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9)
지금 딱 좋은 거 같은데 (2)
나는 텅 빈 민속촌을 느긋하게 걸었다.
아니, 거닐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뒷짐만 안 졌지 아주 느릿느릿, 양반처럼 주변을 돌아보고 있으니.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눈이 익은 곳에서 멈춰 섰다.
낮은 담장들 사이로 뻗어 나가던 구불진 흙길이 둥그런 돌다리로 이어진다.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졸졸졸 흐르는 냇물이 보였다.
‘여기쯤인가?’
어렸을 적 부모님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왔던 기억······ 은 당연히 아니었고.
굿픽쳐스가 보내온 촬영본. 그 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어린 고종의 기억이었다.
개똥이라 불리던 어린 고종은 이곳에서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마음껏 뛰어놀았다. 걱정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사람들이 그런 아이를 보며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아이는 이유를 몰랐다.
상갓집의 개.
아이는 그런 자의 자식이었다.
그런 아비의 이야길 알 리 없었던 아이는 냇가에서 한참을 뛰어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귀가해 어미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단잠을 청한다.
그 사이 달빛이 기울어 창호지에 스며들고, 은은하게 방을 밝히던 초마저 다 타들어 갔을 때쯤, 검은 그림자가 집으로 들어선다.
그림자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코를 찌르는 술 냄새를 풍기며 방을 기었다.
아이의 지척까지 다가온 그림자가 몸을 낮춰 나지막이 속삭인다.
[아들아, 잠시 악몽을 꾼다고 생각해라.]그 목소리는 아비의 것이 분명했지만, 두툼한 이불이 부족할 정도로 스산했고.
[그 악몽이 끝나고 나면 너는 이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을 테니.]동시에 구들장처럼 뜨거워, 두 계절을 동시에 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아들아. 너는 이 아비만 믿거라.]······그건, 아이가 자신의 혈통을 모르고, 사람들은 아이의 운명을 몰랐던 때의 이야기였다.
#
“이야~ 이 배우, 오늘따라 더 흥선군 같은걸?”
분장을 마치고 나선 이태관에게 박 대표가 껄껄거리며 다가왔다.
이에 이태관도 들고 있던 대본을 내리고 옷소매를 쓱 쓸었다.
“4개월을 매일같이 입었던 옷인데, 2주 안 입었다고 그새 어색하네요.”
점잖게 웃으며 답하고서 주변을 훑어보는 이태관.
누군가를 찾는 듯한 눈길에 박 대표가 얼른 근처에 있던 조감독을 불러세웠다.
“한철아.”
“어,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백승결 배우는?”
“아직 분장 중이래요. 촬영 예정 시간까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데, 아무래도 분장이 처음이다 보니 어울리는 그림 맞추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하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하지. 수염 모양이 얼굴형에 따라 어울리는 게 따로 있잖아? 3시간이나 일찍 와서 동선 체크하고 기다리더니 정작 분장 때문에 늦는구만.”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늘어놓은 박 대표가 이태관을 힐끔 확인한다.
백승결의 캐스팅이 탐탁지 않았다고 말했던 이태관이라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
물론 백승결을 찜찜해 했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그가 출연한 드라마의 애청자가 되지 않았나.
그렇게 박 대표가 대놓고 커버를 치자 이태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원래 처음 분장이 정말 힘들죠. 배우도, 분장팀도.”
“하하, 그치 그치.”
그의 우려와는 달리 정작 이태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근데, 그 친구. 3시간이나 일찍 와서 동선 체크를 했대요?”
“그렇다더라고. 동선 다 체크하고, 확인할 게 있다면서 여기 주변을 싹 둘러봤다네.”
주변을? 작게 중얼거린 이태관이 눈을 돌렸다.
한적한 민속촌의 풍경을 돌아보던 그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박 대표에게 물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촬영분을 보내 달라 했다면서요?”
“어? 어, 그랬지. 그저께 갑자기 연락이 와서 어린 고종 촬영분만 달라길래, 안 감독이랑 얘기해서 추려 보냈어.”
“······.”
대답을 들은 이태관이 입을 닫았다.
흐음, 하고 작은 숨을 내뱉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선 이채가 떠올랐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박 대표가 물었고.
이태관은 둥그렇게 말은 대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팅 때 워낙 연기력이 좋았어서 안 그래도 기대가 되는 촬영이었거든요. 근데 자꾸 뭘 더 보여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러면 실망도 큰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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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수염이 자라는 현장이었다.
이건 뭐 잭과 콩나무도 아니고, 말끔하던 턱에 이방처럼 얄상한 수염이 생겨나더니 어느새 제법 덥수룩해졌다.
그 광경을 넋 놓고 보는데, 분장팀 스태프 중 한 명이 수염 가닥을 덜어내다가 불쑥 물었다.
“근데 배우님 피부과 어디로 다니세요?”
“피부과요? 안 다니는데요.”
“안 다니신다고요? 피부가 이렇게나 좋은데? 아니, 연기 쉬셨을 때 택배 일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유튜브에서 본 것 같은데?”
연달아 빠르게 내뱉는 질문들에 순간 고갤 끄덕일 뻔했다.
내 턱에 모내기를 하고 있단 걸 깜빡했네. 농사를 망칠 뻔했어.
결국, 턱은 살짝 들어 올린 채로, 복화술처럼 입을 최대한 안 움직이며 답했다.
“마즈요. 그래씃죠.”
“하하, 입은 움직이셔도 돼요.”
