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기억 (13)
“아깐 모든 분들께 인사하느라 얘길 못 했네요. 오랜만이에요.”
어쩐지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배우들이 내 인사에 화답하며 하나둘 말문을 연다.
“어··· 선배라고 하니까 되게 이상하네. 그 귀여웠던 애가 이렇게나 듬직해져 와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 우리가 할리우드 스타한테 선배 소릴 듣는 게 그냥 이상한 거 아닐까?”
“그것도 맞네. 커리어만 놓고 따지면 누가 선배가 누가 후배야, 흐흐.”
어색하게 웃던 그들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잇는다.
“안 그래도 네가 우릴 기억할까 그거 얘기하고 있었는데.”
“기전 선배가 우릴 기억할 거라는 거야. 근데 그 말이 진짜 맞았네.”
“룸6인가 그거 못 봤어? 기억력이 엄청나다잖아.”
그런 그들을 보며 슬쩍 입꼬릴 올렸다.
설령, 기억력이 안 좋았더라도.
나는 이들을 기억했을 거다.
이건 확실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왜냐면 이들은······.
그 시절 내 유일한 적이었으니까.
정말 강력한 적이었지.
아버지보다도, 우경철보다도 더한 적.
내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연기 못하는 연기를 펼칠 때.
‘대본을 못 외웠다고 하는 건 지난번에 써먹었으니, 오늘은 대사를 이상하게 말하자. 우리 반 병국이가 이빨 빠졌을 때 냈던 소리가 아마 이런 느낌······.’
바로 옆에서 혼신을 다해 작품을 완성하려는 이들의 열정은.
‘감독님,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아, 뭔가 아쉽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린 나에게, 친구가 가진 게임기보다도 더 빛나는 것이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 바로 ‘흉내자들’.
그러니 이 작품은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 맞다.
단순히 죄책감이 아니다.
이들이어야 했다.
영화판 흉내자들에서도 다시 한번 주축이 되어줄.
마치 대본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 배우들이어야만 했다.
물론······.
‘이 배우들은 작품 속 배우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진 않을 거다.’
다를 거다. 완성될 거다.
그리고 성공할 거다.
나는 모두와 인사를 하고서, 마침내 양기전 앞으로 다가갔다.
“잘 부탁드려요.”
머뭇거리던 양기전이 내게 말한다.
“내가··· 아니,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벙긋거린다.
그러다 입안에 맴도는 말을 끝내 내뱉지 못하고 삼키며 덧붙였다.
“아닙니다. 그냥······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 모습에서 최태주가 보인다.
그 사실에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허리가 절로 굽었다.
그 순간, 내 어깨에 올려져 있던 돌 하나가 툭 하고 떨어진다.
어린 나이에 생겨나 늘 내 곁에서 잊지 말아라 소리치던, 내 마음의 짐.
죄책감.
고작 내가 자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거 평생 술안주 감인데?’, ‘인생 최대 업적 달성인가?’ 라는 말들과 함께 헤벌쭉 웃는 그들을 보며.
비로소 나는 멋대로 짐작해 본다.
내가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고서야, 피해를 본 이들에게 진정으로 사과를 건넬 수 있었듯이.
이제는 이들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진 않았을까? 하고.
······그냥 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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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렇게 갈대밭에서 소리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는 꽤나 후련한 마음으로 안 감독의 사무실을 나왔다.
이제 배우들이 내가 작가라는 걸 안다.
또 하나의 화살을 시위에 걸어 쏘아 보낸 느낌이었다.
배우로서는 마치 촬영 종료를 외친 기분이랄까.
아직 내 역할이 모두 끝난 건 아니지만.
그리고 종종 촬영장에 놀러 가겠다는 얘기도 하고 나왔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아무래도······.
역시, 새로 쓰기 시작한 대본을 작품화 하는 것.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그 입봉.
그것을 위해 나는 집 앞 카페를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린다.
사락,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앞에서 들려오길 20여 분.
