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28)
이게 가능하다고? (3)
—이 PD, 어디에요?
윤지수 작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지만, 이진태 PD는 여유로웠다.
그래도 몇 달 붙어 있었다고 이런 것도 적응이 되네.
“지금 막 편집실에서 나왔어요. 왜 그러세요?”
그가 되묻자 윤지수 작가가 누군가 들을까 볼륨을 확 줄여 속삭였다.
—얼른 와요. 백승결 배우 벌써 왔잖아.
짧았던 여유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래요? 생각보다 너무 일찍 왔는데. 얼른 갈게요. 15분이면 가요.”
—휴, 어색해 죽겠어. 하필 미팅을 오전에 잡아서. 애들도 다 퇴근시켰는데······.
“또 밤새셨어요? 어제도 아침까지 집필하셨던 것 같은데.”
—방영은 다가오는데 대본이 자꾸 밀리니까 별수 있나. 아무튼 빨리 와요? 알겠죠?
작은 한숨과 함께 알겠다고 말한 이진태 PD가 윤지수 작가를 붙잡았다.
“네. 아, 그리고 작가님.”
—네, 말해요.
“백승결 배우한테 눈치 주거나 그러시진 않을 거죠?”
—뭔··· 내가 뭘 눈칠 줘요.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악감정 없다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 목소릴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진짜 괜찮으려나.”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틀 밤낮으로 창작의 고뇌에 벼려진 그녀의 성격이 얼마나 날카로울지 가늠이 안 돼서.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자연스레 며칠 전 기억이 떠오른다.
CP님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여전히 불안해하는 나에게 유종원 선배가 복도를 걸으며 물어왔었지.
‘윤지수 작가, 자기 작품에 애정이 상당하잖아?’
‘그렇지 않은 작가가 어딨겠냐만, 그중에서도 특히 그런 편이죠. 작품이 자기 자식이나 마찬가지예요. 작가님한텐.’
‘그러니까. 그러면 됐어. 걱정하지마.’
선배는 자신만만했다.
그게 다소 황당해서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작가들은 입봉 때를 못 잊어. 왜 그런 거 같아?’
‘첫 작품이라서?’
‘물론 그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잖아. 처음으로 자기 작품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난 거.’
‘아···.’
‘그 감정은 절대 못 잊는다 하더라고. 그래서 서 작가가 미우나 고우나 나랑 3번이나 한거고. 아무튼, 작품에 애착이 있는 작가일수록 백승결하고의 관계는 걱정할 게 없어.’
‘어떻게 그럽니까.’
한탄같이 내뱉은 말에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걘 내 앞에선 연출가 같았고, 작가 앞에선 작가 같았거든. 그래서 그래.’
그게 그가 걱정하지 않는 이유였다.
백승결은 작가 앞에선 작가 같을 테니까.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알아볼 것이기에 말이 잘 통할 테니까.
하지만 백승결이 윤지수 작가와도 말이 잘 통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겪어본 바, 그건 난이도 최상의 영역이니까.
“모르겠다. 빨리 가자, 빨리.”
오늘 미팅을 통해서 백 승 결 캐스팅의 종지부를 찍고 싶은 그로서는 자연스레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
거실 한복판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
그곳에 앉아 방에 들어간 윤지수 작가가 나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아예 방치하는 걸로 자신의 못마땅함을 표현하진 않았다.
대신 머릴 긁적이며 방에서 나와 ‘너무 일찍 와서 정신이 없네···.’ 정도의 눈치를 줄 뿐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란 건 이미 유종원 PD의 연락으로 알고 있다.
솔직히 이해도 간다. 스케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안을 거절했고, 그럼에도 굳이 다른 역할을 다시 제안하는 PD와 그걸 덥석 문 나.
자칫 배역이 커져서 냉큼 온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온 것은.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기본이 된 청년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건 아니다.
이 정도면 시간 약속을 잘 지킨 게 아니라, 어긴 거로 봐야 할 테니까.
대신 시간을 어김으로써 나에겐 시간이 생겼다.
그녀가 가진 이미지를 지우고, 다시 그릴만한.
누군가에겐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차고 넘친다.
김성운이 가져온 시놉과 대본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만큼 마음에 드는 작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데다가.
욕심이 나는 작품을 외면하는 건 아주 오랫동안 후회가 남는다는 걸 몸소 배웠으니.
“차는 입에 맞아요?”
“네, 맛있습니다. 이거 리제(Rize) 차이(홍차)잖아요.”
할 말이 없어 툭 물어본 듯한 말에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부엌으로 몸을 돌리던 윤지수 작가가 눈을 깜빡였다.
“······차 종류를 잘 아네요?”
“제가 커피를 잘 안 마셔서요.”
