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치정극은 어려워 (5)
제규가 곡물 사재기에 들인 금화의 액수만 해도 50만 골드.
현재 1골드가 10만 원 선에서 거래되는 것을 고려하면 자그마치 500억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간 상황이기에 제규는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업으로 보고 지원해 줄 테니까 그에 걸맞은 성과는 가져와야겠지?”
사업으로 봐 주겠다며 성과를 가지고 오라는 아버지의 경고. 제규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이번에도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번 기회마저 말아먹으면 아마 최춘식 회장은 다시는 그에게 기대를 주지 않을 것이다.
“베르헨 공작의 집에서 나오는 사람들 철저히 감시하고, 유저면 나한테 데리고 와!”
그렇기에 그 어떤 사소한 변수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
제규는 자신 말고 베르헨 공작과 접촉하는 유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작의 집 근처에 사람을 붙여 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이 데리고 온 한 사람, 제규는 그가 아까 공작의 집에서 보았던 모험가 복장의 유저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날 보자고 했다고?”
캐릭터명을 비공개로 설정해 놓아 머리 위에 닉네임이 없는 유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NPC로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한 그는 살짝 불쾌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나 확인할 것이 있어서 데리고 오라 그랬다. 기분 나빴으면 사과하지.”
별로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 재영은 마치 자신이 오라고 하면 다 제쳐 두고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라는 듯한 상대방의 태도에 황당했지만, 참을 인을 마음속에 새기며 물었다.
“확인이라…… 뭘 확인하고 싶다는 거지?”
“아까 베르헨 공작을 만났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걸 내가 말해 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아직 분위기 파악이 덜 됐나 보군.”
대화가 전혀 진전이 없는 그 둘. 그러한 이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규의 수행 비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베르헨 공작님께 어떤 퀘스트를 받은 게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왜 저를 대하는 태도는 그냥 물어보는 수준이 아닌 것 같죠?”
여차하면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던 수행원. 재영은 지금 앉아 있는 이 순간 자체가 그의 의지가 아니었기에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제규의 참을성은 바닥이 나 버렸다.
“네놈이 베르헨 공작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공작이 준비하는 일에 괜히 간섭하지 마라. 만약 또다시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이 보이면…….”
“보이면?”
“앞으로 이 게임을 하는 게 많이 고달파질 거다.”
적나라한 협박. 마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게임을 하지 못하게 괴롭히겠다는 그의 의지가 가득한 것을 보며 재영의 얼굴도 싸늘해졌다. 정확히 무슨 연유로 이들이 베르헨 공작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베르헨 공작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저…… 잠시만 저랑 이야기를 좀…….”
제규의 수행 비서는 감정적으로 나서는 그와 재영을 떼어 놓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연신 굽신거렸다.
“죄송합니다. 저희 상단주님이 이번 일 때문에 많이 예민하거든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조금만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마치 어르고 달래는 듯한 그 둘의 상반된 태도.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재영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넌지시 말했다.
“저희 상단이 그냥 일반적인 상단은 아니고, 지엠 그룹에서 만든 상단입니다.”
“네? 그 지엠 그룹이요?”
지엠 그룹이 게임 속에서 상단을 운영한다는 사실에 재영도 놀랐다. 아무리 아르카디아가 엄청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기업 차원에서 게임 안에 상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번에 저희 상단에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저희 도련님, 아니 상단주님이 많이 예민하세요. 그래서 그런데…….”
그가 손에 꺼내 든 한 주머니. 그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베르헨 공작이 무슨 퀘스트를 주었든 그냥 포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넉넉히 넣었으니 아마 공작의 퀘스트를 깨서 얻게 될 보상과 비교해도 전혀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돈으로 재영을 매수하려는 수행 비서.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재영이 돈으로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죠, 뭐. 공작이 준 퀘스트만 포기하면 되는 거죠?”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넨 주머니를 받아 드는 재영. 그가 돈주머니를 받자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수행 비서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뤄 냈다는 듯. 만족한 미소로 재영을 배웅하는 수행 비서.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의 뒤에 날개를 퍼덕거리며 재밌다는 듯 히죽거리고 있는 악마 하나가 달려 있다는 것을.
* * *
“어떻게 됐어?”
수행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결과를 물어 오는 제규. 비서는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재영과의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돈주머니를 받아 갔습니다. 공작이 준 퀘스트는 포기하기로 했으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끄응…… 그 자식 닉네임도 확인 못 했는데. 혹시 뒤에서 몰래 뒤통수 치는 것 아냐?”
“그 부분은 공작의 주변에 사람들을 붙여 놔서 철저히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가 무슨 퀘스트를 받았든 그게 저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전쟁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이권들이 얽히고설켜 수백, 수천 가지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져서 발생하는 일. 그렇기에 그가 어떤 퀘스트를 해결하든 거의 일어나게 될 전쟁을 막아서는 건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수행 비서가 확신에 차서 말하자 제규 역시 안심이 되는지 살짝 얼굴이 풀어졌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벌어들일 예상 수익은 어떻게 되지?”
최춘식 회장이 준 자금을 전부 융통해서 온갖 상단과 영지를 돌아다니며 이곳에서는 생소한 선물 계약을 들이민 지엠 상단. 이들이 역량을 최대한으로 동원해 끌어모은 레버리지 덕분에 사실상 이들이 쏟아부은 금액은 1,000만 골드에 달했다.
자그마치 한화로 1조 원에 달하는 금액.
