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내 수호천사는 대천사
개연성(Plausibility).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주어진 설정과 그에 따라 벌어지는 상황과의 연관성을 일컫는 말이다.
천상의 천사가 선행(善行)을 추구하는 것. 지옥의 악마가 악행(惡行)을 추구하는 것. 몬스터와 인간이 대립하고, 정령이 자연을 향유하고, 드래곤이 균형을 수호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개연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에서 벗어난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해. 내가 너한테 자꾸 개연성을 달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고.”
날개를 파닥거리며 열심히 재영의 뒤를 따라가는 탄. 새롭게 개연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반색하며 아까부터 연신 그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이계(異界)의 존재는 다른 곳에서 힘을 쓸 수 없어. 아니, 그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지. 물론 나 같은 경우는 계약이라는 수단과 너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존재는 하지만, 그 힘의 발휘는 극도로 제한당하지.”
혼돈의 마왕, 사탄.
만약 그가 본신의 힘을 전부, 아니 한 10%만 가지고 왔어도 아마 대륙 전체가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재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너나 나나 언제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개연성만 받쳐 준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니까.”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가득하다는 듯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탄.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의 말에 대꾸하기도 귀찮아진 재영은 그를 무시한 채 말했다.
“상태창.”
[플레이어, 덱스]직업: 난세의 방랑가(Bard of Anarchy)
칭호: – (미장착)
레벨: –
능력치
-힘: 43
-체력: 52
-민첩: 33
-지능: 65
-행운: 0
-개연성: 8,551
오랜만에 열어 본 상태창. 다른 캐릭터들과 다르게 레벨 칸은 공백 상태였고, 맨 마지막 줄에는 새빨간 텍스트로 캐릭터가 영구 귀속 상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외에 관심 있게 볼 사항이라면…….
“능력치가 너무 중구난방인데…….”
개연성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를 살펴보며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보통 힘, 민첩, 지능 이 세 가지 능력치 중 하나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성장하는 것이 대중적인 전략이다. 마법사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게임 내 모든 행동이 지능과 연관된 것들로 집중된다.
명상이라든가 마법 연구라든가 연금술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도서관에 처박혀 책이나 뒤적거리는 등. 지능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것들만 집중적으로 해 나가며 성장한다.
하지만 개연성을 벌자고 움직이는 재영의 행동 패턴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기에, 재영 그 자신조차도 어떤 능력치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주인! 내 말 듣고 있어?”
“어? 뭐?”
골똘히 생각에 빠진 나머지 탄이 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재영이 되묻자 탄은 그를 흘겨보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미션이라는 게 무슨 내용이냐고!”
“아, 미션?”
탄의 물음에 문득 열어 본 미션 내용. 하지만 재영은 아무리 미션 내용을 읽어 봐도 머리만 아파질 뿐, 도무지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Mission. 2]주변에 일진 같은 나라들만 가득한 마룬 왕국. 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간만 보며 살아남은 왕국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네요. 이러한 변화의 시기를 그냥 지나치면 난세의 방랑가라 할 수 없겠죠? 얼른 찾아가서 이 변화의 바람의 주역이 되어 보세요.
-마룬 왕국과 왕실 행보에 기여하기.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이어서 뭘 하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내용.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막막함에 재영이 한숨을 내쉴 정도니, 아마 다른 유저 같으면 당장에라도 때려치울 것 같은 불친절한 내용이었다.
“이쯤 되면 아주 그냥 엿 먹으라는 것 같은데…….”
무한한 자유를 표방한다고는 해도 게임사가 이런 식으로 던져두기만 하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잠깐…… 이러다가 왕국 자체가 날아가는 것 아냐?’
이미 일전에 첫 번째 미션을 해결하면서 단순히 초보자를 죽이는 것을 넘어 초보자 마을을 완전히 없애 버린 전적이 있는 재영이었기에, 도무지 이 미션이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스스로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저 하나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다면…….
[앞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깽판 쳐 보세요. 제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언제나 혼란과 깽판만이 가득할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이게 다 개연성 벌자고 하는 짓이었으니 말이다.
우우웅-
그렇게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에서 이상한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스템 오류에 대한 문제 사항이 해결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천상의 메달’의 능력치가 전면 조정됩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플레이 되십시오.]갑자기 들려오는 알림음과 함께 또다시 목걸이에서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쿠엑! 저거 또 왜 지랄 났어!”
재영의 주변을 날아다니다 또다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을 뒤집어쓴 탄이 기겁하며 그의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신성한 기운들은 이전과 달리 재영에게 흡수되지 않고 어느 한 지점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탄과 거의 흡사한 크기의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미모의 한 요정의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뒤에는 새하얀 깃털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저, 저건!”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는 듯 눈이 톡 튀어나올 것같이 커진 탄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영광스러운 천상의 메달’의 효과로 거룩한 천상과의 연결이 이루어졌습니다.] [플레이어를 수호할 수호천사가 소환됩니다.] [아이템이 플레이어에게 영구 귀속됩니다. 착용 해제가 불가능합니다.]그렇게 소환이 완료되고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며 눈을 슬며시 뜨는 천사. 그리고 그 천사를 보며 탄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닭 날개! 네년이 왜 여기서 나와!”
“…….”
방방 뛰며 난리를 치는 탄을 뒤로하고, 재영은 방금 등장한 천사의 머리 위에 쓰인 텍스트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거룩한 영광의 성위, 대천사 미카엘.]“하하…… 씨발.”