“나돈데. 커피든 홍차든 카페인이 든 건 비슷하지만 뭔가 커피는 속이 쓰리더라고요.”
나름의 이유까지 덧붙이던 그녀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자신의 컵에 차를 담아온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퍽 어색해 보이는 표정으로.
정적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대화의 물꼬를 텄다.
“촬영은 얼마나 진행됐나요?”
“지금 12화 찍으면서 편집 중이에요. 대본은 이제 막 13화 집필 중이고.”
“앞부분 대본도 너무 재밌게 봤었는데. 어떻게 영상화되었을지 기대되네요.”
“기대가, 돼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윤지수 작가가 내 말을 놓치지 않고 덥석 잡아챘다. 질문은 날카로웠고, 눈빛은 그보다 더 번뜩였다.
마른 침을 삼키며 머릿속에서 기억들을 뒤적였다.
‘이거, 말 잘해야겠구나.’
···준비해온 대로.
“제가 이전에 받았던 4, 5화 대본에서 주인공의 과거가 슬쩍슬쩍 밝혀졌었잖아요. 늘 가볍게만 보이는 캐릭터지만 그 속에 아픔이 있다는 걸 계속 보여주셨죠. 특히 저는 큼직한 연출보단 작은 요소들에 감탄했어요.”
“작은 요소라면···.”
“대표적으로 변호사 사무실에 놓인 큰 어항.”
“······.”
“거기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잖아요. 그게 마냥 가벼워 보이는 주인공의 속마음을 나타내는 거라고 느꼈어요.”
말따라 날카로워졌던 눈빛이 무뎌졌다.
대신 다른 감정이 조금씩 그 자릴 채운다.
“또 기억나는 거 있어요?”
“큰 어항, 빈 화병, 아무것도 들지 않은 캐리어, 그리고 서류를 가득 쌓아서 아무도 앉을 수 없게 만들어 둔 조수석?”
“···!”
윤지수 작가가 놀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에 닿아있던 손이 자신의 팔뚝을 쓸어내린다.
“대본 보낸 지도 꽤 오래된 거 같은데, 기억력이······ 되게 좋네요? 나조차도 잊지 않으려 따로 적어놨을 정도로 짧게 짧게 스치듯 묘사한 요소들이었는데.”
“그만큼 기억에 남는 글이었던 거죠.”
살짝 분위기를 틀어 능글맞게 답하자 심각한 표정이었던 윤지수 작가가 픽 하고 웃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입꼬릴 잠근 그녀가 물었다.
“근데, 왜 거절했어요?”
역시 쉽지 않네···.
이 질문만큼은 반드시 듣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지만.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제가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야 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작가니까.
나보다 더 이 작품에 푹 빠져있는··· 아니, 아예 이 작품을 만든 창조자.
그런 그녀에게 어설픈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대사나 생각, 행동들을 보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거든요.”
“그게 뭐죠?”
“성별.”
그 역할은 섬세하고 꼼꼼했다.
범행 대상이 힘없는 어린아이임에도 지나치게 철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정확히는 2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에겐 맞지 않는 옷이었다.
역할을 자신에게 맞추는 게 배우의 역량이라지만, 성별까지 바꾸는 건 불가능하니까.
“여자. 그것도 여차하면 어린아이를 놓칠 정도로 가녀린··· 그런 여자가 더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스스로 연기를 하는 내내 마음에 걸릴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역할은 할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윤지수 작가에게 말하려는데,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말꼬릴 올렸다.
“뭐야, 이 PD가 얘기해줬어요? 그래서 설정 바뀐 거?”
“네? 아뇨. 그냥 제 생각에······.”
해명을 하다가 나도 덩달아 놀라서 물었다.
“바뀌었어요?”
“여자로 바꿨어요. 방금 말한 대로 대사랑 생각이 너무 안 맞아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하네. 그것까지 생각했다고요? 혹시 전공이 영화과나 각본 뭐 그런 쪽이었어요?”
#
이진태 PD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백승결이 먼저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해온다.
“안녕하세요.”
“아 예, 배우님. 일찍 오셨네.”
뒤이어 윤지수 작가도 고갤 돌려 알은체를 했다.
“어, 이 PD 왔어요?”
목소리가 밝다. 그것만으로 꽤 고무적이었다.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슬쩍 눈치를 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위기란 게 있잖나. 그게 아무리 봐도 화기애애한······.
“아니, 이렇게 쭉 보니까 아무리 봐도 대사나 생각들이 설정하고 안 맞는 거야.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극의 흐름을 바꿀 순 없잖아. 그래서 나이대까지 확 낮춰서······.”
“이 부분도 너무 기대되는데요?”
