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파코스 (2)
파코스는 떠올렸다.
커다란 소음과 비명.
천막을 들추니 보이던 저 멀리 자욱한 연기와 덜컹 내려앉는 심장.
지면을 박차고 달려갔으나, 더 이상 내디딜 땅과 모든 것들이 사라진······.
자신의 집이 있었던 곳을.
메마른 땅은 핵전쟁 이후의 사람들만큼이나 결속력이 없다. 그렇기에 사막은 지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고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굳이 랜시가 아니었더라도,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거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에서도, 이들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들이 단순한 사설 용역이 아닌, 이전 시대의 공무원과도 비슷한 역할임에도 말이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가족의 시신이라도 찾으려던 이들에겐 육중한 굴삭기는 커녕 한없이 가벼운 양손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꺼져버린 생명을 깨졌을지도 모를 그릇 따위가 이겼다.
⌜그땐,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말이지.⌟
고요하게 터져 나오는 살기 어린 두 눈에 책임자가 의문 없이 읍소한다.
⌜저, 저흰 그냥 윗분들이 시키시니······.⌟
지긋이 바라보자 놈이 얼른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양손을 싹싹 빈다. 순간 시야가 번쩍거렸다.
범인은 그의 손에 걸쳐진 시계와 금붙이들.
⌜······.⌟
⌜이, 이거······ 이걸 드리겠습니다.⌟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그것들을 모두 풀어 놓는다.
이 어두컴컴한 폐허 속에서도 그것들만큼은 반짝거렸다.
파코스는 그것이 마치 희망 같다고 느꼈다.
족히 수백의 희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들이 빼앗긴 희망이 여깄었구나.
전쟁을 일으켜 희망을 꺼트린 이들이, 희망을 독식하고 있었구나.
스윽.
파코스가 목각인형을 꺼내어 만지작거린다.
이것도 운이라는 이름의 농간일까?
아닐 것이다.
운은 주어진다.
어느 날 문 앞에 배달된 이름 모를 택배처럼.
그게 행운이든, 불운이든 같은 방식으로.
하지만 이들의 희망은 빼앗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이걸 운 같은 것으로 치부하려거든.
⌜사, 살려주십시오.⌟
⌜그러려고 했어. 근데 알아버렸잖아.⌟
너희도 빼앗길 준비를 해라.
내가 기꺼이 너희들의 불운이 되어줄 테니.
목각인형을 움켜쥐며 파코스가 말했다.
⌜안다는 건 그런 거야. 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
타앙—!
무너져내리는 신형과.
반짝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희망들.
⌜너흰 가서 너희 주인에게 전해.⌟
파코스의 시선이 벌벌 떨고 있는 인부들에게로 향했다.
⌜재앙이 찾아가겠다고.⌟
#
액션 장면은 어지간한 스파이 영화 뺨쳤다.
이어지는 책임자와의 대화는 흥미로웠으며.
이들이 맨해튼에 온 이유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 파코스의 분노는 꽤나 정당해 보였다.
지금 코리 황의 감탄이 그런 것처럼.
그는 백승결의 연기를 보며 쉴 새 없이 감탄을 이어가고 있었다.
카메라에 백승결이라는 필터를 씌운 것 같았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그린 스크린을 연기력으로 가려버렸고, 이 커다란 세트장을 작품 속 현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나 어수선한 촬영장마저 휘어잡는 저 연기가, 완벽하게 정돈되어 스크린 위에 올라간다면 어떨까?
이번 영화, 크리스 감독님의 첫 속편 영화이다 보니 1편을 등에 업고서라도 성공하길 바랐는데······.
‘어쩌면 그 위로 올라타 버리는 상황이 생길 수도.’
물론 이제 고작 오프닝 장면들을 찍었을 뿐이지만, 저 짧은 장면들에서부터 우리의 천재 배우가 이미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나.
이번엔 자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결코, 1편과는 같지 않을 것이며, 더욱 강렬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
호텔에서 한창 대본을 만들어나갈 때, 크리스 감독이 내게 말했다.
‘대비는 세계관을 확장하기에 효과적인 방식이지.’
‘대비요?’
‘하늘이 배경이었으면 그 다음은 물속으로, 그 다음은 불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님이 그런 방식을 이용했었지.’
‘단순히 다른 지역을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대비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군요.’
‘그렇지. 우린 어떨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주 추워야겠네요. 새하야면 더 좋을 거고요.’
이에 크리스 감독이 맞다는 듯 웃었다.
물론 세계관 확장이니 대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단순하게 생각해도, 눈보라 속의 파코스라니.
이건 못 참지.
“으으, 못 참겠다······.”
현태 형이 파르르 떨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뮤튜브 브이로그에 쓰일 영상을 찍겠다며 밖으로 나간 지 10분도 안 돼서였다.
터질듯한 패딩이 무색해진 광경이었다.
우리는 지금 아이슬란드.
대자연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어비앤비를 하는 호화스러운 별장을 빌려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게, 추울 거라니까.”
“그래도 몇 장면 담긴 했어. 이런 고생이 다 뮤튜브 퀄리티를 올려주는 거라고. 에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한다~.”
현태 형의 익숙한 너스레에 내가 말했다.
“고마워.”
“뭐야, 간지럽게.”
“간지럽혀달라는 거 아니었어?”
“사실 맞아. 이거 기분 좋은데?”
낄낄 거리는 현태 형을 이번엔 김성운이 간지럽혔다.
“사실 내가 고맙지. 너 아니었음 배우 복귀 섣불리 못 했을 거라고 승결이가 그랬었거든. 그럼 난 백승결의 매니저가 못 됐을 거 아냐.”
“어, 그럼 저도······.”
한 손 거드는 김주철까지.
