하실 것 같다.
-아마 걔도 이런 식으로까지 흘러갈지는 모르지 않았을까?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이번 사태를 만든, 그 의문의 초보자 살인마를 욕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깊게 눌러쓴 후드 때문에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본인만이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
“뭐…… 이렇게 될 줄 모르긴 했지.”
장시간의 플레이에 휴식을 취하러 접속을 종료한 재영. 그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벌컥 들이켜고는 입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하…… 재밌긴 한데…… 뭐 이런 대책 없는 게임이 다 있지?”
퀘스트 하나 실패했다고 초보자 마을 자체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 사냥터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 지금껏 많은 게임을 해 왔지만, 재영조차도 이런 식으로 맵 자체를 뒤바꿔 버리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일단 나중에 생각한다는 듯이 앞뒤 안 가리고 이렇게 즉각적으로 시행하는 결단력은 더더욱 말이다.
-히든 전직 퀘스트 날려 먹었습니다.
이번에 초보자 마을 사수하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우연한 기회로 히든 클래스 전직 조건을 충족해 관련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퀘스트를 준 마을 NPC가 이번 사태로 사라져 버렸네요. 정말 허탈합니다. 이거 어떻게, 게임사에 문의하면 보상해 줄까요?
퀘스트는 받았는데 핵심 NPC가 사라져 버린 피해 사례를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부정적 여파가 인터넷에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마을 하나만 사라진 게 아니라, 초보자 마을 안에 존재하던 NPC들과 이들이 주던 퀘스트까지 싸그리 다 저세상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상황. 모르긴 몰라도 그 모든 것을 기획하고 개발했던 게임사 직원들이 저 어딘가에서 오열하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에휴…… 모르긴 몰라도 그 마을 하나 만드느라 여럿 갈려 나갔을 것 같은데…….”
그렇기에 재영 역시 사람이다 보니 양심에 찔릴 수밖에 없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아니, 재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피 본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니, 근데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게임 자체가 그렇게 몰아가는데 뭐 어떻게 하라고?”
난세의 방랑가(Bard of Anarchy).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된 이 직업이 이러한 모든 플레이를 강요했기에 재영의 입장에서도 억울한 점은 많았다. 거기다가…….
[앞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깽판 쳐 보세요. 제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마치 이런 것들을 기대했다는 듯한 개발자의 메시지. 그 장난기 가득한, 은근히 이런 것을 기대한다는 듯한 목소리를 떠올린 재영은 이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뭐, 내가 나쁜 놈이 아니라 이런 걸 시킨 그 미친 개발자 놈이 나쁜 놈이지. 뭐 꼬우면 정지라도 먹이든가.”
이번 일 때문에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제재를 할 것 같지 않다는 확신이 든 재영은 뻔뻔하게 살기를 결심하며 일어났다.
위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문자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재영은 얼굴을 찌푸리며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가상현실에 너무 매진했더니 어느새 현실의 시간은 3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민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날짜 공지.]대학교 신입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전체 메시지. 이를 확인한 재영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래도 일단 현실도 신경 쓰긴 해야겠지?”
가상현실을 시작한 후로 너무 소홀해지고 있는 현실. 일반적인 컴퓨터 게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몰입감을 가졌기에 재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가상현실에 빠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현실을 잊을 만큼 깊숙이 말이다.
“일단, 옷부터 새로 사야겠네. 장도 이참에 보고…….”
그 지긋지긋한 시골에서 살다 드디어 서울로 상경했는데, 막상 올라와서는 캡슐에만 처박혀 있었지 언제 한번 제대로 서울 나들이를 해 본 적 없다는 사실에 재영은 나갈 채비를 했다.
“흥흥. 다 함께 해 봐요, 캠퍼스 라이프-.”
요상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나서는 재영은 기대감에 차올랐다. 칙칙한 교복을 입고 생활하던 시골의 남고가 아닌 발랄하고 활기찬 대학교에서의 생활.
하지만 재영은 몰랐다.
서민대학교, 특히 컴퓨터 공학과는 남녀 비율 8:2의 심각한 남녀 불균형을 자랑하는.
남초 집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