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여긴 이기고 지는 게 없어 (3)
집 근처 조용한 카페에 도착해 카페인 없는 차 한잔을 시켰다.
잔을 가지고 빈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툭 내뱉은 속마음.
“내가 누굴 걱정해.”
돌이켜보면 남자에게 꽤나 감정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억울한 건 못 참아.
그렇게 덩치 큰 친구가 내리찍을 듯 노려보는 와중에도 할 말은 해야겠는 거 보면.
‘당신이 안다고?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는 그 기분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곱상한 얼굴로 대접받고 제 능력인 양 으스대며 살았잖아. 그러면서 뭔가 아는 것처럼 굴지 말라고.’
······그 말이 화가 났던 건 아니다.
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동생 같아서··· 라기엔 형이라 불러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아무튼, 뭐랄까···.
‘좀 안타까워서.’
그 시절 내가 겪었던 긴 터널이, 그의 앞에도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터널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거란 것도 알고 있어서.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르겠다.”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따뜻하게 들이키고 가방을 뒤적여 내 마음의 일용할 양식인 대본을 꺼내 들었다.
[악역 6화]“벌써 6화네.”
어느덧 후반부에 접어든 이야기.
멀티온이 원하는 대로 회차를 절반으로 줄여서일까.
벌써?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렇다고 ‘벌려놓은 이야길 어떻게 회수하려고?’라는 불안감이 들지는 않았다.
회차가 적은만큼 호흡도 빨랐으니까.
다만 아쉽다. 촬영이 다가온다는 것은 또 다른 설렘이었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간다는 건 섭섭할 정도다.
그 정도로 ‘악역’의 이야기가 좋았다.
“이 부분에선······.”
그렇게 대본을 이어서 읽어내려갔다.
중요한 것 같은 부분에 밑줄을 치고,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 곳엔 내 생각을 덧붙이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대본을 절반 정도 넘겼을 때쯤, 문이 열리며 카페 안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약속되어있던 반가운 얼굴에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오셨어요? 감독님.”
“오랜만!”
한이연 감독이 활짝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한달음에 다가와 자리에 앉는 그녀를 보며 내가 나직이 감탄했다.
“와, 정말 이젠 몰라보겠어요.”
진심이었다. 영화를 제작할 때의 그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고 화장이나 옷으로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그냥 사람 자체가 밝아졌달까.
“역시 눈속임 감독님.”
“그 정도로 확확 바뀌어서?”
큭큭 거리며 웃던 그녀가 말했다.
“걱정 마. 곧 집필 시작하면 다시 돌아간다.”
“전 그게 걱정인 건데요.”
“푸흐흣. 그래도 어쩌겠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숙명인데.
어깨를 으쓱거린 그녀가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악역’ 대본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번 대본?”
고갤 끄덕이자 그녀가 발을 구르며 군침을 삼켰다.
“으으, 너무 궁금하네. 나 김미옥 작가님 팬이거든.”
“조금만 기다리세요. 멀티온에서 봬요.”
“아직 촬영도 안 들어갔잖아.”
“그렇긴 하지만, 막상 촬영 들어가면 금방인 거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렇긴 한데. 아, 눈앞에 치킨이 있는 게 못 먹는 기분이네.”
피식 웃으며 대본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못 먹을 치킨은 보여주는 게 아니지.
쩝. 아쉬워하는 한이연 감독의 반응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최근 그녀는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천만 관객 돌파 기념으로 굿픽쳐스에서 스크립터인 손기훈을 포함해 팀원들 전부에게 포상 휴가를 준 것이다.
“너~무 좋았어. 해외여행이 얼마만이었는지···.”
“영감은 막 샘솟으셨고요?”
여행을 가기 전, 차기작의 영감을 받아 오겠다며 떠난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작은 핸드백에서 카탈로그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미술 전시라도 다녀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뻗은 손.
딸려 들어온 카탈로그엔 수많은 사람들이 담겨 있다.
각자 손에 무언가를 쥐고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 끝에 흡사 문신 남자 정도 되어 보이는 덩치의 거구.
백인 노인이 격정적인 자세로 서 있었다. 팔을 넓게 벌리고, 허공을 가르며.
······오케스트라?
카탈로그를 천천히 펼쳤다.
동시에 그녀가 덧붙인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마침 내가 베를린을 지날 때 공연을 하고 있더라고. 여기 왔으면 꼭 한 번 봐야 한다길래 또 언제 오나 싶어 얼른 예매했지. 그랬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숨넘어갈 듯 감탄하는 한이연 감독.
“정말 대단하더라.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더라니까.”
나는 그녀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 음악에는 완전히 문외한 이었으니까. 미술처럼 말이다.
그나마 전율에 가까운 순간을 찾으라고 하면 좋은 대본을 받았을 때와 좋은 연기를 보았을 때, 그리고 해냈을 때 정도가 되려나.
결국, 연기네.
나도 참 외골수 같은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는데, 한이연 감독이 말을 잇는다.
“이번 작품 언제쯤 끝날 것 같아?”
“아마, 5개월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요?”
“그래? 그 정도면······.”
말끝을 흐린 그녀가 ‘시나리오 작업하고, 대본 들어가서···.’ 라고 중얼거리더니 덧붙여 말했다.
“아직 대본은 커녕 시놉시스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서 좀 이르긴 한데······ 또 이만큼은 일러야 할 것 같아서. 백승결을 유혹하려면.”
멀티온이나 다른 곳에서 먼저 채가면 어떡해.
그녀의 노파심이 담긴 말에 픽 하고 웃었다.
