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206)
206화 조선유랑극단 (5)
“그나저나, 개봉 시기는 잡혀 있는 거야?”
평소 보여주던 털털한 성격과는 정반대되는 말을 쏟아낸 양기전이, 그제야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화두를 돌렸다.
“대략적으로는요. 근데 대본 리딩도 하고 크랭크인 들어가면 상황이 계속 변하겠죠.”
“그거야, 그렇지.”
주억거린 그가 빈 음료수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빨리 개봉했으면 좋겠어서. 그때 잠깐 너한테 들은 내용만으로도 너무 좋았거든. 그리고 네가 우리한테 말해준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가 허허 웃으며 나를 본다.
“굉장히 서늘하기도 하고.”
양기전을 비롯한 ‘흉내자들’의 주연 배우들은 과거,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선명한 영화의 의도가 더욱 명확하게 느껴질 수밖에.
“아무튼, 여러모로 너무 기대된단 말이지.”
“최대한 빠르게 찍어볼게요.”
“음? 아냐, 아냐. 가장 중요한 건 잘 찍는 거지.”
“그건 당연하고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선배님도 ‘흉내자들’ 잘 마무리하고 와주세요.”
“그거야말로 당연하지. 이 영화, 네 새끼지만 내 새끼이기도 해. 나 목숨 걸었다, 진짜.”
목숨까지 거는 건 좀······.
“근데 갑자기 네 새끼, 내 새끼 하니까 드는 생각인데.”
“···?”
“나중에 네 자식은 장난 아니겠다. 태어나보니 아빠가 백승결이잖아?”
갑자기 목소리가 진지해지길래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너무 나중 얘기 아녜요?”
“까마득한 거 같지? 절대 아니다? 금방이야, 금방. 나야 뭐 백승결한테 좋은 어른 되려고 연기만 하다가 이렇게 노총각으로 늙어버렸지만. 근데 넌 안 그럴 거잖아? 심지어 바쁘기까지? 너처럼 배우하고 작가하고 감독하고 톱스타까지 하면 진짜 금방이라니까?”
양기전의 논리를 듣다가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가라앉으며 곱씹게 된다.
금방이라···.
“그건 좀 겁나는데요?”
“응? 겁날 게 뭐 있어. 넌 그때가 되어도 다 잘할 거 같은데. 그게 뭐든지 말이야.”
“그거야말로 모르는 거죠.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와는 다를 수도 있고요. 사람은 쉽게 변하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으쓱거렸다.
하지만 속으로 느끼는 무게 만큼은 바위처럼 묵직한 진심이었다.
이런 말이 있지 않나.
‘피는 못 속인다.’
나는 닮지 말아야지, 닮지 말아야지 되뇌다가 어느새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들.
그래서였다.
언젠가, 내게 가정을 꾸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가장 원하는 게 화목한 가정이었듯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그거니까.
“······.”
잠시 내가 가진 걱정들을 담담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핸드폰 알림에 시선이 빼앗겼던 양기전이 내게 묻는다.
“지금 다들 여기로 와도 되냐고 묻는데? 한잔하려나 봐.”
“선배님들이요? 당연하죠.”
흔쾌히 끄덕였다.
아주 큰 스위트룸은 아니더라도 나름 거실이 널찍하게 있으니 그들이 모두 와도 문제 없으리라.
오히려 지금 혼자 있게 된다면 여러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들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러면 제 친구들도 이 근처에서 머물고 있는데, 부를까요?”
“어휴, 방장조아라고 알아? 방장님 뜻대로 하세요. 알잖아. 우리들 낯 안 가리는 거.”
노프라블럼이라고 영어까지 섞으며 손을 흔들던 양기전이 갑자기 이상함을 느끼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의도나 강남에선 볼 수 없는 LA의 회색빛 고층 건물들이 빽빽하다.
“가만, 근데 여기 미국이잖아? 친구가 있었어?”
“네. 영화 찍으면서 친해졌거든요.”
“영화. 그렇구나, 영화.”
양기전이 수염을 긁적이다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 혹시 이름이······.”
“세이디랑 데이브요.”
“···!”
