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조선유랑극단 (6)
“이 업계엔 생리라는 게 있어.”
며칠 전, 우경철이 차도영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내뱉은 첫마디였다.
갑자기 자신을 찾은 것에 바짝 얼어붙어 있던 차도영이 눈을 깜빡이자, 우경철이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한다.
“생리··· 아나? 그냥 편하게 규칙 같은 거라고 보면 돼. 내가 회사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룰과 살아남기 위한 방법.”
그러다 성인도 안 된 어린아이한테 무슨 알아먹지도 못할 설명을 하는 건가 싶어 손을 휘적거렸다.
“아니다. 그냥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결국, 우경철은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다 직설적으로 터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유랑극단’, 그 영화 촬영하는 건 좋은데, 가서 제대로 하진마.”
“네···?”
“연기 열심히 하지 말라고. 아니, 그냥 못 하라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차도영은 모르지 않았다.
열일곱의 나이는 그리 세상 물정을 모르지 않는다.
하물며 일찍이 배우 일을 시작한 차도영에겐 사회생활이라는 골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을지언정, 이 바닥이 돌아가는 정말 그 생리현상과도 같은 흐름엔 도가 터 있었다.
일종의 눈칫밥이랄까.
정리하자면···.
우경철은 백승결을 싫어한다.
백승결이 감독이 되어 자신을 캐스팅했다.
우경철은 자신에게 제대로 연기하지 않을 것을 요청했다.
그러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스파이, 자객, 밀정··· 뭐가 됐든.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하차하게 되는 구도를 원하는 거겠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때의 다음 스텝도 불 보듯 뻔했다.
안 그래도 없던 일이 더욱 줄고, 계약 기간 내내··· 아니, 어쩌면 평생토록 연기를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언뜻 넓은 듯한 이 업계는 사실 너무나 좁고, 우경철의 양복 소매는 한삼과 같이 길어서 반경이 넓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차도영이었지만.
“그러다 캐스팅이 무산되면···.”
그럼에도 이런 말을 내뱉은 건.
조선유랑극단.
그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모 영화 속 아트박스 사장마냥 잡념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고. 그럼에도 계속 촬영을 이어가면 그것도 좋고. 주인공이 연기를 못 하면 영화엔 아주 치명적이겠지. 그게 우리 아티스엔 큰 도움이 될 거야. 그게 무슨 뜻이겠어? 너한테도 아주 도움이 될 거란 거지. 연기 재밌다며. 오래 하고 싶다며.”
협박을 자연스럽게 곁들인 우경철이 ‘넌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거야’라는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그러면 너도 우리한테 뭔가를 해줘야 하지 않겠어?”
그의 말이 맞았다.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경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연기나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진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 대본 리딩 당일이 되었고, 차도영은 연기를 시작했다.
못 하는 척, 어색하게.
정말 쉽지 않았다.
연기를 일부러 못 하는 것도 정말 어려웠지만, 그걸 자신의 우상 앞에서 해야 한다는 게 더 큰 곤욕이었다.
우경철에겐 절대 밝힐 수 없었지만, 차도영에게 백승결은 우상이었다.
그동안 우경철이 예전부터 백승결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고, 해별이와 자신을 비교하며 닦달을 했지만.
그게 차도영에게 자격지심이나 원망으로 쌓일 순 없었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 매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 백승결은.
그에게 감히 경쟁 상대가 아니라, 선배이자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차도영은 앞으로도 연기가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연기 못하는 것을 연기했다.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대충 넘어갈 정도는 아닐 만큼.
그랬는데······.
“본부장님이 시켰어요? 연기 못하는 척하라고?”
얼어붙은 차도영이 백승결을 보았다.
이 사람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신이 연기를 억지로 이상하게 하고 있다는 걸.
두근두근···.
거짓말이 들통난 것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할까?’
짧은 고민이 스쳤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뇨, 저는···저는 그냥.”
부정.
그러나 자신의 우상은 그것마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선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뿐일 테니, 이따 따로 얘기해요.”
#
“차도영이 오래 쉬긴 했나 보네요.”
회의실에 찾아온 잠깐의 쉬는 시간.
구경 온 한이연 감독이 작게 속삭였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서 지켜보던 박 대표가 끄덕인다.
“그러게. 역할 자체가 난이도가 있다는 걸 고려해도 생각보다 많이 어색한데? 흐음, 백 감독 없이라도 미팅을 진행했어야 했나? 아니면 화상 통화로 하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차도영이 저러면 안 됐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니까.
그런 캐릭터의 연기가 어색하면, 그건 영화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걱정 한가득 담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박 대표에게 한이연 감독이 말했다.
“우리가 느낀 걸 승결이가 모르지 않을 거예요. “
“그렇겠지.”
“그러니 어떻게 대처하는지 한 번 지켜보죠.”
누가 뭐래도 감독은 백승결이었다.
그러니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도 그여야 했다.
······휴식이 끝나고, 다시 대본 리딩이 이어졌다.
윤석과 혼의 대사가 모두 끝나고, 이제는 다른 배우들 위주로 장면들이 선정되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던 아이들도 하나둘 대사를 시작하며 비교적 순탄한 리딩이 이어졌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더 흐르고서.
