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칸 (7)
칸의 밤거리를 천광윤이 가로질렀다.
아롱거리는 조명 아래 도착한 그가 낮게 상대를 불렀다.
“데이먼.”
시선 끝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USA 투데이 평론가, 데이먼 셰리.
그가 손을 휘적거리며 오랜 친우를 반겼다.
“왔나. 칸 영화제가 시작된 지 꽤 오래 지났는데 이제야 보는구만.”
“그러게. 이제 곧 뒷방 늙은이가 되어야 할 놈들이 뭐 그렇게 바쁜 건지.”
천광윤이 자조 섞인 농담을 던지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가오는 점원을 향해 같은 거로 한잔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고서, 다시 데이먼을 보았다.
금세 나온 맥주. 잔을 부딪치고서 목을 축이자마자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이번 칸 영화제는?”
그러자 데이먼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맥주가 너무 맛있어.”
“···?”
“그만큼 지루해.”
피식 웃은 천광윤이 말했다.
“왜, 영화들 재밌던데. 굶주린 사자도 그렇고, 에브리띵 헤픈도 그렇고.”
“기대작이 기대만큼 하는 거야 당연한 거잖아. 전혀 흥미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
“그건 그렇군.”
“그런 점에서······.”
데이먼이 천광윤을 보며 웃는다.
“’48시간의 위로’는 유일하게 이번 칸에서 흥미로웠던 순간이었어. 솔직히 놀라울 정도였지.”
“고맙군.”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손을 휘휘 젓는 데이먼.
“‘48시간의 인생’이라고 제목을 지었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밀도 있게 압축된 한 사람의 인생을 지켜보는 느낌이더군. 그런 감독이 이제 고작 두 번째 상업영화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어.”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어?”
“그건 더 쉽게 정리할 수 있지. 젊은 천재 배우와 뒷방 예정 늙은이.”
그 말에 천광윤이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리고 맥주 한 병을 빠르게 비우며 덧붙였다.
“아 참. 이번에 물어봤어. 백승결 그 아이한테.”
“뭘?”
“내가 내내 의아해했던, 그 지점에 대해서.”
데이먼도 어느 정도 아는 이야기였다.
백승결이라는 아역의 연기가 논란이란 처형대 위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단단한 아이가, 고작 사람들의 기대에 짓눌려 무너져 내렸을 리 없다며.
그 찬란한 재능은 고작 그렇게 사그라들 것이 아니었다며.
아쉬워하고 의아해했던 천광윤의 모습을 기억한다.
물론 데이먼은 그게 그저 아쉬움에서 비롯된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단단한 것도 무너진다. 찬란한 재능도 사그라든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오래된 친우를 보며 퍽 안타까워 했었지.
“뭐라던가?”
데이먼의 물음에 천광윤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마른 침을 삼키며 며칠 전을 떠올렸다.
레드카펫을 걸으며 녀석에게 물었지.
혹시, 그것마저 연기가 아니었냐고.
말도 안 되는 연기력으로 스스로 모든 걸 망친 게 아니냐고.
솔직히 그 어린 아이가 선택할 이유가 없는 선택지처럼 보였지만.
그래서 질문 자체가 바보 같게 느껴졌지만.
“묘한 표정을 짓더라고.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
그날 밤.
영화가 끝나고, 그는 백승결과 제대로 이야길 나눌 수 있었다.
작품에 관한 것이 아닌,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백승결은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건 자신의 예상과 어느 정도 맞았으며.
‘그렇지! 그토록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던 네가 갑자기 연기를 못 할 리가 없지!’
그래서 더욱 놀라웠으며.
‘엄청나군. 그게 전부 연기였다니! 연기 못하는 연기는 정말 어려운 건데! 내가 너를 몰랐다면 아마 영원히 속았을 거야. 연기를 못하는 아역으로 완벽하게 믿었겠지. 근데 대체 왜 그랬나? 갑자기 연기가 하기 싫어지기라도 했던 건가?’
예상밖에 서글픈 이야기였다.
