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기억 (1)
맨 뒷줄, 가장 끝자리.
나는 같은 돈을 내고는 누구도 선택하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10인 11각 경기마냥 통으로 연결된 의자는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렸고, 쿠션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하 특유의 냄새와 약간의 습한 느낌까지.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여러모로 영화관과는 많이 다른 환경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천추’ 이후로 연극은 이제 두 번째 관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곳의 분위기는 오히려 극장이라기보단 세트장에 가까웠다.
그래서였다. 나는 이 낯선 환경이 좋았다.
특히나 내 작품에 어울릴 것 같았다.
‘흉내자들’ 속 캐릭터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완성하려 했던 영화의 촬영 현장 같아서.
“후우···.”
살짝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아 허벅지를 문지르며 주변을 좀 더 훑었다.
무대까지 계단식으로 이어진 객석 대부분이 차 있었다.
물론 듬성듬성 있는 빈자리를 다 합치면 2, 30석은 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이만하면 ‘천추’를 볼 때보다 서너 배는 더 되었다.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초연 아닌가?’
하람이 SNS에 홍보를 했다곤 하지만, 안 감독 말마따나 연극은 입소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아직 입소문이 퍼질 선각자도 없이 이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꽤 괜찮은 시작일 것 같지.
그렇게 자체적으로 상황을 평가하며 얼마를 기다렸을까.
객석을 밝히던 조명이 서서히 조도를 줄인다.
대신 무대 쪽이 밝아졌다.
정확히는 무대를 가리고 있는 천막에 스포트라이트가 겨눠졌다.
극의 시작을 알리는 불빛.
그곳을 보며 내가 소리 없이 웃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를 처음으로 선보인 내부 시사회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백여 명의 기자와 수많은 배우들, 그리고 관계자들이 거대한 상영관을 가득 메웠던 그때도 말이다.
고작 이렇게 숨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만약 안 감독 말마따나 내가 배우로도 출연을 했더라면?
‘진짜 백스테이지에서 벌벌 떨었을지도 모르겠어.’
상상만으로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윽고 객석이 완전히 암전되며, 커튼을 비추던 두 개의 조명이 한곳으로 모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집중되는 가운데.
천천히, 막이 올랐다.
#
이야기의 시작은 마치 등장인물을 소개하듯.
최태주를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현 상황을 알려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젠장, 젠장!⌟
어떤 중년 배우는 우편함에 가득 찬 공과금 독촉 다발을 꺼내다가 실수로 전부 쏟아, 그것들을 주우며 서럽게 울고.
⌜그래서 말인데 제가 내일은 오디션을······.⌟
⌜진호씨, 딴 꿍궁이가 있었구나? 이 일은 그냥 돈 벌기 위한 수단이었고. 난 진호씨 열정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든 뒤통수칠 준비 중이었네?⌟
어떤 단역 배우는 아르바이트 도중 오디션 을 봐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그대로 잘린다.
⌜오로지 연기, 연기. 그만하면··· 그 정도 했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냐. 난 이제 모르겠어. 내가 당신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인지.⌟
또 어떤 유명 배우는 아내가 건네는 이혼서류를 받아들며 무너지고.
⌜끄아아악! 흐으으읍!⌟
⌜성철아, 괜찮아···!? 야, 병원. 병원에 전화해!⌟
또 어떤 스턴트 배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액션 연습을 하다가 크게 다친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최태주(—양기전)는, 기억을 잡아먹는 병마가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음을 알게 되어.
⌜최기용, 이은선···, 010······, 010······, 이 일은 이, 이이 사······.⌟
미친 듯이 가족들의 이름과 번호를 외우고, 구구단을 읊조린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한다.
이토록 모든 게 선명한데, 이것들이 왜 사라진단 말인가···!
그렇게, 모든 비극적인 상황들이 불편하지만 자연스럽게.
불쾌하지만 먹먹하게 이야기에 녹아든다.
뒤이어 나오는 오디션 결과.
각자의 인생이 매운맛, 쓴맛뿐인 배우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핀다.
현실에서 멀어지며, 꿈에 가까워져 가는 배우들.
이어지는 대본 리딩에서, 그들은 각자의 사정을 감추고 대본을 읽어내려간다.
배역이란 가면을 쓰고서 연기를 한다.
그 연기를 마치고, 또다시 연기를 이어나간다.
괜찮은 척, 별문제 없는 척.
가슴 한쪽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고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이곳은 그들의 꿈이자, 일터니까.
그렇게 영화는 본 촬영에 돌입한다.
다 함께 의쌰의쌰하며 훌륭한 영화를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하지만 몇 번의 촬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최태주는 자신의 대역인 윤성철이 무릎부상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도.
그렇기에 그가 이 영화에서 하차하길 바랐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녀석에겐 아직 기회가 많으니까.
앞으로의 스턴트 생활 전체를 걸 만큼,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자신과는 달리,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그랬는데······.
⌜어, 성철아. 왔어? 오늘 씬 쉽지 않겠던데? 잘 해보자.⌟
⌜······.⌟
최태주는 실수를 하고 만다.
그 다리로 촬영은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말하던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윤성철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온 윤성철에게 퍽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너 무슨 일 있어?⌟
⌜혀, 형······.⌟
파르르 떨려오는 윤성철의 두 눈.
그 시선을 마주한 최태주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어··· 그, 너 왜··· 왜··· 왜 왔어.⌟
몇 초 사이에 다른 사람처럼 변하더니, 극심하게 혼란스러워하는 최태주.
