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불씨 (11)
오늘 크리스 감독은 뜨겁게 대화하는 백승결을 보았다.
연기를 할 때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류의 불꽃.
그건 그저 흥미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직접 해보고, 깊게 경험했으며, 어느 정도 완성까지 해본······.
창조자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창작자의 열망이었다.
짤그락—.
손안에서 구 모양 얼음이 녹아내린다.
희석된 버번 위스키가 속을 훑고 내려간다.
그리고 코앞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여전히 백승결은 창작자의 눈빛으로 작가들과 대화 중이었다.
마시는 것이 차에서 술로 바뀌었을 뿐(—백승결은 음료를 마시는 중이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 조금은 달라졌나···?
보다 솔직해지고, 대담해졌다.
솔직히 누군가의 글이 너무 재밌어 질투 난다는 얘기부터, 어떤 배우가 거지 같은 연기력으로 자신의 작품을 망친다며 패 죽이고 싶다는 과격한 이야기까지도.
아무튼,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섞여들어 간 백승결을 보며 크리스 감독은 흡족해했다.
이걸로 오늘 자신의 목적은 모두 이룬 셈이었다.
이미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것을 가속화 시킬 불씨를 붙였다.
이제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잔을 드는 크리스 감독.
하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몇몇은 담배를 태우러, 몇몇은 잔을 다시 채우러 움직인다.
그 사이, 백승결이 반도 안 줄어든 논알콜 칵테일을 홀짝거리다가 자신을 돌아본다.
시선을 느낀 크리스 감독이 물었다.
“주정뱅이들 상대하기 피곤하진 않나?”
“술 냄새보다 글 냄새가 많이 나서 괜찮아요.”
크리스 감독이 피식 웃으며 끄덕인다.
확실히 그렇다. 무엇을 마시던, 뱉어내는 것은 모두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 뿐인 작가들이니까.
그때, 이번엔 백승결이 물었다.
“감독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타오르고 식는 건 숨길 수 없다고.”
“그랬지.”
“타오른다는 건 제가 확실히 알 수 있겠는데······ 식는다는 건 뭘까요?”
“흐음, 한 번도 식어본 적이 없는 건가?”
크리스 감독은 백승결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퍽 이상한 표현이긴 하다. 이미 하고 있는 것을 그리워한다는 게.
하지만 크리스 감독이 보기에 백승결에게 연기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독한 그리움.
그때, 백승결이 테이블 위에서 흔들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말한다.
“식어버린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은 있죠.”
그 목소리는 땅거미가 지듯 낮고, 짙었다.
크리스 감독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식는다는 게 뭔지 궁금해한 이유가, 지금 그가 언급한 ‘식어버린 사람’ 때문이라는 걸.
“해본 적?”
“······현재진행형인 것도 같고요.”
아리송한 대답들에 크리스 감독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글쎄. 나도 아직 작품에 대한 열정은 식어 본 적이 없어. 다만, 사랑은··· 관계는 식어봤지.”
“······.”
눈치 빠른 백승결이 침묵한다.
그러니 민망한 그가 괜스레 입을 열 수밖에.
“흠흠! 그러고 보니 자네, 만나는 사람은 있나?”
“아뇨.”
“청춘으로서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만.”
크리스 감독의 말에 백승결이 으쓱거리며 답한다.
“대신 배우로서의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죠.”
“열정이 사랑을 이겼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주억거린 크리스 감독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자네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 사랑이 열정을 이기는 순간을.”
“······.”
“아, 이건 전 와이프 얘긴 아니야.”
황급히 손을 휘적거리는 크리스 감독.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당황한 듯한 백승결에게 그가 얼른 덧붙였다.
“내 딸 얘기네.”
크리스 감독의 딸에 대해선 백승결도 들은 적이 있었다.
파코스와 소녀의 여정을 쓰고, 찍다 보니 딸과 함께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고 했었지.
그래서 김성운이 3편 때문에 부르는 게 아니냐고 흥분했을 때도, 그럴 리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말을 할 때의 크리스 감독의 표정이 너무 진심이라서.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확실히 감독님은 파코스 쪽에 가깝다는 거요.”
“그건 지난번에도 자네가 했던 얘기잖아.”
“그랬죠. 그래서 방금 잠깐 생각했어요. 그럼, 디터와 랜시는 누구였을까.”
이번엔 크리스 감독이 침묵했다.
때마침 양손에 잔을 든 작가들이 자리에 앉으려다가 분위기를 보고 멈칫거렸다.
“이봐, 크리스. 이거 헤밍웨이가 즐겨 마시던 술이라길래 자네 것도 가져왔는···데······ 술만 놓고 갈까?”
크리스 감독이 아니라며 얼른 그들을 앉혔다.
자리에 앉은 작가들이 데구르르 눈알을 굴리다가 백승결에게 정착한다.
크리스 감독도 그를 보며 물었다.
“디터와 랜시는 누구였지?”
하던 얘길 마저 해도 된다는 일종의 허락이었다.
크리스 감독 자신도 궁금했다.
파코스가 자신을 닮았다는 그의 말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과연 이번에도 그럴지.
이윽고 백승결이 입을 뗐고.
“과거의 감독님이요.”
크리스 감독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던 다이키리를 샷처럼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간 술이 인터뷰 이후로 찜찜했던 구석을 모두 씻고 내려간다.
엉뚱하게도, 저 얘길 듣고서.
—왜 사막이었을까요?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떠올랐다.
사막은 단순히 무대 장치가 아니었다.
그렇지. 작품이 곧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데, 그냥 존재하는 장치 같은 게 있을 리가!
그러면 사막은 무엇이었을까.
파코스가 현재의 자신이고.
랜시와 디터가 과거의 자신이라면.
