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기억 (14)
그가 살짝 놀란 눈으로 입술을 적시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허어, 그건 꽤 흥미가 생기는데? 어떤 글인데? 대본도 가져온 거야?”
“시놉이랑 대본 초고요.”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어 건네자 박 대표가 재빠르게 받아든다.
그는 확실히 사업가였다.
먼저 시놉부터 읽었던 한이연 감독과는 다르게, 대본에 적힌 이름부터 쭉 확인한다.
물론 거기선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겠지만.
“누가 쓴 글인데?”
“저요.”
“···?”
홱 하고 고갤 들어 올리는 굿픽처스 박 대표.
그를 보며 하하 웃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모든 전말을 이야기하려면 김미옥 작가와 함께한 ‘악역’ 때로 돌아가야 했지만.
나름대로 타협해서 간략하게 전달을 마쳤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 대표가 경악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당 떨어진다며 초콜릿을 까먹는다.
쬽, 쬽—.
입안에 들어간 초콜릿을 무자비하게 녹여버린 박 대표가 꿀꺽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져온 이 대본뿐만 아니라, 우리가 작업 준비 중인 ‘흉내자들’도······.”
그가 볼륨을 확 줄이며 속삭인다.
“다, 백 배우가 썼다고?”
“네.”
“허어···!”
박 대표가 탄식하며 먼 산을 바라보더니 다시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끝을 올렸다.
“난 하선경 대표가 쓴 줄?”
잠자코 그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네? 정말요?”
“정말로. 난 하선경 대표가 백 배우 성공을 등에 업고 느지막하게 숨겨왔던 꿈을 이루려고 하는구나 싶었지? 그래서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완전 헛다리 짚었네?”
글은 내가 아니라 이 양반이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기발한 추측에 한참 동안 웃자, 그도 허허 웃다가 대본을 집어 들며 물었다.
“아무튼 그래서··· 이게 ‘흉내자들’ 다음으로 쓴 대본이다?”
“네.”
“영화로 만들고 싶다?”
“네.”
“각본뿐만 아니라 이걸로 연출 입봉까지 하겠다?”
“그렇죠.”
“허어··· 욕심 보게. 그러면 투자 문제가······.”
박 대표가 이마를 벅벅 긁으며 미간을 구긴다.
“전작이 될 흉내자들이 잘 터지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아니지, 그래도 부족해. 이거 시놉만 봐도 제작비가 상당할 것 같단 말이지. 세트장부터가······.”
고심이 깊어져 가는 박 대표.
나는 저 늪에서 박 대표를 건져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번엔 저도 출연할 거예요.”
“일단 시대 배경부터가 일제라······ 잠깐, 뭐라고? 출연할 거라고?”
“네.”
“배우로?”
내가 고갤 움직였고.
박 대표의 눈알이 또르륵 구른다.
이윽고, 계산이 끝났다.
“어유,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백승결의 차기작? 그러면 하지. 무조건하지. 온 김에 도장 찍자, 백 배우. 아니, 백 작가··· 백 감독? 어떻게, 뭐라고 불러줄까?”
#
쩐주들을 모아줄 브로커를 구했다.
그 다음은 소속사 대표와의 면담이었다.
하선경 대표는 작가와 연출, 그리고 배우까지 맡겠다는 내 말에 어처구니 없어하면서도 ‘어쩌면···.’이라고 중얼거리며 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대본을 읽더니 휴가는 끝났다며 완성된 대본을 가져오라 독촉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 일상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원래부터 내게 주어진 휴가의 대부분을 글 쓰는데에 쏟고 있었으니.
중간에 영화 ‘흉내자들’ 비공개 대본 리딩에 참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본 작업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본이 완성되었다.
대략적인 스토리와 장면들에 그쳤던 초고가 비로소 완벽히 정리된 스토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본이 완성되자마자 나는 하선경 대표보다도 먼저 다른 이를 만났다.
“여기서 뵙게 되니 색다르네요. 여행은 즐거우세요?”
“무척이나.”
마침 연락이 온 크리스 감독.
그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네의 연극이 즐거운 여행에 일조했지. 아주 잘 봤네. 자네의 연극이, 내가 가졌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어.”
“어떤 생각을요?”
“자네는 글을 써야 한다는 거. 아니, 글도 써야 한다는 거.”
그러면서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는 크리스 감독.
그가 심호흡을 깊게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미 영어로 번역된 대본을 보면서부터 막 화가 나더라고. 왜 이걸 내게 먼저 가져오지 않았나!”
“극찬이네요.”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야. 칭찬 같은 게 아니라고. 아쉬워 죽겠어. 이 작품을 내게 가져왔다면 아마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게 되었을 거야. 그리고 영화화도 할리우드에서 했겠지. 주인공은 나이를 고려해서 디카프리오나 브래드 피트가 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가 안타까운 얼굴로 가정한다.
더는 그릴 수 없는 청사진이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이 작품은 이곳에서 해야했어요.”
“그래. 자네가 말한 그 영화 감독은 연극계를 위해서 자네 작품을 선택했다고 그랬지. 근데, 자넨 왜 그런 건가? 연극은 해본 적도 없다면서 무슨 연극계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분들한테 있어서요. 각별한 애정이. 그나저나, 따님은요?”
