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그린스크린 위의 괴물 (2)
다음 오디션이 없다는 소식을 김성운에게 전하고 우리는 우선 호텔로 향했다.
어제 저녁 늦게 미국에 도착한 그가 오디션 결과에 뿌듯해하면서도 감기는 눈을 못 버티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김성운은 눈을 붙이게 두고, 나는 호텔 근처 카페로 향했다.
2층 테라스 앞.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자리에 앉아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내가 외우다 못해 분석까지 마친, 얇은 대본 이후의 이야기부터.
[디터와 랜시는 도시를 떠났다. 도시를 받치고 있던 지반이 무너지며 거대한 싱크홀이 그래픽카드를 닮은 빌딩을 집어삼킨 후였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두 사람. 이윽고 모래폭풍이······.]운명의 장난 같은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함께 피어오른다.
한편, 예언자를 만난 파코스는 그들의 족적이 남긴 재앙들을 보며 오디션에서 연기했던 술집 씬까지 다다른다.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랜시를 구하려는 남자도, 그녀를 죽이려는 남자도.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 섰다.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은 각자 선택한다.
그 결과는 한 발의 총성.
탕—!
그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서,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른 침을 삼켰고, 먹먹했던 귀에 세상의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는 마치 VR을 끼고 있다가 벗은 사람처럼, 익숙한 광경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던 세계가 끊어진 커튼처럼 사르륵 벗겨져 내려앉았다.
폐허도, 사막도, 그래픽카드를 닮은 빌딩들도 없는 LA.
······그렇게 파코스만의 이야기가 끝났다.
주인공들처럼 찬란하진 못 했지만, 뜨거웠던.
나는 잠시 여운을 곱씹다가 결국 못 참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깨우라는 김성운의 메시지를 넘기고, 하선경 대표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화면을 토도독! 두드렸다.
[나머지 대본을 모두 받아 읽어봤어요. 제 감이 할리우드에서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메시지를 입력하다가 스스로를 확인해보았다.
심장이 뛰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본을 다 읽자마자 평소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던 하선경 대표에게 흥분해서 메시지를 작성한다?
이것만으로 끝이었다.
[미친 듯이 끌립니다. 얼른 크랭크인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요.]재밌는 영화고 좋은 영화다. 심지어 제작비가 엄청나다.
거기에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감각까지.
도박을 해본 적은 없지만.
승리를 확신하는 패를 쥐고서 ‘고’를 외칠 때 기분이 이럴까.
내가 외친 ‘고’에 하선경 대표의 답신이 도착했다.
[나조차 설렐 정도네요. 기대할게요, 백 배우가 연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눈으로 내용을 읽고, 빙그레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부담은커녕 나조차도 기대가 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그런 나를 머금은 이 영화는 어떤 작품으로 완성될지.
······오후엔 정신이 좀 들었는지 김성운이 호텔 방에서 나왔다.
우리는 함께 밥부터 먹었다.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수면욕과 식욕을 넉넉히 채우고 나니.
그제야 김성운의 말문이 트였다.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마저 하자. 보조출연자들과 함께 스턴트 훈련하는 건 그렇다 치고, 그린스크린 훈련?”
“네. 아무래도 CG에 익숙하지 않은 저인데, 더군다나 CG가 대부분인 SF 영화다 보니 걱정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 게임 광고에서 잘했잖아?”
“그땐 거의 반쪽짜리 배가 준비되어 있었고, 더군다나 액션이 주였잖아요.”
차분히 크리스 감독의 우려를 설명하자 김성운이 이내 납득하며 주억거렸다.
“그러네. 단순히 액션만 하다가 끝난 광고랑 감정선을 유지해야 하는 영화는 완전히 다르기야 하겠지.”
물론, 정작 그것에 대해 설명한 나는.
‘난 두 개가 뭐가 다른가 싶긴 한데···.’
납득을 못 하는 중이다.
연기도 결국 몸을 움직이는 거다.
액션이라고 감정을 안 담는 것도 아니고.
내 입장에선 두 개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이려는데 김성운이 말했다.
“근데, 난 별 걱정이 안 된다.”
“···?”
떼어냈던 입을 다시 닫고서 다음 말을 기다리자, 김성운이 설명한다.
“스턴트야 걱정을 하면 시간 낭비고. 그린스크린 속에서 어벙하게 서 있는 네 모습도 상상이 안 간단 말이지.”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제 예언도 하세요?”
“믿는 거지. 배우가 좋은 작품, 성공할 작품 척척 맞춰대니 매니저로선 할 수 있는 게 믿는 거밖에 없다~.”
배우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도 탈이라며 흥얼거리는 김성운.
입꼬릴 올린 채로 그를 지켜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잖아요. 믿는 거.”
“안 어렵던데? 연기 보니까 그냥 믿어지던데?”
으쓱거리며 웃던 김성운이 배가 좀 소화됐는지 다리를 꼬며 말을 잇는다.
“사람들도 이제 다들 널 믿고.”
“상황이 많이 정리 됐나 보네요?”
“너에 대한 의혹은 진즉에 끝났고, 이슈패치 쪽으로 역풍 불던 것도 잠잠해졌고······네 기사는 여전히 많긴 한데, 전부 차기작에 대한 얘기야. 다들 궁금한가 봐. 네가 할리우드로 간 건 알지만, 어떤 작품에 들어가는지는 아직 정보가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파파라치가 붙었을지도 모르겠네. 이건 뭐 미국에서까지 사주 경계를 해야겠어.”