······왜 사막이어야 했을까?
크리스 감독이 웃으며 백승결에게 말했다.
“모든 게 명쾌해지는군.”
사막은 타임라인이었다.
그가 걸어온 과거이며.
머무는 현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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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나조차 모르는 나를 드러내. 자네는 그걸 어김없이 찾아내고. 역시 자넨 글을 써야 해······.”
크리스 감독이 살짝 취기 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 안엔 오만가지 감정이 모두 담겨 있어서, 저것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예를 들어, 이런 거지.
이런 시작도 나쁘지 않겠는데?
아무튼, 나는 다시 한번 느낀다.
작품은 작가의 거울이라는 걸.
이 안에 너 있다. 뭐 그런 대사마냥.
정말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를 하고 글을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 같기도 하다.
‘흉내자들’로서 타인을 연기하며 나를 발견하고.
그렇게 발견한 나의 조각들을 모아 ‘작가’로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거지.
그렇다면······.
‘연기··· 각본··· 뭔가 루트가 다음은 연출 아닌가? 연출 생각은 정말 없어요?’
언젠가 안 감독이 진지하게 했던 질문처럼, 연출은 어떨까.
불쑥 떠오른 궁금증에, 이번엔 크리스 감독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는 모든 작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가와 연출가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물론 표면적으로 하는 일에서도 큰 차이가 있지만, 제가 느끼는 것과 또 다른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의 생각을 답하는 작가들.
그들의 생각들이 이리저리 핑퐁게임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정의되었다.
“작가가 관조(觀照)라면 연출가는 구현(具現)이지.”
자신에게서 끄집어낸 것을 남들에게 내놓는 것.
가장 개인적인 것을 대중적으로 표현하는 것.
내 식대로 설명해보자면, 연출은······.
‘나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인 것이다.
“가장 교묘한 거짓말쟁이이자, 가장 솔직한 거울이네요. 연출가는.”
#
뉴욕의 밤거리는 낮보다 화려하다.
술집을 빠져나와 작가들과 일별한 나는, 크리스 감독과 함께 호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행 가시고 싶으시다고 한 건 얘기 해보셨어요?”
“했지. 와이프도··· 아니, 전 와이프도 이제야 아빠 노릇을 하려는 거냐고 좋아하더군.”
눈을 끔뻑거리며 크리스 감독을 보았다.
그건 화낸 거 아닌가···.
‘뭐, 허락을 받았다니 아무렴 어때.’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이로써 3편의 행방은 더욱 묘연해졌네요.”
사방에서 3편을 내놓으라고 성화인 상황이었다.
거대한 서사가 결국 더 큰 이야기의 시작점이라는 듯한 결말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크리스 감독에겐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생긴 듯했다.
“묘연하진 않아. 오히려 선명하지.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는 거고.”
그의 말을 곱씹으며 내가 주억거렸다.
“어쨌든, 여행 잘 다녀오세요. 사막으로 가시는 건 아니죠?”
옅게 웃은 크리스 감독이 대답 대신 슬쩍 묻는다.
“자네가 쓴 글을 보고 싶네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단호하게 거절하자, 크리스 감독이 단번에 이유를 유추해낸다.
“이미 계약이 되었군.”
“네, 맞아요.”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1, 2편을 촬영하며 붙어 있던 시간이 얼마인가.
이미 크리스 감독은 나를 꽤나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나도 어느 정도는 오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와 감독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보니 함께 2편을 집필한 각본가이기도 하니까.
내 이야기가 이어졌다.
글은 이미 완성되었고, 훌륭한 연출자가 붙었으며, 심지어 연극이라고.
그 연출가가 내 유명세를 이용하지 않으려는 것까지도.
마침 이 거리가 브로드웨이라 묘한 기분이 든다.
“멋진 감독이네. 연극계의 파코스라고 불러도 되겠어.”
“이 얘기하면 좋아하겠네요. 감독님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언제 개봉하지?”
“다음 달이요.”
“좋군. 자네의 팀과 얘기해보고 알려줘. 그들이 허락만 한다면, 바로 비행기 표를 예매할 테니.”
“네? 오시게요?”
“부담스러우면 몰래 가서 보고 오지.”
크리스 감독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연극엔 영어 자막이 없는데요?”
“연기라는 게 대사가 중요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인 건 아니지. 물론······ 정 신경 쓰이면 영어로 번역한 대본을 미리 좀 주면 더 좋고.”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크리스 감독이 내 작품으로 만들어진 연극을 본다?
생각만으로 부담스럽고, 그만큼 궁금해진다.
그가 ‘흉내자들’을 보고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휘유,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걷다가 뭔가 이상해져 물었다.
“근데, 곧 여행 가신다고···.”
“아, 그거?”
말꼬릴 들어 올리며 으쓱거린 크리스 감독이 걱정 말라는 얼굴로 말했다.
“한국 여행이야.”
“···?”
“내 딸이 KPOP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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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첫날 6000만 달러.
개봉 1주 차에 1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가, 7주 차엔 마의 6억 달러를 돌파해 역대 흥행 순위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렸고.
8주 차엔 자신의 형, 전작인 1편을 제치고 6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럼에도 입소문은 꾸준히 퍼지고 있었고,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관계자들 사이에선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가 대체 어디까지 올라갈지가 주된 화두가 되었다.
결국, TOP5 안에는 들 것 같다는 게 그들의 중론.
중요한 건, 그래서 그 TOP5를 언제 뚫느냐였다.
그 시기에 따라서 더 높은 곳도 바라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수천억 원이라는 비현실적인 잭팟을 터트린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가 할리우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걸려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 작은 극장에선······.
[흉내자들]아직은 산들바람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 같은 연극 포스터 하나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