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2)
천만 아역의 근황 (1)
상쾌한 아침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몸속에서 사라진 것 같은.
게다가 오늘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택배 일을 쉬는 날.
가뿐하게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내친김에 평소보다 5km를 더 뛰었는데도 오히려 몸이 더 가볍다.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제야 깨달았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존재는 나를 꾸준히 짓누르고 있었다는 걸.
낳아준 은혜도 모르는 너무 매정한 아들인 걸까?
땀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미지근한 물에 몸을 씻었다.
‘출출한데.’
작은 그릇을 꺼냈다가 이내 큰 그릇으로 바꾸고, 우유와 시리얼을 붓는다.
수저까지 챙겨 방으로 들어가 티비를 튼다.
탁, 탁.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색바랜 화면.
바꾸긴 해야겠는데···.
시리얼을 한입 가득 물고서 핸드폰으로 더듬더듬 티비를 검색해본다.
‘화면이 조금 크면 좋겠는데 말이지.’
원하는 상품을 찾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스마트폰을 바꾼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심한 기계치라서.
어쨌든, 개인적인 욕심을 한 스푼 넣자 가격대가 껑충 뛴다.
내 심장도 뛰었다. 와씨, 너무 비싸잖아 이건.
“근데 이거 진짜 영화관 안 부럽겠네.”
쩝, 입맛을 다시며 가격대를 내렸다.
절충의 시간. 적당해 보이는 티비를 골라 상품설명을 읽어내려가는 찰나였다.
—자, 오늘은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자시죠. 천광윤 배우님을 모시고 곧 개봉할 영화, ‘숨죽인 달’에 대해 이야기를······.
자연스레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내려간다. 반대로 눈은 올라간다. 여전히 팝콘처럼 튀겨대는 티비 화면으로.
그리 크진 않지만 깊은 눈, 세월을 멋스럽게 드러낸 주름. 야만스럽게 넘긴 중단발머리와 단정하게 차려입은 와이셔츠의 아이러니한 조화.
천광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배우였다.
그리고 나에겐······.
‘승결아, 너 연기 대체 누구한테 배웠니? 기가 막힌다, 진짜. 네 연기에 내가 다 기죽는다니까? 하핫!’
한 프레임에 함께 담겼던, 영광스러웠던 기억의 조각이지.
‘해별이네’에서 악역으로 나왔던 그는 이미 당시에도 대배우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가 날 보며 호탕하게 웃던 순간이 선명하다.
물론 이젠 시간에 휩쓸려 떠내려간 옛이야기.
다시 수저를 뜨며 천광윤 배우가 출연하는 새 영화 소개를 들었다.
“재밌겠네.”
보러 가야지.
사람이 적은 조조로. 조용하게, 혼자.
아침마다 뛰는 것과 출근을 제외하곤 좀처럼 현관문을 여는 일이 없는 나에게, 영화관은 몇 안 되는 나들이 장소였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짧았던 아역 생활을 끝내고, 영화는 커녕 티비조차 거들떠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아쉬움은 남았을지언정, 내 선택을 후회하진 않기로 했으니.
—아 참, 이번 영화에 천광윤 배우님까지도 촬영이 쉽지 않았던 씬이 있으시다고요?
—맞아요. 지난겨울에 빙판 위에서 찍은 추격씬이었는데, 어후. 저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무지 고생했죠.
—저도 추위 엄청 타는데. 생각만 해도 힘겹네요. 그래서 더욱 좋은 장면을 담을 수 있었겠지만요.
—하하, 그렇죠.
—어, 얘길 나누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그러면 배우님께서 그동안 해오신 모든 연기 중에 가장 어려웠던 연기는 뭐가 있을까요?
오, 질문 좋다. 나도 궁금한걸?
천광윤 배우가 새치마저 멋스러운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민한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 여러 배역이나 씬들이 스치는데, 그래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이거겠네요. 연기 못하는 연기.
그의 대답에 진행자가 갸우뚱했다.
—어? 그런 연기를 하신 적 있으세요?
—극단 생활 할 때요. 그게 일종의 신고식이었거든요. 워낙 어려우니까 신입들 기죽이기 용으로 선배들이 시켰었죠.
—저는 연기에 문외한이라,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감이 잘 안 오네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쉬워요. 이제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고 여차하면 뛸 수도 있는 우리가, 걸음마를 막 시작할 때의 걸음걸이로 돌아가야 한다고.
진행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벌린다.
—어···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어렵겠죠? 정말 어려워요. 그럴 수밖에 없죠.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건······.
잠시 뜸을 들이고, 그가 말했다.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거니까.
나는 숨을 들이켰다.
시리얼이 눅눅해지고 있지만, 다음 수저를 뜰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목구멍이 뻑뻑해서.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펑 하고 터질 것 같아서.
몸속에 잠자고 있던 폭탄이 하나 더 있었나?
#
임현태의 얼굴에 피곤함이 낙석처럼 굴러내려왔다.