“오늘은 혼자 여행하라고 했어. 자네 만난다고 하면 분명 따라올 거라.”
“걱정 안 되세요?”
“내가? 아니면 내 딸이?”
하긴, 한국에서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이 무슨 걱정이겠냐마는.
“그리고 아무리 딸이라 하더라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 감독이 손깍지를 낀다.
“어디, 차기작에 대한 얘길 들어볼까.”
“······차기작.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조금 아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잘 알고 있을 거야. 어디를 갈 땐, 그곳의 역사부터 대략적으로 살펴보거든.”
참 크리스 감독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품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본이 완성되긴 했지만, 이것까지 영어로 번역해 줄 수는 없으니.
그럼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설명할 내용도 많았고, 인물 간의 관계도 복잡했다.
하지만 크리스 감독이 누군가.
그는 머릿속에 지도라도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흡수했다.
그의 눈앞엔 이미 ‘조선유랑극단’이라는 영화가 영상화되어 그려졌을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이야기군.”
그만큼 완벽하게 내 작품을 이해하고 있었다.
“맞아요.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과는 느낌이 다르죠.”
“그러게. 완전히 정 반대야. 은유나 비유 따윈 없이 오로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달려가는 이야기. 그 대상마저도 명확하군. 아이를 버리는 부모들, 그런 아이를 상품으로, 화폐로 찍어내는 무리들, 그리고 그 모든 걸 선동하는······ 대중.”
거기까지 내다본 크리스 감독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토록 궁금한데, 묻기 두려운 질문은 또 처음이군.”
“···?”
“이것도 자네의 이야기인가?”
그의 물음에 나는 하하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내리며 끄덕였다.
숨기고 싶은 생각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 작품을 쓰면서부터, 나는 진짜 나를 대중에게 보여줄 준비가 끝났으니까.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확실히 편향되지만. 그렇기에 날카롭군. 이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꽤나 논란이 일 거야.”
나는 다시 한번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다.
이에 크리스 감독이 덧붙여 말한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 같네. 예술적이라고. 예술은 늘 소수의 현실과 맞닿아있거든.”
“혹은 소수라고 착각하거나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은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곱씹는다.
“정말 흥미로운 작품이야. 개봉한다면 만사 다 재치고 보러 가고 싶을 만큼.”
호록—.
“하지만 동시에, 나는 욕심조차 낼 수 없는 작품이군. 만약 ‘흉내자들’을 내게 주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작품의 연출을 맡았겠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없군. 자네만 할 수 있어. 자네의 이야기니까.”
내가 연출까지 맡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기보단, 납득해버리는 크리스 감독.
그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혹시, 이 다음 것도 있나?”
“아뇨.”
“아쉽군.”
쩝하고 입을 다시며 그가 말한다.
“앞으로 무수히 많이 떠오를 거야.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그러다 문득 더는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올 거고. 그때가 되면······.”
말끝을 흐린 그가 덧붙였다.
“그다음엔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해보게.”
담담히 말하는 크리스 감독.
그의 말이 마치 복수가 끝나면 자신의 삶을 찾아가라는 조언처럼 들렸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
“그 두 가지가 다른가요?”
“다르지. 자네 말처럼 작가는 경험을 벗어나지 못해. 하지만 그렇기에 계속 벗어나고 싶어 하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쓰고 싶어 하는 욕망을 계속 안고 있는 거야.”
“욕망이요?”
“내겐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이 그랬어. 자네 덕분에 깨달았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늘 그곳은 사막이라 외로웠노라고. 그렇게 고백하고 싶었던 거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어렵네요.”
“그렇지 않아. 질문은 단순해. 내 가장 큰 욕망은 무엇인가.”
······가장 큰 욕망?
그 질문을 던지자마자 툭 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역시나, 연기.
그래. 내겐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복귀한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사무치듯 그리웠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큰 욕망이라기엔 부족하다.
그 연기마저도 포기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 연기마저도 졌었다.
그러니, 내가 진정 바라는 욕망은 이것이겠지.
가족.
그러니까···.
화목한, 가족.
#
‘흉내자들’의 크랭크인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대본도 다 썼겠다, 자주 안 감독을 찾아 연출자의 시선을 쫓았다.
동시에 새로 쓴 ‘조선유랑극단’에 대입해보며 나만의 청사진을 그린다.
그리고 남는 시간엔······.
[그날은 오전부터 비가 내렸고, 아버지는 우경철 본부장과 함께 골프 라운딩이 취소되었다며—.]기억을 떠올리며 노트북을 두드렸다.
당연히 새로운 작품은 아니었다.
그저 내 기억 속 내용 그대로를 옮기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10살부터 15살.
힘겨웠던 5년의 시간이 모두 적힌 프린트를 봉투 속에 넣었다.
그다음 찾은 곳은 집 앞 카페.
그곳엔 내 기억을 요청한 이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때처럼’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하는 그.
“오셨습니까.”
과거 ‘대원군’의 내부시사회를 보고 나를 스카웃 하기 위해 찾아왔던.
아티스 엔터의 스카웃 담당.
아니, 담당이었던 최기석 실장.
그가 수척해진 얼굴로 옅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