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기대 (1)
‘악역’의 촬영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악역이었던 주인공 오태구의 서사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거다.
몰입이 깊어질수록.
이야기가 끝맺음을 향해 나아갈수록.
오태구라는 인물이 가진 슬픔이 축축한 늪처럼 나를 끌어당기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 또 다른 몰입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인호는 오태구처럼 외롭지만, 의지할 ‘음악’이란 게 있었기에.
그에 몰입한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거다.
‘두 작품의 촬영과 준비를 동시에 하는 게, 이런 점에서 도움을 주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오태구와 이인호가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꽤나 긴 시간이 연기 뒤에 숨어 빠르게 흘렀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악역’의 마지막 촬영이 막을 내리는 순간.
관객 하나 없는 촬영장에서 우리는 커튼콜 대신 서로를 자축했다.
“주인공이 가장 고생했지.”
수많은 축하 인사들 사이로 덩치 큰 안기현이 굵은 손바닥을 내민다. 김주철인줄.
“선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작품 준비는 잘 되지?”
“열심히 준비하고 있긴 한데, 쉽지 않네요.”
“클래식이 주제라··· 난 음악에 대해 전혀 몰라서, 상상도 안 가네.”
콧잔등을 긁으며 말하는 안기현.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장르가 뭐든, 주제가 뭐든. 백승결이라는 이름만으로 기대감을 주니까.”
“무지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거.”
“무지 보기 좋은 연기였거든. 촬영하는 내내.”
그가 부드럽게(—섬뜩하게 보이지만) 웃어 보인다.
“깡패 백승결, 오태구가 이토록 큰 울림을 줬는데, 음악가 백승결은 또 어떨까 싶어. 백승결이란 이름이 룸6 때부터 나한테 엄청 강렬하게 남아 있거든.”
“기대하셔도 될 거예요.”
내 이름보다 더 강렬하고 아득히 대단한 이름들이······.
‘48시간의 위로’에 이름을 올릴 테니까.
한 명은 전 세계를 휩쓴 음악가.
또 한 명은 국민 배우라 불리우는 최고의 연기자.
아직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 입꼬리를 잡아 올린다.
이미 시놉만으로, 대본만으로 좋았던 작품이 더욱 대단해지고 있는 느낌.
그게 배우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고양감을 만들어냈다.
······일단 회식 자리에서 더 이야기하자고 말한 안기현이 두꺼운 팔을 흔들며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김성운이 다가와 말했다.
“넌 역시 사람을 끌어당겨.”
“지금 멀어지는 중인데요.”
“······.”
잠시 벙찐 눈으로 바라보다 피식 웃은 그가 말한다.
“대신 내가 왔잖아.”
“오.”
탁월한 반박에 살짝 감탄하는데, 김성운이 덧붙여 말했다.
“난 예전부터 그 이유가 궁금했거든.”
“제가 막 끌어당기는 거요?”
내가 줄을 당기는 시늉을 하자 그가 끄덕였다.
“장점이 많은 거야 알고 있지만······ 그것뿐이라기엔 뭔가 좀 아쉬워서. 그런데 주철이가 이번에 너 없는 술자리에서 그러더라.”
“···?”
“다음에 만날 때가 기대되는 사람이래. 네가. 그래서 자기도 더 나아지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래. 엄마한테 가서 이랬고, 저랬다 떠들고 싶은 사람이래.”
들은 이야기를 내뱉던 김성운이 이번엔 본인 얘길 털어놓는다.
“돌이켜보면 나도 집사람한테 그러더라고. 현태는 직원들한테 그런다고 하고.”
괜히 쑥스러워져 멋쩍게 웃었다.
“아이참,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그리고 발을 돌려 대기실로 향한다.
“얼른 회식 가죠.”
“가면 차기작 엄청 물어보겠던데···.”
뒤따르던 김성운이 휙휙 고갤 돌리며 주변을 확인하더니 속삭인다.
“한서호, 천광윤. 입 근질거려서 참을 수 있겠어?”
“팀장님이 못 참으실 것 같은 표정인데요.”
“사실 맞아. 내가 그럴 거 같아. 흐.”
김성운이 잘 말리라며 흐느적 웃었다.
그가 대기실에 들어가 가방을 챙기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대표님한테 연락이 왔어.”
“대표님이요?”