회의실에 모인 다른 직원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이번 주 촬영 예정이었던 출연자의 사고로 일정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
그것만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불행히도 단순 사고가 아니다.
출연자가 신호 위반을 해서 무단횡단하는 보행자를 쳤다. 그런 논란의 불씨를 어물쩍 넘어갈 순 없는 노릇.
결국, 출연자를 갈아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희 그냥······지난번 회의 때 말했던 거처럼 투표라도 해볼까요? 구독자들은 누구 보고 싶은지.”
직원의 말에 임현태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벌써 소재 떨어졌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까 봐 일단 최후의 수단으로 두자고 했던 방법이었다.
역시 내키지 않는다.
“으아, 지금 구독자도 팍팍 느는데 하필!”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하는데 말이죠. 근데 마땅한 노가 없네. 제대로 된 노가.”
“앞에 출연자들이 너무 셌나 봐요. 지금 이렇게 봐도 50만 넘은 게, 예능 프로에서 요상한 말투로 유행어까지 만든 할아버지. 신비주의 1세대 아이돌.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흥미 있어 할 텐데······.”
걱정스러운 말들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임현태의 초점이 흐려진다.
한참 떠들던 직원들도 조용해진 그에게로 시선이 모여들었다.
“피디님. ······피디님?”
“어, 어.”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뒤늦게 몰려오는 뻐근함에 눈을 비비며 피식 웃음을 흘리는 임현태.
“내가 생각보다··· 존나 쓰레기 같다는 생각.”
“에이, 피디님. 아무리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도 그렇지, 무슨 자책을 그렇게 흉하게 하세요.”
“그래요. 아직 시간 많잖아요. 릴렉스~.”
방금까지 걱정을 쏟아냈던 것이 무색하게 긍정적인 척하는 직원들을 보며 그가 오해를 정정했다.
“떠올랐어. 그래서 문제고.”
“···?”
목적어 없는 대답에 이번엔 의문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뻐끔뻐끔, 망설이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아는 동생 장례식장을 다녀왔잖아.”
“그러셨죠? 엄청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그래. 걔. 걔가 사실······.”
그다음부터는 이 업계에 뛰어든 이후로 남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지금은 택배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천재 아역 백승결에 대한 이야기.
예상했던 대로 직원들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들썩였다.
“그러니까, 피디님이 그 해별이···아니, 백승결이랑 친하다고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얘길 안 해주셨어요, 그 대박 아이템을!”
“그럴까 봐.”
“네?”
“아이템처럼 보일까 봐.”
“앗···.”
덤덤하게 답하던 임현태가 입을 가리는 직원을 보며 웃었다.
“근데 나도 급해지니까 걜 섭외하고 싶어지더라. 심지어 장례식장에 가서도 입에 맴돌더라니까. 근데 어떻게 말하냐. 아역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뻔히 아는데.”
“하긴 ‘해별이네’ 다음 영화부터 발연기로 욕 무지하게 먹었었죠? 그거 웬만한 성인 배우도 트라우마가 생겨서 안 지워지는데. 혹시 그때 나이가······.”
“10대 초반. 초등학생이었지.”
“어후. 그런데 섭외할 궁리 하고 계셨던 거예요? 피디님 쓰··· 그거 맞네.”
“뭐, 임마?”
움찔하며 의자를 뒤로 스윽 물리는 직원.
어처구니없어하는 임현태에게 다른 직원이 말했다.
“그래도 한 번 물어는 보시는 게 어때요?”
“그래도 되려나?”
“당연히 싫어할 거라 지레짐작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요. 이게 그분에게도 또 다른 기회가 될지.”
임현태가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해 덥수룩해진 턱을 벅벅 긁는다. 눈을 굴리고, 다리를 떤다.
그러다 결국 결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건······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거니까.’
쏴아아아아—.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쏟아져 내려온다.
그릇을 손에 들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얼마 후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깨끗해진 그릇을 건조대에 엎어놓았다.
“자, 이제 뭘 해볼까.”
먹은 것도 치웠겠다, 오늘 휴일은 어떻게 남아도는 시간을 죽여볼까 고민하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누구지?
일하는 중도 아닌데 내 핸드폰이 울리는 건 슬프게도 정말 드문 일.
연락처 목록만 봐도 9할이 충무로 인쇄 공장 직원들 아닌가.
의아해하며 침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봤던 현태 형의 전화다.
안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고 연락하려 했는데···.
“여보세요?”
—어, 승결아. 나다. 장례는 잘 마무리했어?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고쳐 든다.
“덕분에. 형은? 그날 무슨 문제 생긴 것 같던데, 해결됐어?”
—아, 그거? 뭐, 아직이긴 한데······ 그나저나 오늘 일 몇 시에 끝나?
“오늘 쉬는 날이야.”
—그래? 그러면······.
말끝을 늘린 임현태가 잠시 뜸을 들인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자 말이 이어졌고.
—장례 끝나면 만나서 밀린 얘기하기로 했잖아.
“그랬지.”
대답하기 무섭게 그가 물어왔다.
—그거 오늘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