마침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한이연 감독이 대본을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
불과 며칠 전, 안 감독 사무실에서 나를 본 배우들 표정이 딱 이랬는데 말이지.
동그란 눈. 멍한 표정.
최근 고하윤과 함께 ‘굿타임’이라는 영화를 끝마치고, 한창 휴식기인 그녀가 종이 뭉치를 손에 쥔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휴식기의 온순한 눈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이거······.”
그녀가 벌컥 내게 말한다.
“내가 할게! 내가 하게 해줘.”
갑작스러운 구애에 솔직히 기분이 좋아진다.
한이연 감독은 대부분의 감독들이 그렇듯,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내 새끼라고까지 하면서 자신의 글을 아끼는, 감독이자 참된 작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의 글을 연출하고 싶어 한다는 건, 그야말로 극찬.
슬쩍 입꼬릴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죄송하다고. 이미 감독은 정해져 있다고.
잠시 황망해졌던 한이연 감독의 표정이 이내, 궁금증으로 물든다.
“누구셔? 누가 이거 맡기로 했어?”
마치 내 사탕 누가 뺏어갔냐는 듯 묻는 한이연 감독에 내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저요.”
간단한 대답과.
“응? 뭐라고?”
그렇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이연 감독.
복잡한 표정을 보며 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연출도 해보려고요.”
그러고서 슬쩍 한이연 감독을 살핀다.
나에게 배우, 작가, 감독의 경계가 희미해졌다고 해서 남들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직업의 경계는 평생을 쌓아 올린 장벽처럼 불가침의 성역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런 말은 꽤나 신중해질 수밖에.
물론 한이연 감독도 영화과 출신의 성골이 아니다.
카메라보다 계산기가, 편집 프로그램보다 엑셀이 더 친숙했던 사무직이 아니었나.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이연 감독은 내가 감독이 될 상이냐는 질문에 큰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다만 충격은 받았는지 한참 동안 허허 거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삼키며 패배를 시인한다.
“뺏길만 했네. 작가랑 감독이 자웅동체인데 어떻게 이겨.”
자웅동체··· 뭔가 맞는 말이긴 한데······.
“와, 이거 너무 욕심 났는데. 내 글 아닌 거에 이렇게 아쉬운 건 또 오랜만이네.”
“감사해요.”
“작품이 좋은 건데 뭘. 그나저나, 나 이거 발이라도 담구고 싶은데··· 어떻게 조감독 해줄까, 내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천만 감독을 조감독으로 쓴다라.
그 무슨 택배 배달을 우라칸으로 하는 소리란 말인가.
“싫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싫으면 이건 어때.”
이번엔 또 무슨 소릴 하려고 그러나 싶어 지켜보자 그녀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까메오.”
내가 감독을 하겠다고 했더니, 감독이 배우를 하겠단다.
“연기 좀··· 하세요?”
“야, 하!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내가 그래도 명색이 감독인데~.”
코웃음을 치며 으스대는 한이연 감독에 오디션 날짜 나오면 연락 드리겠다며 웃었다.
함께 낄낄대며 웃던 한이연 감독이 대본 보는 사이 얼음이 녹아 묽어진 커피를 마시며 묻는다.
“그럼 이제 백 감독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제부터 너도 나 선배라고 불러. 한 선배. 좋은데?”
“아직 크랭크인도 안 들어갔는걸요. 그래서 말인데······.”
콧잔등을 긁적이며 업계 선배에게 물었다.
“이제 뭘 해야 되죠?”
그러자 한이연 감독이 씩 웃는다.
“내가 하는 거 봤잖아.”
“···아?”
잠시 갸우뚱하다가 이내 퍼뜩 떠오르는 기억에 입을 벌렸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술자리. 그곳에서 대본을 꺼내 굿픽처스 박 대표에게 보여주었던 한이연 감독의 모습 말이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한이연 감독이 끄덕거리며 말한다.
“쩐주 모아줄 사람을 꼬셔야지.”
입봉을 위한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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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연 감독에게 대본을 보여준 건 내 입장에선 나름대로의 교차검증이기도 했다.
