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77
77화 잊힌 신화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디아.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딘 모험가, 나는야똥손.
하지만 중식의 캐릭터 수준은 베타 테스터라는 선점 특권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플레이를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처참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헥헥……. 잡았어요!”
망치를 들고 레벨 30대의 코볼트와 치열한 일대일 맞짱을 뜬 중식.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모면하고 난 후에야 겨우 몬스터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며 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뒈지기 직전까지 몰리긴 했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잡긴 잡았네.”
“헤헤…… 코볼트 혼자 잡아 본 건 또 처음이네요! 잘했죠?”
거의 한 틱 차이로 살아남은 중식. 그는 기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회복 포션을 꺼내 들이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재영의 마음은 점점 심란해져 갔다.
‘전투 능력은…… 형편없고 너무 애매한데…….’
아무리 레벨 차이가 난다고 해도, 전투에 대한 센스가 전혀 보이지 않는 피지컬. 거기에 이미 견습 대장장이라는 직업까지 획득해 있는 상황이라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전투 클래스로 직업을 변경하는 것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생산 계열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고…….”
이미 그의 대장장이 실력을 확인한 재영. 그저 투박하고 밋밋한 외형의 단검과 방어구 몇 개만 만드는 게 다였다. 성능 역시 미하일 남작의 말을 빌리자면 쓰레기에 가까운, 철광석이 아까운 수준이었으니 이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쯧…… 이러니 클로즈 베타 때부터 해도 이 모양인 건가…….”
재영이 볼 때 아르카디아는 다른 일반적인 RPG 게임과는 차별화된 특징이 있었다. 시간에 따라 무한정 노가다 작업만 반복한다고 해서 성장할 수 없는 구조. 남들과 다르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시스템과 퀘스트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100% 끌어낼 수 있어야만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생산 계열은 최악이고…….”
생산과 제작 계열의 직업들.
개인의 로망이나 차후에 돈이 될 만한 직업이라는 판단 때문에 대장장이나 재단사 등 그 이외의 직업으로 수많은 이가 제작 계열로 뛰어들고 있었지만, 대부분 금방 그 한계를 깨닫고 절망과 좌절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생산품을 만들면 죄다 최하품만 나오는데 이거 왜 이래요?
-제작하는 동안 온도 균일하게 맞추셨어요? 망치질 똑바로 안 하고 균일하게 안 두드리면 무조건 불량품 나와요. 스킬 보정만 믿지 말고 직접 하세요.
-아니, 이거 게임 맞아? 내가 지금 게임을 하는 건지 대장장이 교육을 받는 건지 헷갈린다.
-맞음. 장비 제작 쪽은 현실에서 하듯이 해야 함. 운 좋으면 매직 등급도 뜨더라.
단순히 실력과 기술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녹아 내고 거기에 나아가 장비 하나하나에 갖은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만들어지는 상위 아이템. 현재 대장장이로 가장 유명한 유저가 만들어 내는 최고 등급이 매직 아이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장장이는 중식이 감히 넘볼 영역이 아니라고 재영은 판단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그런 그의 생각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엘. 그녀는 묘하게 흥미로운 눈으로 중식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대장장이는 실력과 재능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영혼까지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예술적인 영감도 중요하죠. 하지만 제가 볼 때 대장장이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대천사인 그녀가 갑자기 대장장이가 가져야 할 소양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재영은 의아한 눈초리로 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초점이 풀린 눈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뜨거운 불과 숨까지 막혀 오는 지독한 더위를 참아 내며 무거운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근성. 그 불굴의 의지와 신념 속에서 수백만…… 아니, 수천만 번의 망치질을 통해 진정한 힘을 가진 무구가 탄생하게 되죠. 그리고 저 아이는…… 참혹하고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겨 내 왔죠. 그걸 보면 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저 단순한 추측이나 사탕발림이 아니라 강한 확신을 가진 채 말하는 엘. 그런 그녀의 태도에 재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넌 대천사면서 어떻게 대장장이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아니, 그보다 왜 저 아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거야?”
재영의 눈으로는 답답할 정도로 둔하고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부족하다고 할 정도로 부족한 중식. 여러모로 어떻게 이 녀석을 활용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엘은 그를 대장장이로 키워야 한다고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건 조금 말하기 곤란해요.”
살짝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기를 주저하는 엘.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재영은 더욱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왜?”
“그게…… 다른 것들은 상관이 없는데, 이와 관련된 정보는 누설되기라도 하면 이 대륙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큰 파급력을 가지거든요. 천계에 소속된 입장으로서 그런 혼란이 벌어지게 되면 저희에게 오는 타격도 무시할 수 없어요.”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미카엘. 특히 일개 천사도 아니고, 천상을 수호하는 천계의 지도자나 다름없었기에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저번에 칼립소가 개입한 것만 해도, 본인의 개연성을 넘어서는 행위를 해서 그에 따른 대가로 천계 역시 그 부담을 대신 짊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식의 월권이 반복되면…….”
결국 개연성 문제 때문에 말할 수 없다는 엘. 하지만 재영은 그런 그녀의 고민을 너무나도 손쉽게 해결해 줬다.
“네 말은 다시 정리하자면…… 개연성만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네가 말하기 주저하는 정보도 제공할 수 있다 이 말이네……?”
“음…… 그건 그렇긴 한데…….”
“간단하네. 그럼 개연성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이야기해.”
“예……?”
“어차피…… 개연성은 차고 넘치거든.”
