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연주와 연기 (3)
“저 왔어요.”
사운드필름 유채봄 팀장이 방문한 곳은 평창동의 한 저택.
팔짱을 끼고 곧은 자세로 그녀를 반긴 백선화 사장이 이어서 눈을 흘겼다.
“꼭 서호가 와있어야 오지? 차 마시러 놀러 오라니까.”
“죄송해요.”
“하긴 능력이 좋아서 회사가 바쁜 걸 어떡하겠어.”
“그건 또 그렇죠?”
싱긋 웃는 유채봄 팀장을 보며 백선화 사장이 헛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가. 늘 그렇듯 서재에 있어. 신기하게 유럽만 다녀오면 곧장 여기로 오는 것 같아.”
“······가장 먼저 오고 싶을 만한 곳이죠.”
이곳은 영화 음악 제작사, 사운드필름부터 영화관, 배급사까지 모두 갖고 있는 SJ그룹의 저택이다.
하지만 유채봄 팀장이 만나러 온 한서호에겐 의미가 조금 달랐다.
그의 후원자이자 SJ 그룹의 회장인 백한길 회장이 살던 곳.
물론 대외적으로 그랬다.
하나의 생으로 다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가 둘 사이에 있었지만, 어쨌든.
그건 책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긴 얘기였다.
······유채봄 팀장은 계단을 올랐다.
그녀 앞에 나타난 긴 복도. 그 끝에 양쪽으로 열리는 낡은 문.
앞에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똑, 똑.”
“······.”
“똑! 똑!”
이윽고 문이 열린다.
문틈 사이로 헛웃음을 삼키는 남자.
지금의 음악계에서 가장 위대하다 불리우는 음악가, 한서호를 보며.
유채봄 팀장이 씩 웃었다.
“내 방도 아닌데 그냥 열고 들어오지.”
“열어주는 게 좋아서요.”
“그땐 미안했다니까.”
“미안하면 계속 열어주시죠.”
언젠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끝나버렸던 생을 떠올리며.
한서호가 입꼬릴 올렸다.
“그래. 알겠어. 계속 열어줄 테니 얼른 들어와.”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기억?”
기억하고 있었구나···.
낮게 읊조린 유채봄 팀장이 서재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풀었다.
안에는 이 서재의 주인이 좋아했던 작곡가들의 새 앨범이 잔뜩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앨범을 꺼내어 빈 책장에 하나씩 꽂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 없이 정리하다가, 유채봄 팀장이 툭 던지듯 말했다.
“‘위로’를 OST로 쓰고 싶다는 영화가 있어요.”
“어, 실장님께 들었어. 클래식 영화라던데.”
“시놉도 봤어요?”
“아니, 그럴 시간은 없었지. 꽤 오랫동안 영화 쪽으론 신경을 못 쓰기도 했고.”
고갤 저은 한서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사용해도 상관 없잖아. 아니, 애초에 우리가 허락하고 말고 할 곡이 아니지. 그건 곡의 주인이 누구나 쓸 수 있도록 허락한 거니까.”
곡의 주인.
‘위로’는 한서호가 만들었지만.
그가 주인은 아니었다.
그에게 음악을 알려준 첫 스승이자, 후원자인 이 방의 주인에게 헌정한 곡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방의 주인은 그 곡을 모두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저작권을 없앴다.
영화 제작사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터.
그래도 작곡가가 한서호이니 나름의 예의로서 물어봤으리라.
“그래서 OST에 수록하기로 했어요. 위로.”
“좋은 영화였으면 좋겠네.”
앨범을 모두 정리한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았다.
조금씩 우려나는 홍차를 바라보던 유채봄 팀장이 물었다.
“어땠어요, 유럽은. 지금쯤 유채꽃이 만개했을 텐데.”
“여전히 좋더라고. 다들 잘 지내고 있었고.”
