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불씨 (12)
“잘 지내는가.”
오랜만에 친우에게 전화를 건 천광윤은 붕 뜬 것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사는 게 무료하다며(—보다 깊은 고뇌를 얘기하긴 했지만 요약하자면 이거다) 후배 기자 따라 한국에 방문했던 데이먼 셰리.
실종이 된 지도 너무 오래 지나 죽어버린 것 같다는 열정을 갑자기 되찾기라도 했는지,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아닌가, 화가 넘치는 건가.
“바쁜 것 같네.”
—당연하지. 정신없어, 아주. 자네의 페르소나 덕분에.
“페르소나? 아, 승결이를 얘기하는 건가?”
—나를 정신 없게 할만한 게 그 친구 말고 누가 있겠나.
셰리의 말에 천광윤은 흥미가 동했다.
안 그래도 미국 현지 상황이 궁금하던 그였다.
뉴스나 인터넷에서 백승결에 대해 매일 같이 다루고 있지만, 이렇게 현장에 있는 이의 반응이 더 정확할 수밖에.
“반응은 좀 어때?”
—다 알면서 뭘 물어보나. 할리우드가 이렇게나 시끄러운데, 자네가 모를 리가.
“그래도 지금 내가 할리우드에 있는 건 아니잖아.”
천광윤이 바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데이먼이었다.
안달 나게 하는 것은 이쯤에서 관두고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젠 정말 모르는 이가 없어. 이전까진 서귀호, 파코스 정도로 통했지만, 이젠 백승결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가 더 많지. 게다가 함께 일한 스턴트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기삿거리가 풍년이야.”
“그거 얘기하는 거지? 한국의 톰 크루즈니 앤디 서키스 이니 하는거.”
—왜 그렇게 못마땅한 말투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렇게 다른 배우들 이름에 가려지면 안 될 정도로 승결이가 더 대단하니 하는 말이지.”
—나 참. 꼭 장 오슬로가 자기 제자는 제2의 모차르트가 아닌 제1의 자기 자신이 될 거라던 인터뷰가 생각나는군.
“누군지도 모르는 양반이야.”
—요즘 클래식은 기본 소양인 거 모르나.
“그래서 한서호는 알지.”
천광윤의 대답에 데이먼이 허허 웃다가 이내 덧붙였다.
—그래, 그거면 다 아는 거나 다름없지. 아무튼, 자네의 대단한 자신감만큼 대단하긴 했어. 흥행 성적은 둘째치고 엄청난 연기였지.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가 역대 흥행 순위 5위라는 성적에 이름을 올렸을 때, USA 투데이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을 뿐.
TOP5 안에 들어갔다는 소식 자체가 놀랍진 않았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작이란 찬사가 당연하다 느껴질 만큼 재밌었고, 특히나 그 안에서 백승결이 보여준 파코스는 대작마저 견인하는 초인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데이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백승결은 천광윤의 말처럼 어떤 이름에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몸집이 커졌다는 걸.
—파코스는··· 그 친구가 그동안 맡은 것들 중 가장 복잡한 캐릭터였어. 마치 해별이, 서귀호, 진기원, 오태구··· 이런 과정들이 모두 그 캐릭터를 위해서 지나온 과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
이는 천광윤도 느낀 바였다.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이 말도 안 되게 넓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조합해 재창조까지 해버린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겠어. 파코스 다음엔 또 어떤 놀라운 걸 보여줄지.”
천광윤의 대답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였다.
확실히 그건 기대가 된다.
당장 내년, 그리고 앞으로 5년, 10년.
시간이 흐르며 그가 어떤 배우로 성장할지.
—그나저나, 반응이라면 아마 본인에게 물어보면 더 다이나믹할 텐데. 대우 자체가 달라졌을 테니까. 연락해 봤어?
“당연히 해봤지.”
—엄청 붕 떠 있지 않아?
“그렇지만도 않아.”
천광윤이 얼마 전 통화한 백승결을 떠올렸다.
살짝 들뜬 느낌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곧 개봉할 연극 때문.
영화의 성공을 축하할 땐 오히려······.
“잠잠해. 호수처럼.”
—그건······.
천광윤의 말에 데이먼이 낮게 감탄한다.
—확실히 굉장하군.
