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기억 (10)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불판엔 빗줄기가 약해진 바깥처럼, 타다 남은 고기만이 이따금 탁탁 튀었다.
정말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우경철과 죽이 맞아 어느 순간부터 가족을 등한시했다는 것.
그리고 유일하게 천광윤에게만 밝혔던(—사실 그가 눈치챈 거지만) 내가 연기를 못 하는 척했다는 것까지도.
긴 이이기를 들은 세 사람이 그만큼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이따금 그들의 얼굴에 분노나 안타까움, 슬픔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누가 연기자의 매니저와 피디 아니랄까 봐 금세 숨긴다.
어느새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온 김성운이 먼저 입을 뗀다.
“이 애길 우리한테 해주는 건······.”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번에 알아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이 얘기도 꺼내지 않았을 거란 걸.
“더는 안 참을 거라서요.”
내가 담담하게 답했다.
뭐, 지금 당장 달려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다.
대신 더 미친 짓을 해볼까 싶네.
“빚투 사건 때 모은 자료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네. 뭐, 우경철 한 사람이 타켓이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피해자가 나밖에 없을까. 또 다른 해별이가··· 또 다른 우경철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내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미친 짓을 함께해줄.
#
김주철과 둘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적막이었다.
동시에 시끄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데구르륵—.
김주철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달려온다는 거다.
내가 꾹 참고 있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저기요. 매니저님. 너무 눈치 보시는 거 아닙니까?”
“제, 제가요? 아, 아닌데. 휘이익~.”
“갑자기 휘파람을 분다고? 그것도 그렇게 어설프게?”
“크흠. 그, 노래 틀어드릴까요?”
“좋아. 주철이 취향 좀 볼까.”
김주철이 볼륨을 올렸다.
점점 커지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김미옥 작가와 함께 했던 악역의 OST였다.
노래를 듣자 내가 오태구였을 적의 기억들이 화수분처럼 샘솟는다.
“명곡이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예요.”
그러면서 핸들을 드럼 삼아 두드리며 흥얼거리는 김주철.
피식 피식 웃으며 충격적인 노래 실력에 웃다가, 내가 물었다.
“주철아, 너는 악역의 오태구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그랬지?”
“네. 엄청요. 제일 좋아하는 노래이기 이전에, 제일 좋아하는 영화예요.”
그래,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가 나는 지금까지 ‘재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도서관에서 읽었던 ‘서사의 나이테’란 책에선 그 이유를 ‘위로’라고 정의했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어딘가에 재미를 느낀다는 건, 위로받는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악역’이라는 드라마가 멀티온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고서.
김주철뿐만아니라 꽤 많은 이들이 그 드라마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며 감사인사를 전해왔었다.
‘흉내자들’의 제작진과 배우들도 대본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며 안 감독에게 꼭 작가님께 전해달라고 했다지.
그리고 크리스 감독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 있었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이 만들고 보니 자신에게 위로 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이번엔, 나도 그럴 수 있으려나.”
이에 김주철이 입을 앙다물고 머리통만한 주먹을 꽉 쥐어 보인다.
“분명히요.”
제 딴엔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한 응원이었겠지만, 모습이 퍽 위협적이라 위로를 못 받으면 큰일 날 것만 같다.
쿡쿡 웃다가 녀석에게 답했다.
“고맙다. 무서워서라도 위로받아야겠어.”
“···?”
그렇게 워커힐을 앞을 지나친 차량이 어느새 집 근처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강현이 사는 전원주택을 지나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빌라.
슬슬 내려야 하기에 가방을 챙겼다.
그때 옆에서 김주철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오늘 형 얘기 듣고요.”
“···?”
“전 더 창피해졌어요.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이런 사람한테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지 말라고 했었구나······.”
“그러게. 좀 건방지긴 했네, 네가.”
흐흐 웃은 김주철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형을 더 존경하게 됐습니다.”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치려다가 훅 들어온 말에 허 하고 말문이 막혔다.
“무슨 존경 씩이나······.”
“진짜예요. 제가 형 무지무지 존경함돠!”
멋쩍은지 말투를 이상하게 바꾸며 고백(?)하는 김주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방을 어깨에 멨다.
“어후, 오글거려서 안 되겠다. 나 갈게. 얼른 사라져.”
“흐흐. 넵, 들어가세요!”
손을 휘적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미니 밴이 빙 돌아 주차장을 나갈 때까지 녀석을 배웅하다가 터벅터벅 빌라 안으로 들어간다.
존경받는 사람······.
분명 듣기 좋은 말인데.
왠지 염치가 없단 말이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한참을 곱씹다가 깨달았다.
엘베를 안 눌렀네.
#
드라마 악역에서 오태구가 갑작스레 엄마와 동생을 잃고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가족도 지키지 못한 놈에겐 그 어떤 영광도 사치라고.
그 길로 조직을 때려치고, 스스로 만든 고행길에 몸을 올렸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해석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 과정에서 나를 겹쳐보았다.
가족을 지키지 못해 연기를 그만두고, 전혀 원치 않았던 일을 하며 하고픈 것들을 꾹꾹 눌러야 했던 복귀 전의 나 말이다.
여전히 나에겐 죄책감이 남아 있다.
누군가는 네 잘못이 아니다, 안쓰러워할 수도.
누군가는 바보 같다며 손가락질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들의 경험이 나와 다르기 때문.
······나는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내 죄를 사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네.’