이번 일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기에 이제는 그저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지엠 그룹이라는 대기업의 회장이 직접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안. 그렇기에 제규는 이번 일을 무조건 성공시키고 그에 견줄 만한 이익을 만들어 내야 했다.
“곡물 가격의 상승분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예상한 바로는 800만 골드 정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투자금 58만 골드가 800만 골드로 늘어나는 마법. 이 모든 게 레버리지를 풀로 때려 박았기에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최춘식 회장은 물론 그룹 전체가 주시할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빨리…… 전쟁이 일어나면 좋겠군.”
580억을 8,000억으로 불리는 성과. 공장이나 설비도 없이, 그저 접속기 몇 대와 인력 몇 명으로 이루어 내는 말도 안 되는 실적. 엄청난 자금이 움직이는 이 가상의 세상 속에서 제규는 히죽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둘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는 작은 악마를 사이에 두고 말이다.
* * *
“흠…… 뭐야? 얘들도 결국 전쟁을 원하는 거였잖아?”
“그러게? 그러니까 서로 간의 솔직함이 필요한 거라고. 너나 그놈들이나 원하는 바를 까놓고 이야기했으면 훈훈하게 대화가 끝났겠다.”
의식하지 않아서 몰랐지만, 패밀리어로서 재영과 계약이 맺어진 탄. 패밀리어의 기본적인 능력인 감각 공유를 통해 원격으로 이들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염탐한 재영은 이들의 속내를 파악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전쟁을 일으켜 최대한의 혼란을 불러와 개연성을 얻으려는 재영.
곡물을 독점적으로 매입해 전쟁 특수로 큰 이익을 얻으려는 제규.
그 둘이 원하는 것은 똑같은 전쟁이었지만 서로를 견제하거나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손을 맞잡고 짝짜꿍하는 게 더 합리적인 상황.
“아무튼 신경 안 써도 되겠는데? 여기도 베르헨 공작의 사주를 받고 열심히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
합리적인 탄의 말. 누가 듣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겠지만, 재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잠깐만, 근데 전쟁이 일어나면 아까 그 싹퉁바가지가 더 좋은 거 아냐?”
탄의 통해 그 둘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주워들은 재영. 물론 상세하게 그 계획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전쟁으로 벌어들일 수익이 엄청나다는 것까지는 들었기에 굳이 이들의 계획에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랑도 상관없는 일이잖아.”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법이고 전혀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가 빌딩을 사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게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 다른 것도 아니고 시가로 자그마치 8,000억 원에 달하는 골드를 벌어들일 예정이라는데 재영은 그 사실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해서 개연성 그거 조금 얻는데, 누구는 손 하나 안 대고 앉아서 800만 골드나 벌어들이려고 해? 이게 게임이냐?”
절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젓는 재영은 마음을 완전히 바꿔 먹었다. 전쟁을 통해서 얻는 개연성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망할 부잣집 도련님이 앉아서 돈을 벌어 먹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베르헨 공작은 죽어야 해.”
“아! 저 새끼 또 지랄 났네.”
“드디어 신의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군요.”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치는 탄. 그 옆에서 엘은 언제 베르헨 공작을 죽이러 갈 거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베르헨 공작에게 결투장을 보내도록…….”
“엘,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니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해야지.”
이 결투무새의 천사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고민하는 재영. 하지만 기어코 암살하겠다는 재영의 말에 엘은 실망스럽다는 듯 날개를 축 늘이고는 삐졌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흥! 그렇다면 이번에는 저도 도와드릴 수 없겠군요.”
“뭐……?”
“암살은 불시에 타인의 생명을 거두는 비겁한 행위. 사랑하는 이들과의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주지 않는 악랄한 짓이라고요. 천상의 힘을 그런 곳에 쓰는 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요!”
“…….”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재영은 도대체 저 정신 나간 천사가 어떻게 대천사가 된 건지 그리고 모든 천사가 다 저런 것인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탄이 은근한 눈빛으로 재영에게 속삭였다.
“뭣하면 내가 빌려줄까?”
“뭐……?”
“아니…… 저 닭 날개가 빌려주는 것처럼 나도 마계의 힘을 빌려 오는 건 가능하거든.”
강신 스킬이 단순히 천상만이 아니라 마계의 존재에게도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에, 재영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야!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네가 물어본 적도 없었잖아! 전에는 스킬인지 뭔지 능력만 달라고 해 놓곤?”
“아…… 일단 어떻게 하면 되는데.”
“잠깐만…… 됐다.”
황급히 무언가를 휘젓더니 재영에게 손을 내미는 탄. 그 손을 맞잡자 핏빛 육망성이 그려지더니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계와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개연성을 소모해 마계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려 올 수 있습니다.]계약이 성립되었다며 이전과는 다르게 두 칸으로 나뉘어 무수히 많은 인물의 리스트가 빼곡하게 나열된 강신 스킬. 그 리스트 안에서 재영은 이번 일에 적당한 한 인물을 고르고는 미소 지었다.
“이 녀석으로 하면 되겠네.”
“뭐야? 왜 하필 그놈인데?”
“전에 역사서에서 본 적이 있거든.”
아르카디아의 역사를 섭렵한 재영. 그 안에서도 꽤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며 서술되었던, 아르카디아 대륙 전체를 공포에 물들였던 죽음의 존재.
[죽음의 군단, 리치 아르게이머.]그의 이름이 리스트 안에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