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불씨 (8)
‘레보’는 이제 파코스를 알았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위험해질지.
그렇기에 오늘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그 사실을, 최고위원을 비롯한 레보의 모든 이들은 알고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 돼.⌟
⌜뜻대로 되실 겁니다.⌟
거구의 경호원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덧붙인다.
⌜결코, 일개 개인이 뚫을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니까요. 퇴로도 모두 막아 두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좋네.⌟
흡족하며 끄덕이는 최고위원에게 그의 경호원이 물었다.
⌜위스키 한 잔 드시겠습니까?⌟
⌜싸움 구경에 술이 또 빠질 수 없지.⌟
절벽 위에서 술잔과 함께 내려다보는 광경은 지옥도에 가까웠다.
총성이 끊이지 않고, 피가 튀었으며, 죽음이 난무했다.
딱히, 지금 세상과 별다를 것 없이.
⌜이미 세상은 지옥인 것을. 뭔가를 바꾸려고 저렇게 아등바등하는 모습이라니.⌟
최고위원이 비릿하게 웃으며 탄식한다.
단순한 비아냥이 아닌,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나오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저 몸부림도 곧 끝날 겁니다. 저자가 아무리 위험한 사내라 한들, 세상의 질서를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질서라······. 그거 마음에 드네.⌟
하지만 세상의 질서인 양,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꺼드럭대는 최고위원조차도 모르는 게 있었다.
세상의 질서, 그 자체가 파코스 바로 옆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질서는······.
불합리할 정도로 무자비하고 파괴적이라, 주변 모든 것을 삼킨다는 것을.
⌜끝이군.⌟
경호원이 말했다.
파코스는 포위되었다. 더는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도 더는 그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파코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끝을 예감한 눈으로 품에 안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화상을 입은 흉측한 손이 소녀의 눈을 가린다.
이제 곧 총성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날 터.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아이에게 속삭이는 파코스.
그 순간.
총성 대신 쩌저적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릉······.
이어지는 땅의 묵직한 울부짖음.
“어어어어···!”
“으아아악!”
순식간이었다. 지반이 무너져내리며, 절벽 아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은.
진정한 재앙이었다.
이 순간, 세상이 소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인 거다.
촤라라라락—!
파코스는 빠르게 반응했다. 최고위원에게 닿기 위해 준비했던 갈고리를 힘껏 던져 몸을 띄웠다.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떨어져 내리는 땅과 그 위에 서 있던 모든 이들.
최고위원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움직였다.
그는 절벽에 박힌 갈고리를 빼내 파코스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물론 뜻대로 되진 않았다.
콰직——!
땅이 저 모양인데 천장이라고 멀쩡할까.
거대한 고드름처럼 대롱거리던 돌덩이가 그대로 떨어져 내렸고 경호원은 거기에 짓이겨져 그대로 절명했다.
절벽이 그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지만 파코스는 기어이 밧줄을 붙잡고 위에 올라섰다.
······그곳엔 다리를 다쳐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된 최고위원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놈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파코스가 품 안의 소녀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또 한 번 살았네······.⌟
파코스가 안도한다.
소녀와 오랜 시간 함께 다녀본 결과, 재앙에도 텀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한동안은 또 잠잠하리라.
⌜내가 너에게 지켜질 줄은 몰랐는데.⌟
그녀에게 닥친 재앙에 죽을 뻔만 했지, 이렇게 오히려 지켜지게 된 건 처음이라 파코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바라보는 소녀.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있는 최고위원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이 빠진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에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
⌜의원이란 새끼들 대답이 하나같이 시원찮더군.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푸흑···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려주고 싶겠나.⌟
⌜안 알려줘도 돼. 물어볼 사람은 아직 많은 것 같으니.⌟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최고위원이 쿨럭거리며 웃었다.
