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불씨 (10)
“왜 사막이었을까요?”
기자가 크리스 감독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사전에 이야기가 오고 간 질문은 아니었지만, 무례한 질문도 아니었고, 이미 수많은 인터뷰로 웬만한 질문들은 다 나왔기에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크리스 감독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장소의 의미에 대해 묻는 이는 처음이라 내심 당황했다.
딱히, 어떤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이건 조금 클리셰였던 것 같아요. 황폐해진 지구는 이래야 한다는··· 뭐 그런 배경이죠.”
“일종의 무대 장치일 뿐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크리스 감독이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렇게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기자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좋은 인터뷰 감사했어요, 크리스.”
“저도 즐거웠습니다.”
손을 맞잡은 크리스가 악수를 나누고서 돌아선다.
그리고 조금 묘한 기분에 콧잔등을 긁적였다.
어쩐지 찝찝했다.
기자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그의 질문은 오히려 좋았다. 천편일률적인 인터뷰 사이에서 오랜만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다만 자신의 대답이 그리 좋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에 거스러미가 남았다.
‘왜 사막인가.’
여전히 그 대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핵전쟁 이후의 세계니까··· 같은 판에 박힌 답변은 피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렵군.”
작게 중얼거리며 곧장 옆 블록으로 향한다.
번화가인 메인 스트리트에서 살짝 길을 틀어 중소 규모의 극장들이 즐비한 거리로 들어선다.
그 사이에 야채가 대부분인 샌드위치 속 소시지처럼 끼어있는 작은 카페.
오늘 모임이 있을 장소로 건너가던 도중 품 안에서 벨소리가 들려온다.
아내였다. 그러니까··· 전 와이프.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내려다보던 크리스 감독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간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응. 왜?”
—아니, 루나랑 여행 가는 거. 그거 티켓 예매했나 싶어서. 며칠 전부터 루나가 물어보더라고. 아빠가 정말 티켓을 예매했을까? 하고.
“정말 티켓을 예매했을까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크리스 감독의 대답에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살짝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넘어온다.
—왜냐니. 못 믿는 거지. 아빠가 자기랑 무려 여행을 가준다는 걸. 아주 바빠서 15년째 여행 한 번 같이 안 가준 그 아빠가! 애가 오죽하면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불안해하고 있겠어. 물어보면 아빠가 미안하다고 할까 봐 전화도 못 하겠다잖아.
“······.”
—설마 또 취소한 건···.
뜨거워지려던 목소리가.
“아니야. 했어, 예매. 이번엔 정말 갈 거야.”
—다행이네.
팍 식은 채로 툭 떨어졌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거리를 바라보던 크리스 감독이 타임스퀘어 뒤로 넘어가려 하는 태양을 보며 물었다.
“밥은 먹었어?”
—지금 토비와 먹으러 나왔어. 토비가 당신 영화 너무 재밌다고 꼭 전해달래.
훅 들어온 현 남편의 칭찬에 크리스 감독이 픽 하고 웃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고맙다고 전해줘. 밥 맛있게 먹고.”
—그래.
뚝, 끊어진 전화.
빵빵거리는 거리의 차들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그런 것들에 젖어 드는 거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겨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
브로드웨이.
바둑판 같은 거리 위에 빙고라도 하듯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리의 이름이다.
동시에 굉장히 상징적인 이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름 뒤에 뮤지컬을 떠올리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지.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전 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왔다.
마치 의정부 부대찌개나, 대전 성심당처럼.
하지만 브로드웨이를 지탱하는 건 뮤지컬만이 아니다.
함께 이끌어가는 쌍두마차, 연극이 있었다.
브로드웨이 연극.
영화 업계 종사자들에겐 고향과도 같은 곳!
할리우드가 태동할 당시, 심각한 인력난을 겪던 감독들은 동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여긴 그들에게 노다지. 금광이나 마찬가지였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모여있는 것은 당연하고.
정말 찾는 게 쉽지 않은, ‘글 잘 쓰는 작가들’이 이 거리 곳곳에서 펜에 잉크를 적시고 있었으니까!
“이 카페 옆으로 돌아서 저 카페 건너편에······.”
그렇기에 여전히 이 거리엔 카페가 많다.
살인적인 뉴욕의 땅값을 견디려면 집은 작아질 수밖에 없고.
침대 위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작가들은 커피 한 잔으로 가로세로 40cm짜리 자신만의 작업실을 임대해야만 했다.
수요가 높아지니 공급도 많아질 수밖에.
그런 이유로 이 골목에서만 카페를 몇 개나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딸랑—.
종소리를 내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가자 둥그런 테이블에 다닥다닥 모여앉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들이 보였다.
백발이 성한 노인부터 3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청년까지.
그리고 그사이에 끼어있는 크리스 감독.
이 오묘한 조합은 하나의 연결점으로 묶여 있었다.
극작가들.
브로드웨이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이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승결, 여기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음에도 대번에 날 알아본 크리스 감독의 손짓에 빈자리에 앉았다.
우릴 제외하곤 손님이 없어 모자를 벗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와요.”
“반가워요. 화제의 주인공을 단골 카페에서 만날 줄이야.”
“신기하네요. 나 며칠 전에 영화를 또 봤는데. 너무 재밌어서 벌써 세 번째랍니다.”
쏟아지는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어지는 질문 세례에 크리스 감독이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마실 차를 주문하러 간다.
