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기억 (2)
⌜형.⌟
윤성철이 최태주 곁에 서며 그의 팔을 잡았다.
⌜어?⌟
⌜잠시만요.⌟
⌜아니, 나 감독님이랑 얘길 좀······.⌟
그러나 과거에 갇힌 최태주는 그의 팔을 장애물인 양 털어내며 한 걸음 더 내디딘다.
⌜정말 한 장면만, 딱 한 장면만 봐주세요. 제발······.⌟
언젠가, 누군가에게 빌었을.
어딘가에 적힌 대사가 아닌 최태주 머릿속에 새겨진 기억.
무엇이 그토록 서러웠을까.
얼마나 후회가 남았길래······.
썰물처럼 기억이 빠져나가자, 흉처럼 남아 드러날까.
그 모습을 보며 모두가 숙연해진다.
그 사이에서 영화가 엎어졌다는 얘길 하러 온 감독은.
이 지독한 상황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지금 이 순간, 결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이 불쑥 떠오른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도(安堵)였다.
아직 촬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최태주의 상태가 계속 이렇게 안 좋다면, 그리고 영화를 계속 제작해야 했다면.
아마도 배우 교체는 불가피했겠지.
하지만, 최태주의 손에 들린 너덜너덜한 대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영화엔 그가 필요했다.
비록 더 이상 세상이 이 영화를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된 건······.
⌜다행이구만.⌟
모든 이야길 들은 원로 배우가 한마디로 정리한다.
누군가는 그 말에 속상해할 만도 하건만, 모두가 줄줄이 주억거렸다.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 영화를 위해 어떤 것을 버려야 했는가.
가족, 건강, 미래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스쳤지만, 그냥 지나가게 두었다.
⌜그래도··· 즐거웠어요.⌟
윤성철이 작게 던진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픽 하고 웃었다.
재미. 그것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현실을 위로해줄 수는 있었다.
며칠 후, 영화 촬영이 중단되었음을 감독이 공식적으로 알렸다.
본격적으로 마케팅을 시작하기도 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영화가 개봉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없었던 영화’가 된 것이다.
모두가 한차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영화사 대표 다음으로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던 감독에겐 특히나 가혹한 시간이었다.
상황이 수습되어 안정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였지만, 그래도 이젠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감독.
그에게 오랜만에 윤성철의 전화가 걸려왔다.
상황이 수습되는 사이, 최태주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었다.
감독이 모두에게 연락을 돌렸다.
‘없었던 영화’의 ‘있었던 배우’들이 뭉쳤다.
그들이 만난 곳은 서울에 있는 모 대학병원.
과일을 사 들고 온 배우가 툭 던지듯 고백한다.
⌜저 오늘 이혼 도장 찍었어요.⌟
⌜······.⌟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어떤 위로를 건넬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감독이 슬쩍 말했다.
⌜그, 내가 ‘나는 또 솔로’ PD랑 친분이 좀 있는데···.⌟
⌜감독님···?⌟
황당한 표정을 짓는 당사자와 양옆에서 입을 틀어막고 웃는 배우들.
“그건 역시 좀 아니지?”
멋쩍게 웃던 감독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대상은 옆에서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윤성철이었다.
⌜성철이 무릎은 좀 어때?⌟
⌜이제 멀쩡해요. 의사쌤도 괜찮다고 하셨고요.⌟
⌜다행이네.⌟
어깨를 두드리는 감독에 윤성철이 주억거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서.⌟
⌜응?⌟
얼굴에 서린 걱정을 쏟아낸다.
⌜가서. 괜찮다고. 나 다시 스턴트 할 수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
그가 지금 하는 말이, 누구에게 하고싶은 말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못 알아들을까 봐······.⌟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분명했다.
늘 자신을 걱정하던 이가 그 걱정마저 잊어버렸을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다.
모두가 아무 말 없이 병원 안으로 들어간다.
복도 끝.
문에 붙은 숫자가 늘어날수록, 모두의 표정이 좀 전의 윤성철처럼 변해갔다.
마침내, 앞장서서 걷던 감독이 병실 문을 열었다.
