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26)
이게 가능하다고? (1)
무대인사라는 게 정작 무대에 올라서는 건 불과 몇 분 되지 않지만, 희한하게 하루 온종일을 잡아먹는다.
메이크업도 해야 하고, 거리가 먼 경우도 있는 데다가 끝나면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지친 몸으로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배우들의 반주는 음주가 되고 밤은 깊어가고, 아침은 늦어지고······.
그런 생활 속에 있다 보니 시간이 몇 배는 빠르게 가는 것 같다.
정신 차려보니 300만 레터링 풍선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지.
처음엔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했던 무대 인사가 이제는 감사 인사를 위해 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쯤 되니 관객들의 준비성도 날로 발전한다.
상영관에 들어서면 수많은 피켓이 기다렸고, 나갈 땐 선물을 한 보따리 들고 퇴장했다.
“미친다, 진짜! 오빠 잘생겼어요!”
“얼른 또 작품 찍어주세요! 덕질하려는데 자료가 아기 때 밖에 없어!”
“대원군에서 연기 보고 반했습니다! 바로 팬카페 가입했어요, 형!”
반하진 말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쉴새 없이 인사를 하며 내려왔다.
우리가 복도로 나오자마자 김성운 팀장이 팔짱을 풀었다.
“분위기 너무 좋네요.”
고갤 돌려 반쯤 열린 상영관문을 봤다.
모든 배우가 나갔음에도 여전히 꾸덕하게 흘러나오는 아쉬움 가득한 인사들.
“반응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무대 밑에서 보는데, 뭔가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저 위에 선 네 분이 이제 모두 우리 소속사라는 게.”
김성운 팀장의 말에 뒤쪽에 있던 김상억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저희도 아직 신기해요. 모두 같은 소속사라니.”
말 그대로였다.
애초에 본인만 오케이하면 계약이 성사될 이태관 배우 말고도, 나를 비롯한 김상억과 이준혁도 계약서를 썼다.
‘대원군’의 무대인사를 맡은 네 사람이 모두 매니지먼트 하람과 계약한 것이다.
이태관 배우는 1팀, 우리는 2팀으로.
옆에 서 있던 1팀 매니저가 끄덕거리며 웃는다.
“이런 게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거 아닐까요? 요새 가장 호평인 영화의 배우들을 한꺼번에 싹—. 어, 배우님 그거 저 주세요.”
그가 이태관 배우에게 얼른 달려가 손에 들린 선물들을 받아서 들었다.
김상억과 이준혁에게도 2팀 매니저 한 명이 붙었다.
그리고 내 앞으론······.
“그냥 제가 들게요.”
2팀장이 왔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품에 쌓은 선물을 주지 않자 김성운 팀장이 고갤 젓는다.
“가장 많이 받은 승결 씨 걸 내가 안 들면 다들 뭐라 하겠어요.”
“신인을 상대로 한 매니지먼트 팀장님의 갑질이라고 하겠죠.”
얼른 끼어든 1팀 매니저를 돌아보며 김성운 팀장이 희번덕거렸다.
“왜, 1팀장님한테 갑질 많이 당했나 봐? 내가 가서 말씀드릴까? 아예 본부장님이나 대표님께 직통으로···.”
“무, 무슨 소리세요. 저 당한 거 없습니다? 김 팀장님께 한 말인데 왜 해외에 계신 대표님한테까지······.”
“어디 보자, 대표님 전화번호가···.”
“안 까불게요, 팀장님.”
승리의 미소를 짓는 김성운 팀장과 함께 대기실에 들러 짐을 챙겼다.
짐을 한가득 든 그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확실히, 요즘 로드 뛰니까 좋네요. 사무실에서 서류나 이메일이랑 씨름하면 내가 매니저를 하는 건지 그냥 회사원인지 구분이 안 가.”
“하하, 다행이네요. 그런데···.”
작게 웃다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왜 제 매니저를 맡으신 거예요? 팀장님이 자처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솔직히요?”
“네.”
끄덕이자마자 그가 지극히 회사원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위에서 시켰어요.”
위에서? 난 아직 2팀장인 김성운 말고는 다른 팀장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본부장이나 대표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누가 날 콕 집어 맡으라고 시켰단 걸까?
자연스레 고개가 기우는데, 김성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대표님이 포텐셜 좋은 배우를 키워 보라셨는데. 그게 난 승결 씨일 거 같아서.”
#
미니밴에 올라탔다.
꽤 오래된 회사 차량이라곤 하지만 평소 타고 다니던 대중교통이나 택시에 비하면 차원이 다른 안락함이다.
유일하게 불편한 건 마음.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던 사람으로서, 조수석이 빈 채로 뒷자리에 앉는 게 괜스레 마음이 그렇단 말이지.
어색한 표정을 짓자 룸미러로 날 확인하던 김성운이 말했다.
“내년쯤에 회사에서 전담 차량 나올 거예요. 그땐 옷도 여러 벌 편하게 두고 다닐 수 있을 겁니다.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도 두고 다니고요. 그게 또 별거 아닌데 은근 마음이 든든해져요. 승결 씬 군것질 뭐 좋아해요?”