두통을 호소하는 그를 보며 윤성철과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은 그의 상태를 알게 된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것과 이미 꽤나 진행되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까지.
결국, 최태주는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으로선 알츠하이머 증상이 심해지고 있는 배우와 2, 3개월이나 남은 일정을 소화하는 게 큰 리스크였다.
대표 안 다면 노발대발할 거고, 투자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최태주도 하차를 통보받는다면 군말 없이 대본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랬는데.
⌜하자.⌟
⌜네?⌟
⌜해보자. 까짓거.⌟
감독이 그를 붙잡았다.
⌜우리 끝까지 가보자.⌟
그가 그런 결심을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존재감 없는 배우로 유명한 최태주를 캐스팅했던, 그때의 그 이유 때문이었다.
작중 최태주가 맡은 캐릭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눈에 띄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그리고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와 이제는 나름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 최태주는 딱 그런 사람 같았지.
이제 보니, 같은 게 아니라 정확했다.
몹쓸 병에 걸리고서도 여전히 이 작품을 끝까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넘실거리는 것을 보면.
하지만 영화에 누가 될까 끝내 참아내는 그를 보며, 감독은 생각했다.
이제 와 어떻게 바꿀 수 있겠나.
배역 그 자체인 배우가 여기 있는데.
동정 따윈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감독으로서의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결정을 굳혔다.
그렇게 최태주는 배우 명단에서 빠지지 않게 되었다.
⌜형, 저왔어요.⌟
그리고 그건 윤성철도 마찬가지.
⌜뭐야. 너 왜 또 왔어.⌟
⌜휴······.⌟
당장이라도 축객령이 떨어질 듯한, 싸늘한 말투에 오히려 안도하는 윤성철.
혹시나 또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감독님 허락이에요.⌟
⌜뭐?⌟
⌜감독님이 저 대역으로 넣어주셨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감독님 어디 계셔?⌟
⌜형, 그냥 좀 하게 해줘요. 기회를 달라고요.⌟
⌜말했잖아. 넌 기회가 아직 많다고. 그거 다 날리려고 그래? 날 보고도 모르겠어?⌟
⌜형을 봐서 그래요.⌟
힘주어 말하는 윤성철에 최태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철없는 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형이랑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요. 그건 이번 말고 또 언제인데요?⌟
⌜······.⌟
⌜저 처음 이 일 시작했을 때부터 형 대역이었어요.⌟
⌜······.⌟
들썩거리는 어깨, 비스듬히 내려간 시선, 꽉 움켜쥔 두 주먹.
윤성철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도 자신이고 싶다고.
함께 촬영하고 싶다고.
하지만 윤성철은 차마 그 소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는 얕은 희망이 남아서였다.
말도 안 되지. 어리석지.
하지만 그건 이미 이 길을 선택하면서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인지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
······영화의 촬영이 속행되었다.
이따금 최태주가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충분히 감당 가능한 범주였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기에 최태주도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잡았다.
매일 같이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이번만, 제발 이번만······.
다행히, 그의 병증이 더 늘어나진 않았다.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그의 증상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씁쓸함을 숨길만큼.
유쾌함을 드러낼 만큼.
각자 처한 현실은 최악을 향해 치닫지만, 그럼에도 촬영장에서만큼은 행복해져 가는 배우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끝까지 가보자던 감독의 말은 끝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문제는 최태주가 아니었다.
⌜자, 잠시만요! 대표님! 대표님! 이제 몇 씬 안 남았다고요!⌟
제작사가 빚을 졌다. 감당 못할 만큼 큰 빚을.
회사가 넘어지니 나머지는 도미노였다. 그 끝에 영화가 서 있었다.
⌜야이, 개새끼야! 너만 살면 다냐!⌟
씩씩거리던 감독이 머리를 부여잡고 앉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직원이 묻는다.
⌜오늘 촬영은 어떡하죠?⌟
화도 내보고, 울어도 보고, 탓도 해보던 감독이.
가만히 창밖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가야지. 일단 가서··· 가서 얘기해야지.⌟
어느 때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도착한 촬영장.
이제 곧 심각한 이야길 꺼낼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감독이었는데.
촬영장 분위기가 이상했다.
벌써 소식이 전해졌을 리는 없고···.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가져온 소식에 비하면 양반일 거라 생각하며 스태프들에게로 다가간 감독.
⌜뭐야, 무슨 일이야.⌟
⌜감독님······.⌟
미리 촬영장을 세팅하고 있던 스태프가 마른침을 삼킨다.
그녀의 시선이 툭 떨어진다.
⌜뭔데. 말을 해.⌟
⌜그, 그게 말입니다. 최태······.⌟
⌜감독님, 여기 계셨네요!⌟
그때 촬영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어쩐지 다급한 표정의 최태주가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그 뒤로 우르르 따라오는 배우들.
감독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순간.
덥썩—.
최태주가 그의 손을 잡았다.
간절한 두 눈동자가 감독을 바라본다.
⌜저 진짜 잘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연기하게 해주세요.⌟
⌜갑자기 무슨—.⌟
⌜저 이번엔 진짜 잘할 자신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 제발······.⌟
붙잡힌 양손을 더욱 꽉 잡으며 최태주가 읍소한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대사 한 줄이더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
몇 년 치의 기억을 잃었는지 모를.
과거의 최태주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