⌜젠장, 궁금해지는군. 그래. 뭐가 궁금하지?⌟
⌜핵전쟁.⌟
도장을 찍듯 강한 어조로 말한 파코스가 덧붙여 묻는다.
⌜왜 일어난 거지? 사실 예전엔 나도 신경조차 안 썼거든. 눈앞에 닥친 생존이 버거워서. 깊게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지.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웃기더라고. 애초에 이 질문 자체가 너무 어처구니없지 않아?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말끝을 늘리던 파코스가 더욱 낮아진 음성으로 말한다.
⌜아무도 이유를 몰라.⌟
사막을 질주하며, 그 위에 피와 죽음을 뿌려대며 왔는데.
정작 간단한 질문의 답조차 들을 수 없었던 그였다.
⌜처음에 죽인 새끼는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래. 그 새끼가 군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더라고. 그래서 더 높은 놈을 찾아갔지. 근데 걘 뭐라는 줄 알아? VIP의 뜻이었다더군. 근데 VIP는 전쟁 때 죽었잖아. 그렇게 계속 묻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 넌 뭘 좀 아나?⌟
파코스의 질문에 입에 고인 핏물을 퉤 뱉어낸 최고위원이 벌게진 입술을 달싹거린다.
⌜어리석네.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이유나 찾고 있다는 게.⌟
⌜너도 어리석네. 더는 할 얘기가 없다는 거지?⌟
철컥—.
머리에 겨눠지는 총구에 최고위원이 이미 반쯤 감긴 눈으로 웃었다.
그의 다리에서 빠져나온 피가 이미 주변을 흥건하게 물들였다.
⌜늘 그랬듯이 싸움에 이유랄 게 별거 있나. 필요했고, 선택했다. 그뿐.⌟
그가 파코스를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나, 뭐··· 나쁘지 않았지. 인구를 줄이는 건 원래부터 우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거든. 겸사겸사 인구가 1할도 남지 않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나쁘지 않다고 자위할 만하고. 어떤가. 이렇게 들어보니 꽤······ 세상에 옳은 일을 한 것 같지 않나?⌟
⌜역시 최고위원은 좀 다르군.⌟
파코스가 짐짓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개소리를 꽤나 그럴듯하게 하네.⌟
타앙——!
⌜결국, 꼴리는 대로 했다는 걸 뭘 옳았네 어쩌네 하고 있어.⌟
힘없이 허물어지는 신형을 내려다보며 툭 던지듯 말한 그가 몸을 돌려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휴··· 나가자.⌟
피곤했다. 곧 쓰러질 것처럼.
얼른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가 있는 곳은 적진의 한 가운데.
이 주변은 전부 ‘레보’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소녀를 안아 들고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유일하게 빛이 흘러들어오는 틈으로.
그리고 파코스는 그 틈 너머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하하······.⌟
그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건물들이 무너져 있었다.
그래픽 카드를 닮은 마천루들도, 우주선을 닮은 시설도 모두 폐허가 되어버렸다.
소녀를 죽이기 위해, 재앙이 그녀의 주변을 휩쓸고 간 흔적이었다.
쑥대밭이 된 레보의 영역을 내려다보던 파코스가 조심스레 소녀를 내려놓는다.
그제야,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
⌜조금만 잘게.⌟
······인터넷이 사라진 시대.
소식이 퍼지는 속도는 오로지 사람의 입에 달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지만, ‘정보의 홍수’라 불리던 옛 시대와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테메우스 C13구역을 다스리던 신 정부, 레보가 무너졌다!’
과거였다면 5분이면 전 세계에 퍼져나갔을 이 소식이, 바로 옆 구역의 지배층 귀에 들어간 것은 몇 주가 지나서였다.
황폐해진 사막에 구역간의 교류는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까.
[모든 문을 봉쇄한다.]점차 주변 구역에서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문을 걸어 잠갔다.
의심을 밖에서 거두면 시선은 안으로 향하는 법.