감사하다고 말할 겨를도 없이 양방향 스테레오로 이야기가 들려온다.
“크리스 감독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매번 감탄을 하는 통해 정말 궁금했는데···.”
“크리스는 철저한 사람이죠. 그렇기에 각본에 당신 이름을 넣는 순간 의심보단 흥미를 느꼈죠. 크리스가 인정한 사람이구나. 어떤 작가일까. 하지만 이름을 보자마자 육성으로 놀랐어요. 파코스를 맡은 배우라니.”
“혹시, 연극은 생각 없어요?”
마지막 말에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답할 뻔했다.
있다고. 요즘 아주 연극 생각밖에 안 하고 있다고.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나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었다.
크리스 감독이 통화로 브로드웨이의 극작가들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정확히 어떤 작품을 했었는지는 전혀 몰랐으니까.
전직 연극배우부터, 평론가, 그리고 영화감독까지.
다양한 커리어를 갖고 있는 그들.
흥미롭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어느새 다시 연극 얘기로 돌아왔다.
“만약에 연극 생각 있으면 배우로든 작가로든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쪽을 생각해봐요.”
“무슨 소린가. 오프오프라니.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런 마이너한 곳에서 있을 순 없는 일이지.”
“허, 선배님도 예전에 오프오프에 계셨던 건 다 잊으신 겁니까?”
“그러지 말고, 오프 브로드웨이로 와요. 그냥 브로드웨이는 너무 상업성에 치우쳐져 있고, 오프오프는 난해해. 우리가 딱 균형이 맞지.”
“어허, 그건 너무 편견이지!”
이 몇 안 되는 극작가들 사이에도 파벌(?) 비슷한 게 있었다.
한쪽은 메인 스트리스에 위풍당당하게 위치한 브로드웨이 대극장에 자신의 작품을 건 작가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그보단 조금 뒷골목에 중소규모 극장,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들.
마지막으로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마치 내 연극이 선보여질 가내수공업 극장처럼 상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극장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뭐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가내수공업 극장은 오프오프 대학로라고 불려야 하는 건가?
아무튼, 이런 그들만의 리그(?) 같은 얘기에서부터 뻗어 나간 대화는.
자연스레 작품의 성향과 글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곳으로 오며 기대했던 대로, 이쪽 이야기는 더 흥미로웠다.
그들이 배려해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대화에 참여했고, 어느새 나도 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내향적이냐 외향적이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배우들과 함께 있으면 연기 얘기로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여기선 이게 당연했다.
그렇게 찻잔이 몇 번을 비워졌다.
해가 지며 카페 안엔 짙어진 그림자들이 더욱 길게 드러누웠고, 노랗게 물든 카페의 영업시간이 다 되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도저히 안 되겠군.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배우라니!”
“말은 바로 해야지. 각본에 참여한 순간 이미 글쟁이인 거라고.”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그럼 글쟁이들끼리 본격적으로 글 얘기를 하러 가보실까.”
아쉬움 따위 떠올릴 새도 없이 곧장 술집으로 이동한다.
오늘도 일찍 귀가하긴 그른 것 같지.
뒤따라 나서며 오늘 가장 대화를 적게 한 크리스 감독과 발을 맞췄다.
“즐거워 보이더군.”
“그랬네요. 감독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그래···?”
크리스 감독의 얼굴에 음흉함이 깃든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그의 의도야 뻔했다.
어때. 글 쓰고 싶지? 이래도 안 쓸래?
뭐, 이런 느낌이랄까···.
의도야 어쨌든 감사했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야 세이디나 데이브처럼 이곳에서도 떠들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지만.
글에 대한 건 좀처럼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으니 말이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의 촬영이 끝난 이후부터는 안 감독과 ‘흉내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지.
‘속이는 건 좀 미안하네.’
크리스 감독이 띤 미소를 보며 괜스레 뜨끔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자네는 천상 배우야. 연기를 할 때면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하지.”
파코스의 마지막 대사를 패러디하며 씩 웃는 크리스 감독.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하지만 자네의 찬란한 재능이 거기서 끝인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
“분명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쪽으로도 재능이 있어. 글 쓰는 것 말이야.”
“······.”
이것 참··· 숨기는 게 쉽지 않다.
뭔가를 숨기는 연기야 아주 어렸을 적부터 조기 교육이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지금과는 상황이 아예 다르지 않나.
사실 말해도 큰 상관은 없을 거다.
어차피 지구 반대편, 오프오프 대학로(브로드웨이의 방식으로 따지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극장에서 하는 짧은 연극일 뿐이다.
안 감독도 지인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고.
크리스 감독이 입이 가벼운 사람 또한 아니지.
그렇게 크리스 감독에겐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분명, 이미 쓰고 있겠지만.”
“······.”
자연스레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크리스 감독이 입꼬릴 들어 올리며 묻는다.
“안 그런가?”
“···어떻게 아셨어요?”
“얼마 안 됐어. 오늘 극작가들과 대화하는 걸 보면서 확신이 생겼지.”
손가락을 튕기며 크리스 감독이 말했다.
“타오르고 식는 건 숨길 수가 없는 법이거든.”
그의 말을 듣고, 내가 오늘 어땠나를 되짚어보았다.
즐거웠다.
“······하하. 그랬겠네요.”
충분히, 들킬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