“다행이네! 아니, 그때 그럼 거절한 이유를 터놓고 말하지 그랬어. 그러면 나도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 아끼고 빨리 바꿨을 텐데.”
“그럴 순 없죠. 전 대본의 일부만 본 것뿐인데.”
“지금 그 일부만 보고 전체를 그리잖아!”
······뭐지? 이 어색한 상황은.
분위기는 분명 좋다. 그래서 어색했다. 왜 좋은 건데?
이진태 PD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들린 커피 캐리어를 올렸다.
“그, 이거 커피······.”
그러자 여전히 흥분한 얼굴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쏟아내던 윤지수 작가가 고갤 돌리며 툭 말했다.
“어? 백 배우 커피 안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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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메이드했습니다.”
백승결을 차에 태우고 주차장 한쪽으로 자릴 옮긴 김성운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핸드폰 건너편, 본부장님의 반응도 극적이었다.
4회분 출연.
회당 5백만 원.
억 소리 나는 배우들이 즐비한 하람에서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케이블도 아니고 지상파 미니시리즈에서 단역에 이 정도 금액을 오케이하는 건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으니까.
“네. 일단 승결이 데려다주고, 곧장 회사로 들어가겠습니다.”
보고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미팅이 완전히 끝났다.
배우는 자신의 배역을 따냈고, 매니저는 자기 배우의 가치를 인정받았지.
“이 맛에 내가 로드 하지.”
김성운이 은은한 미소를 흘리며 차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앉으며 뒤를 돌아보자 소중히 품에 안고 온 대본에 푹 빠져있는 백승결이 보였다.
‘욕심이 없는 건지, 많은 건지.’
훌쩍 커진 출연료에 계산기부터 두드릴 법도 하건만,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대본을 읽고 있다. 오늘 안에 다 외워버릴 기세다.
‘본인이 방금 전에 뭘 이뤄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네.’
지금 백승결의 이름값은 꽤 높다. 그렇기에 애매하다.
복귀 후 고작 두 작품.
그마저도 하나는 딱 한 장면만 등장했지.
냉정하게 말해서 제작자들에겐 아직 검증이 필요한 배우란 소리다.
이런 경우 때문에 방송국에선 등급표란 걸 만들어 기준을 삼아왔다. 그리고 등급표는 절대적으로 경력이 중요하다.
여러모로 백승결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주는 대로 받는다면 매니지먼트가 왜 있겠나.
김성운은 최소 200이란 숫자를 마음속에 적고 작업실로 올라갔었다.
자신도 있었다. 당당했다. 백승결이라면 그 정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착한 작업실.
들어가자마자 윤지수 작가와 이진태 PD의 분위기를 스캔했다.
말을 많이 했는지 인원수에 비해 많이 쌓여있는 빈 컵. 새까맣게 뭔가를 설명하고, 적은 종이들과 열의에 찬 눈들. 숨길 수 없이 고조된 분위기.
작품 이야길 끝낸 백승결에게 바통을 넘겨받으며 그는 생각을 고쳤다.
······숫자를 좀 더 올려도 되겠는데?
‘물론 이렇게까지 올라갈 줄은 몰랐지만.’
피식 웃은 그가 회상을 멈추고 룸미러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때 백승결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감사해요.”
“응? 뭐가?”
“저 대신 싸워주셔서요.”
아무래도 계약 얘길 하는 것 같지.
“그렇게 보였어? 싸우는 것처럼?”
이번 계약은 수월하다 못해 부드러웠다. 백승결이란 윤활유 덕분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저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한테 돈 얘긴 다를 게 없거든요. 싸우는 거랑.”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백승결.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씁쓸해 보여서, 선뜻 말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앞으로도 그 부분은 내가 대신 싸울 거야. 그러니 걱정 마.”
나름 든든해 보이고 싶어 내뱉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민망해지는 김성운이었다.
그가 운전대를 만지작거리다 툭 덧붙였다.
“근데 이미 네가 다 이겨놨더만.”
작가건 PD건 완전히 구워삶아서.
옅게 웃은 백승결이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내린다.
금세 집중하고, 빠져든다.
그 모습을 보며 김성운이 피식 웃었다.
착하다. 순진해 보인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사기 치기 딱 좋아 보일 정도다.
하지만 한 달 남짓 옆에서 지켜보며 깨달은 게 있었다.
백지 위에 ‘연기’라는 단어만 적어놓은 것 같은 저 배우는 욕심 덩어리다.
욕심을 담는 위가 너무 커서, 늘 배고픔을 느끼는.
그래서 의도를 했건 그러지 않았건,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건 반드시 손에 쥐는 배우.
그게 작품이든, 배역이든······.
‘사람이든.’