‘······선택지가 없었겠군. 그 어린아이의 시야로는 자신과 연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어.’
연기를 잘해 이 문제가 생겨났으니.
연기를 못하게 되면 가족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아이의 순진한 생각과 그 결과.
그 모든 것을 떠올린 천광윤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데이먼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오래전에 그랬지. 천재는 꽃과 같아서 금세 저버린다고.”
“그래. 백승결 그 아이의 연기가 이상해지면서 내가 했던 말이군.”
“맞아. 근데, 꽃이 져 버린 게 아니더라고.”
“···?”
“잠시 비를 맞았더라고. 다시 활짝 피려고. 그리고 이번에는······.”
천광윤이 웃었다. 이번엔 보다 밝게.
“더는 지지 않을 것 같아.”
#
폐막식 당일 아침.
내 옷을 담당하는 코디네이터가 잔뜩 화가 나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씩씩대는 그녀에게 김성운이 다가가자, 그녀가 설움을 토해낸다.
“‘빌라오소피’요.”
“명품 브랜드? 거긴 왜?”
“분명히 제가 며칠 전에 옷을 빌리겠다고 했고, 알겠다면서 당일 아침에 가지러 오라고 했는데 글쎄. 갔더니 갑자기 그 옷이 없다는 거예요.”
김성운이 침착하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움직여 코디 손에 들린 슈트케이스를 확인한다.
안심한 그가 코디의 얘길 계속 들었다.
“수선이 필요해서 업체에 보냈다느니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길래 어쩔 수 없이 나오긴 했는데, 누굴 바보로 아나. 그거 분명히 다른 배우 빌려준 거거든요.”
어느새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나도 다가가 물었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나요?”
“저도 선배한테 들은 건데, 더한 일도 일어난다더라고요. 여기가 보기엔 낭만적이고 화려해도 결국 줄 세워서 상주는 시상식이잖아요. 벌써부터 계급이 나눠지는 거죠. 누가 먼저 찜하냐가 아니라 누가 와서 입으려고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러자 옆에서 김주철이 험악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우리도 나름 후보에 올랐는데······.”
저러다 ‘제가 가서 엎어버릴까요?’라고 말할 기세라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옷은 가져온 거로 입어야 하나요?”
“아뇨. 코디네이터로서 그럴 순 없죠. 그래서 급하게 구해왔어요.”
그제야 그녀가 손에 들린 슈트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에르메네질도 제···냐?”
솔직히 나는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뭐 그렇다고 불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어느 브랜드 옷이든 잘 어울리면 그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수트에 대해 빠삭한 김성운이 말했다.
“이것도 명품이잖아?”
“그렇죠. 처음 빌라오소피에서 봤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배우님한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래 보이네. 이 아침에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새 옷을 구했대.”
“이게 대박인 게, 거기 점장분이 안 그래도 ‘48시간의 위로’를 보셨더라고요. 그날부터 배우님 팬이 돼서 거꾸로 ‘악역’이랑 ‘악의 링’까지 줄줄이 보셨대요. 완전 팬이 되신 거죠. 황금 카메라상 후보인 것도 아시던데요? 꼭 수상하길 바란다고 전해주셨어요.”
“다들 들었지. 빌라오소피보단 제냐다 앞으로.”
김성운의 말에 내가 물었다.
“유명한 브랜드인가요?”
“대중적으로 엄청 유명하진 않지만, 슈트 쪽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는 브랜드지. 일단 시간이 없으니 얼른 피팅해보자.”
그의 말에 따라 얼른 옷부터 입어보았다.
난 여전히 이런 턱시도(?) 같은 옷이 쉽지 않았다.
활동이 불편한 건 아닌데, 너무 입지 않았던 종류의 옷이라 어색하달까.
“와 진짜 잘 어울린다.”
“급하게 구했는데도 핏이 완벽하네요.”
“배우님 체형이 완전 서구적이라 가능한 일이죠.”
다행히 반응은 격렬했다.
