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내 패밀리어는 대마왕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재영.
좁은 원룸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색빛의 드리머(Dreamer) 고급형 캡슐. 이 캡슐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체감을 하지 못했는데, 학과의 정체성까지 완전히 뒤엎어진 상황을 보고 있자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뭐…… 이렇게 된 이상 게임은 실컷 할 수 있겠네.”
이미 모든 게 다 결정된 사안. 여기에 반대해 봤자 뭐 어쩌겠냐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 막 입학하는 재영으로선 딱히 상관없었다. 만약에 잠깐 얼굴 보러 온 부모님이 캡슐을 보고 뭐냐고 물었을 때 학과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 써먹어야겠다는 생각 정도뿐.
학과 생각은 이 정도로 일단 접어 두기로 한 재영은 이내 접속기에 누워 아르카디아로 접속했다.
[환영합니다, 환상의 세계, 아르카디아에 오신 것을.]매번 똑같은 목소리. 그 환상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게임 속으로 들어간 재영을 반긴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날개의 작은 악마였다.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혼돈의 군주, 마왕 사탄.]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임프처럼 생겼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타이틀을 가진 존재. 재영의 패밀리어인 사탄이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며 그의 눈앞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며칠 동안 꼬박 밤을 새워서. 좀 쉬다 왔지.”
“어휴, 하여간 나약해 빠져서는. 이래서 인간이랑은 계약하면 안 되는 건데 원.”
기다리는 시간 동안 여간 심심했는지 계속 투덜거리는 사탄의 옆은 통통거리며 모여든 초록빛 슬라임들로 가득했다.
“뀨우우웅!”
“뀨우우!”
사탄을 좋아하는지, 이리저리 모여든 슬라임들이 어떻게든 비비적거리려고 달려들자 그는 질색한 얼굴로 재영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으엑! 저리 좀 가! 이 젤리 놈들아! 끈적끈적해서 이상하다고!”
여러 번 당해 본 것인지, 그의 머리 위에서 사탄이 끔찍한 표정을 지으면서 진저리 칠 때 재영은 이곳저곳에서 몰려드는 슬라임들과 주변 풍경을 살펴보았다.
“음…… 그래도 마을의 흔적은 조금씩 남아 있네.”
과거 초보자 마을이었던 슬라임의 성역.
끈적끈적한 초록빛 점액질에 파묻혀 대부분은 파괴되어 사라졌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익숙해 보이는 외관의 폐허들을 보며 재영은 살짝 씁쓸함을 느꼈다. 물론 이 사태의 주범이긴 하지만, 전에 튜토리얼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몇몇 NPC들과 친분도 만들었는데 죄다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이제 여기서 그만 벗어나지? 이 이상 초록색을 보고 있으면 토할 것 같은데?”
이제 슬라임은 지긋지긋하다는 사탄의 말. 그 의견에는 재영도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돌아가…….”
콰앙.
슬라임들의 소굴을 벗어나려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어디에선가 날아온 거대한 슬라임이 재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뀨우우우웅!”
거대한 건물 정도 크기의 킹 슬라임. 그가 위협적인 도약을 하며 재영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슬라임에게서 퍼져 나오는 기세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반가움이 강했다.
[킹 슬라임이 플레이어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인간들을 몰아내고 슬라임들만의 영역을 구축한 그대의 공로를 슬라임 종족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대는 슬라임 종족의 영원한 은인입니다!] [칭호, ‘슬라임의 친우’가 ‘슬라임의 구원자’로 변경되었습니다.] [보상, 슬라임의 정수를 획득하셨습니다.] [개연성이 2,413 상승했습니다.] [미션 퀘스트, 초보자 죽이기가 완료되었습니다.]수많은 텍스트가 눈앞을 가득 메우는 상황. 재영은 차근차근 하나씩 획득한 보상들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칭호, 슬라임의 구원자]슬라임 종족을 커다란 위기에서 구하고 이들의 번성을 도와주었다. 이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며 구원자로서 그대를 칭송할 것이다.