그곳엔, 최태주 대신 그의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구면인 감독에게 그녀가 인사를 한다.
⌜오빠는 화장실 갔어요. 곧 올 거예요.⌟
⌜아, 그래요···.⌟
멋쩍게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
가져온 과일 바구니와 몇몇 문안 선물들을 건네고서 다시 찾아온 침묵에.
⌜이게 대본이래요.⌟
동생이 동화책 한 권을 건네며 방긋 웃었다.
그것을 받아든 윤성철이 눈물을 꾹 참으며 두툼한 표지를 넘겼다.
빈 부분을 빼곡히 채운 낙서들.
그 사이로 보이는 ‘복귀’라는 글자.
동생이 말을 이었다.
⌜본인이 왜 병원에 있는지 몰라요. 그냥 단순히 건강이 안 좋은 줄 알아요.⌟
⌜······.⌟
⌜그래서 얼른 복귀하고 싶어 해요.⌟
윤성철이 들썩거렸다.
가족 앞에서 울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태주 상태는 좀, 어떤가요?⌟
⌜알츠하이머라는 게······ 그저 늦추는 게 최선인 병이잖아요.⌟
그 말인즉,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그가 저토록 꿈꾸는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요즘은 아예 괜찮아지진 않고, 이따금 일부만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그나마 그럴 때 여러분들을 모시고 싶었는데······ 아까 화장실 가기 전에 여러분들 사진 보여주면서 누구냐고 물어보니 기억 못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윤성철의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최태주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를 보며 무엇을 말해야 할까.
그때 문이 열렸다.
스륵—.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오며, 간병인과 함께 한 남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온다.
갑자기 자신의 병실에 여러 사람들이 와 있자 흠칫 놀란 남자가 그 자리에 멈춰선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웃고 있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천천히 훑어본다.
⌜오빠, 이분들 누군지 알아보겠어?⌟
동생의 물음에, 최태주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동생이 ‘역시나’하는 얼굴로 실망하는데, 돌연 최태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찔끔 눈물까지 나오는 걸 닦아내며 그가 걸어들어온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그의 한마디에 배우들이 조심스러워하며 내외하던 발바닥을 떼어내 그에게 다가갔다.
⌜혀어엉!⌟
⌜이런 식으로 놀리기예요?⌟
⌜연기력 뭐야. 더 좋아졌는데?⌟
⌜나 울뻔했잖아요!⌟
⌜이미 우는데?⌟
피식 웃으며 모두와 눈을 맞추는 최태주.
병실에 둘러앉은 그들은 밀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 형은······.⌟
⌜이혼했어.⌟
⌜엇. 나 이거 기억 못 하면 어쩌지? 만날 때마다 물어볼 거 아냐.⌟
⌜까짓거, 매번 얘기해주지. 이혼이 뭐 대수라고.⌟
⌜가만 있자. 내 주변에도 돌싱 누님들이······.⌟
⌜야야, 됐어.⌟
⌜진짜 됐어?⌟
⌜그읏, 나중에. 나중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 최태주가 수첩을 꺼내 들며 볼펜을 달깍거렸다.
⌜기억이 있을 때 처리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라 그러지. 가만있자······.⌟
최태주의 시선이 윤성철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무릎.
⌜다리는.⌟
⌜괜찮아요.⌟
최태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치 자신의 병이 낫기라도 한 것처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재활도 필요 없을 정도예요.⌟
⌜그래? 그럼 뭐하고 있어. 얼른 작품 해야지. 내가 여기서 과일 까먹으며 지켜볼게.⌟
⌜얼굴도 안 나오는데요 뭘.⌟
⌜그래도 내가 널 모르냐. 작품마다 또 다른 나였는데.⌟
윤성철이 괜스레 삐뚤게 웃으며 말했다.
⌜다이어트해서 체형도 바꿀 거거든요? 좀 더 대중적인 쉐입으로.⌟
⌜야, 이만큼 대중적인 쉐입이 어딨냐.⌟
최태주가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입꼬릴 올렸다.
그 모습에 모두가 빵 터져 한참을 키득거렸다.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과일을 깎아 먹고, 따뜻한 차도 나눠마시며.