우리의 말에 현태 형이 쑥스러운 얼굴로 괜스레 손을 휘적거린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웃다가 촬영 준비가 거의 다 끝났다는 소식에 거실로 나섰다.
널찍한 거실이 다소 협소해 보일 정도로 수많은 장비와 스태프들이 촬영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이제 막 불길이 커지고 있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동선을 체크하는데, 내 옆구리로 다가오는 샛노란 머리가 보였다.
금발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푸른 눈.
인형이라는 단어가 찰떡처럼 붙는 여자아이가 다가와 손바닥을 펼친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을 함께할 아역이자, 앞으로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2를 같이 이끌어갈, 이번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나는 담시 멀뚱멀뚱 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리허설 때 몇 번 봤으니 구면이었지만, 그럼에도 의아했다.
지금 내 모습은 그때와 완전히 다를 테니까.
“날 알아봤네?”
7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얼굴의 반이 흉터로 뒤덮인 나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먼저 알아보고 인사까지 해올 줄이야.
리허설 때 보고 애가 참 야무지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런데 이어지는 대답은 더 신기했다.
“처음엔 못 알아봤는데, 눈 보고 알았어요.”
“하하··· 눈?”
“네. 오빠는 눈이 예쁘거든요. 지금 밖에 하늘처럼요.”
자연스레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했다.
아직은 은은한 녹색으로 가닥가닥 얇게 하늘에 풀어져 있는 오로라.
역시 보통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 그나저나, 잘 지냈어?”
“휴······ 아뇨. 미치겠어요.”
훅 들어온 한탄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오빠가 맨날 제 사탕을 뺏어 먹어요. 그래서 여기 와 있는 게 너무 걱정이에요. 제가 여기 와 있는 사이에 아마 오빠가 다 먹어버릴 거예요. 제 사탕······.”
시들어가는 꽃처럼, 말하면서 점점 더 시무룩해지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사탕이 얼마나 있는데?”
아이가 입을 앙 다물고 고민한다.
내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야?”
“아주 많아요. 서랍에도 다섯 개. 제 공주 가방에도 세 개······.”
“그래? 그럼 내가 그것보다 더 많이 사줄게.”
“정말요?”
“당연하지.”
짧게 끄덕이자 새하얀 얼굴 위에 앙증맞게 그려진 입꼬리가 마구 들썩거린다.
“헤헤, 오늘 저 연기 열심히 할게요!”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네?”
“내가 사탕을 사주는 건 그거랑 상관없거든. 그러니까.”
“···?”
“네가 열심히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움······.”
아이의 얼굴에 잠시 고민이 스쳤다.
이윽고.
“근데 저 이거 재밌어요. 이러면 열심히 해도 돼요?”
“그건 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벽난로도 충분히 달궈져 있었다.
보조 출연자들도 실 끊어진 인형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죽은 연기를 시작한다.
“이따 보자.”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서 낡은 스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 감독이 있는 쪽을 보았다.
레디, 그리고 액션.
드르르륵······.
그대로 스툴을 질질 끌며 별장의 중앙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으로 다가갔다.
탁, 하고 의자를 내려놓고서 그곳에 앉는다.
그곳엔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파코스가 맨해튼에서 죽인 책임자가 말했던 바로 그 윗분이자, 굴삭기의 주인.
기둥에 묶인 그가 담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상 미국 동부 지역인 테메우스 C13의 정부를 표방하고 있는 단체, ‘레보’의 의원 중 하나였다.
타닥, 타닥 튀어 오르는 벽난로의 소음 뒤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군.⌟
⌜나도 여기까지 도망갈 줄은 몰랐어.⌟
⌜근데도 용케 찾아왔고.⌟
⌜누굴 쫓는 데는 연습이 잘 되어 있어서. 근데······ 생각보다 침착하네?⌟
파코스가 갸우뚱하며 묻자 의원이 피식 웃었다.
⌜이봐, 난 살 만큼 살았어.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닥 아쉬울 게 없지.⌟
⌜그런 놈이 예전에 살던 곳을 뒤지며 소장품들이나 찾고 있었어?⌟
잠시 허연 눈썹이 꿈틀댔지만, 그뿐이었다.
다시 여유를 찾은 그가 말했다.
⌜그건 이 늙은이의 여흥이지. 사람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면 기억을 뒤져 남은 추억을 찾게 되거든.⌟
⌜······.”
책임자마냥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상상했던 건 아니다.
핵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요지경으로 만든 원흉들 중 하나가 고작 그런 놈이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화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한 저 말투는 확실히······.
‘거슬리네.’
파코스의 동요를 눈치챈 걸까.
의원이 더욱 비릿하게 웃으며 묻는다.
⌜그런데 자넨 대체 이걸 왜 하는 거지? 여흥 거리치곤 너무 치열해 보이는데?⌟
#
순간, 나는 잠시 몰입에서 빠져나왔다.
몰입이 깨진 것은 아니다. 내가 일부러 조절한 거니까.
이 순간, 보다 더 파코스를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서 말이다.
‘완전한 몰입이 때로는 캐릭터를 과하게 만들곤 하니까.’
한발 물러서서 바라봐야 할 때도 있는 거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면서 더 나은 연기를 찾는 것도 배우가 현장에서 해야 하는 일.
나는 내가 쓴 글의 제목처럼, 흉내자가 되어 타인의 감정을 연기해왔다.
그가 느꼈을 감정을 고민하고, 따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 속의 내가 뚜렷해진다.
바로, 지금처럼.
그건 작은 기억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의.
······아주 오래된 기억.
“다녀왔습니—.”
책가방을 이미 반쯤 벗고서, 문을 활짝 열며 집으로 들어갔다.
신이나 붕 떠오른 나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소리에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곳엔 울고 있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무표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빠가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고 느낀 건 그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