작게 웃었다.
스스로에게 던진 나름의 농담이었고.
저 위, 어디선가 들을지도 모를 아버지에게 건넨 조소였다.
그런 다소 비뚜름한 생각을 이어가며 목욕을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쪼르륵——.
물 한잔을 따라 자연스레 식탁으로 향한다.
자리에 앉자 전원도 끄지 않고 덮어둔 노트북과 널브러진 프린트들이 나를 반겼다.
내가 최근에 떠올려 끄적거렸거나, 정리해둔 소재들이 가득하다.
이건, 크리스 감독의 복잡한 표정을 보며 떠올렸던, 파코스와 비슷한 한 남자의 이야기.
저건, 모 재단 건물 벽에 걸려있던 낡은 악보를 보며 떠올린 귀족과 집사의 시간을 초월한 우정.
“새삼스레 신기하네.”
예전엔 이 위에 온갖 대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읽으며 내게 어울리는, 끌리는 역할과 작품을 찾으려고 노력했었지.
물론 여전히 대본은 많이 들어온다.
이제는 여기에 산더미처럼 다섯 번을 쌓아도 모자랄 만큼.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하지만 더 이상 거기서 흥미를 못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찾지 않고, 만들면 되니까.’
이제는 내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글을 구현하고, 그 속에서 연기하고 싶었다.
스윽—.
나는 자리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서 노트북을 펼친다.
어제 급하게 적어 내려갔던 글이 남아 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하지만 다듬어진다면, 우경철 같은 놈들에겐 그 어떤 비수보다 날카로워질.
시놉시스.
#
지구 반대편에선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 하고.
부루마블의 전신인 모노폴리가 보드게임으로 처음 나온 1935년.
그때의 한반도.
얼굴을 게이샤마냥 새하얗게 분칠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가는 미인(美人)이 단상 위에서 분주한 어린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피터팬이 싫다.⌟
⌜예? 뭐라구요, 나으리?⌟
그의 곁을 보좌하던 등 굽은 사내가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그러나 미인, 윤석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할 말을 이어간다.
⌜저 아이가 얼마였지?⌟
그의 시선을 따라 눈알을 굴린 사내가 얼른 답했다.
⌜복동이 말씀이십니까? 60원 정도 되었읍죠?⌟
⌜저 아인.⌟
⌜여아라 20원 더 받았습니다.⌟
윤석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기억력에 뿌듯해하는 사내.
그러거나 말거나, 윤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내가 지금 저 아이들한테 대체 얼마를 쓴 거야. 그것뿐인가? 먹여줘, 재워줘··· 그것까지 다 하면 그게 다 얼마겠어. 이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
사내는 자신의 주인, 윤석이 무슨 소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에게 섣불리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난 이렇게 돈을 써서 아이들을 사들였는데, 녀석은 창문으로 들어가 납치를 해버린단 말이지. 근데 사람들은 그 녹적(綠賊)이 다들 착한 줄 알아.⌟
⌜그··· 송구한데, 대체 피터 팬이 무엇입니까?⌟
이에 윤석이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는다.
⌜있어. 나보다 더한 놈.⌟
그리고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해가 진다. 슬슬 장사 시작하자.⌟
윤석이 자신의 성, 거대한 천막을 훑는다.
자신의 왕국이자.
식민지.
그리고 이곳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들어오는 제국시민들의 행렬.
그는 그곳으로 섞여 들어갔다.
⌜여기 서커스가 대단하다던데?⌟
⌜조선에 와서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어 심심했는데, 잘 됐지 뭐야.⌟
⌜우리 유타로도 좋아할 것 같더라고. 오늘 보고 괜찮으면, 다음엔 아이들이랑 다 같이 오려고.⌟
⌜그거 좋겠네. 근데 개화가 늦은 조선인들의 서커스 같은 게 과연 우리에게 재밌을까?⌟
서커스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여인들이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글쎄요. 여긴 다르다더라고요. 일단 여기 단장이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조선인이고.⌟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서,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다가오는 성별을 알 수 없는 누군가.
⌜어린아이를 사들여서 아주 혹독하게 가르쳤거든. 못 하면 패고, 죽으면 묻고, 부족하면 또 사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기괴하고도 서늘한 목소리에 여인들이 뒷걸음질을 친다. 아니, 정확히는 서커스 안쪽 방향이니 앞걸음질일 지도.
⌜누, 누구세요?⌟
⌜어서 오세요, 제국 시민 여러분······.⌟
윤석이 사교모임에 참석한 영국 신사의 인사처럼 팔을 크게 휘둘러 배꼽에 얹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뒤, 살짝 고개만 올리며 희번뜩 웃었다.
#
“조선 유랑극단입니다.”
어떤 이야기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또 어떤 이야기는 악역에 의해 탄생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가 그랬다.
나는 악역인 윤석의 마지막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활자들이 관객인 양 광기에 어린 눈으로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꼬릴 내린다.
“······.”
확실히 나는 흉내자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 속에서 연기를 할 때가 너무 즐겁다.
그 세상을 내가 만들기까지 하니 더욱 즐겁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흉내자들’처럼. 그 어떤 타인의 시놉이나 대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이끌림.
그렇게, 내 다음 작품이 결정되었다.
연출자로서 첫 번째 이야기이자.
작가로서는 두 번째 작품.
그리고, 배우로서는 차기작이 될.
[조선유랑극단>지켜지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