그렇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어······.⌟
최태주가 작게 신음했다.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건 그의 동생이었다.
⌜연우야.⌟
⌜응?⌟
⌜이 사람들 누구셔?⌟
질문과 함께 내려앉은 침묵.
최태주의 동생이 놀란 표정의 감독과 배우들을 훑었다.
⌜그게···.⌟
⌜나 대본 연습해야 돼. 연우야, 나 대본.⌟
⌜어, 어. 오빠.⌟
동생이 침대 옆에 놓여 있던 동화책을 건넸다.
입꼬릴 올리며 자신만의 대본을 받아든 최태주가 표지를 넘긴다.
그리고 무심한 듯 묻는다.
⌜의사 선생님들이시죠?⌟
감독과 배우들을 향한 질문.
아마도 회진이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그에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오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사락—.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것을 따라 올라가는 최태주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설렘 가득했다.
⌜저 언제 퇴원할 수 있어요?⌟
활짝 웃던 그가 이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동료들이 기다릴 거예요. 제가 영화를 찍다가 아파서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얼른 복귀해야 하는데······.⌟
그리고 어느새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한다.
⌜제가 배우거든요.⌟
#
잠시 암전되었던 무대에 홀로 남은 것은 최태주 뿐이었다.
언젠가, 정신이 들었을 때.
홀로 병실에 남은 그.
그가 노트를 꺼내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그 내용이 독백으로 객석을 향해 울려 퍼진다.
⌜행복은 원래 잠깐이다.
그 과정은 복잡하고, 지독하며.
처절하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저 흉내일 뿐이더라도.
잠깐을 위해 살리라.
결국, 그 잠깐들이 모여, 나를 만들고 있으니.
나는 결국, 행복한 것 아닌가.⌟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서서히 조도를 줄인다.
어느새 완전히 꺼져버린 무대 조명.
그러나 객석은 밝아지지 않았다.
몇 초 정도가 적막 속에서 지났다.
정확히는 여기저기서 소매로 얼굴을 닦고, 훌쩍이는 소리만 이어졌다.
이윽고, 극장 안의 분주한 소리들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제야 김진태가 신호를 줘 객석을 밝혔다.
확 밝아지는 불빛 아래에서 관객들이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와······ 너무 울었어.”
“나도 참느라 혼났네.”
“이게 참아진다고?”
퉁퉁 부은 눈들끼리 낄낄거리다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밌네. 재밌다.”
“별 기대 안 했는데 너무 좋았다.
“그러니까. 솔직히 우리 술집 열 시간까지 기다리느라.”
“근데 또 마냥 무겁진 않아서 좋더라.”
“새드엔딩에 위로를 받네.”
극장을 나서며 여운에 젖은 감상평들이 헨젤과 그레텔의 빛나는 돌처럼 툭,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격하는 김진태 옆으로 안 감독이 다가왔다.
“센스 좋았어.”
“하하. 제가 영화관에서 매번 불만이었거든요. 지금 눈물범벅인 거 쪽팔린데, 왜 그렇게 다들 불을 일찍 켜는지.”
씩 웃은 안 감독이.
“······.”
무대를 나서는 인파를 훑었다.
‘갔네.’
백승결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 그의 핸드폰으로 톡 하나가 도착했다.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입꼬리를 올리는 안 감독.
이에 김진태가 물었다.
“누군데요?”
“작가님.”
“설마, 오늘도 보고 가신 거예요?!”
안 감독이 끄덕거리자 김진태가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해한다.
“이제 좀 봅시다! 작가님 좀 보여줘요, 우리!”
“아직 안 돼.”
“왜요!”
“이 작품이 성공하면, 그때 뵙자고 내가 말했거든.”
“감독님이요? 대체 왜요!?”
어처구니없어하는 김진태를 보며 안 감독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연극계가 스스로 바람을 일으킬 때.
그래서 정말 되살아났을 때.
‘그때 우리는 작가 백승결을 만나게 될 수 있을 거다.’
물론, 아직은 멀었다.
이 작은 연극 바닥에서 입소문이 퍼지고, 화제가 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지.’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상황이, 안 감독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