-슬라임이 동족으로 인식함.
-수 속성력 +10
-지능 +5
-물리 저항력 +5
칭호(Title).
재영은 칭호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카디아의 칭호는 다른 게임과는 궤를 달리하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수집하거나 처치할 때 획득할 수 있는 공통적인 칭호들도 물론 존재하긴 하지만, 특별한 칭호들도 존재했다.
이것들을 사람들은 특수 칭호(Special Title)라고 일컬었다.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플레이, 특히 아무도 성취하지 못한 무언가를 게임에서 이루어 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칭호가 유저 개개인들에게 부여되곤 했다. 현재까지 특수 칭호를 획득한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이기 때문에 관련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추정하기로는 특수 칭호는 여러 사람이 중복해서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특수 칭호를 재영은 이번 미션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그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는 칭호였지만 말이다.
초보자 살인마. 그리고 슬라임의 구원자.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칭호를 달고 마을을 활보하다가는 금방 정체를 들키고 강제로 로그아웃당할 것이 안 봐도 훤했기에, 재영은 입맛을 다시며 상태창을 닫았다.
“뀨우우웅!”
마치 고맙다는 듯 일제히 울음소리를 내는 슬라임들. 그런 그들을 보며 재영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흔들었다.
“쩝…… 뭐 미션 때문에 한 거였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잘 살아라. 이제 함부로 너네 죽이러 올 사람도 없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재영은 슬라임의 성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슬라임들은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마치 그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 * *
완전히 사라져 버린 초보자 마을.
하지만 유저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초보자 마을을 대체할 수단을 찾을 수 있었다.
-초보자 마을 대신해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미하일 남작령이라고 영지가 하나 있음. 주변 몬스터들 레벨도 적당하고 물건들도 적당히 있어서 여기에서 플레이 해도 괜찮을 듯?
-어, 거기 나도 갔는데. 역시 초보자 마을에서 제일 가까워서 그런가.
-어쩐지 요즘 사람들이 슬금슬금 몰려오는 것 같더니만.
초보자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 미하일 남작령으로 끈 떨어진 초보자들부터 아직 레벨이 그리 높지 않은 이들까지 옹기종기 모여서 죄다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에는 재영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정지. 이름이 뭐지?”
“덱스입니다.”
영지 입구에서부터 경비병들이 막아서서 이름을 물어보자 재영은 태연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경비병들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덱스라…… 혹시 너도 초보자 마을에서 온 건가?”
“예, 뭐…… 그렇죠?”
마치 이번 일이 처음 있는 게 아니라는 듯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창을 다시 세워 들며 그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슬라임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니?”
어디에선가 소문을 들은 것인지 황당한 얼굴로 물어보는 경비병. 사실 초보자 마을이 슬라임들에게 파괴되고 영역 자체가 그들에게 장악당했다는 사실은 아르카디아의 NPC들에게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 초롱초롱하고 귀여운 눈망울을 가진 연약한 생물체가, 인간들의 마을을 점령한다니 말이다. 경비병의 눈빛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의구심이 가득해 보였다.
“뭐…… 직접 가 보면 아마 알게 되실걸요? 원래 알고 계시는 슬라임이 아니에요.”
아마 ‘우리 슬라임이 달라졌어요’에 보내도 될 정도로 완전히 달라진 슬라임들의 몸통 박치기 한 방에 황천으로 가 버리겠지만 말이다. 재영의 말에 경비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에 온 목적은…… 물어보나 마나 여기에 정착하려고 온 거겠지? 일단 통과는 시켜 주겠는데, 혹시나 무슨 문제 일으키지 말도록.”
의외로 손쉽게 통과시켜 준 경비병들 덕분에 마을에 들어선 재영은 머리 위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탄, 뭘 그렇게 자꾸 보는 거야?”