나는 내 감각을 믿지만, 그것만 믿고 나아가는 건 함께 이 영화를 만들 이들에겐 너무 무책임한 방식일 수 있으니까.
동시에 이런 글을 썼노라 자랑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 각본가들을 만나며 내 작품을 그런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기 때문.
맘 같아선 크리스 감독한테도 보여주고 싶지만,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이제 한이연 선배의 말처럼, 입봉을 하기 위해 내가 택한 다음 행선지는 투자금이 오가는 허브.
속된말로 돈이 나올 구석이었다.
[굿픽처스]‘흉내자들’의 경우엔 하선경 대표가 이 일을 대신 해주었지만, 감독까지 겸하기로 한 이상 이젠 이런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구, 전화 받고 깜짝 놀랐어. 할리우드 스타의 깜짝 방문이라니.”
굿픽처스 박 대표의 환대에 내가 꾸벅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서랍에서 웬 초콜릿을 한 움큼 가져온 그가 무슨 가게 매대처럼 테이블 위에 깐다.
박 대표의 딸(—박혜진)이 여행 다녀오면서 사온 초콜릿이었다.
딸한테 선물 받은 게 오랜만이라 아주 아껴서 먹는다고.
“근데 제가 먹으면 안 되죠.”
“그걸 말이라고. 백 배우는 먹어도 돼. 자네가 먹었다고 하면 혜진이가 무지 좋아할 걸?”
으쓱거리는 박 대표에 픽 하고 웃으며 물었다.
“따님은 잘 지내죠?”
“혜진이? 아후, 말도 마라. 걔가 네 팬카페에서 이거야.”
엄지를 치켜들며 박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한테 너에 대해 계속 묻는다. 한국은 언제 들어오냐, 차기작 소식은 없냐. 근데 뭐, 이젠 나도 아는 게 있어야지. 아, 그렇다고 예전엔 다 얘기해줬다는 건 아니다?”
지레 뜨끔해 하며 덧붙이는 박 대표에 내가 끄덕이며 답했다.
“알죠.”
“아무튼, 아주 난리야. 당죽막 잘되면서 텐션이 더 올라가지고··· 딸 자식 키워 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래도, 행복하시죠?”
장난스러운 내 물음에 그가 스윽 입꼬릴 올린다.
“어때 보여?”
“행복해 보이세요.”
“흐흐, 나중에 백 배우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그 뭐냐, 백 배우 비혼주의거나 아이 생각 없는 건 아니잖아?”
“어······.”
이 순간, 그의 질문에 멈칫하게 되는 건.
망설여지는 건······.
내가 김주철의 존경한다는 말에 묘한 감정이 들었던 그때와 비슷했다.
내가, 자격이 있나?
“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하긴, 아직 젊으니까.”
그럴만하다는 듯 주억거리는 박 대표를 보다가, 따끔거리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대표실 창문에 붙어있던 그림자들이 무슨 송사리 떼처럼 슈슈슉 사라진다.
그 모습을 함께 본 박 대표가 혀를 찼다.
“으이그, 네가 이해해라. 다들 네 엄청난 팬이거든.”
“저야 감사하죠. 근데 직원분들이 훨씬 많아진 것 같아요.”
“배는 늘었지. 다 네 덕분이야.”
“그게 왜요. 작품 잘 보는 대표님 덕이죠.”
“오호? 뭐지 이 사회생활 멘트는? 이러니 오늘 무슨 일로 왔는지가 더 궁금해지는데?”
이제 본론을 꺼낼 시간이었다.
‘감독님들이 다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굿픽처스는 나와 함께 작업도 많이 했고, 하람과도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영화사이지만.
어디까지나 거래처의 개념이었다.
그러니 하선경 대표에게 내 글을 연극으로 만들어달라 찾아갔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할리우드에서 온갖 대본을 다 받고 있을 텐데, 이 누추한 곳에서 작품을 찾으러 온 건 아닐 테고.”
박 대표의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오늘은 가지고 왔어요. 작품.”
내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