원했던 대로라며 안도한 코디가 나를 쭉 둘러보더니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근데 영화 상영 때부터 줄곧 똑같은 시계인 게 좀······.”
“이야, 백 배우 죽이네!”
때마침 들어온 박 대표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코디의 시선이 그의 손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박 대표의 손목.
“······?”
“시계가 참 멋지세요.”
“아휴, 고마워요. 또 코디하시는 분이 그렇게 얘길 해주시니 감개가 무량하네.”
“별말씀을. 근데 저도 고맙고 싶은데. 감개도 무량하고 싶고.”
“네? 무슨······.”
······잠시 후, 시계를 푸는 박 대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중히 다뤄줘···.”
“대표님! 승결이가 지금 굿픽처스에서 성공시킨 영화가···!”
“막 다뤄. 막 굴려. 아니다. 그냥 승결이 너 가져.”
한이연 감독의 호통에 박 대표가 얼른 태세를 바꿨다.
소중히 차고 얼른 돌려드리겠다며 그를 안심시키고 시계를 손목에 감았다.
“이 옷엔 역시 금장이 더 어울리네요.”
“죽인다. 걍 화보네.”
나를 훑어보던 한이연 감독이 한마디 거들었다.
“빌라오소피에서 빼돌렸다는 그 옷. 누구한테 빌려줬든 후회할 것 같네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옷이 누구에게 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코디가 눈에 불을 켜고 폐막식을 위해 모여든 감독, 배우들의 차림새를 확인한 결과였다.
“찰리 톰린슨······.”
할리우드의 톱스타이자, 에브리띵 헤픈의 주인공.
나와는 이번 칸 영화제에서 몇 번 접점이 있었던 배우였다.
공항에서도 함께 들어왔고, 영화 상영 시간도 겹쳤었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서.”
“공항에서 모든 기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걸 방해했잖아요. 영화 상영은 아예 화제성에서 ‘48시간의 위로’가 이겨버렸고.”
“······에이, 그래도 그 옷을 코디님이 찜했는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하긴, 그건 그렇네요.”
빙그레 웃으며 레드카펫에 설 준비를 마쳤다.
영화 상영 때와는 달리 정말 레드카펫다운 레드카펫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길고, 화려하다.
양쪽엔 카메라들이 대나무숲처럼 늘어서 있고.
그 뒤엔 수많은 사람들이 카펫 위를 가로지르는 영화제의 주인공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폐막식은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이곳에 남은 이들은 수상 가능성이란 티켓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 위를 걷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겐 꿈만 같은 그곳에.
비로소 천광윤 배우와 한이연 감독, 그리고 내가 그곳에 올라섰다.
플래시가 터지고,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이따금 들려오는 한국어가 다른 언어들을 수풀처럼 헤치고 귀에 꽂힌다.
멋지다. 응원한다. 자랑스럽다.
순간 울컥인지 왈칵인지 모를 벅차오름을 억누르며 걸음을 옮긴다.
천광윤 배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떨리는가?”
나는 잠시 내가 어떤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뇨.”
명확하게 답했다.
며칠 전 한이연 감독과의 대화 이후.
그러니까 두 번째 목표를 이룬 그날 이후로, 내가 단단해졌다는 걸 스스로 느껴가고 있었다.
“즐거워요.”
마찬가지로 작게 대답하자, 천광윤 배우가 천천히 입 끝을 들어 올린다. 한이연 감독도 빙그레 웃는다.
수상을 향한 붉은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기대와 관심이 함성으로 쏟아졌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그저 즐겼다.
이미 수상을 받은 사람처럼.
마침내, 폐막식이 열리는 뤼미에르 대극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나오게 되었을 땐······.
수많은 기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언어가 섞여 웅성거리는 소리.
그 틈에서 한국인 기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가 던진 건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응원이었고.
“자랑스럽습니다!”
응답이었다.
이어서 곳곳에 있던 한국 기자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에 해외 기자들도 동참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벅찬 웃음을 지었고.
뒤이어, 한이연 감독이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