마왕을 넘어 대천사까지 등장한 것을 보며 아무래도 이번 게임은 시작부터 글러 먹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 * *
천사와 악마.
그야말로 견원지간을 넘어 철천지원수라고 할 수 있는 관계.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는 이 둘, 그것도 수장급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존재의 만남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상황을 연출해 냈다.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안 돼, 안 바꿔 줘, 돌아가!”
소환될 때부터 단단히 화가 나 있던 미카엘. 탄이 당장 돌아가라고 방방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미카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빌어먹을 박쥐 새끼가 동굴에 얌전히 처박히지 않고 뭐 하나 했더니, 인간계에서 우리 성지를 박살 내고 다녀? 너 미쳤어?”
“그, 그건…… 너도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그럴 거잖아!”
“이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어디 한번 제대로 전면전 해 봐?”
“떠! 그래! 어디 한번 다시 해 봐!”
아웅다웅.
마치 초등학생이 싸우는 듯한 모습. 공중에 날아올라 서로 주먹질을 하며 싸우는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재영은 갑자기 팝콘이 당기는 것 같았다. 만약 이들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타이틀만 아니라면 그저 임프와 요정의 맞짱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이익! 내가 본체만 들고 왔었어도!”
“웃기시네. 너만 본체 있냐? 저번 전쟁 때는 꽁지 빠지게 도망간 주제에!”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그땐 네놈이 먼저 반칙했잖아!”
“반칙? 무슨 반칙?”
“절대 신기 무스펠하임(Muspelheim)을 들고 오는 건 반칙이지!”
“엥? 난 그런 거 들고 오지 말자는 규칙 같은 거 정한 적이 없는데?”
“이게 진짜!”
마치 동네 싸움 같은 느낌으로 변질된 것 같지만, 과거에 있었던 신화 속의 대전(大戰), 성마대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재영은 추론해 낼 수 있었다. 초보자 마을에서 아르카디아의 역사에 관해서 열심히 정독했던 내용이 이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거 천사와 악마들의 전쟁, 성마대전에서 천상의 대천사 미카엘이 무스펠하임을 휘두르자 전 대륙에 성화(聖火)가 일고 대륙 전체를 살육하던 악마들은 다시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에 대륙의 모든 생명이 자신들을 구원한 천상의 존재들에게 …….]그 신화적인 명성의 존재 둘이서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유치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이 둘에게 무어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미카엘이 재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당신이 이 사탄과 계약한 인간이죠?”
“어…… 그렇긴 한데요. 이게 강제로 맺어진 거라서, 원해서 그런 건 아니라…….”
이미 그녀에게 찔리는 게 있는 상황. 바로 얼마 전에 이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곳을 완전히 박살 낸 장본인이었기에 재영은 미카엘을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가진 그 힘이 잘못된 존재에게 흘러갔을 때는 아주 위험할 수 있어요. 특히 저 근본부터 글러 먹은 비열한 박쥐 새끼들한테는 더더욱 그렇죠.”
“누구 보고 박쥐라는 거야! 이 망할 닭 날개 새끼야!”
발끈하며 소리치는 탄. 하지만 미카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이미 이루어진 계약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앞으로 저 악마의 사탕발림과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지 않도록, 당신의 수호천사가 되어 바르고 올바른 길로 이끌도록 도와줄게요.”
탄을 흘겨보며 앞으로 자신이 지켜 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미카엘. 그런 그녀를 보며 재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 그녀. 물론 탄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 게임이 자신에게 원하는 방향성이…… 그리고 개발자가 만든 이 직업이 원하는 플레이의 방향은 아무리 생각해도…….
악(惡) 그 자체였다.
정말 순수한 악의(Pure Evil)에 가득 차서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우람하고 거대한 엿을 선사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직업의 목적이자 본질이었기에, 미카엘이 원하는 바를 재영은 절대 만족해 줄 수 없었다.
“키키키키키…… 미친년.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크헤헤헤헤.”
그녀의 말에 멍하니 있다 난잡한 웃음을 터트리는 탄. 배까지 붙잡고 웃고 있는 탄을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미카엘이 물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비웃는 거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탄. 그런 탄이 가까스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아, 하아…… 내가 악마들의 수장으로서 장담하는데…… 이 자식,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인간 중에서 제일 악마 같은 놈이야. 아니, 가끔은 악마보다 더해.”
“…….”
악마한테 보증받은 악함이라니. 뭔가 들으면서 이걸 칭찬이라고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악담이라고 발끈해야 할지 재영이 헷갈려 할 때 탄이 저열한 미소를 지으며 비웃듯이 말했다.
“나조차도 저놈한테 배워 가는 상황인데 네가 쟤를 바른길로 이끌겠다고? 쿠헤헤헤헤헤!”
마치 열심히 해 보라는 듯 비웃는 탄. 그의 말에 미카엘은 저게 사실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재영은 도무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께서 만든 인간들은 모두 선함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죠. 그리고 그러한 선함을 끌어내는 것이 나와 모든 천사의 거룩한 사명(使命)이고요.”
마치 빌어먹을 악마 새끼에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손을 내미는 미카엘. 그녀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제가 당신의 마음에 있는 선(善)함을 끌어내 보겠어요.”
하지만 미카엘은 몰랐다, 가끔은 갱생이 불가능한 절대 악(惡)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재영이 앞으로 벌일 일은, 저 망할 사탄조차도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의 사악함으로 가득한 만행들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