재영의 물음. 그 물음에 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흐음…… 여기 뭔가 익숙해 보이는데…….”
“익숙하다고?”
재영이 되묻자 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으음…… 아냐……. 근데 너, 왜 자꾸 나를 탄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럼 내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네 이름을 불러야겠냐?”
사탄(Satan)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패밀리어. 혼자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 작은 악마의 이름을 부르고 다니다가는 이상한 의심이나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그렇기에 재영은 다른 이름으로 그를 부르기로 했다.
“그래서 앞으로 너를 탄이라고 부를 거야. 그렇게 알아 둬.”
“아니 뭐…… 상관없긴 한데…… 그렇게까지 해야 해?”
떨떠름한 얼굴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탄. 하지만 재영은 확고했다. 괜히 사탄이 강림했다느니 소환자를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느니 하는 이상한 교단과 적대적으로 얽히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그리고 탄 역시도 자신을 어떻게 부르느냐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무튼, 너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그 힘. 어…… 개연성이라고 했나? 그거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많아진 것 같은데?”
개연성.
이번 슬라임 사태와 미션 종료까지 해서 재영이 죽인 초보자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살해한 초보자 수: 41,138
자그마치 4만 명이 넘는 사망자. 일주일 동안 자그마치 4만 명이 넘는 초보자들에게 24시간 접속 제한을 먹여 줬다. 그리고 그 결과 재영이 새롭게 획득한 개연성은 이전보다 훨씬 많았다.
-개연성: 33,551
미션 클리어를 통해 추가적으로 받은 개연성을 포함해서 어느새 스탯이 3만을 넘어가는 상황. 탄은 그 개연성이 탐이 나는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혹시 그거 전부 나 주면 안 돼?”
탄의 은근한 물음. 하지만 재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아! 왜! 너 어차피 나 없으면 쓸 수도 없잖아! 그거 다 주면 내가 진짜 좋은 거 줄게!”
또다시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탄. 하지만 재영은 다급히 그를 말렸다.
“나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 말할게. 그 전까지는 그냥 기다리고 있어.”
일전에도 개연성과 바꾸자며 150제 유니크 아이템을 들이밀던 탄. 그의 전적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전설급 아이템이라도 가지고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상황에서 말이다.
“쳇. 되게 비싼 척 구네.”
뚱한 표정을 지으며 불만을 토해 내는 탄. 하지만 어쩌겠는가? 계약 관계에서 그는 철저한 을이었고, 당장 아쉬운 것은 재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비록 재영이 가지고 있는 개연성의 힘은 매우 매우 탐이 났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건데?”
계속해서 걷기만 하는 재영을 보며 탄이 물었다. 재영은 계속해서 이곳저곳 뻗어 있는 성의 대로들을 걸으며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대충 견적 잡고 있어.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나중에 길 찾기 편하지.”
그렇게 재영은 마을 안에 어떠한 NPC들이 있는지,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의 시세는 어떠한지, 어떠한 퀘스트가 있는지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요즘 영주님이 철광석의 채굴량을 늘리라고 지시하셨다는데, 큰일이야. 어떻게 더 늘리라는 말인가? 지금 자는 시간, 쉬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말이야. 이러다 주어진 시일까지 채굴량을 늘리지 못하면 큰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
그리고 재영은 어느 한 주점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광부에게서 퀘스트 하나를 습득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오오오! 가능하겠는가?”
“그럼 부탁하겠네!”
재영의 수락에 반색하는 두 광부. 머리 위에서 탄은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다가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갑자기 무슨 철광석?”
“뭐 하긴, 퀘스트 깨잖아.”
갑자기 광부들의 문제에 끼어드는 재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마왕이지만, 재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르카디아를 즐기는 유저 중 하나로서 발견한 퀘스트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은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재영은 모르고 있었다, 방금 그가 수락한 이 퀘스트가 얼마나 거대하고 악랄한 결과를 초래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