#
마치 지하철 환승역을 가로지르는 듯, 정신이 없었다.
‘흉내자들’ 스케줄을 끝내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유랑극단’이란 영화가 만들어지는 컨베이어벨트 위로 몸을 실었다.
굿픽처스 박 대표와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간단하게 투자자들과 밥을 먹기도 하며,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도 몇 개 돌아야 했다.
직후 진행된 스태프들이 함께하는 첫 회의.
그들에게 내가 그린 청사진을 보여주는 자리이기에 나는 난생처음 PPT 발표를 해야 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LA 호텔 방에서 점검하고 또 점검한 영화의 청사진을 모두 풀어놓았다.
촬영 감독부터 오디오 감독, 연출 감독 등 각 팀의 대장들을 앉혀놓고 장장 2시간 동안 떠들어야 했다.
“궁금한 점 있으실까요?”
“할리우드에서 스케줄이 엄청났다고 하던데···.”
촬영팀 이 감독이 손에 들린 두툼한 프린트물을 내려다보며 픽 하고 웃었다.
“이런 건 다 언제 준비한 거야?”
다른 감독들도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
“단단히 준비했어요. 제가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불안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지. 그 처음의 승패를 결정하는 건, 그간의 경험이고.”
프린트물을 회의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 감독이 나를 보며 덧붙였다.
“예상은 했지만, 오늘 보니 백 감독은 이미 가득 차 있었네. 그 경험이란 게.”
“감사합니다.”
과찬이라고 겸양을 떨지도, 그렇다고 으스대거나 기분 좋은 티 팍팍 내며 광대를 들썩이지도 않았다.
그저 담백하게 고개를 숙이며 생각한다.
모든 걸 기억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내게 저주 같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빠른 시간 안에 여기까지 이끌어준 축복이기도 하다는 걸.
뒤이어 언젠가 크리스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능은 앞뒤가 다른 동전과 같다고.
그리고 어떤 면을 보여줄지는, 스스로 선택하는 거라고.
‘그래, 세상에 마냥 안 좋기만 한 게 어딨겠어.’
그러니 내가 좋지 못한 과거를 모두 기억한다는 것에 너무 얽매여 있지 않기로 했다.
그걸 기억하기에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거잖아.
······그런, 나름의 자기반성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백 감독.”
잠시 고민하던 이 감독이 어느새 무거워진 표정으로 내게 경고했다.
“그래도 어려울 거야, 이번 현장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얼만큼 각오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부족해.”
“···?”
“더 해. 하고 또 해. 이거 겁주려는 거 아냐.”
나는 그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장난 아닐 거야, 진짜.”
그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
마침내 ‘조선유랑극단’의 대본 리딩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우리는 굿픽처스에서 빌린 커다란 회의실에 도착했다.
“······.”
그리고 곧바로 다시 나왔다.
촬영팀 이 감독이 경고한 바를 몸소 경험하고, 여실히 깨닫고서.
“와··· 어떡하지?”
현태 형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김주철은 완전히 얼었다. 쟤가 뭔가를 무서워하는 건 고층 호텔 방 창가 자리 이후로 처음 본다.
심지어 우리의 정신적 지주, 김성운조차도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휴, 큰일이네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함께 피난 나온 스태프들이 다가와 중얼거렸다.
복도가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해졌다.
영화의 존망이······이런 식으로 위태로워질 줄이야.
돈은 준비가 됐다. 그것도 넘치게.
캐스팅도 원하는 대로 됐다. 스무스하지.
팀도 수월하게 구성했다. 더할 나위 없었다.
모든 게, 그렇게 완벽했는데.
비로소 가장 큰 난관을 마주했다.
“감독님, 이거 자신 있으세요?”
“아뇨. 자신 없는데요. 어떡하죠?”
한 스태프의 물음에 책임감 따위 휘발된 얼굴로 답했다.
······감독 실격이다.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한 이 감독이 팔짱을 낀 채로 다가왔다.
“말했잖아. 아무리 각오해도 부족할 거라고.”
“그러게요.”
뭐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복귀 이후 처음이었다. 이토록 막막한 상황은.