“우유 좋아합니다.”
“그걸 군것질이라고 할 수 있나? 과자류는 안 먹어요? 뭐 초코칩이라던가, 감자칩이라던가···.”
“아, 먹어요. 맛동산.”
김성운이 헛웃음을 삼킨다.
왜···. 맛동산이 어때서···.
이이서 ‘장인어른이 좋아하시는 건데.’ 라고까지 중얼거리며 확인사살을 한 그가 커피까지 잘 안 마신다는 얘길 듣고는 ‘보기 드문 친굴세···’라는 멘트를 날린다. 칭찬 맞나?
그렇게 사소한 이야길 나누며 얼마나 달렸을까.
적당한 때를 골라 김성운에게 말했다.
“팀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반응 속도가 빨랐다. 이 말을 언제 하나 기다린 사람처럼.
“너도 편하게 해. 그래봤자 여덟 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그걸 밖에라고 할 수 있나?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러자 룸미러로 해가 뜨듯 올라오는 시선.
“아. 존댓말···.”
“편해지면 해. 편해지면.”
픽 하고 웃은 그가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우회전, 좌회전. 그리고 골목으로 접어든다.
집이 1, 2분 거리로 가까워졌을 때쯤, 그가 내게 물었다.
“그동안 들어온 시놉들 정리해서 왔는데, 어디서 얘기할까. 아무래도 카페는 보는 눈도 있고··· 집 괜찮아?”
시놉이란 말에 차분해져 있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영화의 흥행으로 하루하루 도파민 넘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작품, 새로운 연기만큼 흥분되는 일은 없었다.
“네, 괜찮아요.”
“오케이. 저쪽이지?”
골목길에 바짝 주차하고서 빌라 3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집은 거실이랄 게 없는지라, 김성운을 곧장 방으로 안내했다.
그가 뭔가 헛거를 본 듯 눈을 껌뻑이더니 허, 하고 탄식한다.
“티비가 뭔······.”
“우리 집 자랑입니다.”
씩 웃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김성운. 그가 나를 묘한 눈으로 훑었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이상하게 웃기단 말이지. 나중에 예능 나가도 캐릭터 괜찮을 것 같네.”
벌써 어떤 예능이 좋을지까지 읊어대던 그가 낡은 브리프케이스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양이 꽤 된다. 대부분 대본이 아니라 시놉인 점에서 작품의 수가 상당했다.
“회사로 들어오는 것 중에 괜찮은 거 추린 거랑, 아예 네 이름으로 들어온 것들.”
우리는 표지가 잘 보이도록 시놉들을 방 안에 쭉 깔아놓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김성운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놉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대체로 백승결이란 이름으로 콕 찍어 들어오는 시놉들이 퀄리티가 좋을 거야. 감독이나 작가, 제작사 네임밸류도 높고.”
“제작사에서 그리고 있는 그림이 명확하다는 뜻이니까요.”
나도 가장 가까운 시놉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김성운이 손가락을 튕겼다.
“정확해. 우리가 앞으로 잡아야 하는 건 그런 작품이야. 한번 찾아보자고.”
얼른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시놉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앞에 김성운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스토리에 몰입한다.
이곳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리모컨으로 휙휙 돌려볼 수 있는 티비 속 남의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내가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낮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김성운이 핸드폰으로 날 찍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핸드폰 너머의 그가 묻는다.
“무슨 만화방 왔어?”
“네?”
“웃겨. 아주 웃겨.”
중얼거리며 촬영을 마치는 김성운을 보다가 시놉을 슬쩍 내려놓았다.
“아냐, 계속 봐. 괜찮아.”
“아, 다 봐서요.”
얼른 다음 시놉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아예 배를 잡고 쿡쿡거리는 김성운. 이러다 작품보다 예능 먼저 잡아 오는 거 아닌가 몰라.
그렇게 시놉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여러 번.
김성운이 조금 지루해졌는지 집구경을 하다가 방 한켠에 쌓아둔 대본들을 발견했다.
가장 양이 많은 ‘종갓집 막내딸’의 대본(무려 70회분)과 ‘대원군’의 대본.
그리고 하나 더 있지.
“‘그림자 변호’. 이거······.”
대원군을 선택하기 전, 고민했던 세 작품 중 하나였다.
대본을 보내지 않은 로코와는 달리, 저 ‘그림자 변호’는 ‘대원군’ 보다도 먼저 대본을 보내왔었지. 물론 읽어보고서 고사했지만.
“종갓집 막내딸 끝나고 거기서도 단역 제안이 들어왔었어요.”
“그랬구나. 네 선택은 대원군이었던 거고? 근데 이거 사전제작이라 충분히 동시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어? 대본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뇨, 대본도 재밌었어요.”
“근데?”
“저한테 들어온 역할이 좀······애매했어요.”
왜 거절했는지 묻는 김성운에게 솔직하게 답했다.
역할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정확히는 나한테 맞지 않았다고.
