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극 (7)
후속작.
혹은 속편이라고도 하는.
크리스 감독의 차기작이 그런 종류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인가요?”
대답은 없었지만, 필요도 없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파코스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아른거려서.
얼굴에 화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건 프리퀄이 아닌 시퀄이었다.
그의 눈에 맺혀있던 광기는 이전 영화의 마지막처럼 차분해져 있었고.
운명의 눈을 감긴 그는 이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
내게 맞는 배역이 있으면 그의 다음 작품에도 출연하겠다고 거래를 했지만, 내심 약간의 불안함도 있었다.
크리스 감독의 능력을 믿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런데 이건 내게 맞는 배역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내가 맡았던 배역이었다.
그냥, 나.
‘인상적이네요. 영화를 다시 찍을까 싶을 정도로.’
뮤튜버 맥과의 인터뷰에서 내 해석에 대한 크리스 감독의 대답이 생각난다.
그땐 다시 찍는다길래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다시 (이어서) 찍게 될 줄이야.
‘처음으로 맡는 시리즈물이 되겠네.’
자연스레 시선이 다시 시놉으로 향했다.
한 장 짜리 시놉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로 상황이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왜 그가 나 때문에 쉬지 않고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파코스는 이제 어디로 향하는가.’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재앙을 죽이려 노력했지만, 정작 진짜 재앙은 따로 있음을 깨닫고.
예언자를 죽이고서, 핵전쟁의 원흉들에게 향하는 파코스.
“파코스는 결국 수라의 길로 가는군요.”
“네가 정해준 길이지.”
진짜 재앙의 원인에게 책임을 묻는.
비로소, 진짜 영웅이 되는 길이었다.
고작 한 장짜리 시놉만으로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기꺼이 내가 그 길을 걸을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음미하다가 문득 궁금해져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깐 뭘 그렇게 고민하고 계셨던 거예요?”
“······.”
크리스 감독의 고개가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가 말없이 일어나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당연스레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8인용 회의 테이블로 써도 될 만큼 넓은 책상.
그 위에 펼쳐진 전지(全紙)에선 크리스 감독이 간략한 시놉을 뼈대로 살을 붙이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거다.
일종의 마인드맵이었다.
단어나 문장들을 뿌려놓고 서로 엮어나가는.
나는 유심히 그의 작업물을 훑었다.
이렇게 직접 적어나가는 방식은······.
‘나에겐 큰 의미가 없겠네.’
아마도 이 정도 사이즈의 다섯 배? 아니, 열 배··· 그 이상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거대한 백지(白紙)가 떠올랐다.
아무리 크게 적어도, 아무리 옅게 그려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그때 크리스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보면 뭐가 떠오르지?”
나는 얼른 머릿속에 만들어진 거대한 종이를 후루룩 말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수만 개는 꽂힌 거대한 책장에 밀어 넣었다.
다시 책상 위.
“이걸 보면요?”
전지에 흩어져 있는 크리스 감독의 아이디어들을 바라보며 나는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퍼즐.”
“퍼즐이라. 괜찮은 비유군. 맞아. 나는 지금 퍼즐을 맞추는 중이지. 애초에 속편을 염두해두고 1편을 제작한 게 아니다 보니 결국 듬성듬성 빈 부분들이 생기더군. 대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그걸 메꾸는 중인데······ 쉽지 않더라고.”
“어떤 부분이요?”
“결과적으로 자네의 생각에 내 이야기를 얹으며 속편이 히어로물에 느와르적인 성격을 띠는 건 피할 수 없게 되었어. 문제는 관객들이 묘하게 틀어진 듯한 이 분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거지.”
어느 정도 그의 우려를 이해하고서 고갤 끄덕였다.
“결을 맞출 필요가 있는 거군요. 배경이나 분위기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결’도요.”
“그렇지.”
결이라······.