가벼운 수다가 이어졌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 들은 음악, 마주한 영감.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 공기놀이를 하듯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유채봄 팀장이 가방에서 프린트된 종이를 꺼내 올렸다.
호기심 어린 한서호의 눈을 보면서 종이를 건네는 그녀.
“혹시나 나중에 아쉬워할까 봐 주는 거예요.”
“이게 뭔데?”
자연스레 종이를 받은 한서호의 고개가 기울었다.
유채봄이 덧붙여 설명했다.
“아까 위로를 쓰고 싶다고 한 영화요.”
“시놉?”
“아뇨. 시놉도 가져오긴 했는데··· 이것부터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혹시 백승결이라고 알아요?”
그러자 한서호가 긴 고민 없이 끄덕였다.
“배우 아냐?”
“오, 알아요?”
“닐 하우저가 ‘눈속임’ 너무 재밌게 봤다면서 그 얘길 한 시간 동안 하더라고.”
무려 미술의 거장이 전화해서 칭찬할 정도라니.
하긴, 그 정도로 재밌긴 했지. 그러니 천만이라는 상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거고.
“그 배우가 이번 영화에선 연주를 대역 없이 한대요. 심지어 오케스트라랑 현장 녹음으로.”
“어떤 곡을?”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번이요. 그 곡에 종이에 적힌 감정들을 담고 싶어 해요. 당연히 OST에 수록될 다른 곡에서도 그런 무드가 나와야 할 거고요.”
설명을 이어가며 유채봄 팀장의 눈이 한서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종이 위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정적 끝에서 그녀가 슬쩍 덧붙였다.
“분명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어쩐지 당신이 생각나서.”
“······.”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을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한서호의 시선이 떠올랐다.
어느새 슬픔에 젖은 듯한 두 눈.
울고 있지는 않지만, 짙게 물들어 있다.
마치 깊이 우려져 나온 잔 안의 홍차처럼.
필시 이 방의 주인을 떠올리고 있을 터.
“영감이 떠오르는 글이네.”
한서호가 입꼬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영화 음악으로 복귀해볼까.”
위로. 그다음은······.
그리움으로.
“오랜만에, 그래 볼까.”
#
“정해졌어요!”
굿픽처스 대표실로 한이연 감독이 뛰어 들어왔다.
박 대표가 깜짝 놀라서 들썩거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로케 관련한 내용을 듣기 위해 잠깐 방문한 나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듯한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어, 승결이도 와있었네.”
“바르샤바 로케 관련해서 해주실 얘기가 있다고 해서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박 대표가 자신의 궁금증도 얹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잔뜩 들떴어? 뭐가 정해졌는데?”
박 대표의 물음에 그녀가 빠르게 답했다.
“OST 맡아줄 작곡가요.”
“그래? 누구길래 이렇게 들떴는데? 유명해?”
“유명하냐고요?”
되물어본 한이연 감독이 마치 거대한 흑막을 밝히듯 씩 입꼬릴 올렸다.
“단순히 유명한 정도가 아닐걸요. 한서호의 영화 음악 복귀면.”
이어서 박 대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나조차도 비슷한 표정일 것 같다.
‘한서호···라고? 이번 영화의 OST를··· 그 분이 맡는다고?’
지난번에 그에 대한 이야길 할 땐 큰 감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단한 사람인 건 모를 수가 없지만 클래식과 영화는 내 기준에서 아무래도 거리감이 좀 있으니까.
심지어 인터넷조차 잘 안 하고 살던 나였잖아.
하지만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공부를 하고 보니 전혀 다른 느낌이다.
한서호라는 이름이 전 세계 음악계에서 어느 정도의 몸집을 자랑하는지 체감이 된달까.
“어, 어떻게!?”
박 대표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그래, 어떻게? 영화 음악을 안 한 지 오래되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들었는데?
나도 궁금해서 한이연 감독을 보는데, 그녀가 날 보며 미소를 짓는다.