이름값에 비해 너무 깐깐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이것도 드라마 잘 뽑혔다고 소문 돌던데. 뭐, 지나간 일이니 아쉬워할 건 아니지만서도.”
아쉬움을 털어내듯 툭 ‘그림자 변호’ 대본을 내려놓은 김성운이 손목을 확인하더니 자세를 고쳐앉았다.
“슬슬 가봐야겠다. 나머지는 다 읽고 얘기하자.”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김성운이 집을 나섰다.
짧게 배웅하고 돌아와 다시 시놉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
비닐 봉투에 맛동산과 우유를 잔뜩 담아 온 김성운이었다.
“먹으면서 보라고. 이제 진짜 간다.”
#
KNS 드라마국.
드라마 ‘그림자 변호’의 연출을 맡은 이진태 PD가 자신의 담당 CP인 양진호를 찾았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는 건 십중팔구 무슨 부탁이 있을 거라 예상한 양진호 CP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어떻게, 촬영 마무리는 잘 돼가?”
“선배, 현장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계신 거 아녜요?”
“왜?”
“촬영 마무리가 잘 돼갈 리 없잖아요. 촬영에 편집에 매일 밤새고, 거기다 후반 되니까 쪽대본에······.”
덥석 문 이진태 PD를 보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거봐, 사전제작이라고 다를 거 없다 그랬지?”
“휴. 그래도 퀄리티 하나는 마음에 들게 뽑히고 있어요. 그거 보고 가는 거죠, 뭐.”
“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게 그거잖아. 근데 뭐가 문젠데?”
대놓고 문제를 거론하자 이진태 PD도 순순히 고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캐스팅 때문에 골머리에요.”
“캐스팅?”
다른 드라마였다면 이미 후반 촬영 중에 무슨 캐스팅이 문제냐고 하겠지만, 법정물 특성상 옴니버스식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되다 보니 배우가 많이 필요했다. 심지어 연기력 좋은 배우가.
그럼에도 조금 의아해진 양진호 CP였다.
“거의 마지막 에피소드잖아? 아직 시간 남았으니 천천히 찾아보면 되지.”
“이미 찾았어요. 아니, 찾아 뒀었죠. 백승결.”
“해별이?”
이진태 PD가 재빠르게 끄덕거리자 양진호 CP가 쉽게 납득했다.
“뭐, 나쁘지 않겠네. ‘대원군’으로 꽤 핫하잖아. 고작 한씬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종갓집 막내딸’만 봐도 충분히 역량 있던데.”
“그런데 작가님은 탐탁지 않으신가 봐요.”
“윤지수 작가가? 왜?”
“백승결한테 역할을 주려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초반 에피소드에서 이미 러브콜을 보냈었어요, 다른 역할로. 근데 고사하고 대원군을 찍었고요.”
“아아, 각 나오네. 그러니까, 그게 윤 작가 마음에 안 들었구나?”
“모양새가 별로라는 거죠. 한번 거절한 배우한테 또 제안하는 게. 어차피 백승결한테 줬던 그 역할, 내용이 많이 바뀌어서 그때 승낙했었어도 맡길 수 없었을 텐데······.”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한 양진호 CP가 쓰읍 하고 숨을 들이쉬며 작게 끄덕였다.
“윤 작가가 글빨도 좋고, 사람도 괜찮은데, 속이 좀 좁아. 잘 열리지도 않고, 그 속이.”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녜요. 근데 저도 양보할 생각이 없단 말이죠.”
단호한 이진태 PD의 모습에 양진호 CP가 머릴 긁적였다.
보통 젊은 PD와 경력 있는 작가가 팀을 꾸리면 작가에게 질질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녀석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것도 중견 작가와!
거 참! 기특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작가님하고 친분 있으시잖아요. 한번 얘기 좀 잘 해주세요.”
“넌 왜 꼭 백승결인데? 아니, 솔직히 꽁해도 네가 꽁해야 하는 거 아냐? 네 픽이었는데 거절 당한 거잖아.”
“······그러게요. 왜 백승결이어야하지?”
“뭐야, 이유도 없었던 거야? 이러면 나 갑자기 윤 작가가 확 이해가는데? 분명한 이유도 없이 자존심 팔라는 거잖아.”
양진호 CP가 윤지수 작가의 손을 들어주자, 이진태 PD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냥 대본을 읽는데 딱 그림이 그려졌어요. 그다음부턴 딴 얼굴이 안 붙던데요? 왜 있잖아요. 작곡가들이 데모 만들 때 대충 흥얼거린 가사가 입에 붙어서 결국 본 가사에도 넣는 것처럼.”
“진태야. 일단 나도 백승결은 오케이거든? 근데 윤 작가 설득하려면 나도 최소한의 확신은 있어야지. 얼굴이 붙네 가사가 어쩌네 같은 소리 말고.”
일침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이진태 PD.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양진호 CP가 뭔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끈적하게 따라 올라오는 시선을 느끼며 그가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 지금 유종원 PD 자리에 있어? 그럼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물어볼 게 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