[또한, 구역 내 주민들에 대한 수색을 실시한다.]가뜩이나 곳곳에서 불씨처럼 튀어 오르던 원성이 점점 더 커져갔다. 들끓었고, 타올랐다.
파코스의 존재는 분노의 방아쇠를 당겼고, 균열을 만들었다.
하나의 도시를 사라지게 한, 어떤 자연재해보다 더 재앙 같은 존재.
이제는 테메우스 C13구역뿐만 아니라, 그 어떤 구역도 재앙이라 부르게 된.
파코스.
그의 악명이 부풀려질 수록, 현시대를 전복하고자 하는 세력은 일면식도 없는 그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었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구역에 강림해주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가 저 핵전쟁의 원흉들이 사라질 날이 될 테니까.
그렇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견하듯, 대륙 전역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태동하는 동안.
인적이 드문 사막엔 몽글몽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후우우우우···! 후우우우우···!⌟
소녀가 볼을 부풀리며 바람을 불었다.
하지만 올라오는 건 연기뿐.
그녀가 원하는 불길은 꽃이 되기도 전에 사라졌다.
⌜으으···.⌟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던져둔 부싯돌을 다시 집어 드는 그녀.
탁, 탁.
처음부터 다시 시도하려는 그녀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활짝 웃으며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본다.
흉측한 손이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쳐 부싯돌을 잡았다.
⌜자, 봐라. 이건 이렇게 하는 거다.⌟
치익—.
불꽃이 튀며 단숨에 불이 붙는다.
그 모습을 소녀는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베에······.⌟
파코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불을 후 하고 꺼트리며 부싯돌을 건넨다.
⌜자, 다시 해봐.⌟
소녀가 다시 집중하기 시작한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며 미소짓는 파코스.
그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참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파코스는 아이를 구했고.
아이는 파코스를 구했다.
그게 전부.
하지만 파코스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초에 그게······.
인류애.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들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도무지 불이 붙지 않자 다시 파코스를 바라보는 소녀.
‘못하겠어요.’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파코스가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해 봐. 될 때까지.⌟
⌜······.⌟
⌜언제까지 내가 살아있으리란 보장은 없어. 그러니 너도 내가 하는 모든 걸 다 할 줄 알아야 돼.⌟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석양을 바라보는 파코스.
⌜그렇게 꼭, 오래 살아남아라.⌟
까칠한 모래바람이 그의 흉을 훑고 지나간다.
⌜아프네······.⌟
작게 읊조리는데, 아이가 목각인형을 손에 쥔채로 다른 한손으로 파코스를 잡는다.
마치 어디 가지말라는 듯.
꼬옥···.
방아쇠가 걸리던 그의 손가락에 아이의 손바닥이 감겼다.
파코스의 시선이 소녀를 향한다.
소녀가 환하게 웃는다.
파코스는 저 웃음을 알고 있다.
저 웃음을 보고 싶어 목각인형을 사려 했던 적이 있었으니.
⌜네가 맞았네, 디터.⌟
그가 웃었다.
흉터가 일그러졌지만 더는 아프지 않았다.
⌜미치도록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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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면이 검게 물들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영화 내내 귓가에 맴돌던 메인 테마가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안 감독은 의자에 기대어 올라가는 이름들을 눈에 담았다.
그 중 ‘파코스 – 백승결’이란 텍스트가 올라갈 땐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그래, 백승결이다.
이 장엄한 영화를 이끈 주인공!
무엇하나 흠잡을 것 없었던 이 완벽한 영화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파코스.
이 미친 캐릭터!
······새삼, 이 순간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안 감독이었다.
“믿기지가 않네, 진짜.”
천재라는 별명이 이보다 어울릴 수 없는 그가.
어제도 화상 통화까지 했던. ‘흉내자들’의 작가라는 게 말이다.
안 감독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옆을 돌아보았다.
단원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온다.
흡사, 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의 표정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