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48시간의 위로 (1)
백승결이 바르샤바의 거리로 나서고, 얼마 뒤.
김주철이 백승결의 의상들을 코디와 함께 체크하고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커피와 차를 손에 들고 들어온 그가 눈을 끔뻑거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백승결 방에 백승결은 없고 객만 둘이었다.
“승결이 형은요?”
“나갔어. 주변 둘러본다고.”
“어, 배우분들 나가시는 거 봤는데, 거기 형 없으시던데. 혼자 가신 거예요?”
김성운이 끄덕이자 커피를 나눠준 김주철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떨었다.
“근데 승결이 형 혼자 나가도 될까요?”
“별문제 없지 않을까. 그리고 혼자 보내주는 게 도와주는 걸 거야. 연기를 위해서 돌아보는 거니까.”
김성운은 백승결이 나간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내일 촬영 장면이 사실상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잖나.
해외 로케를 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겪는 일이지만, 확실히 배우의 몰입엔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역할에 천천히 몰입해서 엔딩으로 향하는 것과, 처음부터 엔딩에 던져지는 건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을 테니까.
‘뭐, 역순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둘러봤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김성운은 백승결이 홀로 나간 사실에 대해선 크게 대수롭지 않아 했다.
반면 김주철은 걱정이 태산인 얼굴이었다.
“그치만 유럽 쪽에 인종차별이 많다던데···.”
“이 도시는 관광객도 많아서 꽤 친절하다던데?”
“누가 시비를 걸면 어쩌죠? 이 동네 깡패들이 혼자 온 관광객을 노릴 수도 있잖아요.”
“이 동네에 깡패가 있을까? 소매치기면 몰라.”
김성운이 툭툭 반박하자 김주철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팀장님. 깡패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경험담이니?”
“쩝······.”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머릴 긁적이는 김주철을 보며 김성운이 킬킬 웃었다.
옆에서 노트북을 꺼내 밀린 편집을 이어가던 임현태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설령 있다 한들 승결이가 어디서 맞고 다니겠어?”
“아?”
김주철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끄덕거렸다.
자신이 백승결을 어디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백승결이 어떤 훈련을 하고 있는지 떠오른 것이다.
“뭐, 그렇진 않겠지만······통역은요? 말이 통해야 사람이······.”
말을 이어가던 김주철이 스스로 깨달았다.
“아, 영어 잘하시지. 근데 여기 사람들도 영어 쓰나요?”
질문을 던졌는데, 두 사람의 표정이 묘했다.
김주철이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요?”
이에 그럴 수 있다며 끄덕이는 김성운.
그가 김주철이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설명했다.
“요즘 유은하쪽 로드로 붙어 다니느라 몰랐겠구나. 승결이가 폴란드어 공부를 하더라고.”
때마침 임현태가 노트북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지금 막 폴란드어 연습하는 부분 나오네요. 크으··· 진짜 부럽네. 이번에도 이런 건 영상에 넣으면 안 되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홍보팀하고 얘길 해보자. 지금은 한국 밤이니까 메일 하나 보내놓자.”
“홍보팀······ 휴.”
임현태가 뻑 하고 한숨을 쉬자 그걸 들은 김성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한숨이야. 홍보팀에 뭐 억하심정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고요. 아니, 저도 어디 가서 기 안 빨리는데, 거긴 진짜 뭐가 있다니까요?”
“기가 빨려?”
“그 정도가 아녜요. 회의 한 번 하고 회사로 돌아가면 대표님이랑 직원들이 묻는다니까요. 집에 우환있냐고.”
어쩐지 공감이 간 김성운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터가 안 좋나.”
“홍보팀 3층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됐어.”
“터는 잘못이 없구나.”
사실 알고 있었다는 듯 끄덕거리는 임현태.
간단하게 홍보팀 뒷담(?)을 풀어놓은 그가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왔다.
“아무튼, 이번엔 좀 오래 걸린 것 같던데요?”
“승결이?”
“네.”
“그런가. 하긴, ‘악역’ 촬영 끝나자마자 협주곡 연습 들어갔잖아. 그게 또 워낙 강행군이었고. 그래도 두 달까진 안 걸린 것 같은데?”
“지금 이 영상이······ 아, 계산해보니 한달 반 정도인 것 같네요.”
두 사람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를 지켜보며 김주철은 연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뭐가 한 달 반이 걸렸다는 거지? 방금 폴란드어 얘기 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
환한 낮임에도 거리엔 조명들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반들반들해질 정도로 닳아버린 바닥이 그 빛을 머금고.
나는 그 위를 걸어 올드타운을 쭉 가로지른다.
광장과 성당. 그리고 악기점까지.
관광적으로도 꽤 낭만적인 코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이연 감독에게 말했던 것처럼,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들이었다.
물론 이인호에겐 동화 같은 속 편한 이야기가 아닌.
그저 부담감에 짓눌려 정신과 약을 남용했고, 그 부작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죽은 스승에게 끌려 나온 것에 불과했지만······.
이게 왜 호러가 아닌 거지?
그런 생각에 입꼬릴 올리며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처음으로 도착한 광장이구나.”
바르샤바에 오면 꼭 들러야 한다는 구시가지 광장.
