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기억 (5)
서른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도 잠시.
나는 어느새 책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참 묘하다.
대부분이 새로운 내용이었지만,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현장에서 직, 간접적으로 느꼈던 것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주는 것 같달까.
마치 어찌어찌 풀어낸 문제를 답안지와 비교하며 풀이 방법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벌써 두 권의 책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세 번째 책을 앞으로 끌어당겨 표지를 펼치는데, 수많은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도서관에 딱 봐도 교수님 소릴 들어야 할 것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영화팀과의 회의를 마치고 날 만나기 위해 찾아온 안 감독이었다.
그도 이런 분위기가 퍽 오랜만이었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와 옆에 앉았다.
“어후, 여긴 모자 푹 눌러쓰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찾는데 애먹었네요.”
목소리 볼륨을 낮추고 속삭이는 안 감독.
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본다.
“갑자기 도서관은 왜···. 어? 반가운 책들이네. 그런데 이걸 왜 작가님이······.”
말끝을 흐린 안 감독이 설마 하는 눈으로 나와 책을 번갈아 본다. 목소릴 높일 수는 없으니 눈이 점점 더 커진다.
“작가님···!”
“아직은 그냥 흥미가 생긴 정도예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요.”
“재밌죠. 재미는 정말 보장하죠.”
번뜩이는 눈빛으로 무슨 원금 보장한다는 듯이 속삭인다.
피식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촬영장, 자주 견학 가도 되죠?”
“물론이죠···!”
언제든지 오라며 들썩거리는 안 감독.
자신의 목소리가 커졌나 싶어 주변 눈치를 보는 안 감독.
“그럼 이제 확실히···.”
주억거리며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배우분들과 팀원들에게 인사를 해야겠네요.”
#
오랜만에 찾은 하람의 홍보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도착한 그곳엔 사뭇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팀원들 전원이 회의 테이블에 붙어 고심하고 있었고, 그 위로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펼쳐져 있다.
그렇다. 지금 보드게임 중이다.
“승결아 잠깐만. 지금 판이 꽤 크다.”
그것도 여덟 명이나 되는 팀 전체 저녁값 내기.
여긴 확실히 올 때마다 새롭다.
황당해하며 픽 하고 웃자, 판이 크다며 집중하고 있던 홍보팀장이 자신의 차례가 끝났는지 카드를 내려놓으며 내 쪽을 돌아본다.
그 과정에 옆자리 직원들이 ‘에헤이~’ 소릴 내며 자신들의 패를 숨기기 바빴다.
“안 본다, 시키들아.”
“그래놓고 저번에도 슬쩍 보셨잖아요.”
“누가 보이게 들고 있으래?”
콧방귀를 뀐 홍보팀장이 내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요즘 워낙 바빠서 이렇게라도 유흥을 즐기지 않으면 버티질 못해.”
다음 턴을 마친 직원도 대화에 동참한다.
“그래서, 영화는 언제 나와요?”
그의 물음에 살짝 놀랐다. ‘흉내자들’에 대해 직원들은 모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화라니.
어쩌면 ‘흉내자들’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직원이 덧붙여 말했다.
“천재 배우, 백승결의 할리우드 도전기!”
아, 그 얘기였나···.
“작명센스하고는. 영화는 한 단어 작명이 성공의 법칙이야. 그냥 할리우드, 이렇게 가야지.”
“오, 근데 그러면 뭔가 외국 영화 같잖아요.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는 어때요?”
“할리우드가 무슨 정글이냐···. 정글이지. 맞지. 괜찮은데, 그거?”
시선은 각자의 패에 고정한 채로 뇌 뺀 것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팀원들.
다시 자신의 차례가 된 홍보팀장이 카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걸, 누가 찍는데?”
다음 직원이 카드를 부채처럼 펼쳐 펄럭이며 너스레를 떤다.
“저 원래 꿈이 감독이었는데, 어떻게, 이제부터라도 제 꿈을 펼쳐봐요?”
“지금부터 펼치면 한 10년은 걸리겠네.”
“에이, 고작요? 더 걸릴 거 같은데. 한 아흔쯤?”
“아흔이래. 흐흐흐.”
“그리고 아흔이 아니라 백살에 돼도 일단 배우님이 싫다고 하실 것 같은데. 그쵸?”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연출에 재능이 막 기가 맥혀서 아주 대단할지도.”
팀원들의 조롱에 억울해하는 직원.
옆에서 홍보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게임엔 재능이 없는 게 확실한가 보다. 네가 꼴찌네.”
“윽······.”
게임이 끝났는지 카드를 한데 모아 정리하기 시작하는 직원들.
뭘 먹을지 고민하던 홍보팀장이 ‘한 판 더 할까요?’라고 묻는 직원의 물음에 고갤 돌려 날 올려다본다.
“승결 배우도 한 판 해볼래?”
“오, 재밌겠다. 같이 해요, 배우님.”
“어머, 나 할리우드 스타랑 보드게임 해보는 거야?”
“그럼 카드 돌립니다?”
흥분한 직원들을 보며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저 할 줄 몰라요.”
“원래 다 하면서 배우는 거야, 하면서.”
직원들의 성화에 결국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홍보팀장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재밌을 것 같다. 내심 나도 하고 싶었던 걸지도.
어릴 땐 배우로서.
커가면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배우로서.
그렇게 계속 미뤘던 평범한 일들을 조금씩 하는 기분이······.
꽤 좋다.
#
“···.”
“···.”
“···.”
“그리고···.”
꿀꺽.
직원들이 메기를 만난 송사리 떼처럼 파다닥 내 시선을 피한다.
내 패의 숫자가 이들 중 가장 작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러면 게임이 끝난다고 그랬지.’