그러니까 음식의 재료는 바뀌었지만, 그래도 이 가게만의 느낌은 살리고 싶다는 거잖아?
결국, 비슷한 맛을 내는 육수가 필요하다는 건데···.
‘뭘 그렇게 오글거려해. 헤리티지가 있는 별명인데. 이미 해별이네 때 천재 아역으로 유명했잖아?’
갑자기 김성운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나는 건, ‘헤리티지’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어릴 때도 덩치가 컸던 ‘돌쇠’가 여전히 ‘돌쇠’로 불리고.
‘천재 아역’이 ‘천재 배우’가 되듯이···.
1편의 결을 2편이 계승하는 방법.
“감독님. 제 생각을 얘기해봐도 될까요?”
“어서 안 하고 뭐 하나.”
당연한 걸 묻냐며 퉁명스레 답하는 크리스 감독에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속편의 파코스가 있듯이, 속편의 랜시도 있어야죠.”
책상 위에 올려진 난제에 눈을 뗄 줄 모르던 크리스 감독의 시선이 튕겨지듯 나에게로 향한다.
“랜시의 뒤를 잇는 다음 재앙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이번엔······.”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챈 듯, 크리스 감독의 눈이 커다래지고 있었다.
“파코스가 지키죠.”
#
할리우드에는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는, 필승 소재 같은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재벌의 은밀한 영웅 놀이이고.
두 번째는 납치된 가족을 구하러 가는 은퇴한 특수요원이나 킬러.
그리고 세 번째가 소녀를 지키는 무뚝뚝한 아저씨다.
백승결이 제안한 것은 그중 세 번째였다.
물론 재앙이 여자아이인 것은 방금 크리스 감독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아이디어였다.
[재앙. 소녀]크리스 감독이 촉 굵은 펜을 휘갈겼다.
그리 긴 문장도, 어려운 단어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잊어버릴까, 다급한 손놀림이었다.
“그렇지. 이 영화는 그런 영화였지. 내가 그렇게 썼었지.”
지키는 자와 살고자 하는 자, 그리고 죽이려고 하는 자.
그들 모두가 결국 지키는 자였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백승결의 해석에 꽂혀서 가장 초보적인 실수를 했군.’
속편은 크리스 감독에게도 첫 도전이었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났다는 사실에만 동기를 뒀다.
그렇게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그때 그의 뒷덜미를 잡은 백승결이 확 하고 그를 잡아당겼다.
시야가 넓어졌고, 자신이 이미 완성한 1편의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2편에 섞여 들어갔다.
백승결이 스위치를 켰다. 물꼬를 텄다.
그러자 크리스 감독의 머릿속에 엉켜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단번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 재앙을 만나는 게 가장 인상적일까··· 그래, 아무래도 전작에서 상징적인 장소가 좋겠지. 아예 오프닝을 이 재앙이 될 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겠군. 그리고 타이틀을 띄우며 사막을 드론 샷으로 보여주고, 모래바람 속에서 파코스가 걸어 나오면······!”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장면들.
그리고 이따금 송곳처럼 들어오는 백승결의 생각까지.
“목각인형을 그 여자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이 나오면 좋을 것 같네요. 딸에게 주려던 선물이··· 그렇게 이어지는 거죠.”
“파코스가 아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겠군!”
흥분한 크리스 감독이 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전지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떠들었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
하지만 두 사람은 그걸 해냈고, 이제 이야기는 시놉에서 대본으로 탈피하기에 충분히 비대해졌다.
······어느덧 노을이 할리우드의 누끼를 따고 있었다.
대화의 끝에서 크리스 감독은 내내 생각했던 바를 비로소 꺼냈다.
“자넨 천상 배우임이 틀림없지만.”
크리스 감독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자신이 부정한다고 부정되는 게 아니지.
백승결은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였다. 그 사실은 너무 완벽한 대전제라 증명 따위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 있지 않나.