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여러 명이다 보니 잠시 멀뚱거리자 김성운이 답한다.
“우리 하선경 대표님.”
아, 하람 대표님 말하는 거였구나.
“이번주 토요일에 밥 한 끼 하는 거 어떠냐고. 마지막 촬영이 오늘이라, 좀 쉬고 싶어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 계획 있어?”
“딱히 뭐 없어요.”
“그래? 그럼 말씀드린다.”
대본을 챙기며 끄덕거리는데, 가방과 팬들이 보내온 선물을 한아름 안아 든 김성운이 허리를 펴며 덧붙였다.
“아 근데, 단둘이 먹는 건 아닌가 봐.”
#
“‘48시간의 위로’에 합류하신다는 얘기 듣고, 선배님이 연락 주실 줄 알았어요.”
서울 근교에 위치한 고급 한식집.
한적한 정원을 내려다보던 하선경 대표가 식전차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맞은 편에 앉은 남자가 새하얀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노인과 중년 그 사이에 걸쳐 있는 듯한 남자, 천광윤 배우가 물었다.
“우리도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이지?”
“그렇죠. 선배님은 작품활동을 쉬지 않으셨고, 전 1년에 절반 이상 해외에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요즘은 좀 어때.”
뭐가 어떠냐는 건지 말하지도 않았지만, 하선경 대표는 늘상 나눴던 주제인 것처럼 답한다.
“할리우드··· 거기도 인식부터가 꽤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과는 다른 시대죠. 기존 한국 드라마들이 어느 정도 조명을 받고 있던 차에 ‘악의 링’이 터지면서 확 바뀌었달까요. 동양인에게도 조금씩 비중있는 역할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균열이 생겼고, 그걸 완벽하게 무너트릴 한 방이 필요한 거군.”
“두 방일 수도 있고요.”
가볍게 으쓱거리는 하선경 대표를 보며 천광윤 배우가 눈매를 좁혔다.
“‘악역’과 ‘48시간의 위로’를 얘기하는 건가?”
이에 미소로 답하는 하선경 대표였다.
퍽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며 턱을 매만지는 천광윤 배우.
“자네의 ‘감’이 또 동했나 보군.”
그의 말에 하선경 대표가 끄덕였다.
두 작품 모두 감이 좋다니, 놀랍네······ 라며 낮게 감탄하는 천광윤 배우에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꽤 신기한 사실이 있어요.”
“음?”
“백승결 배우가 선택해온 대본들을 그동안 쭉 살펴봤는데, 하나같이 전부 다 느껴지는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전까지만 해도 한 작품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감’ 좋은 작품들이 전부 그의 필모에 있었어요.”
이번엔 곧 공개될 두 작품이 하선경 대표의 감에 들어왔다는 것보다 더욱 놀라는 천광윤 배우였다.
“백승결이··· 자네와 비슷한 능력이 있다?”
“어쩌면 더 예민할 지도요.”
넌지시 예상한 그녀가 천광윤 배우를 보며 말을 잇는다.
“거기에 선배님이 인정할 만큼 대단한 연기력도 있고요.”
“인정이 아니라 놀라움이었지. 이미 그 어린 나이에 말이야. 천재라는 단어가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었는데······.”
잠시 과거를 떠올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돌아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놀라운 배우가 되어 복귀한 것 같네.”
안도하는, 흐뭇한 미소였다.
동시에 기다림에 대한 환호도 엿보였다.
빙그레 웃어 보인 하선경 대표가 식전차를 말끔히 비우며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왔네요. 천재 배우.”
그림 같은 연못 위, 소박한 다리를 건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
정원과 연못, 잉어.
그리고 한옥.
정갈하면서도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그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며 눈을 굴렸다.
그리고 직원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방.
드르륵—.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오랜만이군.”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서, 자리에 앉았다.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색하긴 했다. 워낙 오랜만에 보는 천광윤 배우였으니까.
티비를 통해서 꾸준히 봐오긴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해별이네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다소 걱정도 됐다.
나에게 ‘해별이네’는 여전히 기억에 새겨진 흉터 같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렵거나, 아프기도 하거든.
물론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자, 그러면 이제 식사 주문하지. 여기가 대체적으로 음식이 다 맛있어.”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젓가락질을 하며 이야기가 물꼬를 텄다.