—오늘 대본 리딩은 이것으로 마칠게요.
마이크에 대고 대본 리딩 종료를 선언한 백승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스태프들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잠시 차도영에게 뭔가를 말하는가 싶더니, 이 상황을 지켜보던 박 대표와 한이연 감독에게로 다가왔다.
“백 감독, 수고했어.”
“오셨어요?”
“조감독도 못 해, 까메오도 안 돼. 어쩌겠어, 구경이라도 해야지.”
한이연 감독이 입을 삐죽거리자 백승결이 하하 웃었다.
“그래도 까메오는 안 돼요.”
“알거든? 누가 뭐래?”
“아니, 한 감독이 연기를 그 정도로 못해?”
박 대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고, 한이연 감독이 머릴 긁적였다.
그리고 백승결은 침묵했다.
“그 정도구나···?”
허 하고 웃는 박 대표에게 백승결이 말했다.
“대표님.”
“응?”
“지금 회사로 가서 미팅룸 하나만 써도 될까요?”
“미팅룸? 어유, 그럼 당연히 되지. 근데 뭐하려고?”
“상담이요.”
툭 던지듯 말하는 백승결.
그의 얼굴엔 은은한 노기가 묻어있었다.
마치 리딩 때 윤석의 연기가 지금까지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차도영에게로 향해 있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박 대표가 끄덕였다.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인 백승결이 자신의 팀원들과 차도영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선다.
“······.”
박 대표와 한이연 감독이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상담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었나.”
“그러게요. 감독이 되더니 장난 아니네요. 무섭다.”
두 사람이 감탄사(?)를 주고받자, 구석에 서 있던 직원이 스윽 다가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저거 그거 맞죠? 진실의 방으로.”
#
나는 사실 차도영이 우경철과 함께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촬영 전부터 팀의 분위기를 흐려놓으려면 이만한 자리가 없으니까.
갑자기 다시 차도영의 매니저가 되었다며 나타나 난장을 피우면 어떻게 대처할지 나름대로 대비까지 해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방해할 줄은 몰랐네.
연기를 못하는 척이라니.
솔직히 속이 끓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람이 나 때문에 아티스에게 배우를 빼앗겼다는 걸 알았을 때만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화가난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의 잘못된 방법을.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아이가 그대로 하고 있었다.
심지어 스스로의 선택도 아닌, 강요로.
그러니.
“······.”
미팅룸에 나와 차도영, 둘만 남았음에도 입을 떼기 어려웠다.
“대본 좀 봐도 될까요?”
“아, 네.”
시선을 내려 차도영이 들고 온 대본을 받아들었다.
대본 리딩 때부터 슬쩍 봤었는데, 역시나.
이곳엔 차도영이 얼마나 ‘혼’이란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과거 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직히 깜빡 속을 뻔했어요. 내가 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지도 모르겠어.”
그러면서 대본을 몇 장 더 넘겼다.
여전히 프린트된 텍스트 외에도 빽빽한 글자들.
“어떤 자세는 정반대의 자세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게 돼요.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을 등지고 그대로 쭉 뛰어가면 되니까.”
“······.”
“그래서 들킨 거예요. 그걸 내가 해봐서.”
“···죄송합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는 차도영.
녀석을 보며 대본을 내려놓았다.
“본부장님이 시킨 거 맞죠? 본인 의지가 아니었다는 건 대본에 다 나와 있어요.”
“죄송합니다.”
“흐음······.”
이미 대답은 되었다.
그러니 이제 결정해야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맞아요. 죄송해야 해요. 오늘 대본 리딩 자리엔 그저 이 상황이 흥미롭기만한 해맑은 어린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 아이들까지 아울러 이 영화를 제대로 완성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았거든. 나를 포함해서.”
“······.”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차도영을 보며 나는 일순 마음이 약해졌다. 일종의 자기연민일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덤덤하게 말했다.
“둘 중에 하나만 해요. 우경철 본부장님이 시킨 대로 해서 이 영화에서 제외되던지. 아니면 다음 리딩 땐 제대로 하던지. 선택은 자유예요.”
그렇게 선을 긋고서, 아쉬움이 남아 결국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차도영 배우가 이 역할을 너무 하고 싶은데도 전자를 선택한다면······ 후회할 거예요.”
천천히 고개를 드는 차도영.
울음을 참고 있었는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씁쓸함을 삼키며 녀석의 대본을 가리켰다.
“연기를 이렇게나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이게 자신의 꿈일수록··· 그만큼 후회는 꿈을 등지고 반대쪽으로 달려갈 테니까.”
“······.”
“나만 참으면 뭔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나만 희생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자신의 탓이 아닌데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스윽—.
대본을 밀어 차도영에게 돌려주었다.
여기까지가 녀석이 해야 할 선택이었다.
“아, 그리고.”
······이건 내가 할 선택.
“어떤 선택을 하든 불이익 따윈 없어요. 앞으로 연기도 마음 편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예?”
“본부장님의 말을 들어도, 내 말을 들어도. 그건 차도영 배우의 연기 생명과는 전혀 상관 없을 거라고요.”
한껏 상기되어 있던 표정을 풀고.
다시 차도영 손으로 돌아간 대본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