러닝백의 폭발적인 달리기를 보면서, 저 친구가 스프린터로서 뛴다면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그게 궁금해 미치겠을 때.
지금이 그랬다.
“그럼에도 언제 기회가 된다면 이야길 한 번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이야기요?”
“그래, 잘할 것 같아. 단순한 칭찬도, 가벼운 격려도 아닌 진심이야. 또한, 오늘 생긴 바람이기도 하고. 궁금해졌거든. 자네의 이야기가.”
이에 백승결이 빙그레 웃는다.
······퍽 묘한 웃음이었다.
#
한편, 백승결이 투척하고 간 폭탄.
아니, 대본을 가지고 고민을 거듭하던 하선경 대표가 결국 SOS를 쳤다.
“연극이라······.”
과거 자신이 매니지했던, 그보다 더 과거엔 극단에서 최고의 연극 배우로도 활동한 적이 있는 국민배우.
천광윤.
그가 백승결의 대본 표지를 내려다보며 말끝을 늘린다.
“왜 하필 연극이지?”
“그건 모르겠네요.”
푹 고개를 떨구며 입맛을 다시는 하선경 대표.
그녀의 모습에 천광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대본을 집어 들었다.
“많이 아쉬운 것 같은데?”
“그래 보이나요?”
“무척이나. 네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닦달했던 영화를 결국 깠을 때만큼이나.”
“그런 적, 한두 번이 아니셨잖아요.”
“하 대표가 유난히 아쉬어했던 거 있었잖아.”
잠시 고민하던 하선경 대표가 물었다.
“백록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맞아. 그거.”
“하아··· 또 아쉬워지네. 선배님, 그거 관객수 기억하세요? 자그마치 1100만이었다구요. 근데 그거 대신 선택하신 거 뭐였더라··· 이름도 기억 안 나네. 무튼, 그때 그거 얼마였어요?”
“200···.”
“120만을 간신히 넘겼죠.”
“···허허, 그랬나?”
“네. 손익분기점 절반도 못 넘겼어요. 제작비에 열 배를 벌 수 있는 영화를 두고···.”
천광윤이 천천히 입꼬릴 올리며 대본을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그래, 항상 네가 맞았지. 하지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따로 있었고.”
“뭐··· 이젠 어느 정도 인정해요. 내가 감이 좋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영화만 할 순 없다는 거. 사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회사를 차렸는데, 여기까지 와 보니 그건 꿈같은 이야기더라고요. 전 선배님이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은근 많더라고요. 자신만의 길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엔 돈키호테를 꿈꾸는 이들도 분명 있는 법이거든.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처참히 실패했지만, 그때 그 영화를 찍으며 많이 배웠지. 배우로서··· 그것만큼 좋은 영화가 어딨겠어. 그러니 그 다음에 해별이네 같은 걸작도 하게 된 거고.”
그의 말에 하선경 대표가 옅게 웃으며 주억거렸다.
이제는 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판초가 못 되어드려 죄송해요.”
“아서왕이 아니라 돈키호테여서 내가 미안했지.”
왕년 연극배우다운 비유에 하선경 대표가 헛웃음을 흘린다.
“그래서 저도 배우들 많아지면서부턴 작품 선택에 최대한 관여 안 하려고 해요. 저는 지금 당장의 성공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의 미래는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수긍하던 그녀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천광윤의 말마따나 세상엔 돈키호테가 있듯.
아서왕도 있다.
요즘 말로 하면 게임 체인저쯤 되는.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래서 백 배우가 귀한 거예요.”
그게 백승결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떠오르는 배우로 주목 받고 있는 우리 천재 배우!
“배우가 선배님과 같은 연기력이 있고, 저보다 감이 살아있다는 건. 심지어 그 감과 이끌림마저 같다는 건······.”
하선경 대표가 벅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정말이지 완벽한 배우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랬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녀가 황당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갑자기 글을 썼다는 거예요.”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대본 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