-개연성: 912,312
10만이라는 개연성을 탄에게 주고도 아직도 90만이 넘는 수치를 자랑하는 개연성. 죽창대전에서 받아 낸 막대한 양의 개연성 덕분에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엘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네가 말하는 대륙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수 있는 정보, 내가 살게.”
재영은 의도치 않게 개연성의 새로운 활용법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수천, 수만…… 아니 까마득한 지고의 세월을 살아오며 습득한, 방대한 정보의 소유자인 탄과 엘. 그 둘에게서 개연성을 지불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받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가상현실 아르카디아.
놀랍게도 이 가상의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신과 신화가 존재했다.
‘신화의 시대’라고 명명된 시대에는 비록 보유하고 있는 힘과 권능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래도 신성과 신격을 보유하고 있는 이가 여럿 존재했다.
사냥의 신. 음악과 유흥의 신. 전쟁의 신. 정의와 균형의 신. 시간의 신. 장난의 신 등…….
수없이 많은 신이 존재했었고, 이들을 믿고 숭배하는 셀 수 없는 교단과 종파들이 있었다. 각자 다른 신성력과 권능을 보유하고 다양한 이적을 일으키며 신과 인간이 뒤섞여 살아가던 시대. 하지만 그 시대는 인간들에게서 완전히 잊히고 지워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갑자기 엄청나게 많던 교단 중 하나가 대오각성 해서 ‘이 땅의 신은 오직 하나다! 다른 것들은 모조리 이단이니 처단한다!’라고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그 교단의 후신이 지금의 세인트 제국이고?”
꽤 놀라운 역사적 비화였다. 지금껏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이러한 역사적 내막과 사실이 알려진다면 엄청난 논란을 불러올 정도로 피로 점철된 길을 걸어온 세인트 제국이었다.
“이제야 왜 그놈들이 미친 듯이 마녀사냥 하고 다녔는지 알겠네.”
어떻게 저렇게 미친 광신도처럼 모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이고 다닐까 의아할 정도였는데, 과거의 전적을 보니 이제야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이해되는 재영이었다.
“그렇죠. 그런데 놀랍게도 진짜 그러면서 죄다 죽이고 다니더군요. 그걸 넘어서 다른 교단의 기록이나 흔적들도 철저히 파괴하고 다녀서 완전히 신앙 자체를 말살했죠. 그 덕분에 천계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자랑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니죠.”
그 누구보다 선함을 추구하는 천계의 존재였지만 여러모로 알게 모르게 모순점이 많은 존재. 그런 그녀의 말에 재영은 천사들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환상과 고정관념에 크나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신자들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들은 결국 하나둘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허신(虛神)으로 전락하고 말았죠.”
신앙.
강력한 이적의 원천이자 신성력의 근원. 신을 신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믿음을 가진 신도들은, 결국 문화 말살 정책을 펼치는 어느 옆 동네 나라처럼 싸그리 죽이고 불태우는 바람에 모조리 몰살되고 말았다.
그렇게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며 존재 자체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신들.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중식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불의 관심을 끄는 자.]가장 오래된 불. 태초의 끝없는 어둠을 밝힌 자. 모든 대장장이의 아버지이자, 천계의 상징인 어떤 악마도 불태워 정화하는 신검, 무스펠하임(Muspelheim)의 창조자.
불카누스.
그의 존재에 대해 엘에게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재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중식을 다른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저 끝없는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집념. 저걸 어떻게든 굴려 먹어야 한다 이건가…….”
비록 재능은 미천하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는 대장장이로 대성할 가능성은 있다는 결론을 내린 재영.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저 어리숙한 녀석을 최대한 굴리고 또 굴려서 쓸 만한 놈으로 만들어 내야만 했다.
‘이거 뭐…… 대장장이 메이커도 아니고…….’
안 그래도 바쁜데 중학생 정도 되는 애의 플레이까지 봐 줘야 하는 상황. 하지만 절대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생각이 없던 그는 엘에게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어떻게, 좋은 생각 없어?”
대장장이로 키우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엘. 그런 그녀였기에 재영의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다 이야기를 꺼냈다.
“음…… 혹시 드워프한테 데려가 보는 건 어때요?”
“드워프……?”
드워프(Dwarf). 난쟁이족으로도 널리 알려진, 판타지의 교과서적인 클리셰이자 어디에서든 등장하는 인간 형태의 이종족. 그들이 아르카디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르카디아의 역사서에서도 극히 일부분에서만 언급될 뿐 정확히 어디에서 마을을 꾸리고 살아 나가는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어디서 사는지도 전혀 모르는 녀석들인데? 어떻게 이 녀석을 데려가?”
“그건 저도 잘…….”
엘 역시 드워프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때. 갑자기 옆에서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탄이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난 아는데…….”
“뭐……?”
“뭐라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홱 돌리며 동시에 탄을 바라보는 재영과 미카엘. 탄은 그 둘의 격한 반응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지하에 처박혀서 사는 놈들이니까! 여기저기 땅바닥 헤집고 다니는 자식들이라 그놈들하고 맞닥뜨린 마물이 몇 있어서 아는 거야.”
“그래? 거기가 어딘데?”
“음…… 여기서 조금 멀어.”
재영의 재촉에 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드워프족의 활동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5대 금역으로 악명을 떨치는 지역 중 하나인.
초고열로 들끓는 모래가 가득한 곳, 대사막 슈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