“행운의 부적이 맞더라고요.”
“······?”
그건 또 무슨 소리?
눈을 끔뻑이며 돌아보자 박 대표도 날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행운의 부적이 나를 지칭하는 건가?
“한서호가, 승결이가 쓴 글을 읽어봤대요.”
“승결이가 무슨 글을 썼는데?”
“이인호에 대한 단상이랄까.”
내가 쓴 글을 그녀도 봤었다. 이인호의 창조주잖나. 당연히 컨펌을 받아야 했지.
그리고 김미옥 작가처럼 글 한 번 써보라는 극찬을 해주었고.
작가에게 글을 내밀며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 아닐까.
아무튼, 그걸 한서호가 읽었다고?
대충 루트가 짐작이 가긴 했다. 이게 이렇게 풀리네.
“아무튼, 그 글이 퍽 마음에 들었나 봐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그녀의 말에 박 대표 입이 귀에 걸렸다.
“야, 안 되겠다. 제작지원에 백승결 이름이라도 넣어야지. 안 그래?”
덩달아 끄덕거리는 한이연 감독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박 대표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러면 이제 캐스팅만 확정되면 정말 최고의 시나리오······.”
그 순간, 이번엔 한이연 감독이 활짝 열어놓은 문으로 스크립터이자 촬영이 없을 땐 그 외의 여러 업무도 맡고 있는 손기훈이 나타났다.
그도 꽤나 다급해 보였다.
“그, 스승 역할 후보군 중에 답신이 왔어요.”
“그거 세 명한테 보냈잖아. 그중에 누구?”
박 대표의 물음에 손기훈이 한이연 감독을 힐끗 보며 말했다.
“감독님이 가장 원하셨던······.”
“헙···!”
한이연 감독이 헛바람을 삼키며 입을 가렸다.
박 대표도 정체를 아는지 넋이 나가버렸다.
어째 나만 모르는 것 같네.
요즘 ‘악역’ 촬영에 피아노 연습까지 겹치며 잠시 우선 순위에서 밀렸지만, 스승 역할을 누가 맡을진 나도 너무 궁금했었다.
‘48시간의 위로’라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라고 하면 역시 주인공인 이인호와 그의 스승일 테니까.
대부분의 대사가 두 사람의 대화였다.
하지만 내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한이연 감독도, 박 대표도 그럴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분은······ 진짜 복권하듯이 한번 보낸 건데?”
“그러니까. 엄청 바쁘시다고 하지 않았나?”
벙쪄 있는 두 사람의 의문에 손기훈이 나를 본다, 또.
“승결 배우와 하고 싶으셔서, 그래서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고···. 늦게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그러시던데요.”
“또 승결이 때문이라고?”
“또요? 또 누가 승결 배우 때문에 왔대요? 아, 눈속임 때 이태관 배우님이랑 고하윤 배우 얘기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사운드필름에서······.”
한이연 감독이 손기훈에게 OST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는 박 대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분이 누군데요, 대체.”
“아, 모르지?”
“한이연 감독님이 설레발이 될까 무섭다고 안 알려주셨어요.”
한 감독이 그런 거 엄청 예민하지.
허허 웃으며 중얼거린 박 대표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스승역··· 너도 만난 적 있는 배우님이야. 아주 오래전에.”
“···?”
“그러니까, ‘해별이네’에서.”
그 설명만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사실 ‘해별이네’의 배우들은 모두 스타덤에 올랐다.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물론 나는 예외였긴 하지만, 이젠 다시 배우를 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나이대로 솎아내보아도 여러 사람이 후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 한 사람만 떠오른다.
내가 한이연 감독이라면······.
‘48시간의 기적’에서 ‘스승’의 역할을 맡을만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을 테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이자.
모든 배우들이 존경한다 입을 모아 말하는 ‘스승’ 같은 배우.
내가 박 대표를 바라보며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천광윤 선배님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