“아니, 그래서 스승은 정말 이름이 없는 거야?”
“어머, 그러게요. 대본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저도 없는 거로 알고 있어요.”
···의외였다.
솔직히 옛날 이야기가 주를 이룰 줄 알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게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음식 얘기도 ‘입맛에 맞나?’ 한 번 질문한 게 끝.
그 이후부턴 계속 ‘48시간의 위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전하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광윤 배우는 과거에도 고작 10살짜리인 날 앞에 두고 ‘해별이네’에 대한 이야길 끝도 없이 했었으니까.
그 사실이 묘하게 즐거웠다.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작품을 하고 싶어 시간을 만들었다 말했지만.
이미 ‘48시간의 위로’란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자신이 맡은 스승 역할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무슨 폐관 수련처럼 피아노 연습만 하던 나로서는 이 상황이 반가울 수밖에.
신기한 건 옆에 앉은 대표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언제 대본을 다 읽었는지 오히려 나보다도 말이 많다.
딱딱할 줄만 알았던 분위기가.
작품과 연기 얘기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정갈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대화였다.
“······그래도 스승 역할에 연주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승결이가 실제로 연주를 한다고 하는데 나만 대역을 쓰기도 뭣하고.”
“선배님 지금 승결이한테 경쟁심 느끼세요?”
“경쟁심이라기보단, 향상심이지. 함께 뭔가를 도모하는.”
능청스러우면서도 진중하게 답한 천광윤 배우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참, 모 잡지사에서 인터뷰한 거 봤는데.”
“어떤 인터뷰요?”
“해별이를 넘어서고 그다음 목표. 이번엔 자신을 믿는 게 목표라고?”
“아··· 네, 맞습니다.”
“복귀 후에 연달아 잭팟을 터트렸는데, 아직 자신을 못 믿나? 아니, 그보다 그 연기가 자신을 못 믿는 배우의 연기라고?”
의아해하다가 놀라워하는 천광윤 배우를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말은 달달한 칭찬이었지만, 내가 가진 대답은 겸손 따위가 아니었기에.
지키려고 했지만, 무엇하나 지킨 게 없었다.
가족도, 함께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그리고 연기가 좋았던 10살짜리 나조차도.
그러니 나는 아직 내 선택이 무섭다.
성공할 작품이 눈에 보여도, 그건 마찬가지.
작품의 성공이 나를 지켜주진 않더라고.
“뭐, 상관없겠지.”
“···?”
“뭐가 되었든.”
천광윤 배우가 형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그러자 옆에서 하선경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환영 인사가 너무 늦으신 거 아녜요?”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었거든.”
“아, 자만추? 근데 이 자리도 딱히 자연스럽진 않았던 것 같은데.”
“같이 작품도 하는 마당에 이런 자리가 어때서.”
“그 작품도 억지로 시간 맞추신 거 잖아요. 어디 하나 자연스러운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요?”
“끙···.”
과거 배우와 매니저였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살짝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이 저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에 놀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래, 저런 사람들이었지.’
그제야 떠오르는 아주 오래전 기억들.
저 두 사람을 보며 나는 꺌꺌 대고 배를 잡았다.
10살짜리 애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조크들 투성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냥 즐거웠지.
“하···.”
헛웃음이 났다.
그 소릴 들은 두 사람이 날 돌아본다.
이 장면조차 너무나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렇게 기억력 좋다 말하고 다녀놓고······.’
정작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은 다 잊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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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과 OST.
가장 중요하다 여겼던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매듭지어지자.
한이연 감독은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달렸다.
장소 섭외부터, 마케팅, 콘티까지.
나머지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덕분에 옆에 있는 스크립터 손기훈까지 10년은 늙은 모습이었다.
굿픽처스 박 대표는 한 5년쯤.
시간이 빠르게 간다 싶었는데, 굿픽처스는 실제로 바깥보다 서너 배쯤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무서운 곳이야.
그래서 굿픽처스를 기피하고 피아노나 열심히 치는 사이, 점점 대망의 날이 다가왔다.
무려 바르샤바에서의 첫 촬영.
’48시간의 위로’의 크랭크인이 바로 코 앞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미국 멀티온 본사에선 또 다른 준비가 끝났다.
‘악연’의 내부 시사회.
마케팅에 어느 정도의 힘을 쏟을지 결정하는 결전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