홱 홱 고갤 골리며 주변을 훑은 김성운.
내가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요. 파파라치.”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겹치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요.”
“응?”
“제 주변을 맴돌면 제가 얼굴을 못 기억할 리 없잖아요.”
으쓱거리자 김성운이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 기억력··· 참 활용도가 많다? 네 능력으로 그 주철이 친구가 한다는 탐정사무소, 거기 가면 바로 에이스 되겠다.”
“현태 형은 기자들 몰래 연애하기 좋겠다던데요?”
“오, 그것도··· 나 뭐라냐. 하여튼 현태 걔는 발상 자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이 매니저임을 자각하던 김성운이 돌연 날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묻는다.
“···없지?”
“저 하루 종일 팀장님이나 주철이랑 붙어 다니는데요?”
“집에선 모르지.”
“······.”
이번엔 내가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어이가 없어서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자신의 의심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깨닫는 김성운이었다.
“아, 현태가 너보다 거기 더 오래 있지.”
“명의만 제꺼예요. 방에 있는 침대랑.”
킬킬 웃은 김성운이 이러다 남자랑 사귄다는 소문 나는 거 아니냐며 끔찍한 소릴 해대길래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운이 뒤따라 일어나며 묻는다.
“난 방으로 돌아가서 일할 생각인데 넌?”
“전 좀 돌아다니려고요.”
“그러면 내 방으로 가서······.”
호텔 카드 키를 챙기던 김성운에게 내가 겉옷 안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들었다.
“챙겼어요, 이미.”
“······.”
그렇게 하나 장만하라고 잔소리했는데 이제 샀냐며 웃을 줄 알았던 김성운이 어쩐지 표정을 굳혔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에요.”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 물었다.
그래야 좀 덜 걱정할 것 같아서.
“네가 먼저 챙기는 거, 처음이잖아.”
“아, 인기가 높아지니 사람들이 너무 알아보잖아요.”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김성운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다.
“······괜찮은 거 맞지?”
“네, 그럼요.”
그래서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막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조급해지거나 그러면 곧바로 나한테 연락해야 한다? 공황장애 그거 갑자기 와.”
김성운의 마지막 노파심까지 잠재우고서, 나는 LA의 거리로 나왔다.
역시나 그가 우려하던 문제는 없었다.
심장이 벌렁거리긴 하는데, 그건 대본을 곱씹으며 떠오른 여러 아이디어들 때문이었고.
갑자기 조급해진 건 그 아이디어를 적을 펜이 가방에 있으며 그 가방을 김성운이 가져갔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가게에 뛰어 들어가 펜을 사는 대신, 오늘 등록한 따끈따끈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로 조금은 덜 냉랭해진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본을 다 읽었나 봅니다?
크리스 감독이었다.
“다 읽은 지는 좀 됐는데, 생각을 정리하느라 이제 연락드렸네요.”
—대본에 이해가 안 가거나 문제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었습니다. 대신 궁금한 게 생겨서요.”
—들어봅시다.
“아까 보니 사무실에 일러스트가 많이 있더라고요. 혹시 컨셉 아트는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어서 크리스 감독이 답했다.
—한······ 90% 이상은 끝났습니다.
“그럼 그걸 제가 미리 좀 받아볼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또다시 침묵하는 크리스 감독.
이내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이젠 대본뿐만 아니라 컨셉 아트북도 빼앗으려는 겁니까?
“빌리는 거죠.”
—어렸을 적, 내가 보던 만화책을 강탈해간 럭비부 학생이 떠오르네요.
그런 건 만국 공통이구나.
피식 웃자, 덩달아 웃음 소릴 내던 크리스 감독이 말했다.
—보안에만 신경 써준다면야 파토스가 나오는 장면에 한해서 보여주는 건 문제가 안 될 겁니다만······ 그런데 그건 왜 필요합니까?
그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외우려고요.”
가상의 도시 전체를.
이어서 크리스 감독은 오디션을 세 번이나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큰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그린스크린 테스트를 위해 세트장이 즐비한 할리우드의 심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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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장이 길게 늘어선 할리우드 스튜디오.
수많은 관광객들과 눈에 익은 영화 속 촬영장들을 지나쳐 도착한 거대 컨테이너 안에는
마치 게임 광고를 찍었을 때처럼 그린스크린이 가득했다.
다만 그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못 해도···세배? 네 배?’
대형 쇼핑몰 중앙에 들어온 듯한 압도적인 크기.
그 정도나 되는 크기의 컨테이너 안에는 각종 촬영 장비와 그린스크린.
그리고 바닥을 덮은 사막 모래가 전부였다.
대본 속 묘사를 보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옆에서 김성운이 중얼거렸다.
“저 안에 들어가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 믿는다 말하던 그가 어느새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허허 웃으며 날 본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내 생각도 같았다.
“그러게요.”
쉽지 않았겠어.
‘만약 이걸 받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나는 오늘 아침에 급하게 받아 오는 내내 훑어본 책 한 권을 김성운에게 건넸다.
컨셉 일러스트가 가득한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의 컨셉 아트북이었다.
김성운이 책을 받아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 사이, 나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린스크린을 눈에 담았다.
‘밤이면 ‘ㄹ’자 모양으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그래픽카드를 닮은 빌딩.’
‘그 앞엔 모래폭풍을 견디기도 힘들어 보이는 움막들이. 그 중 세 번째 움막은 반쯤 무너져 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분수대. 그리고 또—.’
이윽고, 녹색으로 덮여있던 공간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