“시놉시스 나오는 대로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줘.”
당장 계약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봐달라는 건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필력이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연출은 말할 것도 없지.
‘이쪽도 기대가 되네.’
끄덕이며 다시 손에 들린 카탈로그로 시선을 내렸다.
적어도 내게 올 시놉시스가 어떤 장르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찾아 떠난 영감이, 이 카달로그 속 장소에서 발견된 것 같아서.
“그래서. 미술에 이어서 이번엔 음악이에요?”
#
“감독님이 뭐라셔?”
일을 마치고 ‘악역’ 관련 자료를 전달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김성운이 물었다.
“팀장님이 예상했던 대로, 신작 관련 소식을 가져오셨어요. 절 유혹하시려고.”
“그래서. 유혹 당했어?”
되묻는 김성운에게 그저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끌끌 거렸다.
“이미 당했구만.”
“그 정돈 아녜요. 이번엔 정말 장르 정도만 들은 거라. 대략적인 소재라도 들어야 그 ‘감’이란 게 발동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한이연 감독이면 뭐, 이제 믿고 보는 감독이니까. 장르는 뭔데?”
“음악이에요. 클래식.”
그러자 김성운이 꽤나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한이연 감독은 아예 예술물로 방향을 잡은 거야?”
“확실히 그런 쪽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으시는 것 같긴 해요.”
“그런 사람이 예술 안 하고 영화 안 찍고 사무직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근질근질했겠어.”
고개를 흔든 김성운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전작이 무려 ‘눈속임’인 감독의 음악 영화라니. 그것만으로 기대가 되긴 한다. 게다가 음악, 그것도 클래식이면 미술보단 훨씬 대중적이잖아. 영화로서든, 요즘 분위기든.”
그의 말대로 클래식은 10여 년 전부터 계속 대중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더는 사람들이 낯설어하지 않았고, 어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나처럼 여전히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있지만, 솔직히 난 대중음악도 모르긴 마찬가지니까.
요즘 유명한 아이돌이 누군지 조차 모른다고.
“심지어 클래식 영화는 성공 사례가 꽤 있지. 예전에 ‘아실리’라는 영화도 전세계적으로 초대박 났었고, 무엇보다······.”
김성운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한서호 보유국이잖아.”
나조차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내가 운동을 잘 몰라도 올림픽 금메달 선수는 아는 것처럼, 한서호라는 이름은 그 정도··· 아니 그것보다 더 유명했다.
악기에 엄청난 천재성을 보이며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새로운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작곡을 하여 클래식계의 젊은 거장으로서 유명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요즘엔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 중이라고 하던데, OST 작업은 더 이상 안 하는 건가. 만약에 한다고 하면 진짜 화제성이 대단할 텐데.”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지닐지 상상도 안 간다며 혀를 내두르던 그가 돌연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긴, 영화 제작사들도 지금 당장 그가 어딨는지도 모를 거야. 갑자기 비엔나의 클래식 홀에서 나타날지, LA의 허름한 재즈 바에서 나타날지······.”
그렇게 말을 맺는 김성운.
나는 잘 모르는 얘기인지라 그러려니 하며 얘길 듣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어디 갔다가 오신 거예요?”
김성운의 옷차림이 평소와는 달랐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결혼식장을 다녀왔나 싶었는데, 얘길 쭉 듣다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아, FHN 엔터라고 뭐 진행 중인 계약이 있어서.”
“FHN 엔터요?”
이쪽도 들어본 기억은 있다.
근데 거기 배우 엔터테인먼트는 아니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가수 쪽 아니었나?
“응. 어쩌면 2팀에 배우 한 명이 더 들어오게 될지도 모르겠어. 아직 확정은 아니긴 한데···.”
팔짱을 끼고서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여기서 배우가 한 명 더 늘면, 로드가 진짜 문제야.”
“어, 지난달에 한 명 구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랬지.”
“근데요?”
“도망갔고.”
“아···.”
김성운이 허탈한 표정으로 등을 소파에 기댔다.
“구하면 도망가고 구하면 도망가고. 그나마 스케줄 가장 적은 배우한테 맡겨도 그런다. 로드 구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리고 갑자기 튕기듯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어디 주변에 체력 좋은 친구 없어?”
체력 좋은 친구? 내 행동반경에 그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한 곳 있긴 한데 말이지···.
“체육관에 한 번 알아볼까요?”
“오, 좋다. 체육관. 얼굴이 험상궂고 덩치 크면 더 좋아. 아무래도 얘기 나온 배우가··· 이건 뭐 아직 확정은 아니니 자세히 말하긴 뭐하고. 아! 운전은 꼭 할 줄 알아야 해.”
자연스레 한 명이 떠오르긴 한다.
운전까지 할 줄 아는진 모르겠다만, 그전에 나온 조건들이 너무 찰떡이라서.
험상궂고, 덩치 크고···.
거기에 화려한 문신까지.
그 외형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물론, 안 되겠지?
말 걸면 죽일 기세던데.
#
다음날.
어김없이 체육관에 도착해서 땀을 쫙 뺐다.
남자도 시간대가 겹치다 보니 한쪽에서 운동 중이었다.
물론 내 운동이 바쁜지라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상대도 그러는 눈치였다.
그랬는데.
“저기.”
“네?”
운동 가방을 메고 체육관을 나서는데, 이번엔 어제와는 달리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이 안 풀렸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돌아서서 바라보자, 그가 머뭇거렸다.
이마를 긁적이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하더니.
다시 날 보며 툭 하고 묻는다.
“그······ 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