“아, 넵.”
쿡쿡 웃은 스태프가 이어서 묻는다.
“그러면 막 뙤약볕에서 땀 흘리시고 그러셨을 거 아녜요.”
“그건 늘상 겪는 일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이렇지? 혹시 선크림은···.”
“아! 그건 며칠 전에 샀습니다.”
내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양손이 자유로웠다면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줬을 거다.
배우로서 그 정도 관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이강현이 추천해준 고가의 제품으로 샀지.
그러자 질문을 던진 스태프가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옆에서 정성스레 수염을 붙이던 다른 스태프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일 하면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역시 피부는 타고나는 거야.”
“그러니까. 난 그 난리를 쳐도 좁쌀같이 계속 올라오는데···. 지금까지 피부과에 쓴 돈만 천만 원은 넘는 듯.”
“와, 그럼 다른 데에 쓴 돈까지 합치면···읍! 퉤! 야, 수염을 왜 입에···.”
티격태격하는 두 분장팀 스태프 사이에서 나는 입꼬리만 슬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업에 집중한다.
나도 땅에 몸이 박힌 모아이 석상처럼 미동 없이 기다렸다.
대략 30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야, 길고 길었던 분장이 마무리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도 수고하셨어요.”
난생처음 수염을 붙여본 소감은 ‘연기가 제일 쉬웠어요’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건 늘 설레였는데, 오늘은 진짜 곤욕이었지.
이걸 촬영 때마다 했을 배우들을 생각하니, 어후······.
고개를 흔들며 미리 세팅한 머리에 넓은 갓을 썼다.
“진짜 고생하셨어요. 너무 오래 걸렸죠? 워낙 잘생기셔서 어울리는 수염 찾는 게 오히려 어렵더라고요.”
“그건 제가 잘못했네요.”
가볍게 능청을 떨며 덧붙여 물었다.
“다음에 사극을 또 하게 되면, 미리 수염을 길러두는 게 좋을까요?”
“그게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또 달라요. 본인 수염에 덧붙이면 자칫 눌어붙을 수도 있거든요.”
“그렇구나···.”
요즘 메이크업이나 분장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들을 계속 물어보고 있다.
이런 쪽도 미리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닥쳐서 아쉬운 대로 세팅하고 찍는 경우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사실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긴 한데······.
‘시간이 없네.’
예정보다 늦어진 시간에 얼른 고맙다는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자 분장팀 스태프들이 풉 하고 웃는다.
이유를 몰라 갸웃거리자 한 명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꼬릴 쭉 끌어올렸다.
“이제 환하게 웃으셔도 돼요.”
“아.”
장장 2시간 반 동안 경직되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붙여서 그런지 어색함은 덜했다.
뿌듯해하는 분장팀 스태프들에게 활짝 웃어 보이고서, 곧장 촬영장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둘러싼 촬영 차량들과 랙 케이스들. 그 오묘한 조합 속으로 들어선다.
나를 반겨주는 제작진과 인사부터 나누고서, 본 촬영이 진행될 정자(亭子)로 다가갔다.
모든 촬영이 그래왔지만, 특히 고대하던 순간이다.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태관 배우의 연기.
그 연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설레고.
그 연기와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에 떨린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더 열심히 준비하기도 했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버선발로 계단을 올랐다.
정자 위에는 최소한의 스태프만 있었다.
안원상 감독과 조감독. 카메라 감독, 음향 감독···.
그 너머로 탕건(宕巾)을 쓴 이태관 배우가 보였다.
고상한 한복을 걸치고 소품으로 준비된 탁상 앞에 앉아 있는 그.
숲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는 순간.
마치 책장이 펼쳐지듯, 자연스레 대본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드디어 가장 높은 곳에 앉게 되셨습니다. 감축, 또 감축드립니다.]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허리를 숙이는 그.
[아직 상감께서 세상을 굽어보시기에 나이가 다 차지 않으셨으니. 왕권이 바로 서고, 그 위에 오롯이 군림하실 수 있을 때까지. 제가 곁에서 살펴드리지요.]따뜻한 얼굴로 다가와 품을 벌리고.
[상감. 유림이 왜 서원 철폐를 반대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서원을 없애는 것은 곧 나라의 곳간을 채우는 일이고, 그것이 곧 왕권을 바로 세우는 길이니까요! 그러니 상감은 그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꽉 안은 채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제가 미우십니까?] [살기 위해 무뢰배처럼 살았습니다. 상갓집 개라고 불렸지요. 그렇게 치욕을 참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빨을 갈았고, 놈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먼저 물어뜯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렇게 상감을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미우십니까? 상감은 절 이해해주셔야지요. 상감만은 그래야 합니다!]······나의 아비.
내가 연기하진 않았으나, 어린 내가 들었을 대사들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떠올리며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코앞에 자리한 이태관 배우를 보았다.
고종의 기억과 감정들이 당장이라도 넘칠 듯 가득 채워졌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쏟아부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카메라의 붉은 빛이 나를 감싸지 않았으니.
‘조금만 있다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입가에 미소를 장착한 채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런데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태관 배우가 갑자기 손을 들어 안원상 감독을 찾았다.
“감독님, 지금 바로 촬영 시작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네? 어, 뭐···.”
갑작스러운 요청에 덩달아 당황한 안원상 감독. 그가 이태관 배우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그 끝엔 내가 있었다.
“가능··· 합니다. 해요.”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지금 딱 좋은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