옆에서 어지러워하던 현태 형이 다시 회의실 문을 슬쩍 열었다.
그러자.
“와아아아!”
“얘, 넌 이름이 뭐야?”
“우리 엄마 어디갔어요? 어음마아아···!”
“으앙아아아아!”
“얘들아! 조용히 좀 해! 시끄럽다구!”
“너가 제일 시끄러워! 베에에에~!”
달칵—.
다시 문을 닫는다.
내가 썼지만, 이 영화······.
“오은영 박사님이라도 모셔와야 하는 거 아니냐?”
아역이 너무 많다.
#
「혼.」
윤석이 낮은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마구간처럼 어두운 공간에 서서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혼.
「너 올해로 나이가 몇이야.」
윤석의 물음에 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여, 열 다섯입니다.」
「열다섯. 그러면 네가 우리 극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네?」
「······네.」
스윽—.
윤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혼에가 다가가 몸을 숙였다.
비로소 맞춰지는 눈높이.
어린 소년의 눈에 이리와도 같은 사나운 눈동자가 비쳤다.
「근데 왜 이렇게 애새끼처럼 굴어. 그런 주제에 왜 밤마다 처우냐고.」
「······.」
「꿀 먹었어? 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소년이 그의 눈을 피하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겠다 마음 먹은 것이다.
「혼아.」
「네.」
「아직도 엄마한테 버림받은 게 슬퍼?」
「아뇨···.」
「음음, 슬프잖아. 아직도 엄마 젖 더 먹고 싶은 애새끼인데, 네 엄마는 너 따위 돈 몇 푼에 버릴 수 있는 여자니까. 그게 지금 속상해 죽겠잖아.」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젓는 윤석.
자작한 웃음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혼을 윤석이 더욱 짙은 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그런데 너. 그따위로 하다가는, 나한테까지 버림받는다?」
「흐으······.」
「여기서 쫓겨나면 너 같은 괴물, 받아주는 곳 따위 없어. 아, 누군가 주워다가 제국 본토로 보낼 수는 있겠다. 거긴 너처럼 신기한 것들 보면 환장할 인간들이 많거든.」
혼의 몸이 떨려온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소년은 윤석에게 빌었다.
「죄, 죄송해요. 울지 않을게요. 울지 않을 테니까 제발······.」
텁—.
윤석이 손을 뻗어 혼의 머리를 잡아챘다. 정확히는 머리 위로 솟은 뿔을 움켜쥐었다.
혼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석은 녀석의 뿔을 쓰다듬는다.
무언가에 의해 찍힌 상처가 여기저기에 난 뿔.
그것을 부드럽게 만지다가 어느 순간 확.
「그러니까, 혼아······.」
움켜쥐며 말한다.
“후애애애앵~.”
「······?」
“후애앵, 무서워요.”
「······.」
더는 대사를 잇지 못하고, 나는 윤석의 시야에서 빠져나왔다.
옆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고 있었다.
“난 안 무서운데?”
“난 무섭거든?”
“감독님, 이 친구가 지금 쉬가 마렵다고···.”
“저는 언제 해요? 저도 하고 싶어요!”
잠잠해졌나 싶었던 회의실이 다시금 활기를 띈다.
하하하. 복수고 뭐고 관둘까···.
‘그럴 수야 없지. 오늘도 이렇게 방해를 했는데.’
피식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잠깐만 쉬었다가 할까요?
그리고서 의자에 몸을 기대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조선유랑극단’의 주인공 자리. 그곳엔 예전 시상식에서 만났을 때와는 눈에 띄게 달라진 차도영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도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다.
“흐음······.”
잠시 고민하다가, 왁자지껄해진 주변 상황에 괜찮겠다 싶어 툭 물었다.
“연기 어렵죠?”
“예? 아, 네.”
차도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주억였다.
“원래 그게 진짜 쉽지 않아요. 복잡한 감정이 드는 와중에 내 의지와는 반대로 억지로 연기를 해야 하니까. 너무 과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네······, 네?”
그냥 관성으로 대답하려던 차도영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홱 하고 고개를 들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에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본부장님이 시켰어요? 연기 못하는 척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