빙그레 웃으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 27이요.”
“전 31······.”
“23. 자, 이제 승결이.”
“15입니다.”
게임이 끝났다. 아주 간단히, 내 승리로.
“아니, 어떻게 이렇게 금방······ 뭐 투시 능력 같은 것도 있어요?”
“아뇨, 근데 이게 내려놓는 카드를 다 기억하고 있으면 대충 여러분들이 뭘 들고 있을지 예상이 가니까요. 그리고 표정에 불안하다고 다 쓰여 있기도 했고요.”
“맞다. 이거 기억력과 연기력이 중요한 게임이었지······.”
“애초에 이길 수가 없었네.”
허탈하게 늘어지는 직원들을 보며 내가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보팀장이 고개를 내젓는다.
“안돼. 승부는 승부야. 승결이 넌 내일 와서 쏴.”
승부는 승부인데, 난 왜 굳이 내일 쏘지···?
결국, 두 번 얻어먹겠다는 소리였다.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린 직원들(-오늘 저녁을 내기로 한 직원을 제외하고)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우리 팀장님. 회계팀 가셨어도 잘하셨을 듯.”
“대신 그렇게 회사 흑자 늘려서 다 모니터 수리비로 나갈······.”
저녁값을 걱정하던 직원이 삐딱하게 말하다가 홍보팀장의 살기에 찔끔했다.
“아,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내가 요즘 모니터 말고 사람 머릴 해먹거든? 가만 있어 봐. 커피가···.”
“아, 맞다! 아까 기자님이 전화 달라고 하셨었는데! 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여기서 해, 여기서. 커피 세수하면서.”
다시금 떠들썩해지는 홍보팀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남 일인 양 웃고 있는데, 홍보팀장이 직원을 응징하고 내게 다가왔다.
“아 참, 백 배우. 잠깐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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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연극 상황, 계속 모니터링 하고 있어.”
팀장실 문을 닫고서 자리에 앉은 홍보팀장이 말문을 열었다.
“아주 난리던데. 반응이 너무 좋아. 영화로 보고 싶다는 사람들도 슬슬 나오고 있고.”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어느새 볼펜을 손에 쥐고 빙그르르 돌리는 홍보팀장.
그녀가 물었다.
“언제쯤 공개할 생각이야? ‘흉내자들’의 작가가 백승결이다··· 라는 거.”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안 감독님하고도 계속 얘기를 해왔어요. 일단 배우들과 스태프분들은 만나보려고요. 이제 곧 영화 촬영까지 본격적으로 시작할 텐데, 작품을 함께 만들어주는 분들한테까지 계속 숨기긴 좀 그래서요.”
“그렇지. 그건 네 뜻대로 하면 될 것 같아. 그런데···.”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아예 대중들한테까지 공개하는 건 좀 더 미루자.”
“왜요?”
“예상 못 한 변수가 있었어.”
“···?”
변수?
연극은 좀 전에 홍보팀장이 말했듯, 잘 되고 있다. 단순히 잘 되는 정도가 아니라 연극판을 뒤흔들 정도로 역대급이라는 평가도 심심치 않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어 홍보팀장이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의아한 마음에 갸우뚱하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원래 내 시나리오는 이거였거든. 연극이 잘 되면 사람들은 작가 대체 누군지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이 극에 달했을 때, 너라는 걸 공개하는 거. 모두가 궁금해하던 작가의 정체가 무려 백승결이다? 이거 그림 나오잖아.”
“근데, 생각보다 작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군요?”
대충 눈치를 채고 묻자, 그녀가 끄덕거렸다.
“맞아. 내가 간과한 거지. 드라마와는 다르게, 연극을 보면서 작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소설 원작 같은 게 있나 찾아보는 사람 정도가 다더라. 게다가 작가 이름조차 넣지 않으니 안정상 감독이 대본도 썼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사람들도 많고.”
“작가 이름이 없어서 감독이 쓴 줄 안다는 건 저도 예상 못 했네요.”
필명이라도 만들었어야 했나···.
물론 그렇게 했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다.
‘이게 내가 바라던 상황이기도 하고.’
작가가 누구인가.
그것에 사람들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쪽의 선예도가 옅어진다.
즉, 배우들이 받을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갖게 된다는 거다.
나는 그러길 원치 않았고, 그러니 오로지 작품의 내용, 그리고 배우들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지금이 나에겐 베스트였다.
비록 홍보팀에겐 아닐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네.”
난감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하던 홍보팀장이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작가를 좀 궁금해 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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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륵— 탁!
물이 쏟아지며 소즈(—대나무 물레방아)가 맑은 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아담한 정원을 바라보던 최영기 실장이 코를 훌쩍이며 몸을 비틀었다.
엉덩이에 깔려있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은 그가 다시 실내로 시선을 돌렸다.
네모반듯한 방.
몇 개 안 되지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소품들.
이 정도 고급 일식집은 처음이었던 그는, 방 안에 혼자 있음에도 괜스레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렸다.
적막 속에서 10여 분 정도 더 기다렸을까.
방문이 열리며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선다.
건너 건너 연락처를 받아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우, 실장님. 안녕하세요.”
호탕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남자.
“자자, 얼른 앉으세요. 하핫!”
그의 말대로 자리에 앉은 최영기 실장이 얼른 준비해 둔 명함을 꺼냈다.
“최영기 실장입니다.”
“아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유능하신 분이라고요.”
우렁찬 목소리로 칭찬을 덧붙인 남자도 품에서 지갑을 꺼낸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리는 명함.
그가 입꼬릴 끌어올리며 명함을 건넸다.
“아티스 엔터테인먼트, 우경철 본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