그는 연기와 감독까지 해봤던 연예부 편집장으로서 많은 것들을 봐왔다.
이 바닥에 있으면서 반짝 떴다가 망가지는 이들도 수없이 봐왔지.
심지어 여기서 말하는 반짝은 말 그대로 약소한 성공.
고작 그것만으로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 바로 연예계였다.
그런데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 정도면 어떨까.
반짝은커녕 번쩍조차 부족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공을 이뤘다.
전 세계를 밝히고 있으니 이보다 슈퍼스타라는 말에 어울리는 성공이 또 있을까.
그런데, 호수처럼 잠잠하다고?
데이먼이 신기해하며 중얼거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단순히 그릇이 큰 거로는 설명이 안 되지. 근데 승결인 단순히 그릇만 큰 게 아니야. 한 번 깨져본 적이 있지. 그래서 잘 아는 거고. 이 바닥에서 결국 중요한 건 연속성이라는 걸.”
천광윤의 추측에 또 한 번 감탄하는 데이먼이었다.
—그런가. 꾸준함을 아는 천재 소년이라. 귀하군.
“청년이지.”
—아직은 소년이지. 내 나이 60도 아직 청년 소릴 듣는 시대라고.
“그건 좀······.”
—진짜라니까? 내가 며칠 전에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랑 인터뷰를 했는데······.
볼륨을 높이는 데이먼에 천광윤이 웃었다.
“나이로 핏대 세우는 백인은 자네밖에 없을 거야.”
—그거 인종차별인가?
가볍게 껄껄거린 천광윤이 핸드폰을 든 손을 바꾸며 말한다.
“아무튼, 바쁜 거 마무리되면 한 번 놀러와.”
—알겠네.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천광윤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바빠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자네가 그렇게 진지하게 오라고 하는 게 두 번째야.
“······그랬나?”
—그랬어. 첫 번째가 언제였는 줄 기억하나?
“언젠데?”
—백승결이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아 참, 그랬었지.”
—근데 그땐 바빠서 못 갔어.
“맞아, 기억나네. 그때가 한창 국제 영화제들이 줄줄이 있었던 시기라 도무지 올 수가 없다고 했었지.”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야. 그러니 그때만큼의 뭔가를 발견했다는 뜻 아니겠나. 그런데 백승결은 지금 할리우드에 있고······ 대체 왜 날 부르는 건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 새로운 배우인가? 아니면 작품?
넘어오는 질문들에 천광윤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뭔가를 발견하긴 했지. 재발견이랄까.”
—···응? 재발견?
#
가내수공업 단장, 김진태가 담배를 피우고 건물로 들어가다가 뒷걸음질 쳤다.
극장 앞에 걸린 커다란 포스터.
[흉내자들]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야심작 ‘천추’의 실패 이후로 연극은 정말 접어야 하나 했었는데······.
갑자기 굴러온 희망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희망이 헛되었는지, 아닌지가 다음 주면 개봉박두였다.
‘아니지, 헛된 건 아닌가.’
이마저도 실패하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연극을 그만둬야 하나’ 같은 고민을 할 것 같진 않다.
양기전 배우의 말마따나, 즐거웠으니까.
‘흉내자들’의 캐릭터들처럼 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성공도 하는 게 좋기야 하겠······.
“어?!”
“자기야, 왜?”
때마침 지나가던 커플이 멈춰서서 포스터를 바라본다.
흥미가 생긴 걸까! 얼른 다음 주에 개봉이라고 다가가서 말할까?
“이런데도 극장이 있네.”
“아, 그러네. 근데 너무 외진 곳 아냐?”
“일단 너무 낡았다.”
푹, 푹, 푹.
비수가 연달아 꽂혔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어가는 사이, 커플은 자리를 떠났다.
돌 맞은 개구리··· 김진태가 멘탈을 붙잡으며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이번엔 근처 농구장에서 한바탕 뛰고 온 듯한 두 남자가 다가와 포스터를 훑는다.
“흉내자들?”
이번엔 다르다. 제목을 읽었잖아!
연극에 대해 흥미가 생긴 거다!
그렇다면···!
“도플갱어 얘긴가?”
“오, 그럼 재밌을 듯.”
“아, 아니네. 배우들 얘기래.”
“······.”