과연 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알겠다.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 속으로 뛰어 들어온 것 같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이니 망상인지 귀신인지 모를 스승이 나타나도 그러려니 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쇼팽이 나타나도 그러려니 할 판이었다.
그 정도로 옛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광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대본에 의지하여 상상만으로 연기를 연습했던 곳.
주변을 둘러보며 나는 대본 속 내용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가장 먼저 찍게 될,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스승을 따라 이곳까지 온 이인호도, 이곳에 서서 주변을 훑어보았다는 지문이 있었다.
이어서, 바르사뱌의 상징인 인어 동상을 바라보던 이인호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갤 돌린다.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
거짓말처럼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헛거였나. 망상이었나. 아니면, 정신과 약이 효과가 떨어진 걸까.
⌜호텔로 돌아갈까.⌟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호텔 방에 숫제 괴물처럼 자리 잡고 있을 피아노가 떠올라 턱 하고 숨이 막힌다.
결국, 근처 노천카페에 앉은 이인호.
······나는 대본 속 그의 걸음을 따라갔다.
⌜어서 오세요.⌟
⌜차 한 잔 주시겠어요?⌟
가장 비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인호가 일상적인 주문을 한다.
이윽고 그의 앞에 찻잔이 도착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차를 앞에 두고 그는 멍하니 광장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넘쳤다. 곳곳에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고,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에 쇼팽이 넘쳐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있던 이인호가 몸을 일으켰다.
호텔로 돌아가······.
⌜다 마셨니?⌟
그의 눈에 스승이 다시 보인 건 찻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카페를 벗어날 때였다.
⌜선생님···.⌟
어안이 벙벙해 하는 이인호를 보며 스승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가자.⌟
얼떨결에 이인호는 또다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관광을 하듯 바르샤바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장소에서 멈췄고, 스승의 모습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인호는 자신이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미쳐있는 게 더 나을 만큼 힘들었다.
아버지와도 같던 스승을 잃고 1년.
턱 끝에 차오르는 그리움을 삼키며 꾸역꾸역 그와 함께 준비하던 콩쿠르에 출전했다.
그렇게 거머쥔 결승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국가대표라며 엄지를 치켜들고, 우승을 바란다며 환호한다.
누군가는 영광스럽다 말할 그 순간들이.
문득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
⌜······.⌟
그렇기에 이인호는 계속 스승을 따라 걸었다.
올드타운 곳곳을 누비던 두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외곽에 위치한 작은 악기점.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스승의 말로서 이인호는 추측할 수 있었다.
언젠가 스승이 자신에게 말했던 악기점이 이곳이라는 걸.
유학을 하면서 이곳에 전시된 피아노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고 얘기하셨었지.
⌜죽기 전에 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오게 되는군.⌟
낮게 읊조리는 스승의 목소리에 이인호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사실 정말 궁금한 게 많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귀신인 거냐고.
하지만 차마 그런 의문들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아마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행복한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것을 인지하면 깨버리는 것처럼.
지금 눈앞에 있는 스승이 아예 사라져버릴까 봐.
이인호는 그게 두려웠으리라.
⌜들어가 보자.⌟
그렇기에 그저 스승이 가자는 대로 걸음을 옮긴다.
악기점에 들어서서도 스승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음악은 순간의 예술이 아니야. 흐르는 예술이지. 그러니 한순간이 결코 네 인생을 대변하지 않아.⌟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말하는 스승.
⌜연주는 그저 연주일 뿐인 거다.⌟
대뜸 그런 말을 꺼낸 스승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악기점 중앙에 놓인 육중한 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피아노도, 그저 피아노지.⌟
알쏭달쏭한 그의 말을 들으며 이인호의 시선이 돌아갔다.
호텔방에 놓인 디지털 피아노보다 몇 배는 커다란 사이즈.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전혀 괴물 같지도, 흉포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말 그저······.
피아노였다.
이인호가 천천히 피아노로 다가간다.
그리고 손을 뻗으려는 그때.
“쳐보셔도 돼요.”
······대본엔 없던 대사가 끼어들었다.
피아노에 닿은 손을 떨어트렸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스승과 이인호가 사라진다.
고갤 돌리니 점원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저희 가게는 자유롭게 연주가 가능하세요.”
덧붙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이인호는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지만, 그것까지 해볼 생각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기에.
하지만 괜찮다며 돌아서기엔······.
지금의 감정이 너무 잘 잡혀있어서 욕심이 났다.
긴 시간 바르샤바의 거리를 걸으며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인호의 감정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대원군’ 촬영장에서 이태관 배우가 지금 딱 좋은 것 같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 기분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연기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러니 선택지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점원에게 살짝 고갤 숙이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보면대 위에 올려진 쇼팽의 연주집.
역시 바르샤바 답달까.
표지엔 과거 쇼팽의 친구였던 슈만이 비평에서 사용했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피식 웃으며 모자를 슬쩍 벗었다.
그리고 머금었던 미소를 툭툭 털어냈다.
‘이인호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고민했던 것을 얼굴에 그려내고서.
‘어떤 자세로 이곳에 앉아서, 어떻게 연주를 시작할까.’
모든 것을 백승결이 아닌 이인호로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오로지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양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뜻밖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