돋았던 흥미가 팍 식었는지 금세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김진태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거······ 괜찮을까?
#
“오늘 일정을 끝으로······.”
크로아상을 쭈왁 찢은 김성운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간다.”
수프를 떠먹던 현태 형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눈을 빛낸다.
“김치찌개······.”
옆에선 에그 스크램블을 푹 뜬 김주철이 입맛을 다셨다.
“계란찜.”
“계란말이.”
“제육볶음.”
“육개장.”
그리운 고향의 음식 이름이 끝도 없이 나왔다.
김성운도 이에 동참한다.
“여기선 외국 술이라고 겁나 비싼 소주도 빼놓으면 섭하지.”
그들의 한 어린 목소릴 들으며 쿡쿡 웃었다.
우유에 말은 시리얼을 후루룩 먹어치우는데, 김성운이 물었다.
“승결이 넌 뭐 먹고 싶은 거 없···.”
“···?”
“뻔하지. 맛동산.”
“오, 정답. 근데 하나 더 있어요.”
“뭐? 약과? 양갱?”
“아뇨, 영화관 팝콘이요.”
내 대답에 세 사람 모두 탄성을 질렀다.
“맞아요. 우리나라 팝콘!”
“그래, 그거 그립지. 여긴 팝콘마저도 너무 짜고 느글느글한 게···.”
“오늘 말한 거 승결이 작품 초연하는 날, 뒤풀이로 전부 먹어버리죠.”
현태 형의 포부(?)에 김성운이 동조했고, 김주철이 수락했다.
어차피 안 감독 식구들과는 만날 수 없으니, 뒤풀이는 우리끼리 조촐하게 하자고 한다.
장소는 내 집이란다.
집주인 동의는 이젠 형식상으로조차도 필요하지 않나 보다. 쩝.
입맛을 다시자, 그런 나를 보며 웃던 김성운이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긴장은 안 돼?”
“팝콘 먹을 생각에요?”
김성운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초연’에 대해 물어본 것임을 알기에 잠깐 따라 웃다가 덧붙였다.
“사실 긴장 안 된다면 거짓말이죠. 연기 처음 했을 때보다 더해요. 그땐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이젠 너무 잘 알잖아요. 이 작품의 성패에 따라 어떤 결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성공과 실패.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치는 얼굴들이 여럿이다.
특히나 내 글을 읽고, 믿어준 하선경 대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래? 언뜻 보기엔 네가 너무 괜찮아 보여서.”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왜? 부정 탈까 봐?”
“아뇨, 그냥··· 그런 모습이고 싶어서요.”
조식을 마치고 준비를 서둘렀다.
한국행 전, 마지막 스케줄이 남아 있으니까.
“거 봐, 또 볼 거라고 했지?”
인터뷰였다. 단독은 아니고, 크리스 감독과도 아닌.
일명 ‘파코스의 소녀’, 올리비아와의 인터뷰.
헤죽 웃으며 달려와 안기는 올리비아였다.
소녀를 안고서 사막을 횡단한 파코스답게, 나는 능숙하게 그녀를 들어 올렸다.
품에 안긴 아이는 해맑다.
한 점 어둠도 드리우지 않았다.
다행히도.
소녀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근데, 기분 좋아 보여요.”
“내가?”
“네!”
“올리비아 만나서 그런가 보다.”
“헤헤~.”
내심 안도했다.
김성운에게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감정을 귀신같이 캐치하는 아이에게도 그렇게 보여서.
조급해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
며칠 후, 가내수공업 극장.
무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양기전이 ‘아이고’ 앓는 소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한 번만 더 하자.”
그의 말에 배우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규진까지도 군말 없이 주섬주섬 소품을 챙긴다.
그리고 또다시 2시간.
탁—.
리허설이 끝나고, 스태프 중 한 명이 무대를 비추는 메인 조명을 껐다.
막판 리허설로 몇 주째 불 꺼질 날 없던 연극 무대가 비로소 암전되었다.
객석 쪽 계단으로 내려온 양기전이 뒤돌아 어두컴컴해진 무대 위를 가만히 바라본다.
드디어 내일이었다.
‘흉내자들’의 초연 말이다.
“저 위에 불이 다시 켜지면, 그땐 진짜 시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